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기락 칠석 SSR 오작교의 만남 진화 통화 '당신의 목소리' 및 24시도전 교환 SSR 석양 아래 진화 통화 '연모시의 밤' 내용 스포 있습니다.
  • 지성(@jisungzzang7)님께서 멋진 삽화를 그려주셨습니다! 중간에 첨부합니다.





연은 정신없이 달리고 있었다. 운동 부족으로 옆구리가 쑤시고, 굽 높은 구두 때문에 무게중심이 앞쪽으로 쏠려 앞꿈치와 발가락이 눌려 아팠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좀 더 굽이 낮은 편한 구두를 신었을 텐데, 해봐야 소용없는 후회를 하며 연은 이를 악물고 좀 더 속도를 냈다.

분명히 집에서 넉넉하게 시간을 잡고 나왔는데, 버스는 간발의 차로 놓치고 다음 버스는 무슨 일인지 평소 배차 시간을 훨씬 넘겨 늦게 왔다. 당연히 버스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택시를 타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사람들에 떠밀려, 그는 얼떨결에 버스에 올라탔다.

겨울이라고 난방을 뜨겁게 틀어 둔 버스 안은, 가득 붙어 선 사람들의 숨 때문에 불쾌하도록 덥고 답답했다. 사람이 많아서인지 굼벵이처럼 느리게 움직이는 버스 안에서 연은 자꾸만 시간을 확인했다. 이 속도로 가다간 분명 심사에 늦는다. 이 일을 따내기 위해 그도 회사 직원들도 몇 달을 공들여 준비했다. 그 노력을 지각으로 망쳐버릴 수는 없었다.

연은 머리가 터져라 고민했다. 이대로 버스를 타고 갈까? 아니면 내려서 택시를 잡을까? 다른 시간대였다면 망설임 없이 내려서 택시로 갈아탔겠지만, 지금은 출근 시간이었고 따라서 교통이 매우 혼잡했다. 버스는 그나마 전용차로로 달려 길이 덜 막히지만, 택시는 꼼짝없이 도로를 가득 메운 차들 사이에 갇힐 수도 있었다. 고민하는 동안에도 버스는 느리게 전진했다. 앞뒤좌우 틈도 없이 사람들에 꽉 끼어 텁텁한 공기를 가쁘게 들이마시던 연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하차 벨을 눌렀다. 너무 숨이 막히고 더워서 버틸 자신이 없었다.

일 초가 한 시간처럼 느껴질 만큼 천천히 버스가 정류장에 들어섰고, 문이 열리자 연은 발을 떼기도 전에 우르르 내리는 사람들에 밀려 구르듯 버스에서 내렸다. 중심을 잃는 바람에 계단 한가운데 있던 기둥에 어깨를 호되게 부딪쳤지만, 아파할 시간도 아까워 서둘러 택시를 잡았다. 다행히 한 번에 잡았지만, 역시 예상대로 길은 꽉꽉 막혔다.

초조하게 택시에 달린 시계를 들여다보며 발을 동동 구르는 연과 달리 택시 기사는 초연했다. 초연하다 못해 심심하기까지 한지, 마음이 급한 연을 향해 서두르면 될 일도 안 된다느니, 젊었을 땐 일 좀 그르쳐도 회복이 빨라 괜찮다느니 하는 쓸데없는 참견을 해댔다. 운전이나 제대로 할 것이지, 남의 사정도 모르고 아무렇게나 해대는 말에 그는 화가 났지만 속으로 꾹 내리눌렀다. 지금 급한 건 시간 맞춰 심사장에 도착하는 일이다. 제게 아무 의미도 없는 사람의 헛소리에 일일이 화내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자꾸만 신경을 거스르는 말들을 한 귀로 흘리려 노력하며 연은 머릿속으로 오늘 발표할 것들을 차근차근 다시 짚어보았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기분이 들었지만, 아무리 꼼꼼히 다시 살펴 보아도 고칠 부분은 없다. 오래 준비한 만큼 발표 준비는 잘 되어 있었다. 완벽하게 해낼 자신도 있었다. 제때에 도착하기만 한다면. 어째서 이렇게 아슬아슬한 느낌이 드는 걸까? 긴장해서 불안한 모양이다. 그는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그 찝찝한 기분을 털어버리려 노력했다.

