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호가 가져온 종현이의 스케쥴은 그야말로 무에 가까웠다. 드라마가 끝나고 딱히 화보도 인터뷰도 없어 집밖에 나오질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의뢰인이 주었던 3개월은 종현에게도 휴가기간에 가까워 그동안 특별하게 잡혀있는 스케쥴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일의 난이도가 높았다.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 피사체를 집 밖으로 끌어내는 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종현이 사는 집에 비싼 동네에 맞게 비싼 경비업체와 계약이 되어있어 몰래 숨어들지도 못했다. 어차피 난 몰래 숨어드는 일을 하지 못했다. 할수 있는 일이라고 집근처에서 잠복하다 종현이가 나오면 몰래 따라 붙는 정도였다. 처음엔 길다고 생각했던 3개월이 무척이나 짧고 어쩌면 의뢰를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동호에게 의뢰 내용을 정확하게 알려주고 잠시 혼이났다. 약점이라는 말의 모호함이 문제였다. 그쪽에서 바라는 약점이 어떤 것인지도 모른채 냉큼 받아들인게 문제였다. 쉽게는 신호위반같은 경범죄부터 음주운전 혹은 마약같은 중범죄나 연예인이니까 여자관계 혹은 갑질등이 약점이 될수도 있지만 의뢰인이 그것 말고 더 심각한 것이라고 외치는 순간 난 의뢰를 이행하지 못한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까지 생각해보지 않아 난 동호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어쩌지? 하고 멍청하게 되물을 뿐이었다. 의뢰인과 통화를 할수 있는 것은 일주일에 한번. 혹시나 싶어 걸려왔던 번호로 전화를 해봤지만 전화가 꺼져있다는 음성만이 들렸다. 동호는 일단 일주일 뒤에 통화하면서 다시 조정해보라고 말했다. 난 정말 동호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었다. 


사전 답사차 차를 몰고 종현이 살고 있는 동네를 가보았다. 차를 주차하고 15분 만에 경찰이 왔다. 주정차 금지구역이고, 동네사람들만 주차가 가능하고 등등의 말을 하면 차를 빼라고 했다. 난 선하고 다정하게 웃으며 죄송하다고 말하고 차를 뺐다. 나의 얼굴은 고생했던 시절이 전혀 없는 것처럼 잘 생겼다고 동호가 말한적이 있다. 곤란한 상황에선 선하게 웃으며 말하면 아무도 머라고하지 않을거라고. 동호가 가르쳐준 다정한 미소는 과연 동호의 말대로 프리패스 같았고 그 누구도 내가 흔히 말하는 좋지않는 부류의 사람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가끔은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방금 그 여경처럼. 

차로 잠복하는 건 무리라는 걸 깨닳고는 주변을 그냥 걸어다녀보기로 했다. 하지만 비싼 동네엔 CCTV가 참 많았고, 그 동네에 살지 않는 내가 그저 배회하는 것은 누가봐도 눈에 띄는 일이었다. 주택가만 줄지어져있는 이 곳은 돌아다니는 사람도 없었다. 결국 난 점심 먹을때쯤 길아래 편의점에서 라면을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편의점 직원조차 못보던 사람이네요 하고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종현이 나오지 않는 이상 이 의뢰는 성공하기 어려웠다. 종현이 살고있는 이 동네 전체가 내가 고등학생때 들어가지 못했던 아파트 단지 같았다. 거대한, 너를 지키는, 너의 성.


동호가 겨우 종현의 집이 각도에 맞는 오피스텔 건물 옥상을 찾아냈다. 대포라고 흔히 불리는 원거리 렌즈를 통해 종현의 집이 보였다. 커다란 유리를 통해 종현이 슬쩍 움직는 것도 보였다. 종현이는 거의 대부분은 전면창이 있는 거실에서 커다란 스툴형 쇼파에 살짝 누운채로 TV를 보거나 책을 읽거나 게임을 하며 보냈다. 창을 통해 내려쬐는 햇빛이 뜨거울만도 한데 커튼은 치지 않았다. 집엔 특별히 드나드는 사람이 없었고, 종현이 혼자 있었다. 가끔 매니저 같은 사람이 서류를 가져다 주거나 했고 식사 시간때나 쇼파에서 사라졌다. 종현이가 쇼파 위에서 사라지면 나도 그제야 빵이나 라면, 김밥 등으로 허기를 채우고 30분쯤 뒤에 종현이 다시 쇼파 위에 나타나면 난 다시 뷰파인더에서 눈을 때지 않았다. 

