惠氷傳



十一話



밤벌레 우는 소리가 크게 들리는 밤이었다. 창호 밖으로 환한 보름달 빛이 비쳐들어오고 있었다.

서늘한 냉기가 바닥을 타고 휘감아 돌았다. 장롱 밑과 바닥 사이의 공간이 유독 깊고 어두워 보였다.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으면, 곧 어둑시니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혜빙과 각방을 쓴지 나흘째였다. 


"…."


한림은 여러 번 이불 속에서 뒤척였다. 

베개에 머리를 대면 바로 잠이 왔던 시절이 언제 적인지. 오랜만에 홀로 이불을 덮고 누운 것이건만 마음이 놓이긴커녕 허하기 그지없었다. 

고개를 돌려 옆자리에 코를 묻어보았다. 


'…냄새도 사라졌다.'


신부를 맞이했던 게 거짓말 같았다. 혜빙은 모든 걸 챙겨 들고 건넌방으로 가버렸다.


건넌방은 안방보다도 좁은 곳이었다. 옛날 옛적, 한림이 막 태어나 유랑의 젖을 먹을 시절에 그 방에서 함께 지냈다. 그 방에서 한림 나이 6세가 될 때까지 지냈다. 

몇 개의 장롱을 제외하고는 비어있는 방이었다. 손님이 방문하는 날엔 별채에서 지내게 했기에 건넌방은 그보다도 쓰임이 적은 곳이었다. 보료도, 화장대도 없는 곳에서. 용케도 며칠을 지내는구나 싶었다.



그날 이후 혜빙은 두문불출하고 서책을 읽거나, 거문고를 손질하거나 자수를 연습하거나 했다. 

한림이 퇴청할 적엔 물론이요, 바깥손님이 온다고 하여도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마중 나오지 않았다. 한림에게 전하는 모든 말은 유랑을 통했다.

동료 관리들은 신혼이라고 집에 초대도 안 해 주냐, 부인과 인사도 못 하게 하느냐 성화였다. 부인이 아프다는 핑계를 들어 전부 거절했다. 


유씨 부인을 비롯해 부인회 사람들과는 서신을 활발히 주고받는 듯했다. 

종종 남장을 하거나 속저고리, 속바지만 입고 나무에 덜렁 기대앉아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떨 땐 그냥 난간에 기대있기도 했다. 그러다 한림과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도로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정말 말을 안 듣는 사람이었다. 천방지축이야. 

빈 옆자리를 손으로 쓸며, 한림은 바닥이 꺼져라 한숨을 푹 쉬었다. 


이런 게 뭐가 지기란 말인가. 

있는 속을 솔직하게 터놓고 지낸다 해도, 사람이 안 맞으면 별수 없지 않은가. 


신혼 첫날밤, 제 손을 붙잡고 눈을 빛내던 혜빙을 떠올렸다. 

그때 혜빙은 아름답게 눈을 반짝이며, 자신과 좋은 지기가 될 수 있을 거란 기대로 혼인한다고 말했다. 


솔직하게 되짚어보자면

한림은 그 이상도 가능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것 같았다.


'좋은 부인이 될 수도 있었을 사람이다.'


대내상에게 답했던 것에 거짓은 없었다. 

혜빙은 이야기가 잘 통했고, 교양 있고, 아름다웠다. 

입을 다물면 얼핏 설녀와도 같이 매서워 보이지만, 실상은 올바르고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올바르지 못한 것에 대해 바로 말을 꺼낼 수 있는 것은 그만큼 담대하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자신이 옹졸하여, 훌륭한 부인의 속을 긁어놓는 것일 수도 있겠다.


"……."


실은 그날, 당숙의 그 표정, 그 말에서 치욕을 느꼈음을 부정하지 않겠다. 그날 혜빙이 느꼈을 분노, 슬픔이 무엇인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혜빙의 편을 들어주었어야 했나.'


가급적 뭐든 해주고 싶었다.

자신과 함께하면 훨씬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겠다고 했다. 그렇게 말해준 여인에게, 하기 싫은 걸 억지로 강요하기는 싫었다. 

