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맨 밑에 있는 결제창은 소장용 입니다.



네오한 빌런 사무소


 

 


 잔잔한 클래식이 울리는 성대한 파티장. 가방 검사까지 마쳐야 들어올 수 있는. 상상 그 이상의 호화로움을 자랑하는 연회장 안에는 반짝거리는 목걸이며 시계며 한껏 치장에 힘을 준 사람들이 가득했다. 백화점 지하 1층 쥬얼리 샵에서도 본 적 없는 크기의 화려함이었다. 큼큼, 어색한 몸짓으로 걸어가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제발. 제발 그 누구도 날 아는 척 하지 않기를. 그 누구도 나에게 티끌만 한 관심조차 주지 않기를. 




"…."




 내가 들어가자마자 10분 먼저 들어갔던 나나가 싱긋 웃으며 맞이해줬다. 그리고 그는 곧 샴페인 하나를 손에 들고 사람들과 얘기를 나눴다. 뭐라 하는 지는 알 수 없었지만, 존나 난 놈이었다. 대단해, 대단해. 난 여기 서 있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지리는데. 푸흐흐- 하고 웃는 제노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마음의 진정 비스무리한 걸 하려고 노력했지만, 머릿속에서는 삐삐삐- 하는 신호가 울리는 거 같았다. 심장이 존나 빨리 뛰었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였냐면 약 1분 동안 물에 들어가서 숨을 참다 나왔을 때만큼 빨리 뛰었다. 귓가에서, 머리에서, 심지어 콧방울에서도 내 심장박동 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간결히 말하자면 개쫄린다.



 

"야야야."

 

 

 

 이어 마지막으로 호텔 안에 입성한 김정우는 나와는 반대를 향하고 서서 입을 꾹 다물고 나를 불렀다. 이리저리 굴려대는 눈동자를 보아하니 나나를 찾고 있는 것 같아서 고개를 까닥이고 말했다.

 

 

 

"저쪽."

"찾았대?"

"그런 듯."

"너 말고."

 

 

 

 아, 글쿤. 김정우의 말이 끝나자마자 무선기로 제노의 목소리가 흘렀다. 네, 찾았어요. 잘 보고 손에 닿은 거 있으면 가져오세요. 그래, 우리의 일. 우리의 일이 그거였지. 제노와 나나가 말하길, 그리고 그 옆 상석에 앉은 문대표가 말하길 우리는 나나가 표적이 된 MS증권의 딸과 샴페인을 나눠마시며 휴대폰을 몰래 가져올 동안 그 잔을 전달받아 무사히 비상구 소화전 안에 들어있는 가방 안에 넣어두기만 하면 된다고 그랬다. 말로만 들으면 누워서 떡 먹기나 다름없다. 나는 연회장 한 편에 마련된 테이블에서 떡 대신 카나페를 주워 먹으며 나나와 그를 살폈다.

 

 

 

"뭐라는 거야."

-"궁금해 하지 마."

"넵."

 

 

 

 김도영의 단호한 목소리에 시선을 돌리고 잘 잘린 멜론 조각을 입에 넣었다. 생각했던 것처럼 일이 흘러가는 중이었다. 역시 예외란 없이 사람들은 미남을 좋아하는 편이고, 나나는 미남이었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잘생긴 얼굴이긴 했지. 확실히 웃는 거 보고 있으면 호감형이다. 나나가 워낙에 척척 일을 잘하니 주제에 맞지 않게 쿵쾅댔던 심장이 조금은 편안함을 찾았다. 클레식 소리에 몸을 맡기며, 입이 떡 벌어지게 화려한 음식들을 작은 접시에 담았다. 카나페, 캐비어, 하몽, 기타 등등. 써브웨이에서도 볼 수 있는 올리브는 가볍게 넘어갔다.

 

 

 

-"그만 좀 먹어."

"아깐 많이 먹으라면서요."

-"며칠 굶었니?"

 

 

 

 오늘 굶기는 했는데. 넘넘넘 긴장돼서…. 내 대답에 제노의 웃음소리와 김도영의 한숨 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졌다. 아 뭐 어쩌라고요. 이제야 배가 고픈데. 풋, 그 순간 나나가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치며 눈꼬리를 휘었다. 엇, 똑같이 들리는 건 몰랐는데, 나나 목소리도 안 들리길래…. 괜히 방해가 된 것 같은 기분이라 접시를 내려놓고 손을 모아 대충 사과의 뜻을 전했다. 웃으며 넘기는 걸 보아서는 좋게 넘어간 것 같았다.