일주일이 흘렀다. 난 그동안 찍은 사진을 예의 번호로 보냈고, 의뢰인이 전화를 걸어왔다. 여전히 변조된 목소리였다.


-이런 것 밖에 없나요?

"밖에 안나오네요. 이것도 겨우 찍은 거예요. 아, 그리고 약점은 어떤걸 말씀하시는 건지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약점이 별다를게 있나요. 그냥 약점이예요. 내가 쥐고 흔들수 있는. 일단 밖에 나올수 있는 스케쥴을 만들어 보죠. 그럼.


전화는 또 일방적으로 끊겼다. 같이 듣던 동호가 한숨을 쉬었다. 이 사람 진짜 말 애매하게 한다며 짜증도 냈다. 


"어떻게, 이제라도 파기 할까? 이래가지고는 답이 안나오겠는데?"

"위약금은?"

"너 착수금 500밖에 안받았잖아. 한 천 쯤 주면 되지 않을까? 이쪽도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니까. 제대로 의뢰내용에 대해 말도 안해주고."

"괜찮아, 일단 해볼게."


동호는 내 말에 고개를 잠시 갸웃하더니 그래, 니 뜻이 그렇다면 하고는 뒷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무래도 맘에들지 않는 듯한 태도였다. 지금이라도 내가 포기하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기억 저편에 묻어둔 종현이 뷰파인더 나마 현실성있게 보이자 난 다시 고등학생이 되었다. 종현의 뒤를 따르던. 그때는 어렸고, 그런 감정따위 알지 못했었지만 지금의 난 알고있다. 종현은 나의 첫사랑있었다. 이제와서 다시 사랑하진 않겠지만 첫사랑은 어딘가 아련하고 다시 보고 싶으며, 놓칠수 없는 무언가로 대변할수 있었고 나 역시 그랬다. 난 종현이 보고싶었다. 내 것이 되지 않더라도 내 입술 위에 닿았던 종현의 체온을 입술을 기억했다. 열려버린 상자는 닫히지 않았고 어쩌면 끝을 보고 싶기도 했다. 의뢰인이 가질수 있는 약점은 나에게도 그렇다. 나는 여전히 종현을 더럽히고 싶었다. 다른 누군가의 손이 아닌 내 손으로.


의뢰인이 전화상에 말했던 외부 출입의 스케쥴이 잡혔다. 갑작스럽게 인터뷰가 생겼다. 사진도 찍는 인터뷰라 그런지 종현은 새벽부터 일어나 움직였다. 새벽에 일어나 저를 닮은 하얗고 비싼 외제차를 타고 집을 나섰다. 난 그 모습을 찍고 종현을 차를 따라 내 차도 움직였다. 사진을 위해 메이크업하는 모습이며 인터뷰 장소로 향하는 모습을 찍으면서 난 고등학교때 종현을 찍어두지 못한 걸 아쉬워했다. 그때의 난 미숙했고 그때의 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지 못했고 언젠가 너를 찍을 날이 올거라고 믿었다. 이런 식으로 찍게 될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인터뷰 장소는 예쁘게 꾸며진 카페였다. 밝은 햇빛 속에서 종현이는 환하게 웃으며 인터뷰에 응했고 종현의 앞에 앉은 기자는 붉어진 얼굴을 가릴 생각도 없어보였다. 분명히 평소보다 반톤정도 높을 목소리로 종현에게 묻고, 종현은 듣기좋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간간이 소리내어 웃기도 했고, 가끔은 곤란한 질문인지 난처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매너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난 카페의 손님인척 커피를 시키고 그 모습을 보았다. 핸드폰을 보는 척하며 사진 찍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인터뷰가 끝나고 기자와 악수를 하고 사진을 몇장 찍고 종현은 밖으로 나가야 했다. 그럼 나도 따라 나갔다가 종현의 차를 뒤쫓아야 했다. 종현이 내 쪽으로 다가오는 건 예상에 없던 일이었다. 예상에 없는 일은 현실감도 없었다. 얼굴이 들키지 않게 고개를 돌려야 하지만 돌리지 못했다. 시선은 정확하게 종현의 얼굴에 향했고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눈앞이 어두워졌다. 머리위에 조금 작은 듯한 모자가 씌어졌다. 눈만 살짝 돌려 확인하니 동호였다. 어디서부터 뛰었는지 살짝 헉헉거리고 있었다. 내앞에 자리 잡고 앉더니 물컵에 든 물을 묻지도 않고 들이켰다.