마침내 택시가 멎었고, 연은 대충 지폐를 건넨 후 거스름돈도 받지 않고 뛰쳐나갔다. 아까웠지만 정말로 시간이 없었다. 심사 장소는 17층이었고, 시간은 3분도 남지 않았다. 서둘러 엘리베이터를 타야 했다. 헉, 헉, 숨을 몰아쉬며 건물의 로비 안으로 돌진한 그는 마침 1층에 머물러 있는 엘리베이터에 허겁지겁 올라탔다. 간신히 늦지 않을 것 같았다.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이마에 맺힌 땀을 서둘러 정리하며, 17층을 누르기 위해 엘리베이터의 버튼 쪽을 보았다. 그리고 잠시 멍해졌다.

아무리 살펴도, 이 엘리베이터에는 17층이 없었다. 홀수층에 안 가는 엘리베이터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안내도 없었고, 짝수 층의 버튼도 빠짐없이 달려 있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 문 위의 층수 안내판을 보자, 최대 층수는 15층까지로 되어 있다.

쿵,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고 뒤통수가 싸해졌다. 아까 무언가 빠뜨린 듯한 찝찝한 기분은 착각이 아니었다. 연은 떨리는 손으로 열림 버튼을 눌러, 막 닫히려는 문을 열고 내렸다. 엘리베이터에 타 있던 승객들의 불평하는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마음이 급해, 주머니에 넣어두고 확인하는 것을 잊고 있던 핸드폰을 꺼냈다. 부재중 전화와 문자를 알리는 빛이 쉴 새 없이 깜박이고 있었다. 저도 모르는 새 무음 모드가 되어 있어서 연락이 온 줄도 몰랐다. 다급하게 그의 위치를 묻는 나연의 문자가 몇 개나 쌓여 있었다.

마침 전화가 와서 연은 반사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전력질주한 탓에 아직도 숨이 가쁘고 머리가 멍했지만 한 숨 돌릴 시간 같은 건 주어지지 않았다. 여보세요, 운을 떼자 기본적으로 침착하지만 묘하게 감정이 깔린 나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 대표, 왜 연락을 안 받아? 지금 어디야?」

"저, 지금 OO빌딩 로비요...... 택시 타고 왔는데, 이 건물에 17층이 없어요."

「거기 아니야. OO빌딩이 아니라 OO프라자. 이름 비슷한 건물 많으니 주의하라고 어제 말했잖...... 후, 일단 얼른 와. 지금 사정사정해서 우리 차례 맨 뒤로 미뤘으니까.」


연은 변명할 말이 있었다. 분명 OO프라자라고 말했는데, 택시 기사가 멋대로 이쪽에 데려다 놨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이 그의 탓이 아니라고 해도, 결과적으로는 그의 잘못이었다. 찝찝한 기분이 들었을 때 택시 기사에게 한 번만 더 확인했더라면, 혹은 길을 헷갈리지 않도록 어제 미리 장소를 확인했더라면. 아니, 차라리 조금만 더 일찍 나왔더라면......

끝도 없이 떠오르는 후회에 푹 빠졌던 연은, 이내 입 안의 살을 꾹 깨물었다. 예리한 고통과 함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은 자책할 때가 아니었다. 아까 세게 부딪힌 어깨도, 혹사당한 발도 욱신욱신 아팠지만 어리광을 피울 수는 없다. 유연은 제작사의 대표이다. 맡은 일이 있었고,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있었다. 그는 다시 전속력으로 달려, 급하게 택시를 잡아탔다. 나연이 벌어 준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면 서둘러야 했다.

