어서 오십시오.
이곳은 <아코르다투라>.

한 명의 인간을 제외한 모든 주민이 기계인형인 도시―――



본 그림은 웹등록용 썸네일로, 회지의 ​​표지 및 내지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Lullaby. 제 1부

1장 【만남】 - 2화




 아침 아홉 시를 알리는 시계탑의 종소리와 함께 【도서관】의 문이 열린다. 규칙상 늘 정숙해야 하는 【도서관】의 분위기를 지키기 위해 이 건물에는 창문을 두지 않았지만 시계탑의 종소리만큼은 【도서관】의 운영 시간을 알리기 위해 들리도록 해 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서인 쟌은 늘 【도서관】 안에 머무르는 덕분에 시계탑의 종소리가 울리면 바로 문을 열 수 있다.

 그날도 쟌은 그렇게 【도서관】 문을 열었다. 입구를 여는 그 순간만이 오직 쟌이 바깥의 햇살을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안녕, 쟌! 좋은 아침이에요!”
 “……테라?”


그런데 오늘은 햇살과는 다르지만, 조금 다른 ‘밝음’을 마주했다. 입구 바로 앞에서 테라가 진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놀란 채 테라를 바라보던 쟌은, 그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이 어제 자신이 건네준 두 권의 책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 이런 아침부터 무슨 일이십니까……?”
 “어? 【도서관】은 이 시간부터 열지 않던가요? 시엘로 형이 그랬는데. 아침 아홉 시부터 여니까 맞춰서 가면 된다고.”
 “그야 이 시간에 열기는 합니다만……. 제가 궁금한 건 그게 아니라, 왜 당신이 아침부터 여기 왔느냐는 겁니다. 책 복원은 일주일 정도 시간이 걸린다고 어제……,”
 “다 읽었거든요, 이거!”


 말하며, 테라는 안고 있던 책을 쟌에게 건넸다. 다 읽었다니? 쟌이 놀라서 눈을 깜박인 것은 당연했다.

 100년 가량 이어져 온 <아코르다투라>의 역사를 단 세 권의 책에 담았으니, 그 책은 어느 것이나 상당한 두께를 자랑한다. 테라에게 이 책을 읽기 쉬울 거라고 말한 건 쟌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결코 하룻밤에 읽을 수 있는 분량이 아니었다. 테라 또한 자신이 이 책을 끝까지 다 읽을 수 있을지를 걱정하지 않았던가.


 ‘내게는 정보처리 프로그램이 설치되어 있으니 당연하지만……. 이 인형에게도 그만한 프로그램이 설치되어 있다는 건가?’


 정말 접하면 접할수록 테라를 알 수가 없다. 쟌은 눈을 깜박이며 일단 테라를 도서관 안으로 들이기로 했다. 신이 나서 쟌을 따라 들어온 테라는 쟌이 책상 위에 올려둔 백지 서적을 보고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책상 가까이 다가섰다.


 “이게 복원하고 있는 책인가요?”
 “예. 한동안 손님이 없을 것 같아서요. 근무 시간에 정리할까 싶어 꺼내뒀던 것입니다.”
 “작업하는 거 옆에서 봐도 돼요?”
 “괜찮긴 하지만, 심심할 텐데요. 당신은 어제 갓 밖으로 나와 본 것일 테니 여기 있는 것보다 도시를 돌아보고 싶지 않나요?”
 “음……. 아뇨, 괜찮아요! 여기 있을래요.”
 “하지만…….”
 “그리고, 혼자 있는 것보단 둘이 있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그 말을 들은 순간 쟌은, 왜 테라가 굳이 이 아침부터 자신을 찾아 여기까지 왔는지 깨달았다. 어제 나눈 대화가 어지간히 테라에게 인상 깊게 남아 있었던 것이겠지.


 「그럼 쟌은 여기 쭉 혼자 있는 거예요?」
 「근무 시간에는 당연히 그래야지요.」
 「……하지만 그럼 외롭지 않아요?」

 ‘그런 것, 나는 정말 신경 쓰지 않았는데.’


