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이고 꼬이는 인간관계는 진절머리가 났다.

마치 흔해 빠진 연속극처럼 에이군은 비양을 좋아하고, 비양은 씨 군을 좋아하는데, ‘오호 통재라!’스럽게도 씨 군은 디 양을 좋아하고, 이제는 될 대로 되라는 듯 디 양은 에이 군을 좋아하는 물고 물리는 듯한 꼬리를 잡은 뱀 새끼 같은 인간관계라면 정말로 넌덜머리가 났다. 그런 건 우리네 어머니들이 좋아하는 드라마에나 나오는 이야기라고 평소라면 웃어 넘겼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내가 처한 뭣 같은 상황과 똑 들어맞는다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적어도 대충 들어 맞는다고 이야기 할 수 있으니 클리셰 투성이의 드라마를 비웃을 수만은 없는 것이다.

나는 마치 한 파운트 안에 이것저것 섞어 놓아, 종래에는 다 엉망진창으로 녹아 버려 어느 것이 어느 맛인지조차 알 수 없는 베스킨라빈스 한 통같은 사랑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나는 다만 오로지 나만을 위해 콘 위에 살포시 올려진 오렌지 샤베트 같은 사랑을 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누차 말하지만 칼자루를 쥔 건 너야.”


그녀의 길다란 속눈썹이 까페의 어두침침한 주홍빛 불빛에 길게 그림자를 내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막연하게 어린 시절 ‘신기한 식물도감’에서 보았던 파리 끈끈이 주걱 따위를 떠올렸다. 물론, 그녀가 눈썹으로 파리를 잡아먹는 무시무시한 생물이라는 말은 아니다. 애초에 그녀가 파리를 잡아먹는 진귀한 인간이었다면 그녀는 이런 지리멸렬한 인간관계에 얽히기 보다는 단연코 세계의 기인 자리에 오르거나 유튜브에 동영상을 올려 떼돈을 버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을 사람이었다. 그래도 나는 빌어먹게도 그녀를 아주 사랑해 마지 않았다.

아마, 그녀가 눈썹으로 파리를 잡아올려도 나는 사랑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었다.


“너 안 어울려.”

“갑자기 그게 왠 뜬구름 잡는 소리야?”

“니 눈썹.”


아무리 내가 사랑해 마지 않는 그녀라 할지라도 나는 확실하게 말해 주어야만 했다. 뭐, 실상 그녀가 긴 눈썹을 붙이고 있는 것은 정말 어울리지 않았다. 내가 사랑하던 그녀는 짧은 단발이 밝은 갈색으로 청순하게 찰랑거리고, 커다란 두 눈을 뜬 채로 같잖은 농담에도 미친듯이 세상이 떠나가라 깔깔거렸었다. 나는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 어두침침한 지하의 까페에 어울리지 않는 새카만 속눈썹을 붙이고 세상 다 산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녀와 마주 앉아있는 것이 솔직하게 말해서 정말로 견디기 힘들었다. 그녀는 나의 말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알루미늄을 넣고 오분정도 돌린 전자렌지처럼 거친 숨을 내쉬었다.


“넌 왜 언제나 그런 식이야? 매번 우유부단!! 정말 언제나 그런 식으로 내가 말하는 건 뺀질거리면서 피해가지? 그런 식으로 피해가면 답이 나와? 너는 이 상황을 즐기는 거야?”


즐기는 식으로 보였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결코 단 한순간도 즐겁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긋지긋하고 질척질척한 뱀비늘같은 인간 관계라면 아침드라마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부터 정말 제대로 조기 교육을 받았던 나였다. 어쩌면 내가 이런 상황에 처한 것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몸소 가르쳐 주신 조기 교육의 영향인지도 몰랐다. 발에 채이는 보도 블럭 조각만큼이나 흔하디 흔한 인간 관계였고, 별다를 것도 없는 이야기지만 어린 시절부터 나는 그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사람을 망가뜨리는 지 보아왔었다.


