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봄이었다. 우리는 함께 밥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여름은 더워도 견딜 만했다, 차에 에어컨이 있었으니까. 우리는 더위를 피해 미술관이나 영화관 같은 실내를 찾아다녔다. 가을은 가장 행복했다. 교외로 나가서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강둑을 따라 걷기도 하고 몇 시간씩 가만히 앉아 있기도 했다. 그와 있으면 편했다. 그는 이따금 재잘거리기 좋아했고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 주기만 하면 되었다.

올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그는 밖에 나오기 싫다는 나를 열심히도 구슬렸다. 나는 수족냉증이 심했다. 따뜻한 실내를 전전해도 늘 손끝과 발끝이 시렸다. 어느 날 우리는 차 안에 꼼짝없이 갇혔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눈이 펑펑 내리는 날이었다. 갑작스러운 폭설에 도로는 끝도 없이 막혔다. 차 안은 히터를 켜 놓아 볼이 후끈할 정도였지만 부츠를 신은 발끝은 갈수록 얼어붙었다.

시호 씨. 일단 어디에 들어가 있을래요?

그가 물었다. 내비게이션은 집까지 1시간도 넘게 걸린다고 알려 주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들어선 근처 모텔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잤다. 고개를 끄덕인 의미가 곧 몸의 허락은 아니었지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나는 어렴풋이 그와 언젠가는 하게 되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언제부터였을까. 가을? 아니면 여름? 어쩌면 봄일지도 몰랐다. 맨 처음 그와 사적인 이유로 만나기 시작했을 때.

“뭐 해요? 머리도 안 말리고.”

침대에 엎드려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으면 그가 뒤에서 나를 껴안았다. 막 씻고 나온 축축하고 뜨끈한 기운이 목욕 가운 너머로도 전해졌다.

“귀찮아.”

그와 하고 나면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그는 체력도 없는 나를 집요하게 몰아세우기 좋아했다.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샤워하면 그걸로 끝, 나는 주로 침대에서 뒹굴뒹굴했다. 나는 원래 바깥에 나돌기보다 안에서 가만히 있기가 천성에 맞았다. 그래서 겨울이 되어 그와 호텔 방에 눌러앉게 된 것이 나는 마냥 좋았다. 솔직히 말하면 섹스보다 좋았다.

조용한 실내에 드라이기가 켜졌다. 그가 가장 가까운 콘센트를 찾아 드라이기를 켠 모양이었다. 그가 침대에 올라와 내 머리를 말렸다. 나는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고 눈을 감았다. 예전 같으면 절대 상상도 못 했을 장면이라고 생각하면서.

참 신기했다. 그깟 몸 한번 섞었다고 상대와 무섭도록 친밀해졌다. 굳이 파고들지 않아도 저절로 벽이 허물어졌다. 예를 들면 화장. 예전에는 그와 만난다고 나름대로 화장에 공들였지만 요즘은 그러지도 않았다. 어차피 몇 시간 뒤에 지워질 텐데, 그렇게 생각하면 가벼운 피부 화장으로 충분했다. 당연히 샤워를 끝내면 줄곧 민낯이었다. 언제부터는 머리를 말리기도 귀찮았다.

“다 말랐다.”

“…….”

“시호 씨. 자요?”

나는 눈을 감고 잠들기 직전이었다. 그가 드라이기를 바닥에 내려놓고 다시 나를 뒤에서 껴안았다. 이대로 우리는 1시간이고 2시간이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그의 핸드폰이 울릴 때까지.

그는 바쁜 사람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한없이 여유롭다가도 갑자기 바빠졌다. 종잡을 수 없는 생활 패턴이었다. 도중에 전화가 울리면 그날 우리의 만남은 거기서 끝이었다. 심지어 하는 도중이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우리는 호텔에 함께 들어와도 호텔을 함께 나간 적은 드물었다.

때마침 그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하. 그가 귀찮다는 듯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가 허문 벽이라면 바로 이런 모습이었다. 일하기 싫어 죽겠다는 태도. 이전에는 일과 관련된 전화를 받으면 미련 없이 뒤돌길래 기계 같은 사람인 줄 알았다. 살을 맞대고 같은 침대에 누워서야 비로소 나는 이 사람도 가끔 일하기 귀찮아한다는 걸 알았다.

