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화 보기★


#33

 

 

독수리와 하얀 새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로랑은 침을 꿀꺽 삼키며 생각에 잠겼다. 오목눈이이가 홍차를 홀짝이는 소리가 들렸다.

 

“천…천천히 설명해 주십시오. 첫 번째로, ‘이야기의 흐름’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로랑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오목눈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올곧은 눈빛 대신에 독수리의 눈길은 갈 곳을 잃은 듯 방황하고 있었다. 로랑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로마노프에 의해 발견되어 적어도 오 년은 우주 통합 관리국에서 일했을 터인데 여전히 모르는 일들이 수두룩했다. 

나는 혹은 우리는 우주 통합 조직을 위해 왜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것인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톱니바퀴처럼 굴러가고 있는가. 

우리의 궤적은 실재하는 것인가.

로랑은 대략 오 년 전 로마노프에게 발견되던 날을 떠올렸다. 로마노프의 얼굴은, 그의 표정은, 그의 모습은 어땠던가.

오목눈이가 대답했다.

 

“너무 많은 것을 알려고 하지 마십시오, 로랑 소령.”

 

그 말을 잠자코 듣던 로랑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저는 알아야만 합니다.”

“로랑.”

“저는…저는, 우주 통합 조직의 톱니바퀴일 뿐입니다. 그건 저도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뼈아픈 진실이죠. 하지만 알고 싶습니다. 

현재, 우주는 멸망을 향해 아주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그 일에 가담하는 조직에서 일하고 있고요. 세상이 사라지는데 아무 말도 못 하고 죽을 수는 없습니다. 상관님. 알려주십시오.”

 

파르르 떨리던 로랑의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홍차를 죽 들이켜던 오목눈이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로랑에게 대답했다.

 

“며칠 전 열렸던 의회에서 레빈 대령님께서 플로라에게 이렇게 질문하셨지. 우주가 끝나면 그다음은 어떻게 되느냐고. 그렇다면 그대 생각에는 세상이 끝나면 그 후에는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우주가 끝나면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말 그대로 모든 행성이 사라지고 파괴되고, 생명이 사라진다면 말입니다. 물론, 은하도 성운도 우주도 그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면.”

 

로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생명의 죽음, 우주의 소멸, 모든 이야기의 끝. 로랑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상념과 단어가 뒤죽박죽 뒤엉키기 시작했다. 

로랑은 즉각 대답하지 못하고 두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오목눈이는 한숨을 크게 내쉬고서 로랑에게 힌트를 건넸다.

 

“그대는 책을 자주 읽습니까?”

“예. 예? 책 말입니까?”

 

대화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는 소재가 등장했기에, 로랑은 조금 당황한 듯했다. 오목눈이가 씩 웃었다.

 

“책을 생각해 보십시오. 한 권의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 하나의 세계가 시작되는 것이죠. 반대로 말하면, 그 작은 세계는 책을 끝까지 읽었을 때 비로소 끝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세계의 시작과 끝을 소설에 비유한 것이로군. 로랑은 생각하며 오목눈이가 질문했던 내용을 다시금 떠올렸다. 

세계의 시작과 끝. 그렇다면, 그 후에는…

 

“혹시, 우주가 모두 소멸하면 또 다른 우주가 시작되는 것입니까?”

 

로랑이 대답하자 오목눈이가 껄껄 웃었다. 하얗고 작은 새가 재밌다는 듯 너털웃음을 지었다.

 

“몸집만 크고 영 어리숙한 줄로만 알았더니, 그대도 꽤 쓸 만하군요. 그렇습니다. 아홉 개의 행성이 사라지고 생명을 품었던 거대하고 아득한 우주가 사라지면 또 다른 우주가 시작되겠지요. 즉, 하나의 이야기가 끝나면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말입니다. 

로랑 소령.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레빈 대령님과 총대장님은 ‘이야기의 흐름’ 즉, 우주 멸망으로 가고 있는 작금의 실정을 깨부수려 하십니다. 신이 계획한 ‘세상의 멸망’에 반발하려는 것이죠. 이렇게 말하면, ‘이야기의 흐름’이 무엇인지 이해가 갑니까?”

“조금은요.”

“생각보다는 똑똑하군요. 나는 레빈 대령님과 총대장님의 계획에 동참하기로 했습니다. 물론, 총대장님과 레빈 대령님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분들이지만, 나는 그들의 생각에 동감합니다. 

나는 우주의 멸망을 바라지 않습니다. 신의 계획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신이 가장 사랑하는 검은 도토리와 도토리의 보물인 하얀 다람쥐를 죽이려는 것입니다.”

 

말을 마친 오목눈이는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그 일을 위해 ‘우주의 질서’가 필요합니다. 그대도 알고 있다시피 우주의 질서는 생명만 걸면 모든 소원이든 이루어 주는 신비로운 보물이지요. 물론, 그에 타당한 대가를 걸어야 하겠지만 말이야.”