"이제 안 먹을래."

-"왜요? 형 때문에요?"

"아니 그냥."




 다시 입에 음식들을 욱여넣으려다가, 김도영 말대로 여기에서 며칠 굶은 것처럼 식사를 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거 같아 손을 내려뒀다. 제노가 바람 빠지는 소리처럼 웃으면서 오늘 작전을 잘 마무리 한다면 맛있는 걸 먹자고 약속해줬다. 그래, 내가 여기서 무사히 나간다면… 우리 꼭 맛있는 거 먹자! 나의 아련함 섞인 대답에 김도영은 코웃음을 쳤다. 누가 보면 전쟁통이라도 나간 줄…하고 읊조리는 걸 내가 똑똑히 들었다. 네가 뭘 알아. 거기에 편히 앉아 있는 네가 뭘 아냐고.

 

 

 

"김정우 봤어요?"

-"같이 있는 거 아니었어?"

"아닌데."

 

 

 

 얘가 어딜 돌아다닐 애가 아닌데. 분명히 아까까지는 눈에 보이는 곳에 있었는데. 설마 얘 또 혼자 사고 치는 건. 그럴 리는 없지만, 의심은 된다. 상대는 김정우니까. 내가 나나였으면 걱정하지도 않지. 괜히 다급해져 발걸음을 옮겼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김정우는 발견됐다. 그도 그럴 게 멀리서 봐도 한눈에 들어왔다.

 

 

 

"아니요, 아니요."

 

 

 

 지져스 프라이스.

 

 

 

"어우, 네네. 그렇죠."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인 김정우를 보다가 이마를 짚었다. 그새 나를 본 건지 김정우가 세상 반가운 눈빛으로 나를 향해 구원의 손길을 바라고 있었다. 눈은 나를 향한 채로 무슨 로봇처럼 옆사람을 향해 기계적으로 대답을 내뱉으면서 당장 이곳에서 나를 데리고 나가달라는 신호를 마구 보내왔다. 근데 뭐 어쩔. 내가 뭐 어떡해. 슬쩍 두 손을 하늘 위로 올려 보이니 김정우가 입술을 혀로 쓱 훑어내리더니 입을 뻐끔거렸다. 목이 타는 모양이었다.

 

 

 

"충만씨 저희가 너무 말이 많죠."


"아뇨, 아뇨! 괜찮아요…!"

 

 

 

 김정우의 신호를 기가 막히게 알아챈 옆자리의 사람들은 웨이터가 들고 가던 쟁반에서 샴페인 하나를 쏙 집어내 김정우의 손에 내려두는 것으로 모든 것을 해결했다. 나는 될 수 있는 한 최대로 입을 꾸욱 다물었다. 이 일에 관여할 마음이 전혀 없다는 나의 의사를 표명하는 바였다. 눈빛을 보아해서 김정우를 단단히 문 것이 틀림없는데, 저기에 등장한다? 말도 안 되지. 어떤 눈초리를 받을 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게다가 내가 홀랑 김정우를 데려가기라도 한다면…. 아찔하군.

 

 

 

"충만씨는 그럼 가업을 계속 받으실 거예요?"

"아무래도 하하, 그래야…."

 

 

 

 이런 오류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왜 김정우도 미남이라는 걸 일이 벌어지고 나서야 깨닫는 걸까. 나는 그곳과 전혀 관계가 없다는 듯 천천히 뒤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김정우는 내가 한 걸음씩 멀어질 때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앞에서 돈이라도 뺏긴 사람처럼 나를 바라봤다. 백제 성왕이 한강 뺏길 때 저런 얼굴이었을 것 같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 어마어마한 얼굴을 앞에두고 손을 흔드는 것으로 대답했다. 우리 뭐든 둘 중 한 명은 살아야 하지 않겠니. 내가 거기에 가서 뭘 하겠어. 너를 어떻게 구하겠어. 나 아무 것도 없는데.

 

 

 

"근데 진짜 신기하다. 충만씨도 할아버지가 직접 하시는 걸 본 적이 있어요?"

"아무래도 하하, 그렇죠…."

 

 

 

 김정우는 결코 싫다던 필충만씨가 되어 한층 더 기계적으로 대답을 내뱉었다. 눈에 초점이라고는 없었다. AI를 가져다놔도 그것보다는 성의있을 듯…. 




