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밍 씨, 이번 주 금요일에 시간 돼?" 


제 직속 선배가 물어왔다. 


"낼 모래요? 뭐 도와드릴 거라도 있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라며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귓속말로, '예밍아, 이따 흡연실로 좀 와. 얘기 좀 하자.' 라고 했다. 대학 선배였던 그는 프로페셔널해 보여야 한다며 사내에선 존댓말을 한다.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지 미간을 살짝 구기고는 흡연실에서 따로 만나자 했다. 






흡연실에 매캐하게 깔린 담배 냄새가 나쁘지만은 않다. 이미 몇 해도 전에 끊은 담배지만, 그 특유의 냄새를 맡을 때면 가끔 다시 피우고 싶다는 충동이 일기도 한다. 그래서 피해온 장소인데, 그걸 아는 선배가 저를 흡연실로 부른 걸 보면 정말 큰 고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 끝나고 바로 저녁 먹으러 갈 건데 시간 괜찮지?" 


"괜찮긴 한데. 무슨 저녁이요? 

일 부탁하려고 한 거 아니에요?" 


"너 미팅할래?" 


"… 네?" 


"그냥, 음, 더블데이트처럼."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니, 


"아── 양예밍! 

이번 한 번만 부탁하자!!" 


그가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좋아하는 여자가 있는데 도통 둘이 만나는 걸 꺼려서 늘 친구가 함께 나온다고 했다. 어차피 나도 여자친구가 없으니 더블데이트처럼 만나 상대 여자를 마크해달라는 거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라며 손까지 모아 부탁했다. 너무 부담 갖지 말고 그냥 여러 명이 미팅한다- 생각하라고 했다. 


"그냥 밥 먹고 술자리만 함께하면 되는 거죠?"


"고맙다, 양예밍!!" 


말을 마친 그가 신이 나서 돌아갔다. 딱히 매주 금요일마다 야오왕과 약속 있는 건 아니지만, 말을 해두어야겠다 싶어 폰을 꺼내 들었다. 


음.. 근데, 뭐라고 하지. 진짜 미팅은 아니니까 미팅이라고 말하기도 뭐하고.. 사실 미팅이라고 말해도 상관없겠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안함이 몰려왔다. 순간 제 이름을 부르며 절정에 달하는 야오왕의 얼굴이 스쳤다. 


"뭐야.."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 그냥 주머니에 폰을 넣었다. 











[ 오늘 저녁 어떻게 할 거야? ] 


양예밍에게 문자를 보냈다. 보통 금요일엔 먼저 연락해오는데 어쩐 일인지 퇴근 시간이 곧 인데도 문자 한 통 없었다. 곧 진동이 울렸다. 


[ 회사 회식 있어. 늦을 거 같아. ] 


그의 문자를 보고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했다. 야오왕 진짜 미쳤구나.. 뭘 당연하다는 듯이 생각한 거야. 양예밍과 몸을 섞기 시작한 후로 금요일의 외식을 당연시하고 있었다. 고개를 세게 도리질했다. 


"미쳤어, 야오왕."






퇴근길에 회사를 빠져나오는 데 샤오란에게서 전화가 왔다. 늘 뜬금없이 연락해 만나자고 하는 녀석. 평소엔 그런 면이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갑자기 전화해준 녀석이 고마웠다. 혼자 있었다간 분명 우울해졌을 테니까. 술 한잔 하자길래, 밥도 안 먹고 술부터야? 라고 툴툴댔더니 술집 근처에 요즘 잘나가는 음식점이 있다며 저녁 먹자고 했다. 문자로 주소를 받아 택시를 탔다. 






"하필 넌 골라도 불가리아 음식점을 고르냐.." 


"여기 셰프 유명하대. 토마토 때문에 그래? 

내가 먹어줄 테니까 걱정 말고 주문이나 해라." 


