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고 난 후, 승윤은 두 번 다시 술 마시잔 얘길 하지 않았다. 아마도 본의 아니게 내게 민폐를 끼쳤다 생각하는 것 같았다. 같이 저녁 먹자고 먼저 말을 꺼내도 선약이 있다며 거절했다. 그렇게 선약을 핑계로 서둘러 퇴근한 승윤은 밤 늦게까지 혼자 술을 마셨다. 한번도 내게 직접적으로 고백한 적은 없었지만 아침마다 희미하게 풍겨오던 술냄새 덕에 듣거나 보지 않고도 나는 그 사실을 알았다. 바르고 성실한 워커홀릭 강승윤이 회사일이 아닌 사적인 이유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술에 취해 있기란 내가 하루아침에 엄친아가 되는 것만큼이나 일어나기 힘든 일이었다. 그것도 다 천성 탓이었다. 승윤은 자신의 슬픔을 성실히 앓고 있는 중이었다. 혼자 조용히 술을 마시며. 괴로움을 삼키며.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무너진 세계의 무게를 저 혼자서 몽땅 감당할 기세로.

 점심시간에도 무리에 섞이지 않고 혼자 조용히 나가는 걸 지켜보다가 커피 심부름을 자청해 승윤을 찾아나섰다. 예상대로 승윤은 우리가 자주 가는 회사 옆 커피샵에 앉아 있었다. 이렇게 추운날 차가운 그린티 프라푸치노를 한 잔 시켜놓고 멍때리고 있는 걸 발견하곤 일부러 천천히 다가가 이름을 불렀다.

 "유나."

 응? 놀란 듯 힘없이 올려다보는 두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다. 살며시 어깨에 손을 얹자 겨우 힘을 짜내 피식 웃는다. 승윤을 '유나' 하고 부르는 건 '사대일'에 대항하는 나름의 소심한 저항이었다. 사람들 눈치가 보인다며 꼭 그래야겠느냐고 나를 타박하던 승윤도 마침내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내가 지어준 간질간질한 호칭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불러도 좋다고 한 적은 없지만 '유나' 하고 부를 때마다 '응?' 하고 돌아봤으니 동의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밥은 먹었어?"
 "아니. 별로 생각이 없어서."

 스트로우를 빙빙 돌리며 승윤은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혼자 있고 싶다는 듯이. 나는 짐짓 쾌활한 어조로 능청스레 승윤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을 붙였다.

 "불금인데 오늘 뭐해? 또 선약 있어?"
 "글쎄."

 글쎄, 라니. 참 애매한 대답이다. 그건 잡아놓은 약속은 없지만 그렇다고 새로운 약속을 만들고 싶진 않다는 뜻이었다. 약속이 없다는 말에 도리어 마음이 초조해졌다. 주말 내내 승윤을 집에 혼자 있게 둘 순 없었다. 외로움과 슬픔이 한 데 엉키면 사람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드는지 나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별일없음 나 밥 사주라."
 "밥? 오늘?"
 "응. 접때 신세졌다고 밥 한 번 사겠다고 했었잖아."

 그거야.... 승윤은 말을 다 끝맺지 못하고 얕은 한숨을 쉬었다. 영악하게도 나는 승윤의 곧은 성격과 바른 양심을 내 이기를 채우는 데에 이용한다. 다음에, 라는 말이 차마 떨어지지 않는지 승윤은 꽤나 오래 망설였다. 이번만큼은 양보할 수가 없어 나는 필사적으로 거짓말을 짜냈다.

 "카드를 잃어버려서 그래. 재발급 받으려면 좀 걸리거든. 주말엔 집에서 밥 먹으면 되지만 당장 오늘 저녁은 곤란해서. 나 현금은 안 들고 다니는 거 알잖아."

 어쩔 수 없다는 듯, 승윤은 겨우 알겠다 답했다. 구차한 거짓말로 구질구질하게 매달려 받아낸 약속이지만 나는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기어이 얻어낸 확답에 지구 종말을 막아낸 것처럼 뿌듯하기까지 했다. 승윤의 말이 옳았다. 나는 가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독하게 굴 때가 있다.

 퇴근할 때쯤엔 날씨가 몹시 추워져 무조건 따뜻한 음식을 먹어야겠다 생각했다. 아니, 정확히는 먹여야겠다 생각한 거였다. 맞바람을 맞고 걷느라 빨갛게 얼어 있는 승윤의 귓바퀴를 눈으로만 만지며, 나는 가까운 식당으로 승윤의 팔을 잡아 끌었다. 들어오고 나서야 예사 밥집이 아니라 안줏거리를 주로 파는 소줏집이란 걸 알았다. 하지만 밖은 너무 추웠고 승윤의 모습이 너무도 지쳐 보여 의도한 것인양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다행히 가게의 해물탕은 한 끼 식사로도 나무랄 데 없이 맛이 좋았다. 입맛이 없다던 승윤도 밥공기를 반 넘게 비웠다.