"아무래도… 하하 그러는 편이 좋죠."




 뭐가 아무래도 인지, 어떤 편이 좋은 건지는 알 수 없다. 김정우가 자기에 대해, 아니 필충만에 대해 구라를 엄청나게 친 것이 틀림없다. 감당할 수 없는 구라는 치지 않는 것이거늘. 김정우의 반쯤 포기한 것 같은 얼굴이 주먹만 하게 보일 때까지 천천히 뒷걸음질 쳤을까, 등에 맞닿는 촉감에 서둘러 몸을 돌렸다. 어, 뭐야. 아 죄송해요.




"아 괜찮아요."

"대표님…?"

 

 

 

 대표님이 왜 여기서 나와. 문대표가 자상하게 웃으며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화려한 머리를 시원하게 넘기고 있었고, 옷은 딱 봐도 비싸 보이는 명품 맞춤 수트를 입고 있었다. 다른 점이라 하면 손에 끼워진 화려한 반지들과 그보다 더 화려해 보이는 시계 정도. 나는 뚫어지게 대표의 손목에 채워진 은색 시계를 바라보다 물었다.




"롤렉스에요?"

"그치그치."

"비싸죠?"

"이거 한정판. 전 세계 딱 다섯 개 있는 거."




 대표가 손목을 들어 올려 내게 잘 보이게 뽐낸 후에 그 손으로 코끝을 살짝 쓸어내고 큼큼 목을 다듬으며 주위를 살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나나를 한 번, 그리고 곤란해 보이는 김정우를 한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를 한 번 본 뒤에야 웨이터를 불러세워 샴페인 하나를 내게 건네고, 또 하나를 받아 손에 쥐었다. 한 번도 대표가 멋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그 과정 자체가 너무도 여유롭고 익숙해 보여서 본새가 오졌다. 태초부터 롤렉스를 쥐고 태어난 사람은 역시 달라도 뭐가 다르다. 문대표는 가볍게 목을 축인 뒤에 내게 가까이 다가서서 귓가에 속삭이듯 말을 건넸다.




"수고해."

"엇, 네…!"




 그 포스가 오죽 쩔었으면, 나도 모르게 대답이 입에서 새어 나왔다. 문대표 진심 그렇게 안 봤는데 대표는 대표구나. 포스가 그냥 와…. 걸어가는 그 뒷모습까지도 부내가 철철나는게. 나는 문대표가 다른 사람과 대화를 시작할 때까지 바라보고 있다가, 나를 부르는 김정우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김정우만 아니었어도 넋을 잃고 하루종일 문대표 뒤꽁무니만 쫓았을지도 몰랐다.




-“야 너 진짜.”

"끝났니."

-"진짜 치사하게 버리고 가는 거 있어?"



 
 우리 우정이 그 정도뿐이야? 난 너한테 뭐야. 김정우의 말에 귀를 후볐다. 우리 우정 당신이 이 작전에 나를 끌어들였을 때부터 난장판 났습니다만. 하지만 가끔은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것도 있으니까. 나는 입에 침 하나 안 바르고 김정우를 향해 허물뿐인 말들을 건넸다. 아유, 아니지.




"너는 내 베프야."




 그 말에 이쪽으로 걸어오던 김정우가 나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않는 듯 풉, 하고 입을 틀어막은 뒤에 한참을 그렇게 낄낄대다가곧 정신이 들었는지 입을 쭉 앞으로 빼놓고 툴툴댔다. 도대체 어디에 장단을 맞춰야 할지. 그래서 네 심리상태가 어떤 건데.




"그런 표정으로 말하면 잘도 믿겠다."

"진심이야."




 성큼 걸어온 김정우가 내 손에 있던 샴페인을 가져가 목을 축이며 나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어떤 거 같아? 잘되고 있는 거 같아. 그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그제서야 김정우를 뱅뱅 감싸고 있던 이들의 존재가 떠올랐다. 아! 소리를 내며 김정우를 돌아보자, 그가 눈썹을 으쓱이며 대답했다.




"왜?"

"너 아까 뭐야."


"그건 모르지, 나도."




