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김독자의 생각 혹은 바람과 달리 유중혁의 마음은 김독자가 자신을 좋아했고, 이미 그것이 과거형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시시각각 새카맣게 타들어갔다. 짝사랑을 음미한다느니 하는 태평한 생각이나 했던 자신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김독자의 흔들리는 표정에 기대어 아직 늦지 않았다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건드리면 금세라도 부서질 것 같은 표정을 짓던 김독자의 표정이 이내 잔잔한 수면처럼 고요해지고, 이윽고 담담하게 꺼내든 말은 유중혁의 마음을 진창으로 밀어넣었다.


"내 사랑과 네 사랑은 스치는 순간조차 없었네."


제 손 안에서 빠져나가는 흰 손과 말간 얼굴이 짓는 웃음은 김독자를 더욱 멀어보이게 만들었다. 한 순간의 교차점이라도 있다면 그대로 잡아챌 자신이 있었으나, 김독자의 말대로 스치지도 못한 사랑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어쩔 수 없다며 포기할 정도로 그의 마음이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유중혁은 돌아가겠다 말하는, 조금 지친 듯한 김독자를 다시 붙잡았다. 억지로라도 어긋난 타이밍을 비틀어서 맞추고 싶었다. 


소파에 김독자를 앉히고 저도 그 곁에 앉으면서도 유중혁은 김독자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 억지로 자리에 붙들어맨다고 마음까지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닌 건 알지만 그래도 왠지 지금 이 손을 놓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김독자는 손을 빼내려고 하지도 않고 말없이 앉아있었다.


"언제부터였지?"

"시작을 묻는 거야, 아니면 끝을 묻는 거야?"


한참이나 말을 고르고 골랐건만 유중혁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초점이 어긋난 물음이었다. 하지만 유중혁은 김독자의 눈 안에 고인 어둠을 기억했고, 그것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아야했고 알고 싶었다. 그러나 되돌아온 물음은 유중혁을 더 괴롭게 했다. 잠시 고개를 기울이고 생각에 잠겼던 김독자가 이내 입을 열었다. 12년. 그 답을 듣는 순간 조금 전 느낀 괴로움과 비교도 되지 않는 막막함이 유중혁을 덮쳤다. …너무 길어서 좀 질렸지? 그냥 비밀로 할 걸 그랬네. 김독자가 머쓱하게 한 말처럼 질렸거나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 김독자의 인생의 반절을 유중혁이 차지했다면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유중혁의 인생의 절반도 김독자가 함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김독자의 사랑은 그 기간 중 대부분, 유중혁이 알아채지 못한 기나긴 시간 동안 이어져왔다. 자신은 지금 때가 어긋난 저와 김독자의 마음만으로도 괴로운데 김독자는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의 애인을 소개받거나 호감가는 상대가 생겼다는 말을 듣기를 반복하면서도 십 년이 넘게 유중혁을 좋아해왔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김독자가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둔다. 상상만으로도 유중혁은 뱃속이 뒤틀리는 기분을 느꼈다. 그런 사내의 마음 한구석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그 긴 시간동안 한 번도 알아채지 못했으면서. 내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나? 유중혁의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만들었던 그 표정. 김독자가 반짝이던 눈동자에 어둠이 깃들게 하고 얼굴에 짙은 피로감을 내려앉게 한 이를 그만 좋아하게 되기를 바랐던 적이 분명히 있지 않은가. 유중혁이 그런 김독자를 알아챈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유중혁이 모르는 사이 김독자는 대체 몇 번이나 그런 표정을 지은 걸까. 그런 것을 생각해보면 자신이 생각했듯 김독자가 더이상 저를 좋아하지 않게 된 것이 다행인지도 몰랐다.


문제는 이제 당사자가 된 유중혁은 여전히 김독자를 붙잡고 싶다는 것이었다. 차마 말이 되지 못한 수많은 감정들이 유중혁의 입 안을 맴돌았다. 가까이에 있고 남들보다 김독자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으면서 정작 중요한 것을 알지 못하는 스스로가 경멸스러웠다. 저도 모르게 손목을 쥔 손에서 힘을 풀자 김독자가 기다렸다는 듯 손을 빼내었다. 시선을 떨어뜨리고 짓는 희미한 미소에 가슴이 죄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 웃는 얼굴이 못내 사랑스러우니, 어쩜 이리도 이기적일 수 있단 말인가. 이 상황에서도 자신은 제 마음만 생각하고 있었다.


죄책감과 사랑이 한데 뒤엉켜 진득하게 넘쳐흘렀다. 자신을 향한 김독자의 마음을 몰랐던 것 하나만으로도 유중혁은 스스로를 용서하기 어려웠다. 김독자가 몇 번이나 그런 얼굴을 했느냐고? 대체 나는 몇 번이나 김독자가 그런 표정을 짓도록 만든 거지? 생각이 넘쳐나는 통에 오히려 할 말을 찾기가 어려웠다.