그는 나를 끌어안고 한참을 꾸물거리더니 결국 내 목덜미에 입을 맞춘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전화는 대부분 부하인 카자미 씨에게서 왔다. 늘 급한 안건이었고 그래서 통화 내용도 간결했다. 어. 그래. 알았다. 그가 짧게 답하면 나는 눈치 빠르게 그를 배웅할 준비를 했다.

“여보세요? …응. ……응, 그래? 하하.”

하지만 오늘은 뭔가 달랐다.

일단 전화 상대가 카자미 씨가 아니었다. 그리고 목소리가 다정했다. 평소와 다른 패턴에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어느새 잠이 달아났다. 통화는 한동안 이어졌다. 그는 거의 맞장구만 칠 뿐이어서 나는 통화의 목적도 내용도 알 수 없었다. 물론 통화 상대가 누구인지도. 그렇게 3분 뒤에 전화가 끊겼다. 내가 줄곧 시계를 바라보고 있었으니 정확했다.

침대에 무게가 실렸다. 이번에도 나를 뒤에서 껴안나 싶었는데 그가 내 어깨를 잡아 천장을 보게 했다. 그는 내 위에 올라타서 눈을 마주쳐 왔다. 탐색하듯 끈질긴 시선이었다.

“…왜 그렇게 봐?”

“신경 쓰여요?”

당연히 신경 써야 했다. 만약 부하에게 온 전화라면 나는 당장 그를 배웅해야 했으니.

“지금 가 봐야 하는 거야?”

“아니. 그런 전화 아니에요.”

“……그래?”

눈동자가 절로 밀려 올라갔다. 그렇다면 무슨 전화일까. 나는 그에게 애인이 있는지 모르지만 어쩌면 애인일 수도 있었다. 목소리가 퍽 다정했으니 그럴지도 몰랐다. 아닐지도 모르고. 나는 눈동자를 헤매다 다시 몸을 틀었다. 옆으로 누울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가 또 내 어깨를 붙잡았다.

“무슨 전화인지 신경 쓰여요?”

어떤 전화인지 알려 주지도 않으면서 신경 쓰이냐고 묻는 심보는 뭔지 궁금했다.

“…내가 신경 쓴다고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잖아.”

만약 급한 전화였다면 그는 벌써 이 호텔을 나서고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한가한 질문 놀이도 하지 않을 테고.

“시호 씨는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가 손을 뻗어 내 볼을 어루만졌다.

“내 기분은 좋아질 것 같은데.”

나는 눈만 깜빡였다. 그가 장난스레 나를 따라 하며 눈을 깜빡였다. 기분이 좋아진다니, 싱겁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싱거운 만큼 받아넘기기는 어렵지 않았다. 기분이 좋아진다는데 이 정도쯤이야. 더군다나 거짓말도 아니었다.

“응. 신경 쓰여.”

“…….”

미소를 띠던 그가 갑자기 얼굴을 굳혔다. 순간 화났나 싶었는데 아무래도 놀람에 가까웠다.

“……왜 그래?”

내가 당황해서 물어도 그는 말이 없었다. 신경 쓰인다는 말에 뭔가 문제라도? 그렇다기에는 신경을 써 주면 기분이 좋다고 했는데. 침묵이 그치지 않아 나는 슬슬 무섭기까지 했다.

“……아. 미안, 정말 그렇게 말할 줄 몰라서…….”

그가 내 볼을 쓰다듬던 손으로 제 입가를 가렸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내가 상대의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사람으로 비쳤다는 뜻일까? 평소에 무심하고 차갑다는 말을 듣기는 한다. 하지만 그게 곧 눈치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특히나 바쁜 그를 위해서는 내 나름대로 배려해 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시호 씨 평소에 이런 쪽으로 표현을 안 해 주니까…… 아, 적응이 안 돼.”

그가 손등으로 얼굴을 가린 채 내 옆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적응이 안 될 정도라니. 그동안 내가 적잖이 냉혈한 취급을 받고 있었구나 싶어 얼떨떨했다.

