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네....." 



아까부터 이말만 백만번째 되뇌이고 있는 사내가 길을 걷고 있다. 

군복차림에 검을 찼으나, 손에는 그에 어울리지 않게 색동 보자기로 싼 무언가를 들고 있다. 

아무도 그게 무엇인지 물어보지 않았지만, 그는 이것이 적잖히 창피했다. 

 

물건 자체도 창피하고, 이걸 가지고 가는 장소도 민망했다.

 

 

 



'나더러 이걸 그집에 갖다주라고?'


'당연한거 아냐? 직속 상관이잖아'

 

 

 

 


반시각전 제집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형진은 매우 마뜩찮은 눈으로 제 앞에 있는 사람과 그가 든 물건을 보았다.  

 


'그분은 자기집에 누가 오는거 엄청. 무지. 굉장히. 싫어해. 그집 주소 아는 사람도 없다고'


'당신은 알잖아. 가본적도 있다며.'


'그렇긴 하지만...그건 일이었고....'


'이건 내가 주는 일이야.'

 

 

 


새초롬한 눈으로 자신을 보며 나름의 논리를 펼치는 제 마누라(?)를 보면 저도 할말을 잃게된다. 

어쨌거나 밖에선 그가 자신보다 한계급 높으니까. 

 

형진은 굉장히 못마땅한 얼굴로 그가 주는 물건을 받아들었다. 

자그만 버들고리짝에는 어제부터 부지런히 만들어 돌린 백설기가 소복하니 담겨있었다.





'우리 막내가 오래 사는게 싫단 뜻이야?'

 


'그런뜻이 아니잖아.'

 

 

 


목소리가 벌써부터 삐지려고 하는게 느껴져 형진은 뒤통수에 진땀이 났다. 

 

 

 

 


그렇다. 그는 최근 막내딸을 보았다.  

위로 다섯이나 아들을 보고 뒤늦게 낳은 딸이라 온집안의 경사였다. 

그리고 그 귀여운 딸이 백일이 되어서 백설기를 돌리는 중이었다. 



백집에 돌려야 아기가 장수를 누린다는 백일떡. 

 


각자의 소속이 다른 탓에 나름 주말부부(?)로 지내는 두사람에겐 이것도 상당히 큰 일이었다. 대대적인 잔치는 못해도 떡은 꼭 백집에 돌려야겠다고 주장하는 마눌님의 대찬 목소리에 그는 어설프게 맞서보았으나 무리였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자신의 동려는 씩씩한것만이 최고의 덕목인 사람이다.

 

'정말 백집에 돌리는 사람은 많지 않아. 그냥 다들 나눠먹으면...'

 

'그냥 나눠먹자는거야. 당신말대로.'

 

훈련원 식구들 모든 집에 돌린것도 모자라서 부득부득 백집을 채워야겠단다. 

 

'그치만 그집은...'

 

'이미 많이 한 떡인데 좀 갖다주면 어디가 덧나? 뇌물을 갖다주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백일떡이잖아.'

 

 





이 나이에 자식백일떡을 나보다 열몇살은 어린 상관집에 갖다주긴 좀. 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쨌거나 비번일때나 얼굴볼수 있는 마눌님(?)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던 형진은 마지못해 알았다고 집을 나섰다. 

 

 

"아...와버렸네...."

 

 

한숨만 이백만번 쉬던 그는 난감한 표정으로 저만치 보이는 목표지점을 보았다. 

조용한 민가에 차분하게 자리한 기와집이었다. 허나 그에겐 대궐보다 크고 어렵게 느껴졌다. 

 

 

 

"집에...있어야 할텐데..."

 

 

 

그는 일주일동안 입궐 안할 예정인 제 상관이 집에 있길 간절히 빌면서 문고리를 두드렸다. 

 

 

'이리오너라~' 하고 외치는 목소리도 작고 떨렸다. 조금 뜸을 들이나 싶더니, 누군가 문을 연다. 

소박하지만 깔끔하고 단정한 무명옷차림에 하얀 앞치마, 은비녀로 쪽을 찐 덩치큰 여인네가 나왔다. 

얼굴이 얽었으나 손발이 큼직하고 키도 큰 듬직한 중년부인이었다. 낯이 익다.

