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대제국은 그 아래에 위치한 나라들보단 비교적 시원한 편에 속하지만, 그래도 더운 여름엔 서늘함을 찾아 무서운 이야기를 하는 이야기꾼들이 인기있었다. 전장까지 다녀온 노엘은 귀신이니 저주니 하는 것들을 조금도 무서워하거나 믿지 않는 쪽이었으나, 요즘들어 자꾸만 그들이 말하는 '공포'가 어떤 식인지를 알 것만 같았다. 그래, 그 새끼다. 겜 아처. 시도때도 없이 아무데서나 불쑥 튀어나와 허리를 감거나 어떻게든 만져대는 놈을 볼 적마다 노엘은 심장이 철렁해서 죽을 맛이었다. 그건 확실히 전쟁터에서도 못 느껴봤던 공포가 맞다. 오죽하면 손발 끝에 핏기가 서늘하게 싹 가시는 느낌까지 드는지.

물론 그런 스킨쉽들이 남들 눈엔 썩 좋아보이는지 황성 내 여론은 슬금슬금 노엘이 원하던 평화로운 방향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당장 노엘이 파혼하길 바라던 친대공파 귀족들도 슬그머니 현실을 자각하기 시작했는지 내내 찾아와 닥달하던 짓들이 줄어들기까지 했다. 기실 노엘이 이 국혼에 못마땅한 티만 냈어도 알아서 유언비어를 불리고 굴려 전쟁을 재발시킬 놈들이었는데, 못마땅하긴 커녕 황성 온실에서 겜 아처에게 가만 안겨 꽃구경을 하는 노엘을 봤다든지(놀라서 굳어있었다) 이른 아침 노엘이 겜 아처에게 안겨 잠들어 있던 모습을 세숫물 떠다 들어갔던 시종이 봤다든지 하는 소문만 가득하니 아무리 재간 좋은 귀족놈들도 달리 수작 부릴 엄두가 나지 않는 듯했다.

그리고 그 괴상한 소문들은 의외로 죄다 사실이다. 기실 그게 노엘을 더 미치게 만들고 있었다. 놈의 그 태도는 대체 어떻게 돼먹은 물건이란 말인가? 전쟁 내내 엿 처먹이고 엿 처먹었던 사이에 그가 보이는 그 호의 가득한 행동이 말도 안 된다는 것쯤은 누구나 안다. 정말로, 이쪽이 좋다던 놈의 말을 아무런 의심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서로 좆되게 만든 경험이 너무 많았다. 오죽하면 남제국에서 다시 한 번 전쟁을 일으킬 꼬투리를 잡으려고 겜 아처에게 뭘 시킨 게 아닌가 의심했을 정도다. 하지만 남쪽에 파견했던 밀정이 그런 낌새는 없다고 했는데. 본인이 손수 훈련시킨 놈이니 멍청히 착각을 할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노엘은 몇 번이나 그에게 같은 말을 물었다. 

- 진짜 아니라고? 

- 아니라니까요. 

- 겜 아처가 그 앞잡인 거 정말 아니야? 

- 아니에요, 그 사람 가는 거 잡으려고 남제국에서도 난리났었는데요.

그러니 노엘의 의혹은 풀어졌지만 마음은 더 불안할 수밖에 없다. 진짜 내가 좋다는 말을 그냥 믿으라고? 굵직한 전쟁 공신이 그 명예와 황금을 다 마다하고 얻어낸 게 고작 이쪽과의 국혼인 걸 멍청이처럼 홀랑 믿으란 말이냐?

하지만 놈을 제쳐두고 다른 사람들의 얘기만 들으면 그게 또 사람 기분을 싱숭생숭하게 만드는 것이다. 종전 축하연 자리에서 깜빡 잠들었다 눈을 뜨니 침대 위여서 그날 내내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의아했는데, 간밤에 찾아온 리암이 마침 그 얘기를 해줬다. 연회장에서 기절하듯 잠든 노엘 갤러거를 겜 아처가 품에 아주 소중하게 안고 돌아갔다나 뭐라나. 게다가 그 상태로 예의 바르게 리암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기까지 했다기에 노엘은 그만 혀를 깨물고 싶을 지경이었다. 씨발, 씨발! 그럼 걔한테 안겨서 황제가 있는 상석까지 갔단 소리잖아! 그건 곧 연회장 안의 귀족 대부분이 그 꼬라지를 봤다는 뜻이다. 어째 요며칠 이쪽을 흘끔거리며 수군대는 새끼들이 많더라니....