유명하기는 한지 빈자리가 거의 없었다. 눈에 띄게 커플이 많은 걸 봐선 로맨틱한 음식이 잘 나오는 거 같다. 안내받은 자리에 앉아 메뉴를 받아 들었다. 메뉴 이름 아래 적힌 재료들을 쭉 훑고 토마토 없는 걸 힘들게 찾았다. 샤오란이 메뉴 결정에 망설이는 동안 물을 마시며 가게를 둘러봤다. 


── !! 






저 먼발치에, 옆모습이긴 하지만 양예밍이 틀림없다. 왕양 선배도 함께였다. 대학 다닐 때 저와는 과가 다른 둘이었지만, 동아리 때문에 셋이 자주 동방에서 밤을 새우곤 했다. 그와 선배의 옆에는 여자들이 앉아 있었다. 회사 회식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정말 조촐한 회식이네.. 


아니, 

회식일 리가 없다. 






꽤 떨어져 있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식당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와 주변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사그라지는 기분이었다. 왕양 선배의 표정이..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말해주고 있었다. 사실대로 말하지 그랬어, 양예밍. 그럼 이렇게까지 비참하진 않았을 텐데.. 


물 잔을 손에 든 채로 멍하니 어딘가를 보고 있는 저가 이상했는지 샤오란이 말을 걸었다. 왜 그러냐고 묻는 말에,


"어? 

… 아는 사람인 줄 알고. 

근데 잘못 봤어." 


하고 얼버무렸다. 


샤오란이 뭔가 한참 이야기하는데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저가 제일 잘 짓는 거짓 미소로 연신 웃었다. 


"너 내가 널 몇 년이나 봐 왔다고 생각하냐?" 


숨기지 못한 표정이 있던 건지 눈치챈 샤오란이 아까 저가 바라봤던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양예밍을 몰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괜히 아무렇지 않은 척 오바해서 먹기 시작했다. 


어그적거리는 것이 꼭 돌을 씹는 기분이었다. 유명한 셰프가 한다는 이 요리가 제 입에 맞지 않는 건, 셰프 탓이 아니라 분명 저 때문이다. 씹고는 있지만 삼켜지지 않았다. 한두 수저 입에 넣고 한참을 씹다 억지로 물과 함께 삼켜버렸다. 아까부터 눈치를 보던 샤오란이 그런 저를 보고, 너 진짜 괜찮아? 하고 물었다. 


"응. 

미안, 나 화장실 좀 갔다 올게." 


그를 혼자 내버려 두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화장실 문이 탁- 닫히는 그 순간부터 다리가 후들거려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빈칸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뚜껑 덮힌 변기 위에 앉았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그에게 왔던 문자를 다시 확인했다. 


[ 회사 회식 있어. 늦을 거 같아. ] 


"하아─"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핸드폰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잠시 멍하니 바닥만 내려다봤다. 그때 화장실 문이 열리며 두 남자의 말소리가 들렸다. 


"이 나이에 미팅이 뭡니까, 선배." 


── !!






양예밍이다. 놀라 숨을 멈추었다. 


"뭐 어때. 우리 아직 한창 청춘인데. 

어때? 네 상대도 예쁘지? 맘에 들어? 

오늘 일은 고맙지만, 잘되면 한턱내라." 


왕양 선배 히죽이는 소리가 들렸다. 양예밍은 그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곧 입을 연 그의 대답은, 


"잘 모르겠어요." 


맞아. 그랬지. 연애 관계에선 늘 입버릇처럼 말했지. '잘 모르겠다'는 말. 


"근데 나쁘진 않아요." 


쿵─ 






이렇게 빠르게 눈물이 찰 수도 있는 건가. 눈물이 툭- 툭- 하고 무겁게 떨어졌다. 입에서 새는 소리를 막으려고 팔을 들다 무릎 위에 올려둔 핸드폰을 바닥에 떨궜다. 화장실 안에 탁- 하고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왓!! 깜짝이야... 