“너 사랑한다고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잖아.”


그녀는 내게 성을 내다 못해 옆에 있던 쿠션을 잡아뜯 듯 집어 들어 던지려다가 손안에서 꾸깃거리며 중얼거리듯 말한다. 차라리 그녀가 그 쿠션을 집어 들어 쿠션 속에서 알콩달콩 살림을 차리고 있던 집 먼지 진드기들을 내 머리와 함께 일괄 소탕하는 것이 훨씬 더 그녀다웠다. 보라구, 확실히 사람을 망가뜨려가고 있잖아.

태양빛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는 루비처럼 삶에 불타오르고 의욕에 충만하던 그녀는 어울리지 않게 울음을 참아가며 나 같은 인간 앞에서 자신 없이 중얼거린다.


어머니는 언제나 자식을 잃고 해안의 절벽에서 돌이 되었다는 니오베처럼 멍하니 울리지 않는 전화통만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이제 현실인지도 확신하기 힘든 아주 오래된 옛날에 그녀는 분명 햇살처럼 웃었을진대, 내가 제대로 세상을 파악할 수 있는 나이가 될 무렵에 이미 그녀는 아테네의 화살에 맞은 것처럼 가만히 그렇게 전화 앞에 오도카니 앉아있기만 했다. 가끔 한숨을 쉬며 전화번호를 누르다가, 채 누르지 못하고 전화통을 거세게 내려놓은 채 빗물 같은 울음을 내뱉는 것이 그녀의 일과였다. 나는 분명 현상을 파악하기에는 어린 나이였지만, 오래지않아 조숙하게 현실을 직시할 수 밖에 없었다. 어린아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뭐, 스테레오 타입의 그렇고 그런 남녀지사.


“로빈은.. 분명 사랑한다고 했었단 말이야.. 너는 아니잖아..”


나미는 간헐적으로 참지 못하고 쏟아 내리는 눈물을 닦아내며 마치 고장 난 카세트 테이프처럼 계속해서 반복해서 말했다. 작은 어깨가 격렬하게 흔들리고 까페에 있던 사람들은 나를 ‘저런 나쁜 새끼’라고 쓰여진 얼굴로 바라보았지만 나는 그녀에게 아무런 말도, 어떠한 위로도 해 줄 수 없었다.

정말로 나는 보이는 대로 나쁜 새끼였기 때문이다.




 

 


“그게 너의 결론이야?”


나는 솔직히 녀석과 만나기 전에 여러 가지 가상의 상황을 생각해보고 그에 맞는 대처법을 생각해보았다. 흔히들 군대에서도 짜는 가상 시나리오를 이런 절대 절명의 상황에서 짜보지 않는다면 머리에 뇌가 아니라 해면을 들어 채웠다고 하는 편이 낫겠지. 우선 가장 유력한 상황은 녀석이 검도로 다져진 팔 근육을 풀스윙으로 휘둘러 나의 턱 쪼가리를 날리는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녀석의 흥분으로 정확도가 떨어진 풀스윙을 가뿐히 피하고 유도로 단련된 나의 무릎 찍기를 녀석의 복근에 쑤셔 박아주는 대처 방식을 꼽았다.

녀석을 쓰러뜨리고 나는 퀘퀘한 지하 술집을 사뿐하게 나가 이 지긋지긋한 순환의 고리에 마침표를 찍는 산뜻한 결말이 예상되는 시나리오였다.


“정말 그게 니가 생각하는 거야?”