“그렇다면…. 그렇다면…”

 

로랑은 머리를 굴렸다. 검은 도토리와 하얀 다람쥐의 죽음, 우주의 질서, 이야기의 흐름의 파괴. 오목눈이가 싱긋 웃었다. 작은 생명체였지만, 그 웃음에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우주의 질서에게 소원을 빌 것입니다. 검은 도토리와 하얀 다람쥐를 죽이게 해 달라는 소원을.”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로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무리 그래도 검은 도토리와 하얀 다람쥐에게는 잘못이 없었다. 우주의 멸망에 대한 책임이 그 둘에게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럴 바엔 ‘우주가 멸망하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우주의 질서에게 소원을 비는 게 차라리 나을 터였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지. 로랑은 생각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오목눈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총총총 걸어 문 앞까지 갔다. 

그 앞에 선 작은 생명체가 뒤를 돌아, 마지막으로 로랑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럼, 다음에 또 봅시다, 로랑 소령.”

“저는 당신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로랑의 얼굴이 진지했다. 오목눈이는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로랑이 목소리를 높였다.

 

“다른…, 다른 방법이 있을 겁니다. 검은 도토리와 하얀 다람쥐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저 또한 그 둘을 잘 아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그건 너무합니다. 그것 말고 다른 방안이 있을 것입니다.”

“그대에게 선택권은 없습니다.”

“상관님.”

“그대는 그대에게도 세상의 이치에 대해 알 권리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었지. 로랑 소령. 혹여 그대가 세상 모든 이치를 깨닫는다 해도 그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는, 저는 로마노프와 함께 하겠습니다. 사람들을 모으겠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한때 저를 사랑해주었던 레빈과 함께하지 못한다 해도,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습니다. 송구합니다.”


오목눈이는 대답이 없었다. 그가 문을 열고 집무실을 나섰다. 또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로랑은 창곁에 서서 한동안 머리를 감싸 안고 있었다.

 

...

 

“다람 씨가 일어나질 않네.”

 

도리는 손바닥에 하얀 다람쥐를 올려 두고서 그 귀여운 생물을 관찰하는 중이었다. 도토리 모습일 때도, 사람 형상일 때도 다람은 늘 도리보다 훨씬 컸으나, 지금은 반대였다. 하얗고 보송보송한 귀여운 다람쥐는 도리의 한 손에 잡힐 정도로 작았다. 

그래서 평소에 느꼈던 포식자로부터의 위협을 느낄 수 없었다. 심장이 울렁이고 두렵고 오들오들 떨리지만, 한편으로는 오소소 소름이 돋아 기분 좋은, 그 정도의 감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하얀 다람쥐는 작았다. 작고 귀여웠다. 귀엽고 앙증맞고 예뻤다. 새하얀 털은 물감을 칠하지 않은 새 도화지처럼 깨끗했다. 

도리는 다람쥐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다람은 귀여운 숨을 내쉬고 있었다.

 

“먹을 것은 부족하지 않나요?”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 도리는 뒤를 돌았다. 열려 있는 문으로 들어온 중년 남성은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도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를 표했다.

 

“괜찮아요. 묵을 수 있게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아닙니다. 이 정도의 호의는 보여야죠. 저희 가문에 대대로 전해지는 인심입니다.”

 

바닷가를 죽 둘러 걷던 도리는 하룻밤 묵을 민박집을 찾았다. 바지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휴대폰과 지갑은 바닷물에 폭 젖어 도저히 사용할 수가 없었다. 스마트폰은 도통 켜지지가 않았고, 지갑 속 지폐들은 눅눅하게 젖어 당장은 쓸 수가 없었다. 

다행히 그 근방에 자리잡은 민박집에서 묵을 수 있게 되었다. 민박집 주인은 중년 남성 혼자였는데 평온한 말씨와 인상으로 보아하니 얼추 믿을 만한 사람인 듯했다. 

도리는 가죽 지갑을 열어 십만원 권 몇 장을 보여주었다. 남성은 하룻밤만 묵는 거라면 돈을 내지 않아도 괜찮다며 도리와 하얀 다람쥐를 집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도리는 이층 손님방으로 올라갔다. 나무 바닥이 매끈했고, 퀴퀴한 냄새는 나지 않았다.

 

“그럼, 편안한 저녁 보내십시오. 아, 다람쥐 똥은 잘 치우셔야 하고요.”

 

남성이 문을 닫고 조용히 나가자 도리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다람 씨는 아무 데나 똥을 싸는 다람쥐가 아니란 말이에요. 그렇게 속으로만 소리쳤다.

 

“다람 씨. 일어나 봐요. 나, 다람 씨랑 껴안고 있고 싶어요.”