 하, 나 진짜 힘들었어. 김정우가 고개를 축 늘어뜨리고 앓는 소리를 냈다. 아, 진짜 그냥 뛰쳐나오고 싶었어. 김정우가 그러고 있는 걸 보고 있으니 약간 양심이라는 게 찔리는 것 같기도 하고. 명명백백히, 조금의 변명의 여지도 없이 그의 구조 신호를 무시했다 보니. 그냥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를 건넸다. 네가 너무 잘생겨서 그런 거지 뭐. 조금 기분이 나아지라고 아부 섞인 말도 늘어놨다. 이게 미남의 숙명이지 않겠니? 그에 흠, 소리를 내던 김정우가 어깨를 뒤로 젖히면서 구부정했던 몸을 바르게 폈다.




"그런 감이 없지 않아 있지."

"그치그치."




 김정우가 가져갔던 샴페인을 다시 가져와 입을 축였다. 이게 맨정신으로 낯부끄러운 말을 내려니 영 힘든 게 아니다. 비록 그것들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기분이 나아진 것 같은 김정우는 여전히 나나와 MS 증권의 딸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로 나에게 이것저것 말했다. 그중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김정우의 이름이었던 필충만의 '필' 성씨가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보석세공 집안이었다는 거였다. 무려 4대째 내려오는 유명한 세공집안이었다며, 필충만의 고조할아버지 격 되는 어른은 고종의 브릿지도 다듬었다고 그랬다. 와, 개쩐다. 김정우는 속삭이는 목소리로 방금 전까지 자신이 겪은 고초를 설명했다. 다들 김정우가 필충만이라는 이름을 꺼내자마자 혹시 필성권 장인 댁 자제냐고 물어봤다고 한다.




"진짜 사장은 다 계획이 있구나."

"아니, 그 계획을 지만 짜면 어떡해."

"…그치그치."

"아니, 나만 진짜 당황해가지구. 완전 우스운 꼴 될 뻔했자너."

"응 그랬구나, 근데 그거 마이크 켜졌니?"


"진짜 문대표 내가 한 소리를 해야겠어. 이러면 안되지. 우리 놀리려고 그런 거라니까?"

"그래, 꼭 하길 바랄게. 근데 마이크 켜졌냐고."

"내가 진짜 가만히 있으니까 가마니로 보이나…."




 나 되게 무서운 사람이걸랑? 김정우가 입술을 꽉 깨물면서 눈을 부릅떴다. 그래 무섭고 좋네, 방금 되게 한국 수달이 아니라 미국 수달 같고 그랬어. 나는 김정우의 불평에 적절히 장단을 맞춰주면서 대각선쪽으로 쭉 손을 뻗었다. 그쪽에는 지하 2층 사무실에서만 보던 화려한 머리의 그가 있었다. 내 손 끝을 향해 시선을 돌린 김정우가 헙하는 소리와 함께 입을 틀어막고 내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저기까지 들렸을까?"

"여기 들렸겠지."




 귓가를 톡톡 치니 아차 싶은지 김정우가 급히 귀를 틀어막는다. 마이크는 귀에 있는게 아닌데, 왜 거길…. 타이밍 좋게 김도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표한테 원활히 잘 전해줄게."




 김정우가 날 바라본다. 자기가 좆된 거 같냐는 얼굴이었다.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감이 없지 않아 있으니까. 귓가에서는 김도영 목소리 다음으로 동혁이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우와, 형 멋있다~ 하는데 전혀 그 말에 존경과 진심이 없다. 그저 김정우를 놀리려는 목적이 분명했다. 쯧쯧, 그러게 허튼 말을 왜 해서는. 너 그거 약점 잡힌거야. 혀를 차니 약을 치느라 바쁜 나나 또한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한 마디 거들었다.




-"형이 우리 월급 인상 시켜주는 거야?"




 사뭇 진지해 보이는 김정우는 마이크를 끄는 것으로 모든 답을 대신했다. 당장이라도 연회장을 나간다는 걸 뜯어말리느라 고생을 좀 했다. 괜찮아, 네가 뭘 했어. 그 정도면 뒷담도 아니야! 내 친구는 부장한테 갠톡으로 부장 좆같다고 문자 보냈는데 아직 잘 다니고 있어!!




"그 친구 괜찮대?"

"응."

"진짜?"

"매일 부장이 투명인간 취급 하는 것만 빼면…."

"거봐!"




 난 이제 투명인간 신세가 될 거야…! 나는 김정우의 허리춤을 단단히 붙잡으며 당장이라도 창문으로 뛰어내릴 법한 그를 말렸다. 야, 너 27층 매달려봤다고, 5층은 우스운 거니. 여기서 떨어지면 최소 골절이란 말이다. 그때, 또 한 번 나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까지 나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것을 고려한다면 꽤나 중요한 상황임이 분명했다.