“그 정도야……?”

“응. 나 지금 무지 기분 좋아요.”

“…….”

상대가 좋다 하니 나 또한 좋았지만 한편으로 영 찝찝했다. 그동안 내 어떤 태도가 문제였을까, 때아닌 자기 성찰에 빠져 있으면 그가 나를 와락 껴안았다.

“맹세코, 절대로 아무 사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절대로’에 강세를 두며 그가 말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 사이’라는 말에 꽂혀 있었다. 누구랑 누구 사이? 대화를 거슬러 되짚었다. 끼워 맞출 만한 사람이 그와 통화 상대밖에 없었다. 아무 사이도 아닌데 그렇게 다정하게 전화하랴 싶었지만 내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웬 걱정? 걱정 안 해. 당신이 애인한테 달려간대도 어차피 나한테는 일하러 가는 거랑 똑같고.”

이상한 침묵이 흘렀다. 그가 내 목에 파묻은 고개를 서서히 들었다. 나는 눈동자만 굴려 그를 바라보았다. 의문 가득한 눈들이 서로 응시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 말 그대로. 당신 사정에 다 맞춰 주겠다고. 나 그 정도 배려는 있어.”

조금 전에 배려 없는 사람이라고 취급받은 것이 내심 상처였는지 무심코 뒤끝이 묻어났다.

“아니, 잠깐만.”

“…….”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내 애인은 시호 씨잖아요.”

“……?”

응? 그거야말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

“…….”

“……애인? ……내가?”

내가 후루야 레이의 애인? 미야노 시호가? 대체 언제부터?

침묵은 끝도 없었다. 나는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고 그는 아마 어이가 없어서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입을 벌린 채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설마 시호 씨…….”

그는 차마 다음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하지만 왠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여태 아무 사이 아니라고 생각했냐는 추궁이겠지. 심지어 대답은 그렇다였다. 그리고 그렇게 답했다가는 그가 금방이라도 화낼 분위기였다. 아니, 이미 화내고 있는 것 같기도.

“화내는 거… 아니지?”

“……안 내려고 노력 중이에요.”

“…….”

“시호 씨.”

“……네.”

괜히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혹시 시호 씨는 나를 전혀… 애인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목소리는 다정했고 어조는 차분했다. 그만큼 이 질문은 그가 한계에 다다라 간신히 쥐어짜낸 마지막 배려였다.

“음. 그러니까…….”

“예, 아니요로 대답하면 돼요.”

“……예.”

하아. 그가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나는 보지 않고도 알았다. 그의 만감이 교차한다는 걸. 나는 뒤늦게 상황 파악을 시작했다. 평소에 무심하고 차갑다는 말을 듣기는 한다. 하지만 그게 절대 눈치 없다는 뜻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나는 정말 눈치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하지만. 불쑥 반발심이 껴들었다. 그와 내가 애인 사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애초에 고백도 뭣도 없었다. 우리는 그냥 밥을 먹고 차를 마셨을 뿐이다. 그러다 추워서 실내로 들어왔고 어쩌다 섹스도 했을 뿐.

그의 무거운 한숨이 또다시 정적을 흔들었다.

“하. 대체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

“하지만 고백 같은 것도 없었고…….”

“그런 게 꼭 있어야 알아요? 손잡고 키스하는데? 섹스도 하는데?”

“…….”

“미국 유학까지 다녀왔다는 사람이 뭐가 그렇게 둔해요?”

말 한마디 꺼냈을 뿐인데 그가 날카롭게 몰아세웠다. 어째 전적으로 내 잘못이 되는 것 같아 기분 나빴다. 나는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평소에 미국식이라면 치를 떠는 사람이 웬 미국 타령? 여기는 일본 아니었어?”

“아아. 그래서 일본식으로는 키스하고 섹스해도 애인이 아닌가 보죠?”

“그러니까 그건…….”

고백을 못 받아서라니까. 그렇게 받아치려다 뭔가 이상하다고 깨달았다.

고백받지 못하면 키스든 섹스든 하지 않겠지, 보통.