들어줄 수 있는 건 그게 뭐든 들어주고 싶었다. 갖고 싶은 것, 누리고 싶은 것, 그게 뭐든 한림이 줄 수 있는 것이라면.


'아냐.'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에 대해서 한정이었다. 


'그 상황에서 혜빙을 막지 않았더라면 더 큰 일로 번질 수도 있었다. 똑똑한 사람이 어찌 거기까지 예상하지 못한단 말인가?'


함께 비밀을 지키기로 맹세했다면, 겉으로는 순종적인 태도를 보여야 의심을 피할 수 있을 게 아닌가. 그때 내 태도가 과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래서 상처라도 받았단 말인가?

이해할 수 없었다. 원래 여염집 아녀자들은 다 이렇게 감성적인가? 

정말 남녀는 날 적부터 차이가 있어, 여인은 장부보다 속이 좁을 수밖에 없는 것인가?


"끙…."


혜빙에게 꼬집힌 엉덩이를 슬쩍 쓸어보았다. 

얼마나 세게 꼬집혔는지, 여태 욱신거렸다. 틀림없이 멍이 들었으리라. 

무슨 손의 힘이 그렇게 세단 말인가. 악기를 연주하는 손이어서 그렇게 우악스럽단 말인가?



달이 밝았다. 그대로 잠들기엔 아까운 밤이었다.

얇은 포 하나를 걸치고 안뜰로 나왔다. 날씨가 완연히 따뜻해져, 밤이 되어도 춥지 않았다. 


가득 찼던 달은 하현으로 기울고 있었다.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었다.

바람은 스산히 불고 벌레가 울었다. 어느 풀 틈에서 저리도 구슬피 우는 것인지.


배롱나무 쪽을 돌아보았다. 곧 있으면 저기에도 분홍 꽃이 완연히 필 터였다. 

저기 앉아 책을 읽으면 몰입이 잘 되는가? 한 번도 그래 보질 않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무를 더 능숙하게 타게 될 줄 안다면, 자유자재로 올라가고 싶을 때 올라가서 볼 수 있는 거겠지. 

남의 눈 신경 쓰지 않고, 나뭇잎과 가지에 가려. 그곳에 있는 듯, 없는 듯한 그림자가 되어.


꽃 그림자 사이로 일렁일렁 둥근 미소가 떠올랐다. 

한림을 보더니, 꽃 냄새 자욱이 풍기는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착지하고.

품에 불쑥 안겨서 어지럽게 자신을 희롱했다. 한참 안고 웃었다. 


"꽃 없는 나무에서도 향기가 나는가."


배롱나무를 짚고 올려다보았다. 혜빙이 자주 앉는 가지가 있었다. 


한림이 기척을 죽이고 다가가면, 그걸 알아차리고는 휙 뛰어내려서 건넌방으로 가버렸다. 그리고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일부러 와달라는 듯이 바깥에 나와 있었으면서, 막상 가면 자리를 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무에 이마를 대고 기댔다. 눈을 감고 가만히 숨을 들이쉬니, 정말 시원한 꽃향기가 나는 듯했다.


혜빙의 몸에서 나는 냄새와도 같았다. 한 이불을 덮고 잠들면, 맡을 수 있는 그 냄새. 

동그란 어깨와, 오동통한 입술과, 작은 숨소리.


"…읏."


얼굴이 달아올랐다. 목이 뜨거워져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이 정염의 정체가 무엇인지, 아직 한림은 알 길이 없었다. 

나무껍질에 코를 묻고 숨을 들이켜니 진한 꽃향기가 아찔하게 올라왔다. 갈증이 일었다.

어른거리는 환상을, 끄무레하게 뜬 눈이 쫓아갔다. 


어쩌라는 것인가. 혜빙 앞에서는 호기롭게 말했으나, 이제 와 여자가 될 용기도 없고, 될 수도 없었다. 

답답하나 속으로 우짖는 일밖에 하지 못했다. 한림은 눈을 질끈 감았다.



환상이 떠올랐다. 


자신을 덮치던 검은 인영, 

진한 피 냄새, 

그리고 맹수의 서슬 퍼런 눈빛이.