두 번째로 유력한 상황은 녀석이 그야말로 내 말을 동네 하룻강아지가 한밤중에 깽깽거리는 소리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들을 가능성이었다. 이런 예상이 유력해진 이유는 녀석은 언제나 내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는 녀석이었기 때문이었다. 녀석이 내가 하는 말을 고분고분 들어주었던 적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초등학교 때도 ‘운명’을 작곡한 귀머거리 작곡가의 이름이라는 너무도 상식적인 문제에 내가 ‘베토벤’이라고 귀띔해 주었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혀언철’이라고 당당하게 적어냈던 녀석이었다. 애초에 설운도나 송대관처럼 세 글자였으면 기도 차지 않았을 것이다. 부모 말도, 선생 말도 기차게 잘듣는 어린아이였던 롤로노아 조로는 단 하나, 나의 말만큼은 청개구리가 사지를 뻗고 백기를 휘두르게 만들 만큼 제대로 뭐 하나 들어주는 게 없었던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정말 복날 개 패듯이 패서 몸으로 말귀를 알아듣게 해주기로 결심했다.

물론 나로서도 막심한 피해가 불 보듯 예상되지만 나미가 울었다는 것은 나에게는 막다른 절벽에서 잡고 있던 풀뿌리의 뿌리가 흔들거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다시는 보지말자....라...”


‘제발 사랑한다고 말하지 말아달라.’는 나의 애절한 부탁에도 녀석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녀석이 왜 나에게 사랑을 느낀 건지 정말로 궁금해져서 나는 작정을 하고 수도하듯 일주일 동안 공책을 펴놓고 그와 나 사이의 이야기를 써내려 가보려고 마음 먹은 적도 있었다. 내가 녀석에게 살갑게 대해주었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정말 기억의 밑바닥까지 박박 긁어보았지만 정말 그 비슷한 쪼가리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의 낭창낭창한 매력에 녀석이 사랑하는 마음을 숨기고 있었던 것인가-라는 내 입으로 말하기에도 민망한 가능성을 떠올리며 녀석이 그런 기색이 있었는가 또 한번 뇌를 들어내 보았지만 역시 그런 비슷한 쪼가리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일주일간 그 녀석과의 기억을 -상당히 엄청난 분량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졸업 직전까지라니- 찬찬히 적어 내려가자, 그것은 그야말로 대학노트 다섯 권 분량의 ‘싸움개들의 지치지 않는 전투기록’이라고 이름 붙여질 만한 엄청나게 하드코어한 회고록이 되어버렸다. 나는 정말 잘도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너를 좋아해. 산지. 사랑해.”


그러니까 이 녀석의 이런 점이 참으로 곤란했다. 하드코어한 생과 사를 넘나드는 격투의 기록 속에서 갑자기 이게 어디서 튀어나오는 분홍빛 하트란 말인가. 넌 지금 조용한 관현악단의 연주를 듣다가 갑자기 발가벗고 하드코어 랩을 하는 것과 같은 현상을 보이면서 -비유의 순서가 약간 앞뒤가 뒤바뀐 것 같지는 하지만 어쨌든 -나에게 이해하라는 말이냐. 녀석은 정말 도통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 황금빛의 고양이 같은 눈동자가 빤하게 내 눈을 바라본다. 깜빡이지도 않는 그 눈에 나는 숨이 턱하고 막히는 것 같아서 등골로 식은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나의 어느 점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걸까. 나는 지독하게 이기적이고, 책임지는 것이라면 언제나 내빼듯 도망쳐서 네가 말하는 사랑을 논하기에는 진절머리나게 -나 자신을 폄하하는 것은 참으로 별로지만- 말 그대로 싼 녀석이다. 언젠가 나미와 싸웠던 날 그녀는 무섭도록 냉랭한 얼굴로 ‘껍데기’라고 말했었는데, 나는 그것이 정확한 나의 본질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었다.


“넌 내가 싫어? 나를 사랑한다는 생각이 조금도 안들어?”


황금빛 눈동자는 빔이라도 내뿜어서 나를 꿰뚫어 죽일 생각인지 여간해서는 옆에서 살인이 난다고 해도 돌아보지 않을 기세였다. 로빈을 처음 본 순간부터 나는 그녀가 녀석을 사랑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내면부터 표면에 이르기까지 알차게 들어찬, 요컨대 나와는 정반대의 사람이었는데 금상첨화로 현명하기 까지 했다.