 

 

"주인어른 부관인 공가일세. 백주부 나으리를 뵈러왔네."

 

 




그렇다. 그는 자신의 상관인 백동수의 집을 방문한 것이었다.

 

 

 

 

 

 





 

"나리는 댁에 계시는가?"

 

과거의 경험으로, 형진은 그녀가 이집 노복이자 아이들 보모이며, 덧붙여 벙어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형진을 본적 있으니 경계를 풀고 금방 답하는 것 같았다. 형진은 그런 그녀의 답에 뭐마려운 강아지마냥 얼른 보자기를 넘겨주었다.

 

 

"별거 아니고 이거 우리집 막내 백일떡일세. 주인어른께 올리게. 그럼 난 감세"

 

 

 

 

만리를 1리처럼 뛰어갈 기색의 형진을 본 유모가 깜짝 놀래며 그를 붙들었다.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젓는 유모는 팔힘도 셌다.

 

 

 

"아~ 별거 아니니까 그냥 드리면 아시네. 이댁에서 받은것도 많고..나중에 내가 나리께 말씀 따로 올리면 되니까..."

 

 

그래도 아니라고 고개를 젓는다. 도망가고싶은데 그녀의 팔아래서 그는 꼼짝도 할수 없었다. 

나름 군에서 잔뼈굵은 군인인데 기껏해야 솥뚜껑정도 드는 게 힘쓰는 일인 찬모를 이길수가 없다는건 정말 쪽팔린 일이다. 좀처럼 손이 없을 이집에선 누가 찾아오면 중요한 일일테니 일단 볼일이 있다면 주인에게 데려가야한다는 교육은 확실히 된 노복인듯 하다. 아. 죽겠다. 

 

 

 

 

 

 

 

 






 

 

"아..그냥 떡만 드리라니까...."

 

 

유모의 성화에 할수없이 집안으로 쭐래쭐래 따라들어가면서도 그는 마음이 심하게 불편했다. 

 

 





이집에 와보는 것은 두번째다. 

 

 

조용한 공기.

 


집은 작지만 마당이 널찍하고 정원수가 많아 집안과 집밖이 완전히 다른 분위기가 된다. 

시간이 사라진듯한 풍경이 자신을 감싸면 뭔가 편안하면서도 압도당하는 기분. 이 집 구성원 외에는 완전히 배척하는 것같은 집안 곳곳이 형진에겐 불편한 마음이 들게 했다. 

 



 

"....안뵈도 되는데...."

 

 

 

 

동수도 없는 이 집에 유모가 뵙게해줄 사람이 있다면 딱 한명이다. 

 

 

 


"...내가...뵈도 되나?"

 

 

 

 

 

대답할수 없는 여인을 쫓아가며 혼자 중얼중얼 말을 하는데, 용케 알아들은 여인은 야무지게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말만 못할뿐 귀는 어지간히 밝은 듯 싶다. 머리는 좀 모자란듯 해보였으나 눈치가 제법 빠르다. 

 

 



 

몇년전에도 그는 이 여인의 뒤를 따라 이 집안으로 따라들어갔었다. 

 




 

그리고 그를 보았다. 

 







 

 

 

꽤 오래전, 그를 처음 본 건 동수에게 비밀리에 전해주어야 할 중요한 서류때문에 집을 찾아왔을 때였다. 

원래 동수가 집안에 손님을 절대 들이지 않는 줄은 알지만, 자리를 비운 동수의 집무실에 가져다둘순 없었다. 어렵게 알아낸 주소로 물어물어 찾아간 집이었다. 

 



 

'나으리께 급한 전갈을 가져왔는데...'

 



안절부절 못하는 형진을 보던 여인은 잠깐 기다리는 손짓을 하더니, 문을 닫고 안쪽까지 한달음에 뛰어간다. 

사라진 여인네의 뒷모습만 보며 초조해하던 그는 이윽고 여인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섰다.

 



'....아..저기..'

 

 



오래 앓는 환자가 있어서 집안에 손을 들이지 않기로 유명한 집인줄 익히 알아 대문까지만 들고 말려고 했는데 얼덜결에 내실이 있는 안마당까지 들어서자, 공부관님께서는 때아니게 좀 긴장했다.

