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이스가 너무 정상인이라서(?) 쓰다가 엎은 외전입니다.





아버지의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을 때만 해도, 레기는 별다른 걱정 없이 전화를 받았다.


“어쩐 일이세요.”


아버지와 어색한 사이이긴 했지만 안부 전화겠거니 싶었던 탓이었다. 그는 스무 살에 가족 앞에서 커밍아웃을 했고, 당시 부모와 절연할 뻔했다. 불화는 예상보다 오래 이어졌지만, 결국 부모와의 사이는 어찌어찌 회복되었다. 애초에 그가 옥탑방 생활을 선택하면서 독립한 이후로는 얼굴 마주칠 일이 거의 없으니 싸울 일도 없었다. 서른이 넘어서부터는 그의 인생에 부모가 참견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내놓은 자식이라 생각하고 포기한 듯했다.


“내일 집에 좀 와라.”

“네?”

“네 동거인도 데려오고.”


그런 평온한 일상이 언제까지고 이어질 줄 알았건만. 위기는 언제든 예고 없이 닥치는 법.


“아버지가 걔를 봐서 뭐 하시게요.”


선풍기를 끌어안고 TV를 보는 ‘걔’를 곁눈질로 힐끗거리면서 레기는 아버지에게 되물었다. 되돌아온 것은 호통이나 잔소리가 아닌 한숨이었다.


“내가 아니라 네 엄마가 보고 싶다잖냐. 나는 모르겠으니까 데려와.”


‘아, 예. 그럼 데려갈게요.’라고 대답하는 대신, 그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못 간다는 대답과 함께 내밀 마땅한 핑곗거리를 찾아야 했다.


거구의 동거인이자 오래된 연인인 바이스를 부모에게 데려갈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바이스를 보이는 게 부끄러워서는 아니었다. 남들처럼 결혼할 수 있는 사이도 아닌데 굳이 소개하기 민망한 그런 마음이 절반,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견례라도 나가는 양 들뜰 게 뻔한 바이스의 꼴을 보기 싫은 마음이 절반이었다.


뭐,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이야기를 꾸며내는 재주로 밥을 먹고 사는 처지인 만큼, 그는 적당한 말로 넘길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지난 10년간 부모의 부탁을 거절한 경험이 쌓였다. 불편한 자리를 피하기 위해 그가 빠르게 머리를 굴릴 때였다.


“안 데려오면 네 엄마가 네 집에 쳐들어갈 거라고 하니까 그리 알고.”

“아니, 아버지. 저기요.”

“끊는다.”


더는 반박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전화는 무심히도 끊겼다. 뜨끈한 핸드폰을 허탈하게 내려다보다가 레기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 젠장.”


터져나온 욕설에 바이스가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물었다.


“왜.”

“하.”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기다가 레기는 벌떡 일어났다. 갑자기 옷장으로 돌진해서 옷을 뒤지는 그를, 바이스는 이상한 것 보는 눈으로 지켜보았다. 안타깝게도 원하는 것은 옷장 안에 없었다. 옷장의 문을 닫고 그는 돌아섰다.


“나가자.”

“더워서 싫어.”

“잔말 말고 씻어. 옷 사러 가게.”

“옷?”


의아한 목소리에 더 답해줄 생각이 없었다. 어머니가 옥탑방까지 찾아와 두 남정네가 엎치락뒤치락 사는 꼴을 보게 하느니, 그냥 데려가는 편이 훨씬 나으니까. 레기는 씹어뱉듯 답했다.


“정장 사야 해.”

“……면접 보러 가?”

“나 말고 네 옷.”

“필요 없는데. 난 면접 안 봐.”


면접이라면 면접이지. 부모님한테 정식으로 소개하는 자리니까. 생각할수록 이 상황이 못마땅했다. 여전히 선풍기 앞을 떠나려 하지 않는 거구의 연인을 발로 꾹꾹 밀면서 레기는 인상을 찌푸렸다.


“내일 나랑 어디 좀 가야 하니까. 최대한 단정한 걸로 사 오자.”

“불편해서 싫어.”

“아, 좀! 청바지에 티셔츠 걸치고 갈 자리가 아니라고!”


물론 바이스의 몸이 잘 보이는 차림을 매우 좋아하는 그였지만, 누가 봐도 동네 백수로만 보일 테니 부모님께 선보이기는 어려웠다.


‘아. 정장을 입혀도 문제 아닌가. 조폭처럼 보일 텐데.’


고민에 빠져선 레기는 입술을 잘근거렸다.


“하는 김에 미리 말도 맞추자. 너는 전기 기술자고, 월급도 꽤 받는데 검소해서 모아두느라 옥탑방을 고수하는 거야. 말도 안 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부모님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신 뒤 여태 혼자서 열심히 산 거야. 알겠지? 나랑은, 음, 어디서 만났다고 하냐. 야. 너도 생각 좀 해 봐.”


아무리 그래도 어쩌다 우연히 만나 원나잇을 했고, 그 이후 푹 빠져서 몸정부터 착실히 쌓다가 연인이 되었다고 부모에게 밝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최대한 건실하고 믿음직스러운 설정을 짜는 그를 빤히 보다가, 바이스가 눈을 꿈뻑였다.