-"그럴까요?"




 방금까지 발버둥을 치던 김정우도, 작게 웃음을 흘리던 동혁이와 제노도 모두 행동을 멈추고 나나의 목소리 하나에만 집중했다. 김정우와 시선을 주고받고, 방금까지 나나가 있었던 곳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나는 우리를 보자마자 천천히 눈을 맞추더니, 곧 타깃인 MS증권 딸이 내려놓은 샴페인 잔을 바라봤다. 대충 자기가 나가면 가져가라는 뜻 같아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여긴 사람이 너무 많죠."


 

 

 나나가 가볍게 타깃의 등을 돌려세우며 걸어갔다. 또각대는 나나의 구둣발 소리와 말소리가 단자를 통해 진동했다. 나나와 대표가 시킨 대로 타깃의 지문이 묻은 샴페인 잔이라도 확보를 한다면 마음이 편할 거 같아서 그 어느 때보다도 저 잔 하나가 절실했다. 두 사람의 뒷모습이 어느정도 멀어졌을 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맞은 편에 있던 김정우 역시도 걸음을 옮겼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연이어 사과를 건네면서 오직 테이블 위에 올려둔 잔에 시선을 고정해둔 채로 사람들 사이를 짚고 걸어 나갔다. 혹여 놓치기라도 한다면, 상상조차 하기 싫다. 김도영은 어쩔거야. 아, 문대표는 또 어쩔거야. 여전히 귀에서는 나나와 타깃의 말소리가 들렸다. 가까운 곳으로 자리를 옮기려는지, 그럼 밑에 있는 바에 갈까요?- 하고 말했다.




"어어-"




 저거 가져가면 안 되는데…! 순간 시야에 들어온 웨이터의 모습에 더욱 다급히 발을 움직이고 있을 때, 알맞은 타이밍으로 도착한 김정우가 손등으로 잔의 동그란 베이스 부분을 꾹 누르고 생긋 웃었다. 그의 숨소리는 꽤 거칠었으며, 이 기막힌 타이밍에 자기도 쫄리긴 했던 건지 후우- 하고 깊은 숨을 쉬었다. 김정우는 그제야 큰 쟁반을 들고 있는 웨이터를 향해 몸을 돌리며 눈을 맞추고는 한 손으로 얼굴에 부채질을 했다.




"아직 덜 마셔서요."

"아, 네."


"여기 샴페인 맛집이네요."




 그만해, 이제.




"진짜 너무 맛있어가지고. 이거 어떤 샴페인인지 알 수 있을까요?"




 그만하라고.




"…지배인님 불러드릴까요?"

"아뇨, 그럴 수는 없죠. 근데 샴페인이 진짜 와~"

"…."

"인생 샴페인 등극. 완전 짱맛."




 결국 엄지까지 세우고 만 김정우를 바라보고 있다가, 웨이터분이 자리를 옮기고 나서야 그곳으로 걸어갔다. 김정우는 대단한 일을 해낸 사람처럼 심장을 부여잡고 헉헉대며 숨을 내뱉었다. 장하다는 의미로 그의 등을 토닥여주니,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얼마나 자신이 무서웠는지, 또 자신이 얼마나 빨랐는지, 자기가 미처 이 잔을 잡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 지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놨다.




"나나가 폰 가져왔겠지…."

"뭐든 클래식이 진짜거든?"




 김정우는 재킷 안 주머니에서 내가 세바스찬 같다고 놀렸던 흰 장갑을 꺼내 손에 끼운 뒤 잔의 손잡이 부분인 스텝의 끄트머리를 조심스레 쥐고 재킷으로 가리면서 나를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이제 잔을 보관할 비상구까지는 내가 앞장 서서 전담 마크를 하라는 것 같았다. 타이밍 좋게 제노가 입을 열었다. 지금 서 있는 쪽에서 우측으로 돌아요.




-"우측이요. 젓가락 쥐는 쪽."

"미안, 이걸 헷갈리네."