그 다음은 무어라 기억할 것도 없이 정신없이 흘러갔다. 헐레벌떡 심사장에 도착한 연은 숨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발표를 시작해야 했다. 처음에는 조금 허둥거렸지만, 중간부터는 침착하게 발표를 이어갔다. 심사위원들의 조금은 못마땅한 듯한 무표정이 신경쓰였지만, 오랜 시간 준비해온 노력은 과연 연을 배신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는 일말의 만족감을 안고 그는 단상에서 내려왔다.

심사 결과는 일주일 뒤에 난다고 했다. 긴장이 풀리자 슬슬 아파 오기 시작한 어깨와 발목에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연은 나연을 돌아보았다.


"오늘 고생하셨어요, 안 팀장님. 그리고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말씀 못 드렸는데 오늘 늦어서 정말 죄송해요......."

"......그래요."


그러나 사과를 받는 나연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연은 이유를 깨닫기도 전에 긴장했다. 잠시 느꼈던 약간의 만족감도 금세 가시고, 팽팽하게 당겨진 현처럼 숨이 막혔다. 나연이 무언가 말하기 전에, 사과의 말을 더 집어넣어서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그러나 연은 그러지 않았고, 나연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유 대표, 언제까지나 학생 기분으로 있으면 곤란해."


평소의 나연과 별로 다르지 않은, 침착한 목소리였다. 그래서 더욱, 겁이 났다. 등줄기가 뻣뻣해지는 걸 느끼며 연은 순간 생각했다. 웃으며 넘겨 볼까? 하지만 그런 임시방편으로 모면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엄격하게 굳은 표정에서, 나연이 이 이야기를 오래 참아 왔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말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유 대표가 늘 열심이라는 거 알고 있어. 그래서 더 안타깝고, 이제는 화가 나네. 그렇게 애써놓고 늘 마지막에 사소한 실수로 망치잖아. 이게 도대체 몇 번째야. 고쳐야겠다는 생각은 안 들어?"


연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팽팽하게 당겨진 현이 팅, 하고 끊어져 나갔다. 서툰 연주자인 연은 현이 부족할 때엔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지 못했다. 아슬아슬 이어져오던 평정의 리듬은 금세 균형을 잃고 무너져내린다.


"오늘만 해도 그래. 딱 한 번만 더 확인했으면 늦을 일도, 발표 차례를 미룰 일도 없었겠지. 준비는 완벽했으니까 지각만 안 했어도 좋은 결과를 바랄 수 있었을 거야. 그런데 단지 그 실수 하나로 지금은, 심사를 해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게 됐네."


연의 머릿속에서 온갖 변명들이 기포처럼 떠올랐다. 아까 참아냈던 것보다 몇 배는 더 강렬한 욕구였다. 그것을 삼키자니 차가운 탄산 음료를 목구멍에 한번에 들이붓는 느낌이었다. 목 안이 긁히는 듯 쓰라리고 울컥 눈물이 났다. 그러나 여기서 울 수는 없었다. 아무리 부족하고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도 유연은 한 회사의 대표였고, 지금 나연은 연에게 사회인답게, 대표답게 굴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미 많이 실망시켰는데, 이 순간까지 모자란 모습을 보여선 안 되었다.

연은 억지로 어른스러운 미소를 만들어내었다. 성공했다는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 외엔 달리 어떤 표정을 지어야 좋을지 몰랐다. 최대한 태연한 목소리로, 담담하게 말했다.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나연 팀장님. 말씀해주신 부분 앞으로 주의할게요."


연의 최선이 나연의 눈에는 애처로운 의젓함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엄격하던 그 표정이 약간 누그러졌다. 연은 한 고비 넘겼다, 라는 생각에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순간, 스스로의 생각에 숨이 막혔다. 나연은 제 일 아니면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삭막한 사회에서 쓴소리를 해주는 몇 안 되는 어른이었다. 그런 사람이 해 준 충고를 친분과 정으로 잠깐 면피하고서 다행이라고 여기다니. 지적받은 실수를 고치고 보완할 생각은커녕 잠깐의 질책마저도 못 견뎌한다니. 이 어찌나,

안이하고.

한심한.