 "진짜 이런 걸로 되겠어?"
 "왜? 맛있기만 한데."
 "보통 밥 사주겠다고 할 땐 좀 비싸고 좋은 밥을 생각하고 말하는 거잖아."
 "그래? 몰랐네."

 형은 보통 사람이 아니니까. 승윤은 알쏭달쏭한 말을 하며 웃었다. 어떤 뜻으로 한 말인지는 몰라도 듣기에 나쁘진 않았다. 승윤이 내게 하는 말들은 대개 그랬다. 의미가 불분명해서 좋았다.

 "그럼 나 술도 한 잔 사주라. 비싸고 좋은 술 아니어도 되는데. 소주 어때?"
 "근데 형 진짜 카드 잃어버린 거 맞아?"
 "사주기 싫음 말고."

 말꼬릴 돌리자 승윤은 더 묻지 않고 손을 들어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 우리는 번갈아 술을 따르며 별 대화도 없이 조용히 술만 마셨다. 가라앉은 승윤을 위해 일부러 더 명랑하게 떠들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지금 승윤은 내면의 소리만으로도 충분히 시끄러울 터였다. 소주 한 병을 말없이 다 비우고 나서야, 두 번째 병을 따는 승윤에게 나는 참았던 말을 건넸다.

 "유나."
 "...응?"
 "아무리 그래도 밥은 굶지 마. 몸 상해."

 잔소리처럼 들릴까 그 한 마디 하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니가 뭔데 참견이냐고 다그친대도 할 말은 없었다. 그래도 말해주고 싶었다. 누군가는 너를 걱정하고 있다는 걸. 승윤은 대답 대신 소주잔을 들었다. 저렇게 빨리 마시면 금방 취할 텐데. 걱정스런 맘에 나는 굳이 안 해도 되는 말들까지 줄줄이 내뱉었다.

 "술 마시는 건 좋은데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말구. 혼자 마시다 외로우면 나 불러. 성가실 것 같으면 아무 말 안 하고 그냥 앉아 있기만 할게."
 "성가시긴, 형이 왜. 내가 형을 성가시게 하는 거겠지."
 "아니야. 안 그래. 그리고 좀 성가시면 또 어때. 우리 사이에."
 "고마워. 그렇게 말해줘서."

 입은 웃는데 눈이 울고 있다. 근래의 승윤은 내내 저런 표정이었다. 내가 따라준 술을 가득 받아놓고서, 승윤은 국물이 자작하게 남은 냄비에 숟가락을 담갔다.

 "해물탕 진짜 오랜만에 먹는다. 예전엔 자주 먹었었는데. 맛있네."
 "그래?"
 "응. 너무 너무 맛있는데, 너무 너무 맛있어서 너무 너무 슬퍼."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잘 모르겠지? 대단한 뭔가를 포기한 사람처럼, 혹은 강제로 포기해야만 했던 사람처럼, 승윤은 크게 한숨을 내쉬곤 고갤 젖혀 잔을 비웠다. 나는 승윤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다 몰랐어도, 매운탕 때문에 승윤이 슬퍼졌다는 건 분명히 알았다. 막연한 죄책감에 나는 식어가는 매운 국물을 배가 터지도록 마시고 또 마셨다. 끝까지 마시고 또 마셔서 모조리 없앨 기세로. 내가 매운탕과 씨름하는 동안 승윤은 천천히 성실하게 취해갔다. 그러다 결국엔 월요일에 그랬던 것처럼 제대로 몸도 못 가눌 만큼 취해버리고 말았다.

 카드를 잃어버렸단 핑계로 얻어 먹은 밥인데, 우습게도 계산은 내가 했다. 계산을 마치고 나와 보니 승윤은 벽에 몸을 기댄 채 필사적으로 곧게 서 있으려 애쓰고 있었다. 황급히 달려가 몸을 부축하자 승윤의 체중이 고스란히 내게로 넘어왔다. 가볍다면 가볍고 무겁다면 무거웠다. 온전히 서 있을 힘조차 잃어버린 승윤의 뼈와 살은. 흔들리는 마른 몸을 자꾸만 넘어뜨리는 상심과 절망은.

 "......형."
 "응?"
 "힘들다."

