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온 나라를 뒤집어 놓았던 왜란도 소강상태로 한시름 내려놓으려는 차, 남쪽에 틀어박혀 있던 왜군이 다시금 자리를 박차고 올라온 것은 성조가 임금이 된지도 30년이 된 해였다. 남원과 전주가 함락되고 나니 어찌어찌 넘어가나 싶었던 조정의 관료들도 허둥지둥 제집으로 돌아가 다시금 피난 짐을 남몰래 싸기 시작했고, 일이 이쯤 이르니 영의정 류성룡은 투옥 중이던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여 전쟁을 수습하려 하니 그제서야 짙은 패색에서 공세로 넘어가던 참이었다.

 

운영의 아버지 진수(晉受)는 왜군이 다시 난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그날로 집안의 재물과 가노를 모았고 임금을 지키러 한양으로 향하는 대열에 합류해서는 곧장 출발하였다. 비록 출발한 엿새째 일어난 전투에서 유탄을 맞아 죽음에 이르렀으나. 성조는 신라왕조의 후예로 나라를 지키다 순국한 그를 칭송하며 크게 슬퍼하였다고 한다. 그런 분위기 탓에 그이 아들 운영이 아버지의 공을 내려받았고 무관직에 봉해졌다. 그 관직을 수행하기 위해 한양으로 오라는 임금의 명이 온 것은 그다음 해의 일어난 일이었다.

 

운영은 일찍이 어머니를 여읜 후 옛 왕조의 특별나지 않은 후손이지만 성조의 지역 정책에 따라 앳된 얼굴에 관을 올리자마자 옹주 진(珍)과 혼인하였다. 얼굴 한번 본 적 없지만 왕을 장인으로 두게 되자 사람들은 봄 햇살에 연두 잎 싹이 절로 나듯 살아가는 그를 부러워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양에서는 몇 날 며칠을 가도 끝인 지역의 촌 양반으로 살고 있던 그에게 중앙의 관직이라니! 과거 보러 한양 한번 안 가고 뜻 없이 소일하며 동내 친구 몇과 놀던 운영이었다. 


갑자기 서울에 벼슬 살러 간다고 하니 아버지를 잃은 슬픔 3년 상의 여운 중에서 뜻밖의 출세를 하자 주변에서는 그를 아들(子) 운영이라 질시를 섞어 칭하였다. 그것도 잠시 이런 촌에서 한양까지 관직 하러 가는 이가 여태까지 몇이나 있었겠는가 금세 몇 날을 잔치가 거듭 이어지며 공짜 술과 음식이나 먹으려는 사람들로 방문객이 가득해 연일 소란스러웠다. 그것도 이제 내일이면 정말이지 출발해야 할 터였다.

 

그날 밤늦게 운영은 집 한켠에서 마지막 이별의 자리를 마련했다. 그의 손위 사촌 시영과 친구 한 명이 다인 작은 술자리였다.

 

"운영 자네가 여길 떠나 한양으로 가게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황망하지만 축하하네."

 

자기와 같이 며칠 전까지도 재미로 개울에 돌이나 던지던 운영이 떠난다고 하니 동갑내기 친구인 자형은 아직도 이 상황이 이상한지 연거푸 술잔을 채웠고 이미 반쯤 취한 듯 보였다.

 

"축하는 무슨.. 한양이 뭐 별건가 자기가 살던 곳이 최고지 자네들도 없고 가고 싶지 않다만 왕명을 거절하면 어떻게 될지.. 두려워 그럴 수도 없다네"

 

친구의 부러움과는 다르게 내키지 않는 운영은 의기소침하여 술잔을 툭툭 치며 반응했다. 그런 둘과 함께 앉은 손위 사촌은 별다른 감흥이 없는지 동그랗게 밝은 달을 가끔 쳐다보며 둘의 잔이 비면 슬쩍 채워주기나 하였다.

 

"그건 그렇고 운영 너 떄문데 향월이가 병이나서 자리에 누웠다고 하지 않는냐."

 

갑자기 분위기가 침체되어 조용히 풀벌레가 우는 소리만 주변에 가득하자 화제를 전환하려 둥근 얼굴의 동무가 위로랍시고 입을 열어 한마디를 했다. 지방 양반이래도 가꾸지 않은 걸 감안하면 꽤 준수한 외모를 가진 운영이기에  넉살좋은 성격도 한몫하여 동내 여인들에게는 꽤 인기가 있었다. 갑자기 튀어나온 이야기에 운영은 술이 목에 걸린듯 켁켁 거리기 시작했다.


사촌은 그 과장된 반응을 보더니 웃음을 섞어 운영의 등을 한대 치었다. 그가 최근에 공을 들이고 있던 만월루의 기녀 향월은 소식을 듣고 충격으로 자리에 누웠다는 주제로 이야기가 새로이 시작되었다.자형은 내심 향월에 대한 사심이 있었던 터라 경쟁자가 떠나는 거라 생각하니 울적했던 마음이 조금 덜어지는 듯했다.

그러던 중에 향월의 가노가 이별의 정표로 보내온 운영의 이름이 자수 놓인 수건이 도착하였다. 자못 점잖은 성격으로 보이던 사촌은 자고 있던 개가 놀라 깨서 짓을 정도로 큰 소리로 웃어제꼈다 운영은 민망함에 검은 얼굴이 붉은 기가 더해져서는 더욱 검하여 밤 배경에 묻혀버릴 지경이었다.

