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이 살던 집 근처에 있는 심야 식당에서는 늘 오래된 엔카가 흘러나왔다. 다른 노래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하루에 한 번. 밤 10시가 되면 아주 조용히 골목에만 들릴 정도의 음량으로 늘 같은 곡이 재생되었다.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지독히도 오래되고 촌스러운 멜로디를 가진 단 한 곡만이.


* * *


어두운 골목에 드문드문 떨어진 붉은 핏방울의 행진은 얼핏 붉은 점선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선 끝에 있던 철은 공중전화 박스에 겨우 등을 기대고 선 채로 마구잡이로 주머니를 들쑤셔 동전을 끄집어내었다. 아, 평소에는 귀찮아서 돈 취급도 하지 않던 것이 이렇게나 귀하게 느껴질 줄이야. 한겨울도 아닌데 덜덜 떨리는 손끝으로 겨우 동전을 밀어 넣자, 쩔그렁거리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비로소 신호가 갔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박철이 오래도록 부정했으나 실은 절실하게 그리운 이의 것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보내주면 그저 멋있을 줄로만 알았는데. 훗날 연락 한 번 하지 않은 것이 생의 마감을 앞두고 거대한 미련으로 남다니, 인생이란 정말로 알 수 없는 것이다. 느닷없이 나타난 괴한이 휘두른 칼에 맞는 순간 철의 머리에 가득 찬 생각은 이렇게 죽어서 억울하다가 아니었다.

정대만을 다시 한번 만나지도 못한 채 죽는 게 억울하다-였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용기가 준 기회 앞에서 철은 그저 입술만 달싹일 뿐이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기에, 그저 그의 목소리를 들은 것만으로도 좋아서. 안녕? 잘 지냈냐? 하나같이 어색한 문장들을 떠올리던 중 겨우 한 가지가 떠올랐다. 박철이 생에 마지막으로 남길 유언으로는, 정대만 이름 석 자로도 충분하겠다고. 그렇게 결심을 마친 철이 끓어오르는 고통을 참아내고 목소리를 내려는 순간이었다.

'너……. 철이냐?'

아, 젠장. 정말 인생이란 게 무엇이라고, 이렇게 뜻대로 되는 일이 없을까? 떨리는 대만의 숨소리가 자신의 귓가에 와닿자, 철은 불현듯 자신이 발가벗겨진 듯한 수치심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게 멋있게 보내놓고 이제 와서 이렇게 초라하게 스러지는 모습을 들키고 싶어 안달 난 자신이 너무나 한심해서. 그래서 철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뱉지 못하는 대신 그저 몇 번이고 자신을 부르는 전화선을 타고 흘러들어온 대만의 그리움을 받아먹을 뿐.

죽어도 너에게는 멋있는 놈으로 기억되고 싶다.

그 한없이 어린 생각은 어쩌면 대만을 떠나보낸 날부터 철이 줄곧 속에 품어왔던 소년의 것일지도 몰랐다. 끝내 입을 다물어버린 철의 의식이 점점 희미해지는 가운데, 철이 찬 손목시계의 바늘이 10시를 가리킨 동시에 공중전화 박스와 멀지 않은 가게에서부터 노래 한 곡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대만에게도 너무나 익숙한 노래가.


* * *


"더 세게 불어, 더. 옳지."

그리고 이번에도 삶은 철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수술 후 쪼그라들었던 폐를 회복시키기 위해 열심히 호흡기를 불어 공을 들어 올리는 철의 곁에는 잔뜩 까치집이 진 머리를 한 대만이 있었다.

"그런 상황에는 구급차를 불렀어야지. 대체 무슨 정신으로 나한테 전화한 거야?"

"……."

그때 수화기 너머에서 들린 노래를 듣자마자 자신이 전화를 끊고 구급차를 불렀기에 망정이지, 너 정말 개죽음당할 뻔했다고 타박하는 대만의 말에 도무지 반박할 말이 없었다. 대신 다른 한마디는 해야 했다.

"안녕, 스포츠맨."

그 인사에 대만의 눈썹이 한껏 위로 치솟았다. 어디 들어줄 테니 다음 말을 이어보라는 듯 팔짱을 낀 대만의 앞에서, 철은 바싹 말라붙은 입술을 달싹였다.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다."

다 쉬어빠진 목소리로 속삭이는 철의 말에 비로소 씩 웃어 보이는 대만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전화를 받은 게 밤 10시. 수술이 끝날 때까지 3시간을 초조하게 보내다가, 겨우 입원실로 옮겨진 철의 곁을 지키느라 뜬눈으로 밤을 샜으니 그럴 만도 했다. 무엇보다 막 마취에서 깨어나 통증으로 정신이 없는 철을 대신해 번거로운 일을 확인하고 대응한 것도 모두 대만의 몫이었다.

"아까 형사님께 전화 받았어. 범인은 CCTV에 찍혀서 금방 잡혔다고 하더라."