 그러나 이 인형에게는 누군가 혼자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쟌 자신이 책이 구겨지거나 책 표지에 먼지가 한 톨이라도 묻는 것을 참고 볼 수 없는 것처럼. 다른 것이 있다면 쟌의 그런 생각은 ‘사서’라는 <역할> 때문이지만, 테라의 그것은 그의 타고난 성정과 이제까지의 경험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어느 쪽이든,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보면 안 돼요?”
 “아, 아뇨. 괜찮습니다. 그럼 옆에 앉으시죠.”


 의자를 끌어다 테라에게 권하고, 쟌은 어젯밤 취침 시각이 되기 전까지 정리하던 원고로 눈을 돌렸다.

 그가 복원해야 할 책은 아코르다투라의 역사를 기술한 책 중 마지막 한 권으로, 내용은 이 도시를 만든 세 명의 창조자가 제각각 남긴 수기였다. 테라가 찾고자 하는 구절은 맨 마지막 페이지에 적혀 있었으니 전후사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시 책 전체를 복원해야 할 모양이다. 그런 분석과 기한 내에 복원을 마칠 계획 수립까지 어젯밤에 끝낸 덕분에 이제는 작업만 하면 되는 셈이다.


 “XX년 8월 16일, 도시의 ‘관리자’가 될 인형을 만들어 이름을 붙였다…….”


 방금 전 쟌이 써내려간 문장을 테라가 소리 내어 읽었다. 그 나지막한 목소리가 꽤 좋은 울림을 하고 있음을 깨닫자 이유 없이 얼굴에 살짝 열이 오른 쟌이었지만, 눈을 깜박이며 이게 뭐냐고 묻고 싶은 듯 저를 바라보는 테라의 시선에 바로 정신을 차렸다.


 “이건 아구스(Augus)를 말하는 거로군요.”
 “아구스?”
 “그는 아코르다투라의 시간을 알리는 【시계탑】의 주인입니다. 어제 파브라를 만났을 때 설명했죠? 지금은 아코르다투라의 ‘창조자’ 중 하나였던 초대 인형사가 도시에 필요한 인형을 만드는 부분을 복원 중이라 그에 대한 내용이 언급된 겁니다.”
 “아, 어제 읽은 책에 나와 있었어요! 아코르다투라 밖의 도시에서 온 세 명의 ‘창조자’가 이 도시를 만드는 이야기가. 쟌에 대해서도 적혀 있던데요? 신기했어요!”
 “그야 저는 파브라와 아구스, 그리고 ‘관리자’인 디센과 함께 최초로 만들어진 ‘최초의 인형’중 하나니까요. 기동은 【도서관】이 정식으로 세워진 뒤였으니 꽤 늦은 편이지만.”


 그러니 신기할 것도 없다. 쟌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었지만, 테라의 눈에서는 쟌을 부담스럽게 하고도 남을 만큼의 존경심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사이, 테라는 제가 어제 빌려갔던 책과 쟌이 쓰고 있는 원고를 번갈아 보다가 후, 하고 짧게 한숨을 쉬었다.


 “……내 세상은 정말로 좁았구나…….”
 “예?”


 돌아본 테라는,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표정으로 웃었다.


 “나한테 있어서 ‘세상’이란 시엘로 형이 말해주는 게 전부였어요. 형이 보고 듣고 느낀 것. 형의 가치관을 거쳐서 내게 전달되는 정보들. 그게 내 ‘세상’의 전부였는데……. 지금 이렇게 밖에 나와서 형과는 다른 인형들을 만나고,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도시에 대해서도 알게 되는 게 너무 신기해서요. 밖에 나온 것도 처음, 책을 읽어본 것도 처음, 책 읽느라 밤을 새 본 것도 처음……. 이렇게나 많은 ‘처음’이 있고, 앞으로도 더 많을 거라고 생각하니 정말 좋아요. 더 많은 경험을 해보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는 테라는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앞으로 제게 닥쳐 올 일을 미리 내다본 것처럼, 눈을 빛내며. 그런 테라를 바라보던 쟌은 잠시 달력을 살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테라. 역시 오늘은 밖에 나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네? 왜, 왜요? 혹시 작업에 방해되나요?”
 “아뇨, 그게 더 좋을 것 같아서요. 당신이 방금 전 말한 대로 당신은 수많은 ‘처음’을 경험하는 중입니다. 그리고 이 도시는 넓고, 아직 당신이 만나보지 못한 수많은 기계인형이 있습니다. 당신의 시간을 그들에게 할당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당신도 방금 전 더 많은 경험을 해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그건 그렇지만…….”
 “게다가 오늘 찾아올 예정인 손님 중에는 당신의 도움이 될 만한 분이 있습니다. 아코르다투라의 지리를 그만큼 잘 파악하는 인형도 없을 테니, 좋은 기회가 아닐까요.”
 “그게 누군데요?”