연은 속이 마구 요동하는 것을 느꼈다. 지진이 난 방에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난장판이었다.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으니 다음에는 잘 하면 된다고, 채찍 뒤 당근 모양으로 나연이 위로하는 소리도 연의 귀에는 잘 들어오지 않았다. 연 자신조차도 이 상태가 당황스러워 제어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평소에는 이 정도 일로 이렇게까지 무너지지 않는데, 어째서.

애써 괜찮은 척 하지만 잔뜩 어두워진 게 티가 나는 연의 얼굴을 보고 나연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다. 그런 표정을 보는 것조차도 견딜 수 없어, 연은 일단 이 상황을 회피하기로 했다. 이토록 마음이 무너진 상태로 회사로 돌아가 봤자 스트레스만 쌓여 더 큰일을 치를지도 몰랐다. 이 정도면 어른스러운 대처 아닐까? 하고 스스로를 설득해 보았지만 변명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스튜디오에 들렀다 가겠다는 연의 말에 나연은 미묘한 표정을 했다. 정말 들러야 해서가 아니라,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시간을 버는 것임을 간파한 모양이다. 그러나 별다른 말 없이 나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먼저 회사로 떠났다. 홀로 남겨진 연은 높은 빌딩 앞에 덩그러니 서서 어디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멈춰 서 있으면 안 된다는 초조함에 아무렇게나 걷기 시작했다. 마침 초록불이 들어왔기에 연은 그저 그리로 향했다. 생각을 하려 해도 자꾸만 뚝, 뚝, 끊겼다. 끝을 잇지 못하고 자꾸만 원점으로 돌아온다. 정신을 차려야 해. 왜? 나는 회사를 지켜야 하니까. 이 상태론 안 돼. 왜? 나는 대표니까.......

연을 움직이는 동력은 상당 부분 의무감이었다. 아버지가 남긴 것들을 제대로 지켜야만 한다는 사명감. 지켜야 할 것들이 있기에 절대 약해질 수 없다는 위기감. 그런 것들에 뒤쫓기듯 달려 지금까지 왔다. 대체로 잘 해왔고, 잘 버텼다. 이따금 쓰러지고 싶은 날이 있어도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그러니 이번에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연은 문득 멈춰섰다. 횡단보도 한가운데였다. 함께 길을 건너던 사람들은 전부 앞서 지나가 버리고, 혼자 덩그러니 남았다. 단단하게 빛나던 초록빛의 보행표시등도 멈춰선 이를 재촉하듯 깜박, 깜박 점멸하기 시작했다. 보행자의 이상을 발견한 운전자가 성마르게 경적을 몇 번 누른 후에야 그는 가까스로 도로 중간의 섬에 다다랐다. 기다렸다는 듯 연의 등 뒤로 차들이 무섭도록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그 찢어지는 바람에 밀려, 또 날카로운 경적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얼얼해서, 연은 그만 무릎의 힘을 풀고 말았다.

한번 모양이 무너지자, 그 다음부터는 겉잡을 수 없었다. 다리에 힘이 탁 풀리고, 끌어안고 있던 파일은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졌다. 눈은 메말랐어도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것은 명백히 울음이었다. 이를 악물어 억눌린 소리를 삼키며, 연은 무릎에 이마를 세게 박았다. 남들 다 보는 바깥에서 이러면 안 된다는 강박에 어깨에 바짝 힘이 들어갔지만, 도저히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다리에 힘이 돌아올 때까지만 이렇게 있자.......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는, 자신이 다시 일어설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 섬에 고립된 것이 자신 혼자라서 다행이라고, 연은 멍하니 생각했다. 앞뒤를 스쳐지나가는 운전자들은 적어도 그를 오래 쳐다보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나 물론, 유연은 혼자가 아니었다.


얼마나 오래 웅크리고 있었는지 연은 기억하지 못한다. 그저, 어느 순간 갑자기, 어떤 목소리가 그를 사로잡았다.


「빛을 거슬러 가도.......」


 그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목소리는 지극히 낯익은 것이었다. 연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그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찾았다. 그리고 눈 앞을 가득 메우는, 그 찬란한 금빛.