어쨌든 말만 들으면 그는 노엘에게 정말 다정했다. 기실 노엘이 고문에 대한 트라우마로 흠칫흠칫 놀라대서 그렇지 겜 아처가 노엘 갤러거를 대하는 태도는, 객관적으로 아주 상냥하다고 표현하는 쪽이 옳을 것이다. 노엘이 아침에 유독 추위를 못 견딘다는 건 리암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는데 그는 당연하다는 듯 붙어지낸지 이틀만에 그걸 알아냈다. 그래서 새벽에 이쪽 방에 몰래 숨어들어(대체 어떻게 그랬는지 모르겠다) 침대에 쏙 들어와있었단 거다. 물론 눈 뜨자마자 옆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가슴팍 위 누군가의 팔에 노엘의 잠이 오싹 깨버렸음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아침햇살을 등진 놈의 그 환한 아침 인사를 다른 새끼들이 봤어야 하는데. 덥니 어쩌니 하며 무서운 얘깃거리를 찾아다닐 필요가 없어질텐데 말야.... 

"넌 씨발 대체 무슨 생각이냐?"

간만에 일거리 없는 아침을 맞아 차를 홀짝이던 노엘이 한숨 반 짜증 반 섞인 표정으로, 당연하다는 듯 곁에 앉은 겜 아처를 향해 묻는다. 그래, 그는 또 노엘의 옆에 누워 이 반짝이는 햇살 가득한 아침을 맞이했더랬다. 마치 제 방처럼 편하게 눌러앉은 채 우아하게 찻잔을 내려놓은 겜 아처가 가시돋은 노엘의 짜증에 대답했다.

"아무 생각 없는데."

"생각 없는게 자랑이냐?!"

"아침부터 열 올리고 그래, 덥게."

그는 노엘이 마냥 짜증 내고 싶을 뿐이라는 걸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대충대충 말을 받는다. 내로라하는 굵직굵직한 귀족들을 죄 겁먹게 만들었던 대공의 험상궂은 표정을 대하는 겜 아처의 목소리는 아주 부드러웠고, 표정은 서글서글하기 짝이 없었다. 노엘은 짜증을 내다가도 그 점에 못내 감탄하고 다시 짜증내기를 반복한다. 그래 저렇게 겁 없고 능청스런 성격이니 아침 댓바람부터 뻔뻔하게 이러고 앉은 거겠지. 한숨을 푹 내쉰 노엘이 결국 제 풀에 못이겨 빵조각 하나를 문 채 침대에 널브러졌다. 귀족적 체면이고 뭐고 집어 던진 듯한 행동에 겜 아처가 또 웃긴 했지만, 노엘은 아예 신경을 꺼 보려는 심산인 듯 뚱하니 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걸 본 겜 아처는 생각한다. 그럼 내가 또 말 걸면 되지 뭐. 그는 노엘 갤러거의 목소리를 듣는게 좋았다.

"편하니?"

드러누워 올리브가 콕콕 박힌 치아바타를 우물거리던 노엘이 겜 아처를 힐끗 곁눈질한다. 척 봐도 대답하기 싫은 표정이었지만, 저건 대답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물어볼 인간이라는 걸 북제국 누구보다도 잘 아는 대공은 마지못해 그래 하고 대꾸했다. 누가 들어도 퉁명스럽기 짝이 없는 목소리에 기분이 나쁠 법도 한데 겜은 여전히 웃는 낯이다. 그야 물론 침대가 편하긴 할텐데, 물어본 건 그 말이 아니어서 말야. 차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그가 서글서글한 표정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노엘이 누운 옆,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다시 물었다.

"내 말은, 내가 편하냐고."

"뭐 씨발?"

하긴 정곡 찌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지만은. 꾸역꾸역 그를 외면해보려던 노엘이 결국 고개를 팩 틀어 겜 아처를 쳐다본다. 편하다니, 씨팔 뭐가 어쩌고 어째? 말이 없어도 저 대사가 들리는 것이 어지간히 기가 찬 표정이었다. 하지만 일어나긴 귀찮았는지 여전히 침대에 드러누운 채라 침대 시트에 비벼진 뒷머리가 아주 엉망이었다. 그걸 지켜보던 겜이 저걸 만졌다간 물리겠지 따위의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르고, 노엘 갤러거는 지금 자기 모습이 아주 무서운 걸로만 아는 듯했다. 하지만 세상 어떤 짐승이 불편한 상대 앞에서 배 까뒤집고 드러눕겠어? 한쪽 무릎을 세워 그 위에 턱을 괸 채 겜 아처가 놀리듯 말했다.