테라의 그 질문에 쟌이 대답하기도 전에 자동문이 열렸다. 기척을 느끼고 돌아본 두 사람의 시선 끝에는 편지가 가득 든 가방을 어깨 양쪽으로 사이좋게 짊어진, 유달리 왜소한 체격의 인형이었다. 그가 누구인지 아는 쟌은 반가운 표정을 지었지만 테라는 어제 아프릴이나 파브라가 등장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낯선 이의 등장에 그저 눈을 깜박일 뿐이었다.


 “어라, 손님이야? 이런 이른 시간부터 별일이네.”
 “어서 오세요, 형. 테라, 소개하겠습니다. 이쪽은 마틴(Martin), 이 도시의 ‘배달부’입니다. 제게는 당신에게 있어서 시엘로에 해당하는 존재이기도 하죠.”
 “아하, 네가 시엘로의 동생이구나? 집 밖으로 안 나온다더니, 이제 겨우 외출할 기분이 든 거야? 반가워!”


 뜻밖에도 자신이 처음 만난 인형이 제 신분이나 사정을 줄줄 읊자 테라는 훨씬 더 당황한 기색이었다. 물론 마틴이라면 저 정도는 간단하다. 그는 아코르다투라의 ‘배달부’로서 도시의 모든 지리와 모든 주민들을 꿰뚫고 있는, 일명 정보통인 것이다. 그런 사정을 테라에게 설명해 주자 그제야 테라는 환하게 웃으며 마틴에게 인사를 건넸다.


 “반가워요! 쟌에게 얘기 많이 들었어요!”
 “쟌, 너 이 친구한테 나에 대해 뭐라고 한 거야?”
 “‘배달부’의 <역할>과 <사명>에 대해 설명해 준 것뿐이에요. 그런 것보다 형, 실은 테라의 안내를 부탁하고 싶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는 어제 처음 집 밖으로 나온 거라 도시에 대해서 잘 모르거든요. 그래서 형과 같이 다니면 많은 걸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어떠신가요?”
 “아, 그래? 뭐 그리 어려운 건 아닌데…….”
 “어? 괜찮아요? 일에 방해되거나 하지 않아요?”
 “어차피 배달하러 도시 구석구석을 돌아다녀야 하는걸. 내 뒤를 따라다니는 것만으로 소개는 충분하지 않을까?”
 “그렇죠? 테라, 형을 따라가세요.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러나 테라는 여전히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밖에 나가는 게 새삼스럽게 무서워졌을 리는 없으니 그럴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제가 혼자가 될까 걱정하시는 거죠? 괜찮습니다. 오늘은 형을 빼고라도 많은 방문객이 오실 예정이고, 당신의 책도 복원해야 하고. 할 일이 많아서 심심함을 느낄 틈도 없을 거거든요.”
 “정말이죠……?”
 “그럼요. 저도 같이 가고는 싶지만 도서관을 비울 수 없어서요. 대신 오늘 당신이 무얼 보고 누굴 만났으며, 어떤 기분이었는지 자세히 기록해서 보여주시는 걸로 타협합시다. 어때요?”


 쟌의 제안에 테라가 으음, 하고 턱을 울리며 고민을 시작했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마틴이 씁쓸히 웃는 게 보였다. 마틴이 왜 웃는지는 알고 있었다.