건물 한 면을 다 덮도록 크게 걸린 대형 스크린에서 주기락의 모습이 나타났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 아래, 강렬한 눈빛으로, 흔들림 없이 희망을 노래한다. 지치고 무너진 이를 위로하고 다시 일으켜 세우는 재생의 선율. 마치 어두운 방의 커튼이 단숨에 걷히고 한낮의 햇빛이 들이닥치듯, 거침없고 눈부신 장면이었다.


「언젠가 희망은 탄생하죠........」


순간, 화면 안의 그이와 눈이 마주쳤다. 바다를 닮아 반짝이는 푸른 눈이, 부드럽게 웃는다. 작은 태양이 연에게 마법을 걸었다. 단 두 마디의 노래와 한 번의 미소로 연을 북돋운다. 그 웃음을 보며 연은 땅을 힘주어 밟고 섰다. 배에 힘을 단단하게 넣고, 어깨를 쫙 폈다. 전신의 피가 혈관을 터뜨릴 듯 쌩쌩 돌고,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갔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고, 나는 반드시 해낼 거라고, 온 세상에다 대고 크게 소리지르고 싶었다.

연은 생각했다. 정말 신기한 일이야. 분명 아까까지는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어 주저앉아 있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온 몸에 기운이 넘쳐 흘렀다. 상황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어도, 마음이 바뀐 것 하나만으로 이렇게 강해질 수 있다.

견고한 마음이 한 순간에 무너질 때가 있다면,

무너진 마음이 단숨에 세워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연을 격려하듯, 신호등의 보행자등에 청신호가 들어왔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서 연은 발을 내디뎠다. 어둠 속에서 빛을 향해 걷듯,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힘찬 발걸음이었다. 그 걸음을 응원하듯, 화면 속의 남자는 계속해서 노래한다. 희망을, 빛을, 간절한 소망을.


그날 밤, 연은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가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 전화가 연결되고, 언제나처럼 해맑은 목소리가 그를 반긴다.


「허니칩 씨~ 내가 보고 싶어하는 줄은 어떻게 알고 딱 전화를 했어요?」

"기락 씨가 날 안 보고 싶어할 때도 있던가요?" 

「하하, 당신은 날 너무 잘 알아요!」


연은 잠깐 말을 멈추었다. 평소대로라면 함께 나눌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시간을 빈틈없이 꽉 채우겠다는 듯 쉴 새 없이 재잘거렸을 텐데, 휴대폰 너머의 그이 또한 가만히 숨소리만 들려주고 있었다. 언젠가, 숨소리만 듣고 있어도 좋다고 소곤거리며 이야기를 나누었던 때가 떠올랐다. 어쩌면 서로의 숨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고, 그런 치기어린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그리고 사실대로 말하자면, 연은 그럴 자신이 있었다. 기락도 그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무튼 그들은, 가장 잘 통하는 사이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망설임 없이 물었다.


"그래서 이번 "주기락 영상 유출" 건에 대해 해커 Key씨의 견해는 어때요?"


잠깐의 침묵, 그리고 과연 악명 높은 해커답게 낮고 의미심장한, 그러나 웃음기 섞인 대답이 돌아온다.


「이거 인터뷰인가요, 유연 기자님?」


연은 그에 장단을 맞추듯 짐짓 엄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프 더 레코드니까 편하게 말씀...하시...죠. 크흐흡......."


그러나 문장의 마지막에 가서는 이내 웃음이 터져버렸다. 아무래도 우리한테 괜히 무게 잡는 건 안 맞는다고, 그렇게 말하며 두 사람은 휴대폰을 사이에 두고 한참을 큭큭거렸다. 겨우 웃음을 잠재운 연이 물었다. 


"그래서 정말 어떻게 된 거예요? 지금 커뮤니티 난리 났잖아요, Key가 주기락 영상 유출했다고. Key가 알고보니 주기락 팬인 거 아니냐, 다음 타겟은 연예기획사 쪽이라고 경고하는 거 아니냐, 뭐 이런 억측들도 나돌고요. B.S. 엔터 쪽도 소란스럽지 않았어요?"