 작은 웅얼거림이었지만 내 귀엔 선명하게 들렸다. 힘들다고 말하는 승윤의 목소리가. 승윤의 어깨엔 언제나 짐이 많았다. 그런데도 승윤은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지고 있던 짐을 내려놓으려 하지 않았다. 원래가 그런 애였다. 꽤 친해졌다고 생각이 든 후에도 승윤은 좀처럼 속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서운했다는 건 아니다. 나보다 나이는 어렸어도 나는 그런 승윤이 존경스러웠고 한편으론 매우 안쓰럽게 여겼다. 그런데 지금, 처음으로 승윤은 내게 힘들다 말하고 있었다.

 고마웠다. 그렇게 말해줘서. 그 말을 듣자마자 승윤이의 무거운 짐을 내가 나눠질 순 없어도 등을 토닥이며 한 마디 위로의 말을 건넬 수는 있을 것 같은 자신이 생겼다. 그리고 약간의 욕심을 부려 지치고 다친 마음을 내 두 손으로 어루만져주고 싶었다. 밝은 미소 뒤에 감춰진 깊은 슬픔도. 너무나 깊고 어두워서 우물의 바닥처럼 내려가보기 전까진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오래된 상처도.

 큰 길까지 휘청휘청 걸어나와 며칠 전과 똑같은 모양새로 택시를 잡고 뒷좌석에 승윤을 밀어 넣었다. 다만 목적지는 달랐다. 승윤이 사는 동네 이름을 말하자 택시기사는 요금이 좀 많이 나올 거라며 경고하듯 룸미러로 나와 눈을 마주쳤다. 괴로운 듯 몸을 뒤척이는 승윤을 보며, 나는 조금 늦어도 괜찮으니 조심히 안전하게 운전해달라 부탁했다. 작게 볼륨을 줄인 라디오에선 폭죽 같은 웃음소리와 잔잔한 노래가 번갈아 흘러나왔다. 적당히 주의를 기울이면 들을 수 있고, 신경쓰지 않는다면 가벼운 소음으로 넘겨버릴 청취자들의 사연은 거리의 풍경처럼 나와 승윤을 스치고 지나갔다.

 듣고 있던 라디오 프로그램이 끝나고 CM이 흘러나올 때쯤, 택시기사는 아파트 앞에 미끄러지듯 차를 세웠다. 택시 요금을 내고 나니 현금이 하나도 남지 않아 부득이하게 오늘 밤은 승윤의 집에서 신세를 져야 할 것 같았다. 무더웠던 지난 여름, 아픈 승윤을 집까지 데려다준 일이 있었다. 그날 이후로 승윤의 집을 다시 찾기는 처음이었다. 계절만 두 번 바뀌었을 뿐인데 승윤의 집은 그때와는 몹시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어둠 속에서 겨우 스위치를 켜고 승윤을 침대에 눕힌 뒤 방 안을 둘러보다 깨달았다. 이제는 비틀거리는 승윤을 온몸으로 받아줄 그 누군가가 이곳에 없다는 사실을. 그의 존재가 사라짐과 동시에 이 집은 더는 예전과 같아질 수 없다는 걸.

 한 사람의 부재는 이렇게나 많은 온기를 앗아가는구나. 승윤이 느꼈을 외로움과 공허함을 생각하며 벗겨낸 옷가지를 차곡차곡 정리하다 주머니에서 떨어진 승윤의 휴대폰을 주워 들었다.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전원 버튼이 눌렸는지 액정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우습게도 내 시선을 잡아 끈 건 잠금화면 배경을 차지한 남태현의 흑백 셀카도, 사진 모서리에 승윤이 손수 넣은 것으로 보이는 하트 스티커도 아니었다. 1월 21일 오전 0시 21분. 오늘은 승윤의 생일이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는지 모르는지, 깊게 잠이 든 승윤의 얼굴을 마냥 바라보다 곁에 휴대폰을 놓아두고 일어섰다. 택시를 타고 오는 길에 24시간 할인마트를 보았던 게 떠올랐다. 그래도 생일인데 미역국 정도는 직접 끓여주고 싶었다. 소고기, 미역, 다진 마늘, 참기름, 국간장. 사야 할 재료들을 하나 하나 마음 속으로 되새기며 생각했다. 내가 만든 따뜻한 국 한 그릇으로 승윤에게 아주 작은 온기라도 전할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정말 좋겠다고. 너무 너무 맛있어서 너무 너무 슬프지 않을 만큼만, 딱 그만큼만 맛있게 끓이고 싶다고.

 괜찮아. 힘든 건 네 잘못이 아니야. 미처 건네지 못한 위로의 말로 나는 승윤의 생일을 축하한다.







블로그에서 연재했던 아름다운 날들의 외전입니다.

포스타입에는 '작은 기다림'이라는 제목으로 여섯 편으로 나누어 업글해요.

물론 본편을 읽지 않으셔도 내용 이해에 무리는 없습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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