아, 안에 누구 있었구나. 

휴- 진짜 깜짝 놀랐네.." 


떨어뜨린 저도 놀랐지만, 왕양 선배가 많이 놀랐는지 멋쩍게 말을 이었다. 먼저 간다며 선배가 화장실을 나갔다. 이내 바슬바슬하고 옷이 부딪히는 소리가 나는 걸 보니 홀로 남겨진 양예밍이 바지 주머니에서 뭔갈 찾는 거 같았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하─ 아 됐다." 


정적 다음에 이어진 한숨 섞인 그의 말. 무슨 뜻인지 몰라도 그냥 눈물이 났다. 내가 만든 허상 속에 빠져 살았구나. 저를 만지는 손길이 다정해, 거짓된 세상인 것도 모르고 살았구나. 입을 틀어막고 흐느끼는 소리를 참아야만 했다. 곧 양예밍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화장실 문이 다시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그제야 소리 내어 울었다. 


너무 달콤해서 널 끊을 수 없었다.


야오왕의 흐느낌이 공간에 튕겨 더 서글프게 울렸다. 






숨을 두어 번 크게 쉬며 화장실 거울에 비친 저의 벌게진 두 눈을 마주 봤다. 괜찮아. 괜찮아, 야오왕. 괜찮아.. 마음을 추스르고 자리로 돌아갔다. 


"야오왕! 하도 안 와서 찾으러 가려ㄱ- , 

너 왜 그래??" 


샤오란이 말을 하다 말고 놀란 듯 물었다. 대답하지 않고 그저 미소 지었다. 벌겋게 충혈된 두 눈, 그새 부푼 눈덩이. 제 미소가 그에게 어떻게 비칠지 뻔했다. 


"그만 웃어, 새끼야. 

아픈 거야?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했어야지. 내가 나오란다고 거절 못하고 그냥 온 거야? 

어휴 진짜!!" 


답답한 모양인지 약간 높아진 톤으로 화를 냈다. 이게 다 저를 걱정하는 그의 애정 표현인 걸 알지만. 


"일어나. 가자 집에." 


"아직 식사 다 안 했ㅈ- " 


"데려다줄게. 일어나 얼른." 


제 말을 잘라먹고 먼저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대중교통 이용하는 저를 데려다 주겠다고 고집부린다. 같이 따라 나가면서 또 예의 그 미소를 지었더니, 헤실거리지 마 인마. 하고 제 뒤통수를 때렸다. 


"미안해.." 


"야오왕, 가서 잠이나 자."






샤오란이 계산을 마치고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차를 타고 오는 내내 저를 걱정해서 이것저것 충고하는데 머릿속엔 온통 화장실에서 들은 양예밍의 말뿐이었다. 


제 방에 들어와 외투만 벗고 침대에 누웠다. 다른 생각을 하고 싶은데 양예밍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몇 달 동안 행복했잖아. 양예밍이 절 좋아할 리 없다는 거 알고 있었으면서. 모르는 척 한 것뿐이잖아, 야오왕. 연애 놀이 정말 기가 막히게 했네.. 자조감이 퍼졌다.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방 안에 한숨과 흐느끼는 소리만 퍼졌다. 


한참 지나고 나서야 현관 비번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불을 들어 머리 끝까지 덮어 썼다. 그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이내 제 방문이 빼꼼히 열렸다가 조용히 닫혔다. 이제 더는 안 나올 줄 알았던 눈물이 또 터져 나왔다. 


그만하자. 

양예밍 이제 놔 주자, 야오왕.. 











현실을 직시한 그 날부터 양예밍을 피하고 있다. 양예밍은 딱히 저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못내 서운하다고 생각하는 저가 우스웠다. 야오왕 이 못난 새끼. 