「그럼요, 난리도 아니었죠. 보안이 어떻게 된 거냐, 책임자가 누구냐, 하고 다들 패닉 상태였는데 제가 혼자 보려고 찍은 연습 영상이라서 저만 좀 혼나고 말았어요. 뭐, 다음 앨범 스포일러도 아니고 이미 발표한 곡이니까요. 원래는 좀 편집해서 SNS에 올리려던 건데, 생각해보니 건물 스크린에 틀어버리면 더 멋질 거 같더라구요!」


다음부터는 그런 거 찍으면 무조건 자기한테 말하라고 형한테 엄청 깨졌어요, 하며 멋쩍게 웃는 목소리. 갑자기 무언가 북받쳐 올라, 연은 숨을 훅, 들이켰다. 그 안에 섞인 울음기가 혹시라도 들릴까 봐, 잠시 휴대폰을 얼굴에서 멀리 떨어뜨렸다. 하지만 그런 보람도 없이, 기락은 이미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조잘거리던 목소리가 뚝 끊기고, 허니칩 씨? 여보세요? 하고 걱정스레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으니까. 연은 목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목소리가 약간 잠긴 것은 어쩌지 못했지만,


"거짓말, 그거 라이브였잖아요."


대답은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다소 당황한 듯한 침묵이었다. 연은 괜히 입술을 비죽거렸다. 내가 모를 줄 알았나. 이윽고,


「......하하, 역시 당신은 나를 너무 잘 안다니까요.」


한숨처럼, 기락은 제 범행을 시인했다.


-


기락은 제가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의 굴곡진 인생사를 보면 아이러니하기 그지없으나, 기락은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었다. 고아라서 실험체가 되었으나, 그 덕에 그의 빛을 만났다. 각성한 EVOL의 특수성 때문에 스스로의 가치에 대해 확신하기 어렵지만, 그 덕에 그의 태양을 만날 수 있는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이런 것을 악운이라고 하나? 아니면 전화위복? 어찌되었든, 아무리 상황이 나빠져도 기락은 스스로의 능력을 의심할지언정 제 운수를 탓한 적은 없었다. 그에겐 평생을 좇아 따라갈 빛이 있었고, 또-

무심코 내려다 본 도로 한 가운데에, 작은 점처럼 동그랗게 웅크린 그 모양을 보고 그는 찡그리듯 웃었다. 이렇게 내가 필요한 순간의 너를, 필연적으로 발견하다니.

그거 봐. 나는 늘, 운이 좋다니까.


기락은 높은 곳에 있었다. 머리가 복잡하고 마음이 답답해 기분 전환이라도 해 보고자 옥상으로 올라온 참이었다. 새벽이라도 되었으면 아무도 없는 밤거리를 아무렇게나 쏘다니며 머리를 비워 보려 했겠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한낮이었다. 올라온 보람도 없이, 삭막한 옥상은 답답하기만 했다. 난간에 팔꿈치를 대고 기대어서 기락은 한숨을 푹 쉬었다.

새로운 앨범 준비는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었지만 그는 좀처럼 만족하지 못했다. 뭔가 부족해, 뭔가가..... 그렇게 연신 중얼거리는 기락을 보며 매니저는 걱정스럽게 미간을 찌푸리더니, 드물게 며칠 휴가를 주었다. 저번에 컨디션이 무너져 있던 기락을 위한다고 독단으로 연을 불렀다가 기락에게 한 소리 들은 이후로, 매니저는 '이럴 때'는 그냥 내버려 두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언뜻 보면 체념이나, 매니저가 다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현명한 결정이었다.