 마틴은 일주일에 한 번, 용건 없이 【도서관】을 찾는다. 그리고 그런 날은 늘 쟌이 맞이할 손님이 한 명도 없는 날이다. 테라가 그러하듯 마틴 역시 하루의 대부분을 【도서관】에 틀어박혀 보내야 하는 동생을 염려해 찾아오곤 하는 것이다. 그런 사정을 모두 아는 마틴의 앞에서 허세를 부렸으니 쓴웃음이 돌아와도 차마 반박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는 사이 테라는 결론을 내린 듯,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고 마틴을 향해 돌아섰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좋아! 오늘 하루 너를 나의 조수로 임명한다!”
 “다녀오세요, 테라. 수기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아직도 불안한 기색으로 테라가 마틴을 앞세워 따라 나갔다. 자동문이 닫히자 쟌은 후, 하고 짧게 한숨을 쉰 채 의자에 도로 앉았다. 테라와 마틴, 둘이 나갔을 뿐인데 도서관이 텅 빈 것처럼 느껴진다. 그 둘이 있었다고 해도 딱히 다를 건 없었을 텐데도. 테라가 이 도서관을 찾아오게 된 지 고작 이틀. 어느새 그의 존재가 익숙해져 버렸는지도.


 ‘……별일이군, 정말로.’


 생각하며 쟌은 펜을 들고 책상 위로 몸을 굽혔다. 아직 복원해야 할 내용이 잔뜩 남아 있었다.



 테라는【시계탑】에서 저녁을 알릴 시간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손에는 쟌이 부탁한 보고서가 여러 장 들려 있었다. 기록을 보여 달라곤 했지만 당일에 가져올 줄이야. 당황하면서도 웃는 낯으로 쟌은 테라가 건넨 기록을 받아들었다.


 “용케 기록할 시간이 있었군요. 어디서 쓰신 건가요?”
 “마틴의 집……, 은 아니고, 우편물 보관하는 곳에서요. 마틴이 그래도 된다고 해줬어요. 처음엔 뭘 써야 할지 고민했는데, 누굴 만났는지부터 시작해서 쭉 쓰니까 재미가 붙어서 손이 빨라졌어요! 글을 쓴다는 건 재밌는 일이었네요.”
 “그것도 당신에게 있어서는 ‘처음’이군요. 이쪽도 복원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전체의 2할 정도는 끝낸 것 같군요.”


 말하며 쟌은 책상 위에 잔뜩 쌓인 원고를 테라에게 자랑스레 보여주었다. 그날은 아무도 【도서관】을 찾지 않았던 덕에 생각보다 많은 양을 복원할 수 있었다. 당연히 쟌은 뿌듯해했지만, 정작 테라는 다른 생각을 한 듯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걸 오늘 안에 다 한 거예요? 아무도 안 왔어요?”


 그 생각이 테라의 입을 통해 지적으로 흘러나오자 그제야 쟌은 당황했다. 테라에게는 찾아올 사람이 많다고 얘기했는데. 식은땀을 애써 숨기며 쟌은 원고뭉치를 거두고 애써 태연히 웃어 보였다.


 “아닙니다. 파브라도 왔고, 다른 손님들도 찾아오셨습니다.”
 “……정말로요?”
 “그럼요. 제 연산 프로그램은 이 도시 내에서도 고급이거든요. 그 덕을 좀 본 겁니다. 어쨌든 이 페이스로 가면 기간을 생각보다 단축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세요. 곧 이 책을 빌려드릴 수 있을 겁니다.”


 쟌의 웃음에 천천히 테라의 걱정 가득한 표정이 풀어졌다. 책을 곧 받아볼 수 있다는 기쁨도 한몫했으리라. 쟌도 역시 테라가 웃는 모습을 마주하자 겨우 마음이 놓였다. 쟌은 원고를 갈무리하고 테라에게서 받은 수기도 조심스레 그 위에 올려놓았다.

 난생 처음이었다. 거짓말을 해본 것은.
 자신을 염려하는 말을 처음 듣는 건 아니다. 테라 이전에도 도서관을 찾은 수많은 인형들-특히 마틴-은 하루 종일 도서관에 갇혀서 지내는 쟌을 걱정하며 그가 심심해하지 않기를 염려했다. 그런 이들에게 쟌은 계속해서 말해왔던 것이다. 괜찮습니다. 그게 제 <역할>이니 당연한 것을요.