 긴장해서 그래. 나 원래 오른쪽, 왼쪽 잘 구분하는 사람인데. 제노는 초등학교 선생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천천히 우리를 기다려주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CCTV 화면으로 보고 있는 거 같았다. 누나 그쪽에서 한 걸음 더 가요. 네, 그리로 나가면 돼요. 거기 맞아요. 그 복도로 쭉 직진이요. 이제 스탑. 왼쪽. 잘했어요. 안으로 들어가면 돼요. 아무래도 적성은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교사가 딱인 것 같다. 같은 시각, 김정우는 내 뒤를 졸졸 따라오다가도 사람이 지나가기만 하면 뻣뻣하게 굳어서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아 진짜 다시는 못하겠어."

"누구는. 내가 이 짓 한 번만 더 하면 인간도 아니다."




 내가 무릎을 꿇고 비상구 안 소화전 안에서 검은 가방을 꺼낼 때까지 무슨 미어캣마냥 고개를 휙휙 돌려가며 경계태세를 늦추지 않았다. 비록 그의 입은 쉴 세 없이 불평을 내뱉었지만, 눈빛 하나만큼은 살아있었다. 그 누구에게도 잡아먹히지 않겠다는 그 정열의 의지가 담겨져 있는 것 같았다. 




"나 진짜 환상의 타이밍."

"응 그래."

"와 좀만 늦었어 봐."




 저거 또 몇날며칠을 우려먹을까. 나는 아무쪼록 나나가 원래의 계획대로 그 여자의 휴대폰을 훔쳐 와 그 안에 있는 생체인식 정보를 해킹하는 쪽으로 이야기가 이어지길 간절히 빌었다.




"분말."

"여기."




 김정우는 조심히 품 안에서 잔을 꺼내 들고 자연스레 가방 안에 있던 분말통을 쥐어 그 위에 뿌려댔다. 그 뒤 골고루 잔에 발린 것을 확인한 다음, 후- 하고 미처 떨어지지 못한 분말을 불며 혹여 훼손되기라도 할까 조심히 붓질을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분말가루가 달라붙은 잔에는 붓이 지나갈 때면 여실히 여자의 손자국이 드러났고, 그는 그것들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나를 향해 이게 엄지같지? 하고 물어봤다. 대충 잔을 쥐어보는 시늉을 하며 응, 그게 엄지하고 답을 해주니 붓을 내려놓는다. 




"테이프."

"여기."




 나는 실제로 지문을 체취하는 걸 보는 게 처음이라 그저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가 김정우가 붓- 하고 말하면 붓을 줬고, 테이프- 하면 붓을 건네받고 테이프를 건네줬다. 김정우가 그 어느 때보다도 신중하게 테이프를 가져다 댄다.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망하는 거라고 심호흡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용지."

"엉."




 김정우는 빈 공간이 생기지 않게 조심히 테이프를 붙이고는 혹여 빠지는 곳이 없나 꼼꼼히 확인까지 마친 뒤에 테이프를 떼어내 흰 용지 위에 붙였다. 빨간 알루미늄 가루를 먹어 조금은 스산한 분위기가 풍겼지만, 무사히 주어진 일을 했다고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엄지 다음으로는 검지, 그리고 새끼손가락까지. 몇 개는 모양이 제대로 안 나와 있긴 했지만, 김도영이 우선은 엄지만 확보해도 잘한 거라고 했다.




"이것도 들고가?"

"들고 가는 게 낫지 않아?"

"안에 샴페인 남았는데."

"먹을까?"

"가루 들어갔잖아."




 그럼 뭐 어쩌라고. 김정우가 당혹스러운 모양새로 나를 한 번, 샴페인을 한 번 바라본다. 그리고는 굳게 닫혀있는 창문을 쳐다봤다. 그 의미를 알 것도 같아서 일단 반대하고 봤다. 야, 위에서 뭐 버리는 거 범죄야.




"액첸데?"

"화장실 가던가."

"이걸 들고? 우리 지금 범죄 중인데."




 맞말하네. 나는 결국 알겠다는 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김정우가 꽤나 신난 얼굴로 계단을 내려가 끙끙대며 문을 열었다. 나는 가방을 챙겨 그 뒤를 뒤따라 내려가며 샴페인이 바람을 따라 휘날리는 것을 바라봤다. 그래, 어차피 액체는 괜찮다니까- 하는 김정우의 말에 상대해주기가 귀찮아서 그냥 네 말이 맞아~ 하고 넘겼다. 안에 남은 샴페인까지 탈탈 털어낸 김정우가 내가 들고 온 가방을 열어 그 안에 샴페인 잔을 넣고 단단히 걸어 잠근다.