“뭐가 이상한지 이제 알겠어요?”

그가 내 생각을 빤히 읽은 것처럼 말했다.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그의 말마따나 우리는 섹스 전에 손도 잡고 키스도 했다. 내가 언젠가는 그와 섹스하게 되리라고 어렴풋이 예감한 데는 나름대로 순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거부하지 않았다. 거부할 이유도 없었다. 나는 그의 체온이 좋았고 그의 여유가 좋았다. 그는 언제나 애태우며 내가 먼저 바라도록 했다.

그래서 우리가 연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 관계는 일방적이었다. 적어도 내 생각에는 그랬다. 내가 원하면 그는 들어주었다. 거꾸로 그가 나를 바라고 원한다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종종 그런 순간이 있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전화 한 통이면 금세 등을 보일 사람이었다. 미련도 없이 아쉬움도 없이.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섹스도 하는 우리가 연인이 아니라면 확실히 이상했다.

하지만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섹스밖에 안 하는 우리가 연인이라면 그것도 이상했다.

“우리가 이상한 사이라는 건 확실히 알겠어.”

“그러니까 그건 시호 씨 생각. 대체 뭐가 이상한데요?”

“…….”

일단 연인 사이라면 지금보다 자주 만나겠지. 몇 주에 한 번, 몇 달에 한 번이 아니라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만나지 못할 때는 연락이라도 자주 할 것이다. 지금은 만날 약속을 잡을 때나 한 차례 주고받을 뿐이다. 하지만 연락의 빈도라든지 만나는 빈도라든지, 결국은 상대적이었다. 자주 만나고 연락한다고 해서 곧 연인이라는 법은 없었다.

나는 혼란에 빠져 몸을 돌렸다. 옆으로 누운 채 더 곰곰이 생각했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터였다. 우리 사이가 이상한 이유.

“시호 씨?”

그가 등을 보인 내 허리에 팔을 감았다. 평소라면 별 뜻 없이 받아들였을 행동에 괜히 싱숭생숭했다. 이 안에 애정과 사랑이 담겼다고 생각하면 더더욱.

왜 나를 조금 더 원하지 않아?

불현듯 스친 생각이었다.

만날 때마다 꿀이 떨어질 듯한 시선으로 달콤한 말을 속삭여도 그걸로 끝이었다. 그는 언제나 일이 우선인 사람이었다. 그동안 숱하게 봐 온 그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이제 와서 울컥했다. 뭐야, 갑자기. 이런 거 원하지도 바라지도 않았다.

“……그냥 아무 사이도 아닌 게 나아.”

그랬다면 서운함과 섭섭함이 이렇게 속절없이 밀려오지는 않을 텐데. 연인 사이가 된다고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상대를 애인으로 여기니 같은 모습도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시호 씨.”

그의 목소리에서 미약한 분노가 느껴졌다. 분명 내 말을 오해했을 것이다. 어떻게 오해했든 나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지금은 나도 머리가 어지러웠다.

“시호 씨. 나 좀 봐요.”

그가 내 어깨를 잡아 돌려세웠다. 나는 안간힘을 써서 버텼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내 얼굴이 못났다는 것쯤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힘에 당할 수는 없었다.

결국 다시 정자세로 누웠다. 상체를 일으킨 그가 나와 눈을 맞추었다. 그는 처음에 화난 얼굴이었는데, 나를 보더니 눈이 조금 커졌다. 그러더니 슬며시 웃었다. 공연히 웃는 얼굴이 미워서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마저도 그는 턱을 잡아 돌리지 못하게 했다.

“이제야 내가 보고 싶었던 얼굴 보여 주네.”

화는 어느새 풀린 모양이었다. 그가 입가를 느슨히 풀었다. 그의 기분이 좋아 보일수록 나는 심술이 차올랐다.

“빈말 아니야. 진짜 아무 사이도 아닌 게 나아.”

“응, 그렇구나.”

“…저기. 내 말 듣고 있어?”

“나 사실 되게 유치한 작전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역시 하길 잘했어.”

뜬금없이 그가 고백 투로 말했다.