 그런데도 오늘 아침도, 방금도, 거짓말을 했다. 찾아온 손님이 아무도 없었느냐는 테라의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어째서일까.


 ‘테라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서?’
 ‘그가 우울해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서?’
 ‘테라가……, 계속 웃어주길 바라서?’


 어느 쪽이든 그것은 쟌이 처음 느껴 보는 감정이었다. 정체불명의 감정은 쟌을 당황하게 하기 충분했고, 그래서 쟌은 다소 어색하다는 걸 알면서도 화제를 일부러 돌렸다.


 “내일도 형을 따라가실 겁니까?”
 “네, 마틴이 괜찮다고 해서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하루만 갖고 도시의 모두를 파악할 순 없죠. 형이 괜찮다고 하니 더 많이 돌아다녀 보세요. 더 많은 주민을 만나 보세요. 당신이 더 많은 ‘처음’을 맛보기를 바랍니다. 이번처럼 기록으로 남겨주는 것도 좋겠군요.”
 “응! 고마워요!”


 다음날 마틴과 만나기 전에 도서관에 들르겠다며 테라가 돌아간 뒤에야 폐관 준비를 시작하면서 쟌의 시선은 계속해서 테라의 수기에 집중되어 있었다.

 테라의 첫 나들이. 테라가 처음 가본 곳. 테라가 처음 만나본 사람들. 테라의 여러 가지 ‘처음’이 저 몇 장의 종이에 가득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도서관】이 세워진 이래 쭉 도서관을 관리해 왔던 쟌은 당연히 이 도서관에 소장된 책은 전부 읽어보았다. 테라가 가져온 수기는 간만의 읽을거리이기도 하다. 그러니 새로 얻은 책을 읽을 때만큼이나 설렐 수밖에 없겠지.

 정리를 모조리 끝내고 쟌은 도서관 맨 안쪽에 있는 제 생활공간에 들어섰다.
 자, 그럼 읽어 볼까. 침대에 누워 쟌은 첫 장을 펼쳤다.



 “자, 어딜 가볼까?”


 테라와 함께 【도서관】을 나온 순간 마틴은 어린아이를 인솔하는 교사로 바뀌었다. 물론 어린아이 취급 받아도 전혀 문제될 게 없는 테라는 아장아장 그 뒤를 따라 거리로 들어섰다.


 “어디 가고 싶은 데 있어?”
 “아뇨, 난 잘 모르니까……. 마틴이 가자는 데로 갈게요.”
 “그래? 그러면 내 뒤 잘 따라와. 나 놓치면 안 된다? 길 잃어버려도 책임 못 지니까!”


 애교 있게 웃은 마틴은 웃음으로 화답하는 테라의 손을 잡아끌며, 가자! 라고 외쳤다.

 아코르다투라의 거리는 처음 테라가 바깥세상으로 발을 내딛었을 때만큼이나 붐볐지만 마틴은 가방을 두 개나 메고도 주민들 사이를 휙휙 빠르게 헤쳐 나갔다. ‘배달부’이기에 갖고 있는 기술이겠지만, 덕분에 뒤쫓는 테라는 고역이었다.


 “마, 마틴……! 잠깐만, 같이 가요……!”
 “앗……!”


 정신없이 마틴의 뒤를 쫓던 테라는 방금 전 마틴이 유려하게 스쳐 지나간 다른 주민과 그만 부딪히고 말았다. 아프릴에 이어 두 번째다. 다만 첫 번째와 달랐던 점은 아프릴과 달리 이번에 테라와 부딪힌 인형 역시 테라와 마찬가지로 뒤로 넘어졌다는 사실이었다.


 “괘, 괜찮으신가요? 죄송합니다, 제가 앞을 못 보고…….”


 사과의 말만큼이나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선 상대는 아직도 바닥에 쓰러진 채인 테라에게 손을 내밀었고, 덕분에 테라가 사과할 틈을 잃어버린 사이 앞서나갔던 마틴이 테라가 따라오지 못하는 것을 눈치 채고 그들이 있는 장소로 돌아왔다.