시간이 흐를수록 야근 있다는 핑계만 대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분명 그도 지금쯤이면 함께 저녁 먹기 싫어 피하는 걸 눈치챘을 터였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그를 마주하면 저는 또 그를 부여잡고 울 게 뻔하니까.. 자자고 다가오면 뿌리치지 못할 것이다.











"하아암─" 


짧은 야근 후, 퇴근길에 늘어지게 하품했다. 딱히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계속 밖에서 나돌다 들어가니 피곤할 수밖에 없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 내내 하품이 이어졌다. 회사 내에서도 요즘 잠 못 자냐며 다들 난리였다. 실수도 잦아지고, 몸 상태도 별로고. 오늘은 어쩔 수 없이 집으로 향했다.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며 올려다본 제 집은 불이 다 꺼져있었다. 


"아직 안 들어왔나 보네." 


다행이다. 






비번을 누르고 들어가 어두운 거실을 가로질러 제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방 문고리를 돌리는데, 


탁- 


── !!! 


탁자 위에 유리잔 닿는 소리에 놀라 획 돌았다. 소파 위에 어스름하게 인형이 보였다. 그 인형이 어딘가로 성큼성큼 가더니 거실 불을 켰다. 탁자 위에 그가 내려놓은 와인잔이 보였다. 검붉은 레드 와인이 그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가 소파로 가 다시 앉더니 와인잔을 들고 한 모금 들이켰다. 그제야 제 시야에 그가 마시던 와인병이 보였다. 


'저 와인 떫다고 싫어하면서..' 


와인병에서 그에게로 제 시선을 옮겼다. 그가 이미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깜짝 놀랐잖아.. 왜 불도 안 켜고 있어." 


대답은 없었다. 그저 저를 계속 바라볼 뿐. 그의 시선이 따가워 고개를 돌리려는데, 


"… 나 있는 거 알면 안 들어올까 봐." 


" ─ … 

무슨 말이 그래. 너도 참."


이미 간파하고 있었구나.. 당황하지 않은 척 대꾸했다. 급하게 '적당히 마시고 들어가 쉬어' 하고 몸을 돌리는데 그가 불렀다. 


"야오왕." 


".. 응?" 


"남자친구 생겼어?" 


대답할 수가 없었다. 간단하게, 응. 이 한마디면 될 것을 그의 눈을 보고 있으니 할 수가 없었다. 이내 양예밍이 술 내음 진하게 나는 한숨을 깊게 내쉬고 '그래서 요즘 나 피하는 거야?' 라고 물었다. 제 속내를 꿰뚫어 보는 눈빛에 견딜 수 없어 몸을 돌렸다. 


"피하지 말고 말해줘. 

그럼 다시 자자는 소리 안 할 테니까. 

내 역할은.. 그때까지였잖아." 


대꾸 없이 문고리만 세게 쥐었다. 


눈물이 차오르는 게 느껴져 얼굴을 찌푸렸다. 그의 말 하나하나에 여자 같아지는 제 모습에 짜증 났다. 천천히 크게 숨을 들이쉬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윽고 고개를 돌려 그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미안. 진작 말했어야 했는데. 

응. 생겼어, 남자친구." 


나 제대로 웃고 있겠지.. 


양예밍이 잠시동안 제 눈을 마주 본 채 가만히 있었다. 그리곤 이내 보조개 들어가는 예쁜 미소를 띤 얼굴로, 축하해. 하며 와인잔에 남아있는 와인을 다 들이켰다. 고맙다고 말하려는 찰나 그는 소파에서 일어나 욕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 욕실 먼저 쓸게. 하고 그는 제 시야에서 곧 사라졌다. 


끝이다. 

잘했어, 야오왕. 

잘했어... 


그제야 제 눈에서 참고 있던 눈물이 후두두 떨어졌다.











역시 이런 자리는 불편하다. 화장실에 다녀온다며 자리를 일어서자 선배도 뒤따라왔다. 선배의 표현 그대로 미팅을 가장한 더블데이트. 생각보다 불편한 자리여서 투정 부리는 말투로 그에게 말했다. 