"제법 체면 차리는 편이라고 들었는데, 내 앞에선 이러고 있으니까 말야."

그 말을 들은 노엘이 코웃음을 친 건 물론 당연한 수순이었지만, 어쨌거나 겜은 자기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봐, 진실에는 붙을 리 없는 변명의 꼬리가 아주 길게 줄줄 딸려오잖아.

"너한텐 차릴 체면이 없으니까 그렇지. 내숭도 떨 인간 앞에서 떠는 거다, 콜린 머레이 아처. 너한테 뭐 곱게 보이려고 예의를 차려? 손에 무기 하나 없는 새끼가 뭐 그렇게 무섭다고……"

"그래, 그럼. 대충 그런걸로 하지 뭐."

"대충 그런 게 아니라 이게 정확히 맞다고, 개새끼야."

"하하."

진짜 못참겠다. 둘 모두 알 리는 없지만, 이건 겜 아처와 노엘 갤러거가 동시에 떠올린 생각이었다. 노엘은 끝까지 히죽대며 놀리는 듯한 겜 아처가 못 견디도록 마음에 안 들었고, 겜 아처는 이쪽이 편하지 않다면서도 끝끝내 침대에 드러누워 일어나지 않는 노엘이 귀여워 참을 수가 없다. 하지만 둘 중 몸이 먼저 움직인 건 겜 아처였다. 노엘에게는 공교로운 일이었지만 어쨌거나 사실이 그랬고, 겜 아처는 이제 노엘의 허리를 깔고앉은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 채 도망갈 틈 없이 아주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 미안한데 도무지 모른체 할 수가 없어서. 너 사실은 내가 편하잖아. 그러면 안 될 이유라도 있어? 왜 그렇게 반골처럼 굴고 그래."

네가 그러면 그럴수록 내 약간… 짓궂은 부분이 간지럽다는 걸 말해줘야 할까? 생각하던 겜 아처가 결국 말 없이 낄낄 웃자 그의 몸 아래 깔려있던 노엘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겜은 그게 의외다. 이쪽이 뭐만 하면 움찔대기에 이번에도 겁먹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덤덤한 표정이니까. 그래 하긴 이런 점이 재밌는 부엉이였지, 겜 아처가 대답을 재촉하듯 왼손으로 노엘의 아랫턱을 쓰다듬었다. 그러다 먹던 빵에 뺨을 얻어맞긴 했지만 손가락에 닿았던 살갗이 퍽 따뜻하고 부드러워 기분이 흡족하다.

"날 그 꼴로 만들었던 놈이 편할 것 같은가?"

"사실 그랬으면 좋겠는데. 연애감정으로 좋아해주면 더 좋고. 내 얼굴, 정확히 네 취향이잖아."

"씨발할 개소리!"

노엘은 이제 전쟁터에서나 보여주던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건 그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짜증이 났다는 신호다. 갓 중앙에 올라온 귀족이 마주한다면 숫제 눈물을 줄줄 흘릴 서늘함이 섬뜩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겜 아처는 싸늘하게 상대를 깔아보는 저 고압적인 오만함이 반갑기만 했다. 이것좀 봐, 세상에서 가장 망가뜨릴 맛 나는 표정 아닌가. 하지만 겜 아처는 멍청하게 이걸 드러내지 않는다. 어디까지 몰아야 겁먹은 사냥감이 물지 않는지, 타고난 사냥꾼인 그는 아주 잘 알고있었다. 게다가 이건 맹금이었다. 너무 겁먹어 날아가기라도 하면 아주 곤란하다. 그래서 그는 부드러운 솜털을 대하듯 상냥한 목소리로 노엘의 귀에 속삭였다. 비밀스런 얘기를 하듯 나긋나긋하고 낮은 목소리였다.

"그냥 하는 소리는 아냐. 전쟁할 때 네 뒷조사 엄청 했거든. 자료 모아서 회의하다가 날더러 미인계라도 써보라는 말까지 나왔었다니까."