"나는 정말 우리가 자랑스러워."

"나도 내가 정말 자랑스럽다."

"한 번 안을까?"

"굳이?"




 그때 위에서 철컥이며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김정우와 나는 동그랗게 눈을 뜬 상태로 서로를 한 번 바라보며 지금 당장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지를 두고 우왕좌왕 댔다. 뭐야, 원래 호텔에서도 계단 써? 안 쓰지 않아? 우리 지금? 어디로 가?? 정신 사나운 나보다 더욱 정신 사나워 보이는 김정우는 제노야, 제노야- 하고 하나뿐인 구원자를 그렇게 불렀다.




"안고 있을까?"

"왜?"

"아니, 뭐 밀회 느낌으로다가."




 쿵쿵대며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리자 냅다 김정우를 껴안았다. 상대가 우리 쪽을 향해 내려올 때마다 계단에 비상등이 번쩍였다. 그게 마치 천국의 계단 같았다. 그 천국은 내가 아는 천국은 아니겠지. 김정우가 어색하게 내 어깨 위로 손을 두르며 제발, 제발하고 읊조렸다. 야, 나도 같은 마음이거든. 나는 눈을 꼭 감은 채로 더욱 김정우의 허리춤을 강하게 끌어당기며 다 된 밥에 코 빠트리는 일이 없기를 빌었다.




"둘이 모해~?"

"…."

"Is this a goodbye hug?"




 목소리에 감고 있던 눈을 슬쩍 떴다. 계단에서 내려온 이는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검은 옷을 입었으며, 검은 워커까지 신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굉장히 익숙한 목소리와 말투였다는 거다. 김정우와 나는 끝까지 서로를 꽉 껴안고 있다가 상대가 모자를 벗어 얼굴을 보이고 나서야 서로를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이것 참 민망한 걸. 아니, 우리가 안고 있었다는 거 말고 겁 먹었던 게. 너무 멋없이 겁먹지 않았나 싶어. 사람이 깡이라는 것도 있어야 하는데.




"나랑은 Hi hug?"

"하이 허그 같은 개소리하고 있네."

"응? 뭐라고?"

"여기서 보니 너무 반갑다."

"그치~ Me too~"




 오늘 둘 다 멋있다. You look great! 으응…. 반갑게 팔을 벌리는 마크를 머쓱하게 만들 순 없어서, 얼떨떨하게 안겼다. 그는 나 다음에 김정우랑도 기쁘게 껴안아 인사를 나눴다. 




"근데, 너 왜…?"




 일단 인사는 했다만 도대체 얘가 왜 여기에 있는 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어서 여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건지 김정우가 얼굴이 떨어져라 머리를 흔들어재꼈다. 그러니까, 너 여기 무슨 일이야? 그런데 우리의 질문에 당황스러운 건 오히려 마크 쪽인지, 마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 나? 그러니까 나? 하고 연달아 물었다.




"엉."



"내가 이거 가져가기로 했자나~"

"언제부터?"

"처음부터!"




 마크도 나름 사람이 있어서 놀랬다고 했다. 당연히 이미 일을 끝내고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놀라야 할 쪽은 자기라는 듯 제법 진정성있는 눈빛으로 호소했다. 




"근데 이제야 온 거야? 대박쓰." 




 그제서야 조용하던 본부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숨이 넘어가라 웃으면서 아 마크형, 아 마크형 하고 테스형을 부르듯 울부짖었다.




"너 시발 동혁이니?"




 근데 그 방정맞은 웃음소리만으로 자꾸만 머릿속에서 인물 하나가 떠올랐다.




-"누나 전 말해주자고 했어요."

"제노는 나가 있어, 뒤지기 싫으면."




 제노는 푸흐흐- 하고 웃으며 대답을 회피했다. 차마 동혁이를 내놓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의리 있는 제노를 등에 업은 동혁이는 이제야 숨을 골랐다. 제노의 목소리에 이어 아, 개웃겨 하는 목소리도 빠지지 않고 들렸기 때문에 놓치지 않고 알 수 있었다. 가만안도. 내가 회사만 가면 진짜 가만안도. 이동혁 쟤가 겁에 떠는 우리를 처참하게 비웃으며 알려주지 말자고 한 게 분명하다. 분명 계단으로 마크가 오는 걸 CCTV를 통해 봤을 텐데. 하나 뿐인 팀원이 이래도 되는 건지. 배신감에 치가 떨린다.




