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영은 재빨리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역으로 물었다.


"주인께서는 이와 같은 사안들을 어찌 자세히 알고 술술 답하시는지." 

"별것을 말씀드렸다고 그러십니까? 민심이며 소문 같은 것은 이런 주점을 운영하고 있으면 자연히 귀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말씀이 참으로 유창하지 않으신가."


주인은 빙긋 웃었다. "찻집에서 하는 일은 이리 손님들 말 상대를 하거나 취객들과 대거리를 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차를 우리는 손을 거두고 말했다.


"왕부의 군주께서 어찌 이 지척까지 걸음하셨는지요."


영녕의 곁에 있던 두 사람의 기색이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다행히도 상대는 이를 눈치채지 못한 듯, 무를 갈고닦은 적은 없는 이인 듯 말을 이었다.


"군주, 자령국은 현재 무척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지금 군주께서 끼어드시면 사안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큰 위험에 처하실 수도 있습니다."


영녕은 잠시 주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속으로 계산을 끝내면 영녕은 차라리 잘 되었다는 심정으로 상대에게 물었다.


"무슨 상황인지 알아야 나도 내 움직임을 정할 것 아닌가. 설득하고 싶다면 사정을 알려주게. 그렇지 않다면 나는 수사를 계속할 것이야."

"그러시리라고 생각했지요. 그렇지 않다면 어찌 황도에서 예까지 직접 걸음하셨겠습니까."


주인 여자는 고개를 들고 일행을 바로 보았다. "저는 주라(珠羅), 이 고을에서 가게를 하고 있는, 홍려당의 사람입니다."


영녕도 시선을 바로 마주했다. "홍려당이라. 과연 온 나라에 눈과 귀가 닿지 않는 곳 없다는 이야기가 헛소문이 아니군. 이는 화괴로부터의 지령인가?"


"홍려당은 점조직 성향이 강합니다. 저는 이 일에 관련되어 자령으로 가는 관문인 유주에 머물러 있다 하면 될까요. 물론 오랫동안 여기서 가게를 운영해 온 것은 사실입니다만……."


주라는 차를 바꾸어 왔다. 말리화(茉莉花) 향이 아찔하게 퍼졌다.


"자령은 경관이 아름답고 각종 공예며 예술이 흥성하여, 유흥으로도 이름난 곳이었습니다. 따라서 홍려당에는 자령국 출신 구성원들이 많지요. 이번에 저희가 이 사건에 개입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군주, 아까 말씀드린 소문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자령국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리 걸음하신다면 필시 들어 두셔야 할 것이에요."

"말해 보게."

"자경환은 현재 유주후의 자리를 비우고 자령국에 머물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는 친분을 이용해 자령국의 왕실을 장악한 듯해요. 자령이 유주로 편입된다는 소문이 유주에는 공공연히 돌고 있으며, 자령국은 본래 제국에 바쳐야 할 공물에 더해 주에서 걷는 세금까지 더해져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런 일을 앞서서 자행하면서 도리어 자령국에 내려오는 도화전설이라는 것을 퍼뜨려, 어려운 이들의 마음을 미혹하고 불만을 잠재우는 수단으로 삼고 있으니 이것이 나라를 통째로 먹어치우려는 욕심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주라가 한 마디 한 마디를 이을 때마다 일행의 표정은 굳어져 갔다. "그 어찌……." 단선이 중얼거렸다. "일어날 수 있는 일이란 말이오." 


"사실입니다. 얼마 전 자령에 다녀오며 보고들은 것이지요. 그러니 도리가 없습니다, 군주."

"…그럴 수도 있겠다." 


자령에 관해 읽었던 문헌들을 떠올리여 영녕군주는 답했다. 주라는 이마 위로 주름이 져 한껏 걱정스러운 표정을 띄우고 말했다.


"군주. 이대로 가면 자령국은 자경환에게 먹혀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손대지 말라는 점이 요지로군."


여관으로 돌아온 영녕은 무사들과 둘러앉아 고민에 빠졌다. 사실상 약식 회의라고 해도 될 것이었다.


"자경환은 자령국 왕실과 먼 혈연이 있는 인사로서 그 친분을 통해 점차 자령국을 자신의 발밑에 두어 권세를 높이려고 하고, 이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제주후 이설은이 개입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입니까."