"남쪽엔 씨팔 제정신인 놈들이……, 넌 전쟁 다 끝난 마당에 왜 이제와서 뒷북인데?"

"내가 말 안했나? 아닌데, 여기 온 첫 날에 말해줬잖아."

"그을쎄, 날 엿 처먹이러 왔다고 했던거 같긴 하군. 비켜. 무거워."

노엘이 슬쩍 상체를 일으키며 겜 아처의 가슴팍을 밀어낸다. 동시에 툭 던진 대꾸가 퍽 퉁명스럽고 심드렁했으나 겜 아처는 그냥 또 웃기만 할 뿐이다. 그는 생각보다 노엘 갤러거의 속을 읽는데에 능숙했기 때문에, 노엘의 저런 대답이 작정하고 이쪽을 긁으려는 의도가 아니라는 걸 다 아는 까닭이었다. 노엘은 정말 이쪽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을 못 한다. 기실 이쪽에 관심이 없었으니 기억하고 말고 할 것 없이 다 흘려들었던 거겠지만, 그게 이 완고한 대공의 귀여운 점 중 하나 아닌가. 겜 아처는 드세게 가슴팍을 밀어오는 노엘 갤러거의 손을 꼭 잡고 노엘의 상체 위로 조금 더 몸을 숙였다. 점점 더 질색하는 표정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걸론 모자라지, 그렇지. 겜 아처는 여기서 저 표정을 더 예쁘게 만들 방법을 알고있었다. 어려울 것도 없이 딱 한마디면 된다. 겜 아처는 좀 더 상체를 숙여 노엘의 콧등에 키스한 다음 아주, 아주 정말 다정한 목소리로 그렇게 속삭였다.

"사랑해."

그러면 겜이 바라던대로 노엘의 표정이 아주 처참하게 구겨지고……, 돌아오는 대꾸가 없다. 그래 노엘 갤러거는 지금 드물게 말문이 막힌 채였다. 기가 찬 듯 몇 차례 입만 벙긋거리다가 드세게 겜 아처를 팍 밀어내는 행동이 말을 대신한 대답의 전부다. 겜은 아예 지금 혀까지 섞어버릴까 하다가 아무래도 피를 볼 것 같아 순순히 숙였던 상체를 물렸다. 봐봐, 나도 정도는 안다니까. 그가 아침 햇살과 똑 닮은 부드럽고 시원한 미소를 보이며 노엘 갤러거를 더 없이 사랑스럽게 바라본다.

아, 가엾은 노엘. 네가 여기서 조금만 더 멍청했으면 내 말을 안 믿을 수 있을텐데. 하지만 이 마음이 진짜라는 걸 모르기엔 네가 너무 똑똑해. 겜 아처는 노엘 갤러거의 저 처참하게 찌그러진 표정 속에 어떤 복잡한 생각과 감정들이 얽혀있는지 다 안다. 싫건 좋건, 지난 십 년간의 전쟁은 이 둘이 서로의 머릿속에 들어가 상대를 이해하고 이겨먹으려 애썼던 과정이기도 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겜은 의심과 불쾌감과 분노로 가득 찬 노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속삭인다. 심판은 없지만 이번 아침은 확실히 이쪽의 승리였다. 아침을 먹지도 않았는데 아주 배가 부르다.

"내가 널 사랑한다고, 노엘. 진짜 그게 다야."

그리고서 시원하게 하하 웃던 겜 아처가 정말 노엘의 입술에 키스하려 들고, 그걸 본 노엘이 질색을 한 채 몸부림 치던 순간이다. 문간에 똑똑 노크를 하며 세숫물을 들고 들어온 시종이 겜 아처 밑에 깔린 채 얼굴이 붉어진 노엘 갤러거를 한 번, 그 위에서 살짝 밭은 숨을 내쉬는 겜 아처를 한 번 번갈아 쳐다본 뒤 서둘러 방 밖으로 사라졌다. 기실 그 광경에 서린 열기는 죄 몸싸움 탓이었지만 남들이 그걸 알 게 뭔가….

당연스럽게도 황성에 예비 대공 부부의 대단한 금슬이 죄 소문나기까진 채 반나절이 걸리지 않았더랬다. 노엘은 그날 업무 도중 멀쩡한 펜대 한 다스를 박살냈고, 그걸 들은 황제는 대공을 불러들여 뒤집어지게 웃다가 금강석으로 만든 만년필 하나를 선물하며 그에게 키스했다.

변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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