기락은 그 염려스러운 방임을 감사히 받았다. 정말은 휴가가 아니라 햇빛이 필요했지만, 기락에게 그의 일이 있듯 연에게도 그이의 일이 있었다. 중요한 심사가 있어서 온 회사가 거기 매달리고 있다고,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그 목소리를 그는 떠올렸다. 조금은 피로하지만, 의욕이 넘치던 목소리. 그래서 기락은 어리광부리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아 넘겼다. 가뜩이나 진 것이 많은 사람인데, 저까지 부담을 줄 수는 없다. 게다가 힘을 내고 있는 연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꽤 기운을 낼 수 있었다. 주기락의 동력은 언제나 유연이었으니까.

그러므로 그는 연이 어디에 있든 바로 발견할 수 있다. 저만치 멀리 웅크려, 동그란 점처럼 보일지라도 주기락은 유연을 알아본다. 그리고 또한, '이럴 때' 자신이 연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날듯이 아래로 뛰어내려가, 주저앉은 연을 일으켜 세우고 꼭 안아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 기락은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스스로를 만류하듯 난간을 꽉 쥐었다. 그가 내려가는 사이에 연이 어디론가 가버릴지도 모르고, 무엇보다도- 보이고 싶지 않을 테니까.

두 사람은 어떤 면에서 너무 닮아서, 기락은 연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슬프게도. 같은 아픔을 공유하고, 비슷한 나이에 세상에 던져져 모진 풍파를 견딘 아이들만이 갖는 유대. 그 담담하고, 조금은 무겁고, 가벼운 웃음으로 덜어 보려 해도 이내 고개를 숙이게 되는, 순간들. 다 떨쳐냈다고, 이제는 괜찮다고 씩씩하게 말하지만 그는 알고 있다. 그 아픔을 관통하는 시기에는 정말로 어쩔 줄을 모른다는 걸. 잘 해내보려 발버둥을 치지만 어떤 것에도 확신이 없다는 걸.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다가도, 스스로를 내보이고 싶지 않아 결국은 숨고 만다는 걸.

그이가 원하지 않는 위로를 감히 줄 수 있을 리 없다. 그러나, 내버려둘 수도 없다. 혼자 버티는 기억은 마음 속 깊은 곳에 남아, 언제고 불쑥불쑥 떠오르게 마련이다. 그는 정말이지, 연에게 그런 경험이 느는 것을 원치 않았다.

기락의 머리가 바쁘게 돌았다. 어떡하면 지금 당장, 가장 효과적으로, 그의 허니칩에게 힘을 줄 수 있을까. 문득 그의 시선이 맞은편의 전광판에 닿았다. 고층 건물에 매달린 그 화면에서는 영상 광고가 재생되고 있었다. 도시의 소음에 반쯤 묻혔지만, 스피커에서 소리도 나오고 있다. 그는 생각했다. 연이 떠나 버리기 전까지 해낼 수 있을까? 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기락은 서둘러 늘 가지고 다니는 작은 노트북을 꺼냈다. 그에게는 간단하다면 간단한 작업이었지만,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했다. 기락의 손가락이 어느 때보다도 바쁘게 키보드 위를 날았다. 혹시라도 신호가 바뀌어 연이 그대로 떠나 버릴까 봐 연신 횡단보도 쪽을 곁눈질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연은 몸을 웅크린 채 미동도 않고 있었다.

그는 재빠르게 제 휴대폰 카메라와 광고판을 연결했다. 잘 나오던 광고 영상이 뚝 끊겼다. 시설 담당자들 엄청 깨지겠지.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기락은 멈추지 않았다. 해커 KEY의 소행이라는 서명을 남겨두면, 그나마 좀 나을 것이다. KEY란 천재지변 같아서, 절대 막아낼 수 없다는 인식이 있으니까. 스승의 명성과 기락 본인이 1년 간 이루어낸 성과를 더해서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위치에 오르기를 잘 했다. 추후에 따로 적절한 배상은 해야겠지만....... 복잡한 머릿속을 애써 비우며 그는 휴대폰을 적절한 위치에 세팅했다. 지금 그가 신경써야 하는 이는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긴장한 채로 바쁘게 손을 놀리느라 땀투성이가 된 얼굴을 최대한 말끔하게 가다듬고, 옷차림도 정돈했다. 헛기침을 해서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카메라의 타이머 기능을 맞추었다. 카운트다운,

5초.