어뜩어뜩, 온 신경이 곤두세워졌다. 

다른 걸 생각할 겨를 따위 없었다. 자신이 가야 할 길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 탄식과 함께.

서늘한 전율이 척수를 타고 달리고 나니 정신이 들었다. 


"… 운이 좋았지."


하나만 가지고 있을 적엔 하나만 쥐고 있으면 되었다. 그거 하나만이라도 지키려 한다면 해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갖고 싶은 것이 하나 더 생겼다. 평생의 지기를 잃고 싶지 않아서. 

다루지 못할 것에 손을 댔다가 가진 것을 모조리 잃을 바에야, 일찍 포기하는 것이 나았다. 

그런데도 아직 욕심이 드는 이유는. 

제 오만일까, 아니면 미련일까. 

아니면….





다시 안방으로 돌아가려던 때였다. 눈을 가늘게 떴다. 

마루에 누군가 걸터앉아있었다. 


처사 같이 풀어 헤친 머리에, 전번과 같이 고쟁이에 얇은 포만 걸쳐 입고. 밤하늘의 달을 무감하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혜빙."


기다렸다는 듯, 부르기도 전에 시선을 맞추어 온 것 같았다. 안 그래도 푸르던 눈이, 푸른 달빛을 받아 더욱 시려 보였다. 


"왜 여태 안 자고 있습니까."


대답을 하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그건 제가 묻고 싶습니다. 서성이는 소리 때문에 깼지 않습니까."

"혜빙은 남으로 하여금 미안하게 만드는데 재주가 있는 것 같습니다."

"말씀이 해괴합니다. 미안하다는 겁니까, 아니라는 겁니까."

"미안합니다."

"………."

"제가 걷는 소리가 그리도 시끄러웠습니까?"


혜빙은 등을 구부정하게 하고, 손으로 턱을 받치며 골똘히 생각하는 체하였다.


"걷는 소리는 시끄럽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한림이 머리 굴리는 소리가 시끄러웠지요."


한림이 옆에 함께 걸터앉으려 하니 혜빙이 멀찍이 밀어냈다. 

아직 오직 마십시오. 화 안 풀렸습니다. 

어쩔 수 없이 떨어져 앉는 수밖에 없었다.



마루의 오른쪽 끝과 왼쪽 끝에 각각 한림과 혜빙이 앉았다. 


바람은 좀 전보다도 습하게 부는 듯하였다. 


"…제가 왜 화났는지, 이유를 아십니까."

"압니다."

"그럼 제가 왜 이러는지 그 이유는 아십니까?"

"화가 났기 때문이겠지요."

"아닙니다."


나직한 한숨 소리에 심장도 함께 오그라드는 듯하였다. 


"한림을 더는 믿지 못해서이기 때문입니다."

"………."


주먹을 꽉 쥐었다. 이런 상태로 더 보낼 수는 없었다. 


"다시 믿어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결연하게 옆을 돌아보며 물었다. 혜빙도 고개를 돌려 한림을 똑바로 응시하였다. 

바짝바짝 입이 말랐다. 


"다시 믿어주는 것을 바라신다면, 한림께서 진실한 사람으로 바뀌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 돌아온 대답은…

한림의 낯이 곤혹스러운 빛을 띄웠다.


"혜빙…."

"몇 번이나 말한 것 같은데, 저는 한림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이러는 것이 아닙니다. 지기라고 해도 밝힐 수 없는 사정이 있을 것이고요. 목숨까지 거셨으니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

"하지만 저는 한림의 수치가 되기 위해 혼인한 것이 아닙니다."


두 귀로 분명 똑똑히 들었는데,

듣고서는 무슨 뜻인지 전혀 못 알아듣겠다. 한림이 황망히 보니 혜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자는 죄인입니다. 아십니까? 모든 일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남편의 규제를 받아야만 하지요."

"어찌 그런 극단적인 생각을 하십니까?"

"이는 남자와 사는 동안엔 끊임없이 이럴 수밖에 없습니다. 하니, 남자가 되지 못한다면 인륜을 끊는 것이 차라리 옳으리라, 그리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혜빙은 혜빙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세상 모든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는, 더는 죄를 짓고 싶지 않았습니다."