 

 

 

'손님이 오셨다고?'

 

 

 

깜짝 놀랄정도로 차분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나긋하고 우아한 말투.

얼덜결에 고개를 돌리니, 마루에 누군가가 나와서 앉아있다. 그는 고개를 깊숙히 숙였다.

 



'백주부 나으리를 뫼시는 공가입니다. 중요한 전갈을 가져왔는지라..'

 


'네.'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동수에게 들은 것만으로는 무척 까다롭고 아픈 사람이라 더더욱 어렵기만 했다. 

 

 

'유모에게 주세요.'

 

 

 

유모? 아 아까 나온 그 여인을 말함인가보다. 

그는 부산스럽게 품속에서 서찰을 꺼내면서 왠지 쿵쾅대는 가슴을 다스렸다. 이 기분은 뭘까.

 

 

 

'제가 잘 전달해주겠습니다.'

 




그림자가 진 마루지만, 그래서인지 하얀색 자리옷과 청록색 덧옷빛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얼핏얼핏 봐서도 앓고 있는 게 역력했으나 전체적으로 단정하고 너무나도 고운 사람이다. 수수한 환자라기엔 눈에 확 들어 올정도로 수려한 외모였다. 행색을 보니 방안에 누워있다가 자신이 오니 마루까지 나온게 분명했다. 왠지 송구해서 서있는 자리가 영 힘들다. 불편해보이는 다리며 기둥에 걸쳐진 목발을 보니 말로 듣던것 보다 훨씬 아픈 사람인듯 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괜찮습니다.....'

 

 

 

허나 목소리는 정갈하되 남을 많이 다스려본 힘이 담겨있어 거역하기 힘들다. 동수가 명문가 출신이니 배필도 그 못지않은 사람이겠지. 오래된 동무와 연을 맺었다고 들었는데 끼리끼리인가. 그는 인사를 하기 위해 고개를 슬쩍 들었다가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굳어버렸다.

 

 

 

저 눈은....저 사람은...설마...

 

 

 

'대접을 못해서 송구하군요. 그만 가보세요...'

 

 

 

살짝 손을 흔들어 가보라고 말한다. 누워있다 나온 사람치고 손짓도 아주 품위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 서늘하고 단정한 눈이 동수를 대련장에서 마주쳤을때만큼이나 긴장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자신과 눈이 마주쳤음에도 고개돌리지않고 똑바로 저를 마주본다. 손을 맞는 예의상 부드러운 표정이었으나 눈에는 힘이 있었다.

 

 

 

 

저 사람이 왜.......

 

 

 

'더 전할 말...있으십니까?'

 

 

'...아..아닙니다...'

 

 

왜그러느냐는듯한 의아한 눈빛에 그는 서둘러 고개를 숙여 인사를 마치고 뒷걸음질로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가슴이 쿵쾅쿵쾅 울려댄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렸다. 

 

 

 

옷차림이며 목소리가 변해서 처음엔 몰랐다곤 하나, 그 눈빛까지 바뀔순 없다. 틀림없었다. 

 



 

 

그다. 

 

 

 

 

그 사람이다.

 

 

 

 

'아니...저 사람이...어떻게.....'

 

 

 

 

 

 

그날은 집에 어떻게 돌아갔는지 모를만큼, 그렇게나 놀랐었다.

 

 

 

 

 

'어떻게....그....자가...나으리의 집에....'

 

 

 

 

홍대주의 난을 진압후, 공신이 되어 훈련원에 온 동수를 상관으로 모시게 되면서, 형진은 이제서야 자신의 오랜 군생활을 아깝지 않게 만들어줄 그런 상관을 모시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맑고 곧은 그와 일하면서 그의 능력과 일솜씨에 탄복했고, 사연많은 동수의 집안일도 안되었다 여겼다. 좋은 상관이었고 살가운 아우같은 사람이다. 다정한 성품을 지닌 좋은 동료며 벗이다.

 

 

 

그런데 왜.

 

 

 

 

'흑사초롱의.....인주...'

 

 

 

 

가장 무서운 살수집단인 흑사채의 수장. 지금은 사라진 흑사초롱의 죽은 인주가 왜 백주부 나으리의 집에 있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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