“아니, 오히려 안 했으면 큰일 날 뻔했지. 이 아가씨가 그렇게 맹랑한 오해를 하고 있었을 줄은.”

그가 신난 듯이 재잘거렸다. 나는 영문을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내 얼굴을 보고도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도리어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입을 씰룩거렸다.

“시호 씨. 아까 나랑 통화한 사람. 누구인지 알아요?”

표정이 저절로 굳었다.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아까만 해도 전혀 신경 쓰이지 않던 사람이 괜스레 거슬렸다. 아니,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는 건 거짓말. 그래도 이렇게 정색할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어느새 맘속으로 그를 꾸짖고 있었다. 애인도 있는 남자가 왜 그렇게 다정하게 통화해?

“이거 봐요.”

그가 베개 옆에 놓아둔 핸드폰을 내게 보여 주었다. 최근 통화 목록이 떠 있었다. 가장 상단에 자리한 통화 상대의 이름은.

“……카자미 유우야?”

“응.”

“방금 통화한 사람이 카자미 씨였다고?”

“응.”

뭐가 그렇게 웃기는지 그는 소리 내어 쿡쿡 웃었다. 맥락도 모르는 나는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이 사람이 부하에게 다정하게 굴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혹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거짓말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었다.

“아직도 모르겠어요? 시호 씨 질투하게 하려고 일부러 꾸며서 전화했다고요.”

“……뭐?”

“물론 연애 사정으로 부하를 이용한다고 털어놓을 수는 없으니까, 전화가 걸리면 바로 끊어 달라고는 했지만요.”

그는 또 쿡쿡 웃었다. 나는 3분간의 전화를 떠올렸다. 응, 그렇구나, 하하. 세 마디가 반복되던 전화. 그게 전부 연기였다니.

“…그렇게까지 해야 해?”

“안 그러면 시호 씨가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겠으니까.”

그가 돌연히 웃음기를 거두고 내 위에 올라왔다. 움찔거리는 내 손에 그가 깍지를 꼈다.

“내가 가면 가는 대로 시호 씨는 그냥 보내 주니까. 내가 먼저 연락 안 하면 시호 씨도 안 해 주니까.”

“그건…….”

“알아요. 다 내 잘못이에요. 그러니까 지금부터 잘 들어요.”

흠. 그가 헛기침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깊고 푸른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시선은 올곧고 정중했다.

“시호 씨. 내 애인 하세요.”

“……명령문으로 고백하는 사람도 있어?”

“대답.”

“……네.”

짧은 침묵이었다. 그러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킥킥 웃었다. 뭐가 웃기는지도 모르고 한참을 웃었다. 웃음의 끝자락이 여운을 남기며 침묵에 잠겼다. 이번에는 끈적한 침묵이었다. 

“시호 씨.”

그가 내 도망치는 시선을 잡아 오듯이 말했다. 그가 오른손으로 내 귓불을 만졌다. 키스하기 전 그의 습관이었다. 괜히 긴장되어 침을 삼켰다.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눈을 감으면 입술이 맞닿았다. 그가 가볍게 아랫입술을 물었다. 처음 키스하는 것도 아닌데 심장이 요란하게 쿵쿵거렸다. 그가 고개를 틀면서 입술을 비집고 들어왔다. 달래듯 부드러운 움직임이 간지러웠다.

어느새 몸을 타고 올라온 그의 왼손이 가운의 깃을 벌리려 할 때였다. 그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설마 또 카자미 씨?”

떨어진 입술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내가 물었다. 그가 핸드폰 액정 화면을 확인했다. 조금 난감한 표정이었다.

“미안. 이번에는 진짜 통화.”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카자미.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벌써 나갈 준비를 했다. 핸드폰을 왼쪽 오른쪽 교대해 들면서 가운을 벗었다. 팔을 빼낸 가운이 바닥에 떨어질 즈음에 통화는 이미 끝나 있었다.

그가 옷을 입는 동안 나는 상체를 일으켰다. 평소와 같은 상황이었다. 새삼스러운 것은 없었다. 그런데 내 마음은 언제나와 달랐다. 마음이 밑바닥부터 흔들거렸다. 도저히 태연할 수 없었고 지금 당장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손을 뻗어 붙잡든, 가지 말라고 말하든.