 “테라! 괜찮아? 미안, 내가 신경을 좀 더 썼어야 했는데. 넘어졌어? 어디 다친 데는 없고?”
 “괘, 괜찮아요! 죄송해요, 좀 더 잘 따라갔어야 했는데.”
 “아냐, 나 빠르게 걷는 게 습관이 되어 갖고, 네가 따라오고 있다는 거 전혀 생각도 못 했지 뭐야. 그런데, 어라? 누군가 했더니 메이아잖아.”
 “안녕하세요, 마틴……. 이 분은 혹시 일행이신가요? 이거 정말 실례했습니다. 자, 어서 일어서세요.”

 또다시 정중한 사과의 말을 하며 상대는 테라를 한 손으로 가볍게 일으켜 세웠다. 그 힘에 조금 놀란 테라였지만, 정작 일어서서 보니 상대의 키는 쟌과 비슷해도 체구는 그보다 좀 더 마르게 디자인 된 것 같았다. 모자 아래로 빛나는 은발은 시엘로를 떠올리게 만들기도 했다. 시엘로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인상이 좀 더 순해 보인다는 점이었을까. 게다가 허리에는 뭔가를 잔뜩 매달고 있었는데, 그게 무엇인지 모르는 테라와 달리 마틴은 또 늘었네, 라 말하며 상대의 허리에 달린 도구들을 하나둘씩 만져 보았다.


 “아, 이쪽은 테라야. 집 밖에 나오는 게 어제가 처음이었대. 도시를 안내해 주려고 오늘은 내 뒤를 따라오기로 했어.”
 “그렇군요. 저는 메이아(Meir)라고 합니다. 【태엽의 저택】에서 일하고 있는 요리사예요.”
 “【태엽의 저택】이라면, 파브라의……?”
 “네. 파브라의 시중을 들고 있습니다.”
 “오늘도 심부름 나온 거야? 어쩐지 짐이 많다 했다. 그런데 뭐 망가진 거 아냐? 괜찮아?”
 “괜찮아요. 요리에 쓸 칼을 사러 왔을 뿐이라…….”
 “또? 허리에 이렇게 많이 달고 다니면서?”


 키득키득 웃던 마틴은 메이아와 테라의 몸에 묻은 먼지를 제각기 털어 주었다. 심부름으로 갈 길을 서두르고 있다는 메이아와 헤어져 마틴의 뒤를 쫓다 말고 테라는 멀리 걸어가는 메이아를 돌아보았다.
 이상하다. 처음 만나는 인형일 텐데,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어.


 “테라, 빨리 따라와! 배달 밀렸어!”
 “아, 응! 갈게요!”



 테라는 마틴의 뒤를 따라 도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배달부’라는 <역할>을 위해 마틴에게 설치된 공중 부유 장치 덕분에 정신없이 뛰어다닐 필요가 없던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코르다투라는 중심 구역과 외곽으로 나뉜다. 중심가에는 일반 주민들의 거주 구역-테라와 시엘로의 집도 여기에 있다-과 【시계탑】, 【태엽의 저택】이 있고, 【도서관】은 거주 구역에서 약간 떨어졌지만 확실히 중심 구역에 가까운 위치다.