그녀는 나의 ‘당신을 처음 본 순간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얼마나 의미 없는 것인지 알아버렸어요.’라는 내가 생각해도 상당히 매끄러운 야심찬 고백에 상큼하게 웃어 보이며 ‘마음이 없는 고백은 싫어요. 언젠가 당신이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생각해 볼게요.’라고 대답했다. 오랜시간동안 남매처럼 자라왔던 나미 외에 나의 그런 면을 단 한 번에 엑스레이로 찍어내듯이 갈갈이 찢어내어 알아 낸 여자는 그녀가 전무후무한 사례였다.


“조금도 너를 사랑한다는 생각은 지금까지 한번도 해본 적 없어.”


나는 내가 생각해도 흐뭇할 정도의 날선 목소리로 비장하게 말했다. 나미야! 봐줘! 너의 골칫덩이 우유부단 바보 같은 소꿉친구가 움직이는 살인 무기 같은 남자에게 눈 한번 피하지 않고 이렇게 당당히 말했단다. 생각 같아서는 지금 휴대폰으로 나미에게 실황 보고라도 하고 싶었다. 이제 너도 울지 않을 거고, 아름다운 로빈도 어울리지 않는 구슬 같은 눈물을 떨구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나는 파르르 떨리는 고양이의 눈동자를 빤하게 바라보았다. 순간적으로 나는 모든 시간과 모든 소리가 그 황금빛 속에 뒤엉켜 멈추어버리는 기이한 현상을 경험한다. 황금색 눈자위 안의 까만 동공이 작게 축소되었다가 파르르 떨리고, 녀석의 눈꺼풀도 덩달아 42키로를 세번 왕복한 마라톤주자의 다리 근육처럼 바들거렸다.


“알았다. 다시는 보지 않으면 되는 거지. 귀찮게 해서 미안했다.”


내 시나리오의 어느 부분에도 이런 결말은 없었다. 녀석은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두개골이 보일 정도로 찢어져 피를 철철 흘려도 눈물 한 방울 흘린 적 없는 괴물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런 것은 시나리오에 넣을 생각조차 해본 적 없었다.


 

 

 

 


“낄낄낄낄낄....아..미쳐.. 웃겨 죽네...낄낄낄..”


나는 커다란 양푼 한 됫박에 되다 만 호랑이 그림이 그려진 ‘기운이 솟아나요’ 콘프레이크를 통 채로 쏟아 붓고 유통기한이 이틀 정도 지난 우유를 콸콸콸 뜯어 부으며 아침 10시에 시작하는 “사랑하기에”라는 애매 모호한 제목을 하고 있는 아침 드라마를 보며 키들거리고 있었다. 학교도 방학, 도장은 이관 공사 중이라서 그야말로 신이 내려준다는 맘편한 백수신세였다. 아침드라마는 역시나 내가 어린 시절부터 주구장창 똑같은 스토리를 이름만 바꿔 내보내고 있었다. 대사도 별반 다를 것 없다. 이 세상에서 제일 속편한 직업이 아침 드라마 작가 일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추하다. 추해.. 뭐가 저럴까..”


-당신이 나한테 했던 말 모두 거짓이었어? 왜 그랬어? 그녀가 얼마나 괴로웠을지 알아?


악역은 언제나 저런 식이다. 나는 눅눅해진 콘프레이크를 씹는 둥 마는 둥 집어삼키며 혀를 찼다. 악역만 빠지면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는데, 대본에 써져 있어서 그런 건지 그녀들은 -보통 그녀다. 그는 대부분 착하고 아름답지만 조금 둔한 여자의 눈물과 악독하고 여우같은 악역의 간계에 휘둘리는 역할이다.- 비 정상적으로 집착하며 유치하거나 저질스러움을 가리지 않는 여러 가지 수단으로 연인을 유린한다. 너만 없었으면 쟤네는 벌써 애 낳아서 축구단이라도 차렸을텐데. 곰 같이 눈물만 흘리던 어머니도 그 여우같은 여자만 아니었으면 조금 더 오래 살았을 것이었다. 조로 녀석이 내 회심의 시나리오를 망가뜨린지 두 달이 다 지나가고 있었다.