“시호 씨는 조금 더 있을 거죠?”

호텔은 숙박뿐이라 나는 다음 날 아침까지도 혼자 뒹굴기를 좋아했다. 내가 매번 그렇게 한다는 걸 그도 아는 모양이었다. 나는 섭섭함을 꾹 눌러 담고 고개를 끄덕였다. 옷을 다 입은 그가 현관을 향했다. 나도 쭈뼛쭈뼛 그를 따라나섰다. 그의 뒷모습은 앞모습보다 익숙했다.

“원하는 만큼 쉬어요.”

그가 문을 열기 전에 말했다. 어수선한 마음에 자꾸 목덜미로 손이 갔다. 평소라면 조심히 가라고 말해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왜인지 내 입으로 가라는 말을 하기 싫었다. 나는 수습도 못 할 거면서 손부터 뻗었다. 손끝에 그의 재킷이 잡혔다.

“저기.”

“네?”

“……안 가면 안 되겠지?”

무례하게 취급받았다고 착각해서 욱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제멋대로 구는 것이 민망했지만.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는지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시선까지 마주할 만큼 뻔뻔하지 못했다.

또 이상한 침묵이 흘렀다. 침묵이 하도 길어져서 나는 눈동자부터 밀어 올려 고개를 들었다. 그는 붙잡힌 재킷 끝자락을 보고 있었다. 하아, 이윽고 무거운 한숨.

“……오늘 진짜 미치게 하네.”

낮게 깔린 목소리가 성급했다. 나는 놀라서 재킷을 놓쳤다. 뭔가 잘못한 기분이었다.

“시호 씨. 몸 줄어드는 약. 만들 수 있어요?”

“……?”

몸이 줄어드는 약이라면 아포톡신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특히 우리에게 그 약은 금기어에 가까웠다. 가벼이 꺼낼 만한 주제도 아니고 굳이 꺼내고 싶지도 않은. 이 상황에 튀어나올 만한 단어가 아니라서 나는 무심코 얼굴을 찌푸렸다.

“초등학생 정도로는 부족해요. 한… 손가락 정도 크기?”

하지만 그는 진지해 보였다. 그는 직접 검지를 들어 보이면서 크기를 가늠했다. 실없는 장난은 아닌 것 같아서 나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글쎄. 아포톡신의 원리상으로는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갑자기 그건 왜?”

“시호 씨 줄어들게 해서, 내 주머니에 넣어 다니려고요.”

그가 재킷 주머니를 톡톡 치면서 말했다. 표정이 하도 진지해서 순간 장난인 줄도 몰랐다. 뒤늦게 말뜻을 알아차리고 얼굴을 붉혔다.

“……뭐야 그게.”

참을 수 없이 낯간지러워서 입술을 꾹 깨물고 있으면 그가 성큼 다가와 귓불을 만졌다.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시호 씨. 오늘 여기 계속 있을 거죠?”

“응…….”

“그럼, 일 끝나고 여기로 올게요.”

“여기로?”

“응. 새벽에 올지도 모르지만… 괜찮으면 기다려 줄래요?”

그가 이마를 맞대며 말했다. 거리가 가까워서 선뜻 답하지 못했다. 나는 겨우 고개만 끄덕였다. 그것으로 충분한 듯 그가 웃으며 뒤돌았다. 그럼 다녀올게요. 그가 문을 열면서 말했다. 대답은 바라지 않았는지 문은 곧 닫혔다.

쾅. 닫힌 문을 바라보며 나는 입에서 맴돌기만 한 말을 조심스레 읊조렸다. 다녀와. 그 말 한마디가 뭐라고 해 주지도 못했다. 게다가 오늘 밤에 어서 오라는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목까지 다 화끈거렸다. 뭐야, 갑자기. 이런 거 원하지도 바라지도 않았지만.

이제 더는 그의 뒷모습이 서운하지 않았다.

새벽에라도 돌아온 그에게 이제부터는 같이 살자고 말하면, 그는 어떤 표정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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