“누구한테 할 이야기인데?”

“있어.”

“새 BL 소설 설정이야?”

“그게 아니라. 후, 그래. 너도 알 건 알아야지.”


무작정 데려갔다가 부모님 앞에서 사고라도 치면 큰일이니까. 큰맘 먹고 레기는 사실을 밝혔다.


“어머니가 널 데려오래. 내일 우리 집에…….”

“아, 어머님.”


어머님? 어머니임?


생각지도 못한 호칭에 레기는 굳어 버렸다. 더 놀라운 말이 줄줄 쏟아졌다.


“어머님한테 거짓말하면 안 되지. 우리 사이 다 아시는데.”

“……뭐?”


당장 바이스의 멱살을 붙들고 그는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물었다. 다 토해내. 그게 무슨 뜻인지. 용케 요구사항을 알아들은 바이스는 툭툭 진실을 뱉어냈다. 종합하자면, 이미 오래전부터 레기의 어머니와 연락하고 지낸 사이라는 게 자초지종이었다.


“우리가 10년 넘게 같이 살았는데 내 연락처 하나 모르셨겠냐.”


놀랍게도 꽤 상식적인 소리를 하며 바이스는 히죽 웃었다. 어쩐지 아찔해져서, 그리고 이 곰 같은 멍청이가 잘도 자신에게 비밀을 품었다는 게 분해서 레기는 바이스의 등짝을 걷어찼다.


“그러니까 그냥 집에 있는 거 입고 가도 돼.”


방바닥에 벌렁 누우며 중얼거리는 바이스의 말에 넘어갈 뻔했지만, 그는 금방 정신을 차렸다. 알 거 다 알더라도 아무렇게나 입혀서 부모의 앞에 데려가기는 싫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레기는 바이스의 옷을 사지 못했다. 바이스를 어르고 달래고 윽박질러서 쇼핑을 나선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유난히 큰 바이스의 키와 두툼한 몸이 문제였다. 기성복 매정에서 여름 정장을 재킷이라도 사 주려고 했는데, 맞는 것이 없었다.


“빅 사이즈 매장을 가시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난처해 보이는 매장 직원의 조언에 따라 검색으로 찾아간 큰 옷 매장은 잠겨 있었다. 하필 오늘부터 여름 휴가를 떠낸다는 안내문을 레기가 짜증스레 읽는 사이, 휴대용 선풍기를 얼굴에 대고 있던 바이스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거봐. 헛수고잖아.”


열 받아서 떡쳤다. 무더위에 쇼핑 강행군, 거기에 섹스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 꿀잠이 쏟아졌다. 부모님에게 가야 한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레기는 푹 잠들었다.



***



“네. 그렇죠, 뭐.”


잠결에 목소리가 들렸다.


“잘 지내요. 요새는 수입도 안정적이고. 네. 피곤한지 못 일어나네요. 다음에 갈게요.”


머리를 쓰다듬는 손은 크고 뜨거웠다. 에어컨을 틀었는지 공기가 시원했다. 이불을 밀치며 그는 다시 잠들려 했다.


“할 수 있으면 하고 싶죠. 만난 지 오래 됐으니까. 이제는 헤어질 생각도 안 들고요. 레기는, 어, 그러니까. 아, 네. 저는 레기라고 부르는 게 편해서요.”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 궁금해도 밀려오는 졸음 때문에 현실이 맞는지조차 분간이 가지 않았다. 어렴풋이 이름이 들렸지만 더 자고 싶었다. 무시하고 레기는 베개에 머리를 파묻었다.


“저는 레기가 아닌 다른 사람을 이제 상상할 수 없거든요. 레기도 그럴 거고요.”


반복되는 자신의 이름이 어쩐지 불길했다. 지금 잠보다 더 중요한 게 현실에 있는 것 같은데. 찜찜한 마음이 점차 졸음을 밀어냈다. 돌아오는 의식의 끝자락을 놓을까 말까, 레기가 갈등할 때였다.


“네. 아시잖아요. 레기가 저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고백도 먼저 하고 사귀자고 매달려서…….”

“야, 이 씨발,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당장 눈이 떠졌다. 레기는 손을 뻗어 바이스의 핸드폰을 빼앗았다. 액정에 떠올라 있는 ‘어머님’ 세 글자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서둘러 전화를 끊어버리자 바이스가 어리벙벙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어, 깼네.”

“깼네 좋아하시네. 여태 이런 식으로 연락한 거냐?”


등골에 솟은 식은땀이 축축했다. 바이스를 밀어눕히며 그가 으르렁거리자 바이스가 멍청하게 웃었다.


“내가 없는 말 했냐.”

“그런 걸 왜 말하냐고!”

“궁금하시다잖아. 진지한 연애는 안 하던 네가 왜 나한테 정착했는지.”

“씨발.”

“내 엉덩이 얘기는 안 했으니까 걱정 마.”

“그거 말했으면 너는 오늘 뒤졌어.”



(미완^^)




살다 보면 언젠가는 완결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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