조금 어색해진 나미는 전화로 ‘조로는 잘 먹고 잘 잔다’라고 별로 궁금하지 않았던 사항까지 착실하게 알려주었다. 나는 내가 헛 것을 본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너 같은 여자에게 지금까지 휘둘렸던 내가 원망스러워. 너 이렇게 추한 여자였어?


악역이 핀치에 몰리는 상황은 언제 봐도 통쾌 그 자체였다. 바야흐로 ‘사랑하기에’라는 이 구태의연한 드라마도 종영이 멀지 않았는가 보다. 내 예상은 정확히 적중해서 티비 화면 밑자락에 ‘다음 주 이 시간 부터는 새 드라마 <용서>가 방영됩니다’라는 요지의 안내글이 줄줄이 흘러갔다. 용서라.. 안봐도 또 뻔한 스토리겠지.

대충 여우에게 홀린 남자가 착한 여주인공에게 돌아와서 그를 용서하는 하품없이 볼 수 없는 스토리.

언젠가 조로도 술자리에서 로빈짱은 정말 좋은 여자라고 말했었다. 그럼, 사실은 네놈에게는 너무도 아까운 여신님이지. 그녀도 언젠가 나같은 대어 대신 너같은 식물계를 선택한 자신의 실수에 한숨을 내지을 거다.


-내가 추해? 추하다고?


나는 저도 모르게 악역의 호연에 박수를 쳤다. 흐음, 요즘 드라마 트렌드가 클리셰를 깨는 것이라더니 아침드라마 까지도 악역에게 말할 시간을 주는 상당히 파격적인 구성을 차용하게 된 모양이었다. 눈물 젖은 독기어린 눈으로 그녀가 남자를 쏘아본다. 워..무서운 눈빛이다.


-널 사랑했어. 갖고 싶었어. 그래서 최선을 다한 거야. 만일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면 널 사랑하지 않은 거겠지. 어쩔 수 없잖아. 널 사랑하게 되어 버렸는걸. 난 당신이 끝내 내게 오지 않을 거란 걸 알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을꺼야. 단 한번만이라도 원하는 것을 가지려고 노력해 보고 싶었다고!-


원하는 것을 가지려고 노력해보고 싶었다고..라는 그녀의 말이 코러스처럼 귀에 울려퍼졌다.



 

  




“산지, 너 왜 그래?”


우솝이 화투를 치자며 옆구리에 녹색 담요를 끼고 들어왔을 때 나는 멍하니 티비 앞에 앉아있었다. 우솝 녀석은 얼마 전 나의 원룸열쇠를 복사해 간 이후로, 뻑 하면 우리 집을 제집드나들 듯 츄리닝 차림으로 설렁설렁 기어 들어왔다.


“ 또 왔냐? 파자마 차림으로 돌아다니지 좀 말라고. 열쇠 다시 내놔.”

“ 야, 어짜피 가까운 데 봐봤자 동네 사람들이지 뭐. 이 동네 사람들 백이면 백 아는 사람인데.. 야, 너 근데 정말 괜찮아?”


티비는 ‘사랑하기에’를 끝내고 광고도 넘어가서 어느새 ‘아침마당’이 방영중이었다. 방청객들이 우솝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도록 정확하게 훈련된 까르르르 소리를 합창했다.


“ 뭐가?”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에 들고 있던 콘프레이크 그릇을 바라보았다. 언제 다 먹었는지 양푼은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고 내 텅 빈 숟가락이 바닥을 으득으득 파내기라도 할 기세로 긁고 있었다. 음, 확실히 다먹은 그릇 바닥을 파내는 것은 좀 비정상적으로 보이지.