 한편 외곽에는 넓은 공터를 자랑하는 【공방】과 【공장】이 일단 자리를 잡고 그 외의 공간은 전부 넓은 숲이었다. 아코르다투라의 자연은 모두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진짜 숲은 아니지만, 그 넓이는 인간들의 숲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 마틴이 가르쳐주었다.
 마틴의 허리에 매달린 테라가 가장 많이 오간 곳도 바로 이 외곽 지역이었다. 마틴이 편지를 전하러 가는 집마다 【공방】에 보내는 수리 예약 의뢰서를 추가로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도시 중심 구역과 【공방】을 열 번은 넘게 오간 뒤에야 겨우 한숨 돌릴 시간이 생긴 마틴은 자기가 늘 쉬는 곳이라며 【시계탑】의 옥상으로 테라를 데려갔다.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뒤로 드러눕는 마틴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는 것이 미안하게도 테라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마틴은 매번 이렇게 바빠요?”
 “원래도 바쁘긴 했지만 요즘은 더 해. 하급 인형들이 멈추는 사건에 대해선 내가 설명 안 해도 알지?”
 “응, 그거 때문에 【공방】에 찾아오는 손님이 많다고…….”
 “그러니까. 평소엔 츠무기 혼자서도 충분한 곳인데, 일손이 부족해서 【공장】에서 일하는 녀석들도 동원되고 있지 뭐야.”
 “【공장】은 뭐 하는 데예요?”
 “인간형이 아닌 기계를 만드는 곳. ‘시장’인 디센이 관리하고 있어. 원래는 도시에 필요한 물건들……, 그러니까 내가 쓰는 부유 장치나 아프릴이 몰고 다니는 오토바이 같은 걸 만들었는데 요즘은 동물형, 식물형 기계 만들기도 하나 봐. 오후에 【공장】에 갈 일 있으면 소개해 줄게. 일단 지금은 좀 쉬자.”
 “수고하셨습니다.”
 “응, 수고하셨습니다.”


 씩 웃으며 테라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어 준 마틴은 도로 지붕에 누워 머리 위로 쏟아지는 햇살을 맞이했다. 햇살에 부딪혀 반짝반짝 빛나는 마틴의 오렌지색 머리카락이 무척이나 아름답다고 생각했을 무렵이었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네? 누가요?”
 “Oh, 마틴. 오늘도 찾아준 겁니까? 기쁩니다.”


 웃으면서 테라와 마틴을 향해 누군가 다가왔다. 별 생각 없이 소리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테라는 가까이 다가온 인형을 보고 와아, 하고 감탄 섞인 놀람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햇살을 등지고 등장한 그 인형의 금발은 방금 전 마틴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찬란히 빛나, 마치 햇살이 그 머리카락에서 흘러나오는 것인 양 보일 지경이었다. 새하얀 피부 위의 푸른 눈동자는 보석-테라에겐 물론 아직 미지의 물건이었지만-과도 같았다. 인간이 성의를 다해 만들어낸 최고의 예술 작품을 보는 기분으로 테라가 눈을 깜박이는 사이 마틴이 테라에 대한 설명을 어느새 마친 뒤였다.


 “쟌과 마틴의 friend, 저의 friend입니다. 반갑습니다, 테라. 저는 쥰(Jeune). 이 도시의 ‘연주가’랍니다.”


 그 말대로 쥰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인형은 손에 바이올린을 들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알 리 없는 테라는 눈을 깜박이며 누군가 그 물건의 용도를 설명해 주기를 기다렸고, 테라의 그런 요청을 받아들인 쥰이 바이올린을 턱에 괴었다.


 “마틴, 뭔가 신청곡이 있습니까?”
 “음, 그럼 오늘의 따스한 날씨에 어울리는 곡으로?”
 “Oh……, 아코르다투라는 언제나 sunny day입니다만?”
 “뭐든 좋아. 네가 잘 켜는 그거 있잖아.”
 “알겠습니다. 마틴을 위해 들려드리겠습니다.”


 후후 웃은 쥰은 바이올린을 고쳐 잡고 현에 활을 대었다. 부드러운 손놀림으로 그가 활을 한 번 긋자 테라가 처음 들어보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것은, 그래. 혁명이었다.

 이전까지 누군가가 말하는 소리 외에는 들어본 적 없는 테라다. 그렇기에 지금 쥰이 들려주는 소리는 테라에게 무척 낯설었지만 또 정신을 빼놓고 듣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현을 손가락 하나하나 짚어가며 활을 움직이는 쥰의 부드러운 손놀림에 맞춰 상냥한 빛깔로 음이 반짝였다. 그것은 분명 하늘에서 비치는 따스한 햇살을 닮아 있었고 살짝 불어와 귀를 간질이는 바람을 닮아 있었다.