"이 나이에 미팅이 뭡니까, 선배." 


"뭐 어때. 우리 아직 한창 청춘인데. 

어때? 네 상대도 예쁘지? 맘에 들어? 

오늘 일은 고맙지만, 잘되면 한턱내라." 


'잘되면' 이라는 전제 조건에 한턱낼 일은 생기지 않을 거 같았다. 그렇게 말하려고 한 순간, 야오왕이 떠올랐다. 어..? 왜? 잠시 뜸을 들이다 선배를 바라보니 내 대답을 요구하는 표정이었다. 


"잘 모르겠어요." 


'이번에도냐?' 라는 눈빛으로 선배가 제 어깨를 툭툭 쳤다. 


"근데 나쁘진 않아요." 


"그렇지? 짜식 보는 눈은 있네." 


탁─ !! 


뭔가 화장실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왓!! 깜짝이야... 

아, 안에 누구 있었구나. 

휴- 진짜 깜짝 놀랐네.." 


소리가 나는 칸에 한 번 시선을 두고 화장실을 빠져나가는 선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핸드폰 떨어트린 소린가? 저도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밥은 챙겨 먹고 있나.' 


야오왕의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누를까 망설였다. 


"하─ 아 됐다." 


그를 하나하나 신경 쓰는 게 이상해서 그만두기로 했다. 야오왕이 좋은 남자 만날 때까지 욕구만 풀어주기로 한 거니까. 오히려 저가 그로 인해 제 욕구를 더 풀고 있는 쪽이지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제 몸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이거 진짜 미쳤네 양예밍.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화장실을 나섰다.






"야오왕, 가서 잠이나 자." 


'어??' 


식사를 하다 어딘가에서 야오왕의 이름이 들렸다. 고개를 돌려 가게를 빠져나가는 두 사람을 보았다. 한 명의 체형과 머리 스타일이 꼭 야오왕 같았다. 


"야오왕?" 


"야오왕이라고?" 


혼잣말로 '야오왕'의 이름을 나직이 부르자 그것을 들은 왕양 선배가 물었다. 


"방금 본 거 같아서요." 


하고 창을 통해 이미 빠져나간 두 사람을 보자 정말 야오왕이었다. 옆에 있던 남자가 어딘가로 가더니 곧 차를 끌고 와서 조수석에 야오왕을 태우고 사라졌다. 


"어? 진짜 야오왕이네." 


선배가 야오왕을 보고 옛 생각이 났는지 저와 셋의 학교생활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집에 들어온 시각은 11시가 넘었다. 만남이 생각보다 길어져서 피곤했다. 주차장에서 바라본 제 집에는 불이 모두 꺼져있었다.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건가 싶어 집에 들어가 그의 방부터 살폈다. 달빛에 어스름하게 보이기론 침대 위에 볼록하게 인형이 올라와 있었다. 안도의 짧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조용히 문을 닫았다. 


혹여 자는 걸 깨울까 싶어 조용조용 욕실로 들어갔다. 어떤 남자와 함께 가는 야오왕을 보고부터 계속 좌불안석이었다. 빨리 집에 돌아오고 싶었는데 내가 가면 이 모임도 파해야 한다며 왕양이 저를 말렸다. 불편했던 마음이 불 꺼진 집을 보고 더 증폭되었다. 생각 없이 그의 방으로 단숨에 걸어가 그가 있는지부터 살폈다. 침대 위 그의 실재에 마음이 놓였다. 


샤워기를 틀어 떨어지는 따뜻한 물에 몸을 맡겼다. 


……? 

내가.. 왜 안도하는 거지..?











야오왕이 저를 노골적으로 피하고 있다. 처음에 야근이 있다고 했을 땐 그런 건 줄 알았는데 몇 주 내내 매일같이 야근한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가끔 늦은 밤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날도 있었다. 일부러 저를 피하는 거 같아 거실에 나가보진 않았지만, 그의 불안한 걸음 소리가 이미 말해주고 있었다. 