“ 너 울고 있잖아?”


아, 그리고 수도꼭지처럼 멈추지 않는 눈물도 매우 비정상적. 눈물? 나는 그제야 헬렌켈러가 설리반의 손에 w.a.t.e.r을 새기듯 더듬더듬 내 얼굴로 손을 가져간다. 손이 얼굴에 닿기도 전에 닭똥같은 눈물이 철퍼덕 철퍼덕 무릎으로 떨어져 내린다. 내가 왜 울고 있는거지? 

나는 나같이 심지 곧은 남자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의 이유에 대해서 고심하기 시작한다. 그 동안에도 눈물샘은 고장난게 아니라 아예 터져버렸는지 줄줄줄 멈추지도 않고 흐른다.


“아침 드라마..”


단 한번만이라도 원하는 것을 가지고 싶다고 떼써보고 싶었다. 한 순간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정말 그랬기 때문에 나는 모르는 척 한다. 언젠가 껍데기보다 더 추악한 구더기로 꾹꾹 눌러담듯 들어차 있는 나를 보면 그 누구라도 나를 사랑해 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 사랑은 그녀를 남김없이 태워올려서 단 하나뿐인 아들인 나에게 줄 애정조차 남김없이 불살라 버렸다.


“뭐야, 너 아줌마냐? 아침드라마 보고 울게?”


심각해지면 그만두어 버린다.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내 옆에 있는 그녀를 조금이라도 독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뒷꽁무니에 불이라도 붙은 듯 도망쳐 버린다. 상대방이 나를 뻥하니 차주면 짐이라도 덜은 듯한 느낌에 안도의 한숨을 쉰다. 떼를 써도 되지 않는게 있다는 것을 나는 너무 어린 나이에 알아버렸다.

어머니가 아무리 떼를 쓰고, 기절할 듯 울고, 간질병환자처럼 발악을 해도 아버지는 그럴 수록 진저리가 났다는 듯한 얼굴로 멀어져갔다.


“야, 산지. 야! 어디가!!”


지금은 뛰어야 했다. 어머니, 바보같다고 비웃지 말아주세요. 난 어쩔 수 없는 어머니의 자식인가봐요. 이번 뿐이라고 해도, 인생에 단 한번 갖고 싶은 것을 갖고 싶다고 말해 보고 싶어요.

갖지 못한다고 해도, 한번쯤은 진지해보고 싶다구요.


“야! 너 잠옷입고 어디가!”






 

 




“왜! 아직도 마음 정리를 못해? 어째서?”


조로는 나미의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운동화에 발을 구겨 넣었다. 아침 댓바람부터 그녀는 조로에게 찾아와 한 가지 말만 입력된 로보트처럼 끊임없이 조잘대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대답하고 싶은 마음도, 대답할 기운도, 정확히 말하자면 대답할 말도 없었다.


“어째서 로빈하고 사귀지 않는 건데? 로빈의 어디가 마음에 안 드는건데?”


로빈이 마음에 안 드느냐고 묻는다면, 오히려 그 반대였다. 조로는 그녀가 정말로 좋았다. 만약 누군가 그녀를 괴롭힌다면 단연코 목도를 세우고 달려들 자신도 있었다. 그녀는 말재간 없는 조로에게 쓸데없이 많은 말을 하도록 강요하지도 않았고, 현명하게 자신의 마음을 배려해 주는 면도 있었으며, 고즈넉한 말로 긴장을 풀어주기도 하는 그런 여자였다.


“로빈을 좋아하잖아. 너도. 왜! 어째서! 산지는 너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잖아?”

“그만 좀 해!”