바람이 부니 풍경이 잔잔히 울었다. 꽃향기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시끄러운 풀벌레의 소리가 메웠다. 

아주 오래전, 옛적부터 이 땅에서 울어왔던 소리였다.

한림이 대꾸하지 않으니, 혜빙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남은 말을 털어놓았다.  


"자유롭게 살고 싶었습니다. 죄인 아닌 자유민으로서, 동등한 인간으로서요. 그리고 한림과 혼인하면 그 자유를, 드디어 찾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한데 한림이 무엇을 하셨는지 아십니까? 저를, 저를 죄인 만드셨습니다."


목소리가 애처롭게 떨리는 듯했다. 이번에는 분노보다는 슬픔에 가득 차서.

제 신세를 한탄하고 있었다.


"…이제는, 한림을 믿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

"한림을 여자로 생각했던 제 판단이 틀렸습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위태로웠다.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건가. 

여인으로서 들었을 때 당연히 상처 될 수밖에 없는 이 말을. 



한림은, 혼례 때와 같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모를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불안한 것인가? 

무엇이? 본인의 상황이?


"한림도 이런 부인은 맞고 싶지 않으셨겠지요."


혜빙은 제 눈에서 눈물이 굴러떨어지는 줄 모르고 말했다. 흘러내리고 난 자국만 뜨거웠다.


"…하지만 저는 저의 성정을 고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나는,"

"한림도 마찬가지이시겠지요."


고치지 못하는 쪽에 가깝다면, 그것대로 안타까운 것이지만요. 

한림은 차마 부정할 수 없었다.


"우리 서로 상황이 잘 맞았다고 생각했는데요…."

"………."

"그렇지 않은 걸 수도 있겠습니다. 이제 알았으니 그걸로 된 거겠죠."


견딜 수 없이 가슴이 답답하였다. 그제야 자기가 눈물 흘리고 있음을 알았다.

한림의 입에서 어떤 대답이 나오든, 혜빙은 대꾸할 여력이 없었다. 

…서방이라는 자 앞에서 눈물 흘리고 싶지 않았다. 

한숨만을 남기고 건넌방으로 도로 들어갔다. 


공기는 서늘하고 사위가 그림자로 가득했다.





다음 날 아침,

혜빙이 유랑을 불러다 넌지시 일렀다.


"여간 답답한 게 아니구나. 이대로 지낼 순 없다."


우리 말괄량이 마님께서 또 무엇을 하실 생각이실까? 유랑이 황망히 고개를 숙였다. 


"방 가의 재산이나 불려보겠다. 이렇게 얹혀살며 먹고 놀 수만은 없는 노릇이니."

"송구하옵지만, 마님… 본디 여염집 부인의 의무는 후계 생산으로, 그 밖의 일은 집안 대소사를 주관하는 것이 있습니다. 재산을 불리는 것은 안주인의 소관이 아닙니다."

"안다. 하지만 이대로면 앞으로도 남편이 큰소리칠 때 찍소리 못할 것이지 않겠느냐."

"하면 마님…."


읽던 책을 챙겨 들고 일어났다. 혜빙이 일어나니 유랑도 황급히 뒤따랐다.


"장부를 봐야겠다. 주판도 챙겨서 서재로 오너라."

"주판을 다룰 줄 아십니까?"

"다룰 줄 알지. 그러면 지금까진 서방님이 직접 재산을 관리해왔나?"

"………."


유랑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어 아무 대답 못 하고 있기에, 혜빙이 의아해하며 뒤돌았다.


"왜 대답이 없어?"

"그것이… 소인이 관리하였습니다. 나리께서 어릴 적에 가주가 되셔서, 그때부터 제가 쭉 맡았지요."

"…근데 주판을 못 다루는 거야? 설마?"

"………."


어떻게, 이때까지 유지되어올 수 있었던 거지?

한림이 사치하는 사람이 아녔기에 망정이지…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재무 관리를 이렇게 해왔단 말인가!


"……있는 장부 없는 장부 다 가져와. 토지 대장이랑."

"…예."




12화에서 계속.



CHEON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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