 

"그거 눈물이라도 묻어있어서 가지고 가시기에 불편하지 않으시겠나? 부인께서 보시면 큰일이 날 텐데?"


"하아.... 자형, 놀리지 마시게. 안 그래도, 내 부인에게는 모르게 하고 있지 않는가."


"네가, 향월에게 공을 들이고 있다는 걸 이 좁은 고을에 서당 집에 늙은개도 아는 사실인데 부인께서 모르시겠나."

 

"에? 형님은 그런 걸 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네가 호색하다는 평판이 하루 이틀 일이냐. 정작 네가 몰랐다는 사실이 나는 더 놀랍구나."

 

그의 부재중에 대신 집을 맡아서 돌보아줄 사촌이었다. 짐짓 점잖은 척을 하고 있던 운영에게 시영이 정색하며 말하자 민망해졌다. 운영은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젓가락으로 괜히 음식을 뒤적거렸다.

 

그런 그들의 왁자한 대화이기에 그리 크지도 않은 집에서 운영의 부인이 거주하는 곳까지 그 소리가 미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달은 올려다보니 만월이라 정원에 있는 풀벌레의 움직임까지 훤하게 보이게 밝았다. 그런 정원의 풍경을 가만히 보고 있는 이가 운영의 처인 이진(李珍) 이었다. 그의 부인이지만 그녀가 따로 손님을 맞아 응대할 일도 그런 적도 없기에 그녀는 잠에 들기 전 복장을 하고는 머리도 이미 풀어 편안한 모습이었다. 아무런 표정도 없이 나앉아 있는 진에게 간혹 가을바람과 귀뚜라미 소리가 섞어서 들어왔다.

 

어린 나이에 혼사한 남편은 첫 만남부터 자신을 어려워했다. 왕의 자녀이지만 낮은 서열의 옹주로 그저 궁궐에서 살아봤다는 것 외에는 특별할게 없다고 생각했다.

 

'오죽했으면 이런 먼 지방의 별 볼 일 없는 자에게 시집을 보냈겠는가..'

 

시댁의 사람부터 주변의 이들은 그녀를 공경하여 대했지만 특별히 가까이 다가오는 경우도 없었다. 힘없는 옹주라고 해도 왕의 가족이니 어떤 잘못으로 책이 잡힐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호색한으로 온 동내에 소문난 남편이 가끔씩 그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서 형식적으로 가끔 들렀다 갈 뿐이었다. 궁에서 함께 내려온 궁녀 소아만이 가장 가까운 사람일 뿐이었다. 그런 그녀도 궁에서만 생활해본 터라 진보다는 낫지만 마음을 터놓은 친구를 많이 사귀지는 못하였다.

 

이번 남편의 한양행이 결정되었을 때 진은 운영이 자신을 두고 상경할 것일라 짐작했었다.

 

'괜한 기대를 해서 마음을 상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런 그가 자신을 찾아와 "부부는 따로 기거할 수 없다" 라는 이유를 들어 한양행을 통보하였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크게 놀랐었다.

 

'다시 어머니를 만날 수 있다니.. 같은 도성에서 살 수 있다니..'

 

모든 왕의 여식들이 정치적 상황에 따라 중요한 혼처로 정해져 가지만 그들이 모두 한양에서 먼 곳으로 가는 것은 아니었다. 왕이 사랑하는 아이일수록 오히려 도성의 권력자에게 결혼을 시키곤 했다. 이진이 경주 땅으로 떠난다고 했을 때 그 어머니의 상심이 얼마나 컸는가! 본인의 힘이 없어서 이렇게 되었다고 자책하던 그녀의 눈물이 생각나서,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진의 마음에 슬픔이 낮게 차오르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번 한양 벼슬 건은 어머니가 자신을 보고 싶은 마음에 주도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아.. 어머니!"

 

조용한 하루하루 가운데 가족에 대한 그리움 외에 그녀는 딱히 원하는 바도 없었다. 매일 보던 서늘한 달의 빛이 오늘은 모처럼 따뜻한 반가움으로 보였다.

 

궁에서 따라온 가솔들도 그 친구와 가족들을 만날 생각에 들떠있었다. 짐을 쌓았다 풀었다 다시 싸는지 밤부터 새벽까지 집안 밖은 작은 소음들로 가득 찾고, 덩달아 작은 짐승들조차 잠을 못 이루어 내내 소란스러웠다. 진은 내일부터 시작될 여행길이 무척 길 것을 알기에 잠을 청하려 자리에 누웠다.

 

'금방 다시 쫓겨오게 될지도... 혹은 얼마나 걸릴지 모를 일이다. '

 

지난 몇 년간 나라에 일어난 풍화는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것을 변화 시키고 영원히 존재할 거 같은 이도, 오래 살아갈 사람들도 어느새 데려가 버렸다.

이진은 어느새 마음에 아무것도 담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래도 오래 거주하여 또 다른 정이 들어버린 자신의 처소를 한번 둘러보다 작은 은색 나비 장식에 눈이 갔다. 별것도 아닌 추억이 또 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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