조로가 가히 인간의 것이라고 할 수 없을 만한 무시무시한 괴성을 지르자 나미의 낯빛은 마치 머리라도 강하게 후려맞은 듯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녀의 눈에 슬금슬금 눈물이 올라오는 것을 보자 조로는 이번에는 자신의 짧은 곱슬머리를 다 뽑아내기라도 할 것 처럼 벅벅 잡아뜯었다. 그러나 때로는 한 대 치는 것보다 자해가 상대를 더 쫄게 만드는 법이어서 나미는 그야말로 숨도 못쉴 지경이 되었지만, 조로를 한 두해 보아온 나미가 아닌만큼 독기 어리게 노려보았다.


“니가 말 안해도 알아. 그러니까 그만해.”

“산지가 좋은 친구인건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녀석은 사랑같은 거 안해. 지금도 뻔히 닐리리야 거리면서 우솝이랑 화투장이나 들추고 있을걸?”

“그래.. 니말이 맞아. 하지만 로빈을 사랑하는 건.. 내가 아니고 너잖아.”

“......”


산지는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다. 처음에는 두 해정도 피아노를 치다가 선생이 칭찬하며 콩쿨에 나가자고 하자 그만둬 버렸다. 그 뒤에는 바이올린이었는데 이것도 똑같은 꼴이었다. 그 다음해에는 작문이었고, 그 다음 해에는 기타, 그 다음해에는 독서.. 인정받을 만 하면 제 손을 분질러서라도 그만 둘 기세였다.

그녀석이 유도로 월급을 받아 먹고 살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소꿉친구 였던 자신과의 부대낌 속에서 본의 아니게 다져진 무술 실력 덕분이었다. 그것 만큼은 매해 연마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찌됐든 녀석은 한 군데에 정착하면 곧 죽기라도 할 듯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비워나갔다.


“난 로빈도 소중하지만 나미 니가 더 소중해.”


대문 앞에 서서 아무말 하지 않고 따라나오는 나미에게 말한다. 애초에 나미가 로빈을 사랑하는 것을 눈치 못 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로빈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로빈이 입었던 옷을 사서 옷장에 쟁여두고는 꺼내 입고는 했다. 오랫동안 보아왔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그녀와 닮아지고 싶어서 어울리지도 않는 옷들을 사입고, 긴 속눈썹따위를 붙일 때부터 알 수 있었다.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는 다는 것을 자신도 알고 있을테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조로 자신과 쌍둥이처럼 닮아 있는 모습이었다. 이미 불가항력이다.


“롤로노아!”


그리고 조로가 말을 이어 ‘너에게 상처 주는 일 따위 할 수 없어’라고 없는 말재간에 제법 괜찮은 말이 술술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고 생각했을 때 어디선가 그야말로 일갈의 외침이라 할 수 있는 목소리가 정오의 주택 골목을 뒤흔들었다. 담장에 길다랗게 누워 잠을 자고 있던 고양이가 떨어질 정도로 우렁찬 함성이었다.

그리고 마치 불륜하다 걸린 선남선녀들 마냥 나미와 조로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고,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너! 나미를 좋아했냐?”


에, 그러니까 산지로 말할 것 같으면 상당히 ‘의복’에 신경을 쓰는 편이었다. 상당히 병적일 정도여서, 오밤중에 편의점에 담배를 사러 갈 때 조차 넥타이를 졸라 맨다는 그로테스크한 전설의 보유자였다. 하루라도 같은 옷을 입으면 천지가 개벽나는 줄 아는 착각에 빠져사는 인간이 바로 나미와 조로가 20여년을 보아온 산지라는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반사적으로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휩싸이게 되었다.


“너 나미를 좋아했냐!”


산지는 이미 산지가 아니었다. 적어도 그들이 아는 산지는 ‘나 방금 자다일어났어요’라는 듯한 더벅더벅한 금발의 한쪽이 눌려 하늘을 바라보게 하는 모습을 맨 하늘에 내보인다는 것을 절대 용납할 인간이 아니었다. 게다가 어불성설로 단추가 한군데쯤 잘못 꿰인 허연 파자마를 마치 고급 수트라도 되는 듯이 뻔뻔스럽게 입고 나타날 인간은 아니었다. -그건 평범한 인간이라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못되었다- 더욱더 경악스러운 사실은 신발 한쪽은 슬리퍼였다.-차라리 양쪽 다 슬리퍼라면 용납할 수 있었다. 포인트는 한쪽만 슬리퍼라는 점이었다. -


“산지 무슨일이야? 너 왜그래?”