"그러냐……."

조용히 살던 철의 인생에 나타나 흉기를 휘두른 범인은 철의 삼촌이 사주한 심부름센터 직원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도 철은 무척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고, 그런 철의 반응을 다르게 해석한 대만이 슬그머니 철의 편을 들었다.

"너무하시네. 너희 부모님 아직 정정하신데. 게다가 유산 얼마나 된다고 하나뿐인 조카한테 해를 가하냐."

"좀……. 많기는 하지."

"어?"

가까이 오라는 철의 손짓을 따라 다가간 대만의 귓가에 아주 자세한 재산 내역이 속삭여질 때마다 점점 눈이 크게 뜨였다.

"그, 많기는 하네……."

"그렇지?"

애써 표정을 관리하려 허둥지둥 얼굴을 문지르는 대만을 보던 철은 웃음을 터뜨리다 덮쳐오는 통증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뭐, 어릴 적부터 자기를 싫어하는 티가 워낙에 났던 인간이라 배신감이니 뭐니 들 것도 없었다. 집안 사업을 물려받을 생각도 없는 놈이 어릴 적부터 사건 사고를 많이도 쳤으니, 자기 손에도 떨어졌으면 하는 재산을 축내기라도 할까 전전긍긍하는 게 어찌나 눈에 선했는지 모른다.

"내가 하던 것 중에 바이크 타는 것만 응원하던 인간이다."

일찍 죽어버리라고 말이야. 이어지는 말에 대만의 얼굴이 울 것처럼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가벼운 말 대신 철의 손을 꼭 붙드는 것으로 위로를 끝냈다. 진심 어린 손길과 애정 어린 눈빛. 참 오래도록 이게 그리웠다. 그래서 그 밤에 구급차 대신 대만을 찾는 바보 같은 짓을 했었나 보다.

뒤늦게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아픈 몸을 일으키려던 철은 자신을 만류하는 대만의 손에 고개를 기울였다.

"어딜 가려고?"

"화장실."

"어……. 안돼."

"뭐?"

"아까 말했잖아. 너 오늘, 내일은 절대 안정 기간이라니까?"

그래, 절대 안정. 취할 생각인데 뭐가 문제지? 여전히 모르겠다는 철의 눈빛을 마주한 대만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눈 뜨자마자 허겁지겁 설명했으니, 귀에 안 들어왔을 만도 하지. 그러니 철에게 다시 한번 제대로 상태를 알려줘야 할 의무가 있었다. 자신은 철의 보호자니까.

"너 지금 소변줄 차고 있으니까 화장실 갈 필요 없어."

"……."

철은 그 순간 자신이 살아있음에 조금, 아주 조금 후회했다.


* * *


병원에서의 생활은 썩 지루하지만은 않았다. 소변줄을 차면서 오는 약간의 쪽팔림과 진통제에도 쉬이 가라앉지 않는 통증, 씻지 못해 냄새나는 몸뚱이를 대만에게 맡겨야 한다는 걸 제외하노라면. 오히려 철이 보낸 최근 몇 년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기름으로 잔뜩 엉겨 붙은 자신의 머리칼을 대만이 굳은살 박인 손으로 벅벅 문질러 감겨줄 때도, 어린애처럼 코를 풀라는 말에 갓난쟁이처럼 코에 힘을 주다가도 웃음이 나왔다.

없는 자식이라 생각하겠다며 호언장담했던 부모님이 사색이 되어 병원에 달려왔을 때에도 철은 웃었고, 그런 그들 대신 자신의 보호자로 곁을 지키고 있던 대만이 두 사람과 머쓱하게 인사를 할 때는 근육이 땅겨서 비명이 나올 정도로 웃어버렸다. 그저 좋아서, 너무 즐거워서. 철은 몇 년 치의 웃음을 쏟아내듯 웃어버렸다.

"배에 칼 맞아 놓고 뭐가 좋다고 웃냐, 너는."

그런 대만의 타박에도 철은 웃음을 줄줄 흘리며 부모님 앞에서 보란 듯이 대만의 손을 꼭 붙들었다. 단순한 생명의 은인을 소개하는 것 이상으로, 이 녀석이 지금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보여주고 싶었다. 대만 역시 철을 간호한다고 부스스한 머리에 후줄근한 티셔츠를 걸친 모습이었지만, 그런 차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그가 발산하는 빛이 보였으리라.

"철이 걱정은 마세요."

간병인을 고용하겠다는 철의 부모님을 만류한 건 대만이었다. 어차피 자기는 지금 휴식 기간이고, 둘이 못 한 이야기가 산처럼 쌓였다면서. 무엇보다 철이 본인이 다른 사람 손 타는 걸 영 불편해할 거라는 아주 정확한 진단에 결국 철의 부모님도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이고 고맙다고,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대만아."

"어? 뭐 필요하냐?"