 그렇게 테라는 처음 맛보는 소리에 푹 빠져 있었다. 5분 31초. 연산 프로그램이 쥰의 연주가 끝나기까지 걸린 시간을 정리한 뒤에야 여운에서 빠져나온 테라는 바이올린을 몸에서 떼고 허리를 굽혀 인사해 보이는 쥰을 향해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다.


 “대단해……! 정말 멋있어요!”
 “Oh, 그렇습니까? 칭찬 고맙습니다.”
 “뭔가……, 뭔가 예뻤어요! 쥰도, 쥰이 들려준 그것도!”
 “후후후, 이건 ‘music’이라고 한답니다.”


 『I hope my music is comforting you at the last moment』.

 쥰의 말을 듣고 테라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그 문장이었다. 제 <역할>과 <사명>을 찾는 것에 관계가 있다던 문장.


 ‘그렇구나, 그 문장에서 말하는 ‘music’ 이런 걸 말하는 거였구나…….’


 새로운 지식을 다시 하나 손에 넣은 테라였지만, 그것은 필연적으로 새로운 호기심을 동반했다.

 그게 내 <역할>과 <사명>이랑은 무슨 관계일까?


 “언제 들어도 좋은 곡이라니까. 제목이 뭐랬지?”
 “<sakura message>입니다.”
 “무슨 뜻이에요?”
 “sakura는 봄에 피는 꽃입니다. 저도 본 적은 없습니다. 그래도 【공장】에서 같은 꽃을 만들려고 연구 중이랍니다. 그러니 조만간 sakura를 볼 수 있지 않을까요? Oh, 그걸 보면서 이 곡을 연주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코르다투라는 1년 내내 봄이니까 계속 피어 있으려나? 우리가 만든 꽃은 원래 존재하는 꽃이랑은 달리 져 버리지도 않고.”
 “분명 아주 아름다울 겁니다. 저는 많이 기대하고 있습니다.”


 따스하게 웃으며 쥰은 시선을 【공방】과 【공장】이 있는 도시 외곽으로 돌렸다. 마치 자신이 말하는 벚꽃이 그 자리에 피어 있는 양. 다만 그건 환상에 불과하다. 어쩌면 쥰이 들려준 음악 때문에 아직 여운에 빠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아코르다투라의 자연은 인공적인 것으로, 도시의 세 ‘창조자’ 중 ‘기술자’를 맡았던 인간이 기술의 정수를 동원해 만들었다고 한다. 어떤 기술을 이용했는지는 책에 적혀 있지 않았고 적혀 있었대도 이해할 수 없었겠지만, 테라가 하늘에 떠서 본 인공숲은 그와는 관계없이 그저 아름답게만 보였다.

 테라의 시선이 인공숲으로 옮겨간 것을 보고, 쥰은 다시 바이올린을 턱에 괴었다. 이번에도 쥰이 연주하는 똑같은 곡에 귀를 맡기고 테라는 눈을 감았다. 한 번 들어 기억 회로에 남은 음의 흐름이 허밍을 통해 테라의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이 음악……. 쟌에게도 들려주고 싶어.’


 그렇게 생각한 것은 왜였을까.
 이유는 어찌 되었든 그것은 지금 세 대의 인형이 맞고 있는 아코르다투라의 햇살만큼이나 따스한 생각이었고, 테라는 쥰의 연주가 끝날 때까지 그 음을 따라 부르길 계속했다.

 기억 회로가 곡을 전부 머릿속에 담고 쥰의 연주가 끊겨도 계속 되뇔 수 있을 때까지, 쭉.



 거기까지 읽었을 때 전신에서 삐걱대는 소리가 났다. 슬슬 취침 시간임을 느낀 쟌은 테라의 수기를 읽다 말고 침대 옆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조금 더 읽고는 싶지만 내일도 일이 있으니 할 수 없다. 대신 내일도 테라가 수기를 써 올 테니, 한동안 읽을 게 늘어날 것이란 즐거운 예감이 들었다.


 ‘그를, 테라를 만나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겠지…….’


 입에 떠오른 만족스러운 미소는 분명 그 때문이리라고, 수면에 빠져들기 전 쟌은 생각하는 것이었다.


2차창작 중심으로 이것저것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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