“산지 왜그래? 괜찮은거야?”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나미와 조로는 산지의 안위를 걱정했다. 그래서 산지가 내뱉은 말에 두 사람 모두 아무 신경도 쓰지 않았다. 지금 조로가 나미를 좋아하는지, 조로가 고양이를 좋아하는지, 심지어 조로가 애만 셋 딸린 냄새나는 옆집 홀아비를 좋아한다고 해도 그런 게 중요한 점이 아니었다. 지금 미친 사람처럼 흐트러진 자칭 타칭 ‘패션아이콘’은 한쪽 손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양푼을 들고, 또 한 쪽 손에는 햇살에 반짝이는 큼지막한 수저를 손가락이 새하얗게 질리도록 꼭 쥐고 있었다. 양푼 끄트머리에서는 그들로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희멀건한 액체가 아직도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산지의 시퍼런 눈동자에서는 수도꼭지처럼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검이라도 부러진건가!-산지가 검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기에는 그는 너무 패닉상태였다.’

 ‘돈이라도 떼인건가!-누구의 생각인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수 있었다.’


여간해서 제정신을 잃지 않는 두 사람을 패닉상태로 몰아넣은 원흉은 긴 다리를 성큼성큼 뻗어 다가섰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손에 들린 커다란 양푼을 바라보았다.


‘양푼과 관계가 있나!’


그리고 조로는 이 생각과 동시에 그의 마지막 단상을 장식한 양푼에 강하게 머리를 얻어맞았다. 무슨일인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산지는 도장 관장이 감탄해 마지 않았던 휘돌려 차기로 조로의 복부를 강하게, 인정사정없이 날려버렸다.

그저 방심한 상태에서 산지 생각만 하고 있던 불쌍한 사내는 담벼락으로 내리꽂듯이 깔끔하게 내쳐진다.


“왜 그래? 산지? 조로! 괜찮아?”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내뱉는 조로를 향해 몸을 돌리던 나미는 자신의 어깨를 그러쥐는 강한 힘에 산지를 바라본다. 산지는 여전히 평생 흘릴 눈물을 오늘 다 길바닥에 쏟아붓겠다고 결심이라도 한 듯 줄줄 투명한 액체를 흘려대고 있다. 도대체 무슨일인지 감잡을 수 조차 없었다. 그녀의 어깨를 부여잡고 산지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열심히 골라내고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 그 청산유수처럼 흘러나오던 말솜씨는 중요한 때에는 쓸모가 없는 것인가!

산지가 잔뜩 미간을 찌푸리자 나미는 정말로 산지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무어라고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미친듯이 흔들고, 다시 중얼거리려다 눈물만 흘리며 한숨을 쉬는 산지는 지금이라도 곧 죽을 것 같은 낯빛이었다.

꽤나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산지는 결심한 듯 비장하게 나미의 눈을 바라보고 외쳤다.


“ 나미! 승부다!”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희미하게 멀어지는 산지의 목소리를 들으며 조로는 여전히 양푼과 산지의 눈물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양푼 때문에 운 것일까.

내가 하나 사줄테니 그런 것 때문에 울지 말라고.



 

후기: 역시 예전에 썼던 단편입니다. 아마 제가 처음으로 썼던 소설인 것 같습니다. 당시 Loop라는 주제로 썼던 것 같은데 대충 제목은 다시 지어서 넣었습니다. 그림의 출처는 다음과 같습니다.

아티스트 Chuck E. Bloom 

 


글 연성쟁이입니다. 소설용 트윗은 https://twitter.com/Staccato00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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