무슨 곡을 부르지?

4초.

허니칩이 좋다고 해줬던 노래가 너무 많아.

3초.

발렌타인 데이 때 선물로 줬던 곡은 둘만의 것이니까, 외부엔 노출시키지 않을래.

2초.

그렇다면 역시,

1초.

그 노래밖에 없어.


녹화가 시작되었고, 동시에 기락의 모습이 건물 한 면을 가득 채웠다. 무반주인 것은 주기락에게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마음을 다해, 아름답게, 기락은 노래를 불렀다.

힘내, 허니칩 씨. 힘내.

지금의 고통도 눈 앞의 어둠도, 언젠가는 반드시 희망으로 태어날 거야.


몇 소절을 마치고, 적절한 순간에 기락은 연결을 끊었다. 오래 끌면 아무리 KEY라도 추적당할 테고, 그걸 따돌리는 번거로운 일은 웬만하면 피하고 싶었다. 후처리 작업을 하느라 손가락을 놀리면서도, 기락은 얼른 난간 쪽을 보았다. 그의 허니칩은 이 노래를 들었을까? 듣고...... 기운을 차려 줄까? 아니면 혹시라도, 더 우울하게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닐까. 불안과 기대로 가슴이 지끈거렸다.

그리고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두 다리로 힘있게 당당히 선 멋진 뒷모습이었다.

하하. 그는 그만 소리내어 웃었다. 입꼬리가 끝도 없이 올라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고, 막을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그래, 이래야 우리 허니칩이지. 나의 유연이지. 어떤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는, 언제나 빛을 발하는 사람, 당신.

멀어져가는 그 기운찬 뒷모습을 내려다보며, 기락은 생각했다. 역시, 그는 운이 좋았다. 설령 함께 있어줄 수가 없어도, 연이 그의 노래를 재생하기만 하면 언제든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까. 목소리로나마, 그이의 힘이 되어줄 수 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하고서, 기락은 눈을 크게 떴다. 어떤 사랑 노래의 영감이 불쑥, 그의 뇌리에 스친 탓이다. 넣고 싶은 가사도, 붙이고 싶은 멜로디도 자꾸 떠올라서, 당장이라도 곡을 완성하고 싶어 심장이 쿵쿵 뛰고 좀이 쑤셨다. 아, 정말이지! 기쁨과 희열로 잔뜩 달아오른 낯을 양 손으로 감싸쥐며 기락은 생각했다. 역시, 내 허니칩 씨는 최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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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고요. 그러니까 허니칩 씨는 길을 잃은 내 앨범을 구해준 영웅이에요!"

「기락씨야말로 나를 구해줬는걸요. 그럼 우리 서로를 구해준 건가요?」

"하하, 그렇게 되네요? 아, 그러고보니 정말로 어떻게 안 거예요? 그게 라이브인 거."

「음, 사실...... 넘겨짚은 거예요. 라이브인지 아닌지 확신은 없었어요.」

"그래도 무슨 근거가 있었을 것 같은데요?"

「......듣고 비웃으면 안 돼요? 그냥, 눈이 마주친 것 같아서요. 불특정다수의 대중이 아니라, 나 하나만을 위해 들려주는 노래처럼...... 그래서 깨달았어요. 지금 나를 위해 기락 씨가 불러 주고 있구나, 하고.」

"......아, 안 되겠다. 나 지금 갈게요."

「응? 네? 지금요?」

"응, 지금! 예전에도 말했죠? 앞으로 몇 시의 도시든, 유연 곁에는 주기락이 함께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다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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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10월부터 쓰다 만 글이엇읍니다... .진짜 오래묵엇다... 

제가 묘사를.... 그냥 진짜 못해서요 지금 다 포기하고 내용만 갈겨썻어요 퇴고도 없음 그냥 간다

아이돌에 해커면 당연히 전광판 정도는 해킹해서 자기 영상 틀고 그래야 하는거 아니갯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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