어른들을 상대하느라 지친 기색이 역력하면서도, 철의 부름 한 마디에 대만은 냉큼 그를 살폈다. 물? 옷 갈아입고 싶어? 몸 닦아줄까? 쏟아지는 질문 세례에 철은 겨우 손사래를 치며 그를 불러 말해주고 싶던 말을 꺼냈다.

"그냥. 네가 진짜 내 보호자 같다고."

"뭘, 새삼."

그렇게 답한 대만은 물론 눈이 마주친 철도 이내 어깨를 들썩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어릴 적 대만이 힘들 때 곁을 내어준 것은 철이었고, 대만이 필요로 하는 걸 찾아다 쥐여준 것도 철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역전되어 버린 관계가 익숙해졌으니, 인생이란 정말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었다.

"다 잘될 거다, 철아."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넘겨주는 대만의 손길 아래에서 쏟아지는 약기운에 겨우 웃음 대신 하품을 꺼내며 철의 눈이 느리게 끔벅였다. 평생 남의 말이라곤 귓등으로 들어왔던 철이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정말로 그렇게 될 것 같다는 확신이 저 아래에서부터 꿈질꿈질 솟아나고 있었으니까.

"다 잘될 거야."

그래. 정대만의 곁에 서라면, 분명…….


* * *


좁다란 간병인 침대 크기에 맞춰 대만의 몸이 쪼그라들기 전에 철은 퇴원할 수 있었다. 회복이 무척이나 빨라서 처음 예상했던 기간보다는 조금 이른 퇴원이었다. 그동안 철의 부모는 간병인 대신 실력 좋은 변호사들을 선임했고, 혈육의 정 같은 것에 흔들리지 않고 가장 확실한 처벌을 내리기 위해 분투하겠노라고 자신들의 아들과 그의 친구에게 호언장담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을 대신해 철의 짐을 정리한 대만이 정말로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된 친구와 눈을 마주치며 씩 웃어 보였다.

"드디어 퇴원이네. 아까 들은 주의 사항 다 숙지했지? 너 완전히 나은 거 아니니까 조심해야 해."

"그래, 알았다. 잔소리 많은 스포츠맨."

진지하게 듣고 있지 않다며 한껏 미간을 찌푸리는 대만을 보던 철은 슬그머니 웃으며 손을 뻗었다. 힘이 잔뜩 들어간 대만의 미간을 꾹꾹 문지르며 철은 여전히 미소가 떠나가지 않는 입을 열었다.

"앞으로 연락해도 되냐."

"별 이상한 걸 다 묻는다. 나는 항상 네 전화 기다렸거든?"

"그럼, 근처에 사는 건."

자주 보는 건, 함께 밥을 먹는 건, 둘이 카페에 가는 건. 그 외에도 너와 하고 싶은 수많은 것들을…….

"같이 해도 되냐, 대만아?"

그 물음에 대만의 입술이 댓 발 튀어나왔다. 다 좋다. 다 좋은데, 가장 중요한 게 하나 빠져 있었다.

"내 경기 보러 오는 것도 해야지."

언젠가의 철이 자신을 붙들어준 덕에 다시 돌아갈 수 있던 농구. 그 농구에 열정을 불태우는 모습을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철만은 반드시 봐줘야 했다. 싫다고 해도 강제로 봐야지. 박철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난 네 생명의 은인이잖아. 맞지?"

그렇게 물으며 씩 웃어 보이는 대만의 웃음 앞에 결국 철은 무장이 해제되듯 너털웃음을 함께 터뜨렸다. 대만을 일찍 보내놓은 뒤에도 홀로 밤거리를 방황하던 철의 삶도 비로소 그 방향을 정한 것 같았다. 오래 미뤄오던 부모님과의 대화, 안정적인 일자리 같은 것들을 움켜쥐고 이전보다는 답답하지만, 남들처럼 평이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지금껏 허비해 온 박철의 시간은 이제 오롯이 정대만을 향해 흐를 테니.

"안녕, 철아."

"또 보자. 스포츠맨."

이제 치기뿐이던 시절의 소년은 어른으로 자랐다. 그러니 더는 영화 속 주인공인 것처럼 그리움을 억누르고 궁상떠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다. 보고 싶으면 만나서 촌스럽게 철 지난 노래를 들으며 심야의 식당에서 서로 가볍게 술잔을 부딪치고, 그러다 마주친 눈빛에서 오래된 감정 속 새로운 반짝임을 찾아내면 그때부터 둘은 같은 방향을 나란히 달리는 사이로 발전할 것이다. 물론 그 과정은 순탄하지만은 않겠지. 첫 연애처럼 미숙하고 찌질하고 궁상맞은 선택의 연속에 개똥밭을 구르는 것처럼 추저분한 사랑과 전쟁을 찍을 것이다. 하지만…….

"야, 박철!"

부름을 따라 뒤돌아본 철에게 대만이 현재도 그리고 미래에도 삶의 정답이 될 말을 외쳤다.

"살아있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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