생각나는 원인은 딱 하나, 그때 그 남자다. 그날 음식점에서 야오왕을 본 이후로 그는 저를 피하고 있다. 그 남자.. 새로 생긴 남자친구인 걸까? 거절 못 하는 성격이라 저가 자자고 하면 곤란해질까 봐 피하는 걸까. 요 며칠 혼란스러운 건 저도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애매한 시간에 외근이 있어 바로 퇴근했다. 조금 이르게 집에 들어왔다. 오늘은 결단코 그와 이야기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옷만 갈아입고 거실에서 그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아무것도 안 하고 소파에 앉아 멀뚱히 그를 기다리고 있자니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맥주라도 한잔해야겠다는 생각에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술이 하나도 없었다. 그때 눈에 들어온 와인병. 저는 떫어서 싫어하지만 야오왕이 가끔 마시곤 했다. 와인과 잔을 들고 소파에 자리 잡았다. 






"역시 맛없어.." 


벌써 세 잔째다. 오늘도 늦게 들어올 생각인지 문밖에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8시가 넘어 밖이 깜깜한데도 그저 베란다를 통해 들어오는 달빛에 의지해 와인을 마시고 있다. 행여나 불빛을 보고, 그도 저처럼 제 유무를 확인할까 싶어서였다. 요즘 그의 패턴대로라면 저가 잘 때까진 안 들어올 테니까. 


역시 제 생각이 맞았는지 얼마 있다 비번 누르는 소리가 났다. 저가 있는지는 꿈에도 생각 못 했는지 거실을 가로질러 그의 방으로 걸어갔다. 마시던 와인잔을 소파 앞에 놓인 탁자 위에 놓았다. 탁- 하는 마찰음에 그가 놀라 획 돌아봤다. 소파에서 일어나 거실 불을 켜고 돌아와 다시 앉았다. 와인잔을 들어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곤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잠시 와인병에 시선을 두는 듯하더니 이제야 제 얼굴을 쳐다봤다. 


"깜짝 놀랐잖아.. 왜 불도 안 켜고 있어."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또 저를 피하려는 그의 행동에, 저도 모르게 솔직하게 말해버렸다. 


"… 나 있는 거 알면 안 들어올까 봐." 


" ─ … 

무슨 말이 그래. 너도 참." 


당황하지 않은 척하는 너의 모습이, 그동안 저를 진짜로 피해 다닌 걸 확인시키는 거 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다. 


오늘 꼭 결단 짓기로 했으니, 이제 물어야겠다. 


그를 불렀다. 


"야오왕." 


".. 응?" 


"남자친구 생겼어?" 


그의 대답은 바로 나오지 않았다. 살짝 안도했다. 남자친구는 아니었던 거구나. 


"피하지 말고 말해줘. 

그럼 다시 자자는 소리 안 할 테니까. 

내 역할은.. 그때까지였잖아." 


그를 떠보는 식으로 말했다. 말하면서도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신경 쓰이는 건가.. 좋은 남자 만나라고 늘 그에게 말했으면서..? 


야오왕이 뭔가 결심한 듯 숨을 들이쉬더니 저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미안. 진작 말했어야 했는데. 

응. 생겼어, 남자친구." 


── !!






대꾸할 수가 없었다. 그냥 그리 말하는 야오왕을 계속해서 바라봤다. 그는 웃고 있는데 어딘지 모르게 불안함이 느껴졌다. 내 표정이 또 이상한 건가.. 또 저런 표정 짓게 한 건가. 곧 저도 그와 같이 미소지으며 '축하해' 하고 남은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이 듣기 싫어 그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욕실로 도망쳤다. 


예전엔 느껴본 적도 없는 이 마음 때문에 불안하고 짜증 난다. 







길어져서 한 편 연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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