 

도리는 다람쥐와 함께 침대에 누웠다. 이불 속은 포근했고 아늑했다. 옆에 누운 하얀 다람쥐의 꼬리를 꾹꾹 누르며 도리는 다람쥐에게 속삭였다.

 

“다람 씨의 넓은 품에 폭 안기고 싶단 말이에요. 다람 씨가 따뜻한 품으로 날 안아주면 좋겠어요. 다람 씨랑 키스도 하고 싶고, 살갗도 맞대고 싶고, 그리고…… 여기저기 기분 좋게도 하고 싶어요. 다람 씨. 일어나 봐요. 응?”

 

도리의 귀여운 목소리가 다람쥐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다람쥐는 조용했다. 여전히 아무 대답이 없었다. 

도리는 또 한 번 입술을 삐죽였다.

 

“무슨 꿈을 꾸길래 그렇게 깊이 잠에 빠진 거예요? 나랑 기분 좋은 거 하는 꿈?”

 

도리는 하얀 다람쥐를 품에 꼭 껴안았다. 자다가 다람 씨를 몸으로 눌러버리면 안 되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다람과 포옹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아서 어쩔 수 없었다. 

혹시 내가 잠결에 당신을 눌러도 알아서 잘 피해야 해요. 도리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전등을 껐다. 환하게 방 안을 밝히던 불빛이 사라지자, 그는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

 

그날, 펭귄과 토끼는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잠에 빠져들었다. 새끼 황제펭귄의 꿈에 눈처럼 새하얀 아기 토끼가 고개를 내밀었다. 아기 토끼는 펭귄의 날갯죽지를 꼭 잡으며 동산 위로 올라가자고 말했다. 펭귄은 눈을 들어 토끼가 가리킨 푸르른 동산을 올려다보았다. 연둣빛으로 빛나는 동산에는 수많은 토끼와 펭귄들이 즐겁게 뛰놀고 있었다. 먹을 것이 풍부했고 따뜻하고 평화로웠다. 아이들은 즐거워했다.

토끼는 펭귄에게 속삭였다.

 

“나랑 같이 동산 위로 올라가자. 함께 놀자. 즐거울 거야. 저 아이들을 봐. 정말로 행복해 보이지 않아?”

 

토끼를 따라 뒤뚱거리며 발걸음을 옮기던 펭귄은 동산 아래에서 우뚝 멈춰 섰다. 토끼가 펭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펭귄의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괜찮아. 나랑 함께잖아. 우리가 함께라면 힘든 일이 있더라도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거야.”

 

토끼가 펭귄을 위로했다. 토끼의 얼굴은 무척이나 아름다웠지만, 펭귄은 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난 두려워. 무서워. 나는 널 사랑하지만, 그만큼 네가 두려워. 잘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래서 두려워.”

“펭귄아.”

 

토끼가 펭귄의 배 아래에 얼굴을 묻고서 보들보들한 털을 솔솔 쓰다듬었다. 펭귄의 아랫배가 볼록했다. 토끼의 따스함이 펭귄의 피부에 전해졌다. 펭귄은 날개를 뻗어 토끼를 안았다. 토끼가 펭귄에게 말했다.

 

“좋아해. 좋아해, 슈.”

 

...

 

“슈.”

 

암막 커튼 때문일까. 방 안에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잠에서 깨어나 눈꺼풀을 올렸으나, 불빛 하나 없이 어두컴컴한 까닭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부르며 상체를 일으켜 침대 위에 앉았다. 검은 머리의 남성은 그의 옆에서 평온한 얼굴로 잠에 빠진 애인을 응시했다. 

이불을 살짝 들춰 보니, 테오 자신도, 슈도 벌거벗은 상태였다. 슈의 목덜미에 자신의 키스 자국이 남아 있었고, 그 옆에는 그날 보았던 붉은 상처 자국이 있었다. 

테오는 슈의 목덜미를 살살 어루만지다가 상처에 입술을 대었다. 조심히 그 붉은 것을 빨아 먹으니 상처가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다.

 

“으응…”

“일어났어, 슈? 더 자요, 형아가 조금 이따 깨워줄게요.”

 

베개 깊숙이 얼굴을 묻은 슈가 몸을 움직이자 남색 머리카락이 살며시 흔들렸다. 테오는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어 앉아 슈의 몸을 껴안았다. 슈의 따뜻한 숨결이 테오의 목덜미에 닿았다. 

슈는 잠이 달아나지 않아 여전히 피곤한지, 앓는 소리를 삼키며 눈을 스르르 떴다.

 

“슈. 키스할까?”

 

슈의 귓가에 달콤한 말을 속삭였다. 손을 뻗어 슈의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슈는 테오의 부드러운 손길이 간지러운지 잠결에도 까르르 웃었다. 

테오는 슈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슈에게 속삭였다.

 

“귀여워, 슈. 슈가 세상에서 제일 귀여워.”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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