"괜찮아?"

"쉿, 아직 니 뒤에 있어."

"아."


종현은 내 뒤에 있는 계산대에서 싸인을 해주고 커피를 하나 테이크아웃해서 나갔다. 그제야 난 내 뒤에 계산대가 있음을 기억해냈다. 종현은 내가 아닌 계산대로 간거 였다. 종현이 날 알아볼리 없다. 기억할리 없다. 그렇게 오래전, 그것도 같이 졸업도 하지 않은 양아치인 나를 종현이 머리 속에 남겨둘리 없었다. 알고있었지만 서운했다. 나는 이렇게 오롯이 널 기억하고 있는데 너와 함께 했던 모든 밤을 기억하는데 너는 그날 밤 처럼 날 버렸구나. 그 날의 운전은 집에 올때까지 동호가 했다. 난 그저 습관처럼 종현일 찍었다. 종현인 나온김에 모든 볼일을 다 볼 예정인지 집으로 가지 않고 옷가게를 들리고 악세사리 점을 들리고 마트를 들렸다. 해가 뜰때쯤 시작한 외출은 해가 지고나서야 끝이났고 집에가서도 짐을 정리하는 것인지 언제나 나른하게 앉아있던 쇼파 앞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집안의 불이 다 꺼지고 나서야 내 일이 끝났다. 

동호는 여전히 차안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동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난 집에 도착하자마자 찍은 사진을 컴퓨터 옮기고 잘 보이지 않는 사진을 보정했다. 동호는 쇼파에 앉아 맥주 한캔을 마시며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렸다. 단 한번도 불편하다 생각해본적 없던 동호와의 밤이 불편했다. 동호는 마치 무너진 내 감정을 알고있는 것 같았다. 아니 알지 못할 것이다. 그저 동호는 평소와 같았고 나만 달랐다. 


"아까 어떻게 왔어?"

"응?"

"아까 카페. 어떻게 온거야?"

"아, 마침 지나가는 길이 었어. 근데 너가 위기의 순간인 거 같아서 내가 쨘 하고 등장했지. 멋있지 않았어?"

"그래?"

"그럼. 넌 이 일 하루이틀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정면으로 보고 있으면 어쩌냐. 너도 반했어? 내가 그렇게 잘생겼다고 말하는 내내 무덤덤하더니 실물을 보니 달라? 하긴 내가 봐도 잘생기긴 했더라. 얼굴도 작고 피부도 좋고 목소리도 좋고 매너는 왜 그렇게 좋아. 원래 그런데 카페에서 일일이 다 싸인 해주고 사진 찍어주고 하는거야? 하마터면 나도 가서 해달라고 할뻔 했잖아."


동호가 TV에서 시선을 때지 않고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내가 고개를 돌리지 못하는 동안 내 뒤에서 너는 그랬었구나. 너는 예의바르고 매너좋은 아이였어. 그 예의와 매너를 내가 내마음대로 휘둘렀을 뿐. 종현인 그때도 지금도 굳이 분류하자면 좋은 사람이었고 난 그때도 지금도 나쁜 사람이다. 난 널 좀먹고 널 망가트릴거다. 그때도 지금도.

화면 가득히 종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아닌 누군게에 웃어주고 있었다. 더이상 볼수 없었다. PC를 끄고 방으로 들어갔다. 동호는 나에게 묻지 않았다. 난 그냥 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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