"…미안하다."

"왜 네가 미안해."


형언되지 못한 감정들을 전부 제쳐두고 막연한 사과를 건네는 것이 유중혁에게는 최선이었다. 그 사과에 돌아온 것은 정말로 의문이 담긴 되물음이었다. 차라리 이미 늦었다고 화를 냈거나 하다못해 쓴웃음이라도 지었다면 나았을 것이다. 저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거나 그 시간을 보상하라고 하는 것도 괜찮았다. 하지만 김독자는 왜 그것이 사과할 일이 아닌지를 조곤조곤 늘어놓았다. 정말로 유중혁이 마음을 쓰지 않게 하기 위해 신중하게 표현을 고르고 고른 말은 더 잔인하게 들려왔다. 

 

자신이 그에게 과분한 친구였다는 말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김독자와 유중혁의 관계는 김독자의 말처럼 일방적으로 베풀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런 관계였다면 이리 오래 지속될 리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 말들이 가리키는 것은 결국 같았다. 유중혁의 사랑은 김독자의 사랑과 다르다는 것. 시작도, 끝도 공유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 사실이 유중혁의 마음을 더욱 들끓게 만들었다.


사실 김독자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유중혁은 김독자에게 미안함을 느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감정적인 문제일 뿐 그것으로 유중혁을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저를 향한 마음에 모두 보답해야 한다면 유중혁은 몸이 열개가 아니라 백개라도 부족했을 터였다. 책임질 이유가 없지, 그래. 하지만 그래도 김독자가 감히 헤아릴 수 없이 무거운 감정을 정말 혼자서만 짊어지려 하는 것이 그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시간을 보상하라고 한다면 보상했을 것이다. 시간의 간격을 메울 수는 없겠지만 유중혁은 제 마음을 아낄 생각이 없었다. 김독자는 유중혁이 제게 많은 것을 주었다고 했지만, 유중혁은 이제 자신의 마음까지도 김독자에게 내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내어준다 한들 김독자는 손을 내밀지 않을 것이고 억지로 손에 올려준다 해도 쥐지 않을테니 그의 마음은 결국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전부 흘러내릴 것 같았다.


이야기를 마치고 고개를 든 김독자는 유중혁의 표정을 살피고 안타깝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살짝 물었다 놓은 입술이 달싹이다 다시 꾹 다물렸다. 마치 유중혁이 마음을 '정리'하길 기다리려는 듯, 그는 침묵을 지켰다. 유중혁은 한껏 심경이 복잡한 자신과 달리 무척 홀가분해 보이는 원망스럽고 사랑스러운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미안해하지 말라는 것이 유중혁을 생각해 한 말이라 해서 김독자가 세운 벽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욱 견고하고 높아졌을 뿐.


"유중혁, 정말로 나는 괜찮아. 너도, 괜찮아질 거야."


미안해하는 것도 후회하는 것도 허락지 않는데 그럼 어떻게 해야 이 어긋난 간격을 메울 수 있는가. 유중혁의 사랑과 김독자의 사랑은 별개라고 말하는 사람을 어떻게 해야. 김독자가 마음을 접은 것과 유중혁이 김독자를 사랑하기 시작한 것 사이의 간격이 그렇게 긴 것도 아닐 텐데 그 짧은 시간이 만들어낸 간격은 마치 바닥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김독자가 미안해하지 말라고 한다 해서 그것을 따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김독자가 저렇게 길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으면서까지 그것을 바라고 있었다. 김독자의 말을 따를 생각도 없는 주제에 김독자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는 지극히 모순적이고 이기적인 감정이 유중혁의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용서를 구할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김독자에게 용서를 구하고 제 사랑을 내보이고 싶었음. '나'의 사랑인가. 유중혁이 쓰게 웃었다. 어느새 자신도 김독자처럼 그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을 구분지어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두 사람의 것이 되는 것이지만 지금은 김독자가 제 사랑을 거두고 난 자리에 유중혁의 사랑만이 덩그러니 남아있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다소 비참할 정도로 분리되어버린 마음은 도리어 유중혁에게 어떠한 결심을 일깨웠다.


"유중혁?"


유중혁이 제 손아귀를 빠져나간 김독자의 손을 다시 고쳐쥐었다. 의아해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그가 느릿하게 입을 떼었다.


"네 말대로 미안해하지 않겠다."

"그래, 내가 말헸잖아. 네가 미안해 할 일이 아니…."

"그러니, 나는 이대로 너를 사랑해도 되겠지."