"이거 저 줘요."

"어, 그래."




 동혁이는 동혁이고, 우리는 일을 마무리 해야 하니까. 김정우가 마크에게 가방을 선뜻 넘겨줬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기라도 한 것처럼 가뿐한 얼굴로 머리를 정리하는 마크를 바라봤다. 응, 그래 조심히 가고~ 마크는 한 손으로 가방을 건네받으면서 우리에게 물었다.




"지금 길 막힌대요?"

"제노야 길 막혀?"




 나는 중앙에 서서 마크가 모자를 눌러쓰는 것을 봤다가 제노의 말을 곧이곧대로 전달했다. 아니, 지금 사거리 쪽은 막히는데, 뒷길은 괜찮대. 마크가 가볍게 오옹~ 하면서 끄덕이더니 우리에게 손을 들었다.




"Goodbye hug?"




 잘 나가다가 꼭.




"노 허그."




 손을 저으면서 극구 사양하며 제노와 동혁이의 웃음소리를 듣는데, 그 위로 나나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아, 그래요? 하는 소리. 일상의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같은데. 아마 실수로 마이크 부분을 눌렀겠거니 짐작했다. 마크는 순식간에 입을 다문 우리를 보며 방해가 되지 않도록 입을 뻐끔거렸다. 대충 무슨 일이냐고 묻는 것 같길래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 근데 제가 지금 안구건조라…."




 아니, 잠깐. 순식간에 손으로 내 앞을 막은 김정우가 입을 떡 벌리고 나를 바라본다. 나 역시 그를 바라보며 입을 벌렸다. 제발, 아니라고 해 줘.




"아니, 잠시만."

"왜에?"




 제발 아니라고 해, 나나야. 진짜 너도 안타깝게도 안구건조라는 병을 앓고 있다고 해줘. 그거 요즘에 누구나 다 앓고 있는 병이잖아.




-"안구건조증이 있어서 눈이 뻑뻑하네요."

"…."

-"이 놈의 안구건조… 하하."




 유감스럽게도 확실한 거 같다. 나나가 무려 세 번이나 언급한 걸 보니, 오는 길에 우리 셋이 정해뒀던 그 신호임이 틀림없다. 왜 하필, 이런 일이.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나나에게서 이런 일이. 그 신호를 말하는 쪽은 김정우 아니면 나라고 생각했는데. 눈앞이 깜깜해지는 기분이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건지 김도영이 마이크를 잡고 우리에게 물었다. 왜 무슨 일인데? 뭐야, 무슨 일 있어?




"저기. 나나가 좀…."

-"나나가 왜."

"나나가 뭐가… 곤란한 일이 생겼나봐요."




 어렵사리 말을 꺼내니 하아- 김정우가 깊게 한숨을 내쉬며 주저 앉는다. 나도 마찬가지로 주저앉고 싶었다. 이제야 짐 하나를 덜어놨는데, 컨테이너 박스로 일을 받은 듯한 기분이었다. 김도영은 한 번 알아볼게- 하는 퍽 믿음직한 말을 내놓으며 사라졌다. 이어 제노가 걱정하지 마세요- 하며 우리를 다독였다.




"저 마크…."




 형용할 수 없는 애처로운 표정으로 김정우가 이제 떠나가려던 마크의 바짓가랑이를 부여잡았다. 손에 얼굴을 묻고는 차마 안 도와주고 배길 수 없는 물기어린 목소리로 이 엄청난 상황을 설명했다. 마크도 일이 잘 돌아가고 있지 않다는 건 깨달은 모양인지, 어색하게 웃으며 무슨 일 있오? 하고 갔던 길을 되돌아왔다.




"네가 밑에 좀 가주면 안될까…?"




 진짜 양아치다.




"나? 나 아무 것도 안 들고 왔어!"

"…그래두."




 김정우는 꼭 그를 대신 보내겠다는 생각인지 말꼬리를 늘렸다. 와, 진심. 양심 어디. 하지만 다행인 것은 그만이 쓰레기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치, 네가 뭐 있는 우리보다 더 낫긴 하지."




 내가 말을 거들자 마크가 이게 농담인지, 진담인지 헷갈린다는 듯이 웃었다. 뭘 웃어. 이거 찐인데….



 

 


이어지는 내용이 궁금하세요? 포스트를 구매하고 이어지는 내용을 감상해보세요.

  • 텍스트 4 공백 제외
200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