유중혁은 채 김독자가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사이 손을 끌어당겨 희고 긴 손가락 위로 입술을 눌렀다. 입술 너머로 뼈마디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손톱 위에 입술을 누르며 시선을 위로 올리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김독자의 얼굴이 보였다. 그런 주제에 하얀 얼굴이, 귀끝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이것이 유중혁이 내린 결론이었다. 김독자의 말을 들으며 끝없이 가라앉다가 마침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발을 딛은 순간 깨달은 것이기도 했다. 미안해 할 필요 없다는 김독자의 말은 반박하고 싶은 것과 별개로 틀리지 않았다. 여지를 주지 않으려는 말은 잔인했으나 다시 생각해보면 유중혁이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미안할 일이 없다면 유중혁의 사랑도 구태여 죄책감에 매일 필요 없는 것 아닌가. 이것은 '유중혁의 사랑' 이니까. 십여년을 이어져오다 끝난 사랑과 연속성이 생기지 않아도 상관 없으니 지금 김독자의 마음을 붙잡으면 되는 것이다. 다소 억지였으나 유중혁으로서는 지금 그런 것을 가릴 입장이 아니었다.


"뭐, 뭐하는 거야!"


여전히 입술을 붙인 채 입꼬리를 당겨 웃자 뒤늦게 정신을 차린 김독작 황급히 손을 빼냈다. 설령 제 결론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 해도 상관 없었다. 유중혁의 눈에는 한층 선명해진 목표가 보였고 그는 결코 쉽게 목표를 포기해본 적이 없었다.




이건 아니었다. 김독자는 유중혁이 자신에게 마음을 주지 않은 것을, 제 마음을 몰랐던 것을 미안해하지 않길 바랐다. 하지만 그것은 유중혁에게만큼은 사랑이 마음의 짐으로 남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지금처럼 미안해 할 일이 아니라면 사랑하는 데에 문제가 없다며 한발 다가오리라고는 상상도 한 적 없었다.


"유중혁, 지금 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고 있는 거야?"

"다시 한 번 말해주길 원하나? 나는 너를…."

"그런 소리가 아니잖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김독자가 무심결에 유중혁의 입을 막았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친구로서의 허물없는 태도가 튀어나온 것이었다. 물론 유중혁이 피식 웃자 손바닥을 간질이는 숨결과 얇은 피부로 선명히 느껴지는 입술의 움직임에 금세 떨어져나가긴 했지만 말이다.


"중혁아, 나는."

"네 말대로 나는 나의 사랑을 하는 거다. 이건 그저 나의 마음일 뿐이고. 물론 네가 싫다면 표현하는 것은 자제하겠다."


태연한 대답에 김독자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유중혁은 조금 전 제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고 있었다. 두 사람의 감정에 선을 그은 것은 김독자였으니 그 말대로면 유중혁이 제 마음을 드러내는 것도 그의 자유였다. 머릿속이 온통 어지러웠다.


"난, 나는 이만 가볼게."


벌떡 일어난 김독자가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얼굴에 열이 오르고 눈앞이 핑 돌았지만 그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현관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유중혁도 그런 김독자를 잡지 않았다. 현관까지 따라온 유중혁이 벽에 어깨를 기댄 채 말했다.


"연락하겠다."

"하지마! 아니, 아예 연락을 끊자는 건 아니고…."


김독자가 횡설수설하는 사이 닫히는 문 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완전히 사라졌다. 초조하게 엘리베이터가 올라오길 기다리던 김독자는 문이 열리자마자 뛰어들듯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문을 닫았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가기 시작하자 김독자의 몸이 주륵 미끄러져내렸다.


"미쳤어…."


새빨갛게 물들었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14년이면 한 사람을 알기에 그리 적은 시간은 아니었다. 원치 않았지만 유중혁이 연애하는 모습도 많이 보아왔다. 그래, '좋아한다'고 말하는 유중혁은 그렇게 낯선 모습도 아니었다. 그 상대가 김독자라는 것이 문제일 뿐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은 자신의 것일 뿐이니 이대로 저를 사랑하겠노라 선언하는 유중혁은 그래, 낯설었다. 겨우 가라앉힌 마음이 온통 거세게 흔들릴 정도로. 김독자는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여 한 번 열렸다 닫힐 때까지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겨우 몸을 일으킨 김독자가 반사적으로 웹소설을 켰다. 복잡한 생각들을 전부 구석으로 밀어두기 위함이었다. 활자를 읽어나가자 어수선하던 마음이 점차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조금 전에는 너무 갑작스러워 지나치게 당황한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저도 무디어지고 유중혁도 스스로의 마음을 돌이켜보고 나면 한결 차분해질 것이리라 믿었다. 유중혁도 결국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조용히 마음이 흘러가도록 놓아둘 수 있겠지. 그것은 김독자가 지난 12년간 해왔던 일이었다.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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