"전쟁이라고 하기도 무색하지. 화포로 무장한 제주군이 그대로 월강을 건너 자경환을 향한 무력 시위를 할 셈인 듯하니까."


골똘한 예비 장군들 곁에서 영녕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포병은 중앙군만이 배치할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제주후가 무엇이라고 사사로이 화기를 다루며 군사를 움직이지."


다시 한 번 영녕은 이 나라의 상태가 제국이라 하기에 한참 모자라다고 느꼈다. 행정과 관제가 제대로 작동한다면 제주후는 이에 관해 천자에게 보고서를 올리고, 2군 가운데 빼어난 장수들이 유주로 파병되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지방군이 화포를 밀반입하고 각 주가 내전을 벌이는 모양이 아닌가. 


"홍려당은 이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가능하다고 보는 것일까요? 제주후를 통해 군사를 동원한다 해도 그에게 야심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터, 상황이 평화롭게 해결되고 제주후가 물러가 나라가 평화를 찾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입니다만……."

"모르지. 우리에게 말하지 않은 또 다른 수가 있는 것은 아닐까."


영녕은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또 어떤 방안을 강구하든 제주후 휘하에 포병이 생겨나는 상황은 용납할 수 없어. 그렇지 않은가." 그에는 융롱과 선도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는 화약 문제를 해결하고, 그리고 자경환을 고발해야 할 텐데……."

"이 다음은 자령국으로 가 봐야 알 듯싶습니다. 한데 홍려당의 주라에게는 일단 그 뜻에 반하지 않도록 하겠다 약조하였음에, 어찌하실 참이신지요."

"……."


영녕은 자리에 앉아 어둑어둑해진 창 밖으로 가랑비가 내리는 풍경을 보며 한참 생각했다. 어찌할 것인가. 


"자령의 왕실을 방문해 봐야겠다. 융롱, 그리고 정예인 기병(騎兵)이라면 자령국까지 오는 데 며칠이 걸리겠느냐?"

"전력으로 이동한다면 10일, 곧장 싸움에 임할 수 있을 정도로 전력을 보존하면서 행군하면 국경까지 두 주 남짓입니다."

"자령국 내에서 이동할 생각도 해야겠지. 파발을 보내도록 하자."


그 사이에 조사를 마치고 병사들과 호응하겠다는 계획이었다. 화약을 사이에 둔 싸움이라. 그렇다면 비가 다소 오는 날이 좋을까. 일영은 어둠 속에서 가느다란 발처럼 내리는 비를 보면서 생각했다. 





자령국은 분위기가 아주 이상했다. 길거리는 한산하고, 한산하지만 사람들이 돌아다니지 않는 것은 아니었는데, 어쩐지 표정이 어두웠다. 길은 포목과 비단, 주렴을 걸어 놓은 가게들로 화려하고 번쩍번쩍하였으나 생기가 없었다. 가게 사람들은 손님을 끌 생각도, 활기차게 거래를 할 의지도 없어 보였다. 이따금씩 온통 푸른 옷을 차려입고 무언가 중얼중얼하는 사람들이 지나갔다. 그들은 머리를 단정하게 빗고 옷도 구성을 맞게 챙겨입었으나 푸른색은 볕에 바래 엷은 구름 같은 빛깔이 되었고 군데군데 옷감이 닳아 늘어진 부분도 보였다. 마치 그 옷만 입고 수 달을 지낸 사람들 같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선이 중얼거렸다. 활력이라면 둘째가라 하기 서러운 일행은 이 사이에서 눈에 안 띌래야 띌 수도 없을 듯했는데, 그런 그들을 슬며시 바라보는 사람들은 있었으나 말을 거는 이는 또 아무도 없었다. 분위기를 참다 못한 선이 아무 가게로나 가서 물었다.


"이보시오, 나는 오랫동안 황도로 떠나 있어 보지 못했던 어머님을 만나러 자령국으로 돌아온 사람인데, 거리 모양이 왜 이리 된 것이오? 내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모양은 도무지 이렇지 않았는데!"

"뭐요?"


주인의 대답은 한 박자가 늦었다. 무엇에라도 씌어 있던 사람 같았다. 


"내 고향인 자령국 사람들이 왜 이런 모습인지 물었소만."

"고향?"

"그렇소."


이제 제법 역할 설정에도 익숙해져 자연스럽게 자령을 고향이라 말하는 선에게 주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런, 그러면 당신은 아주 오랜만에 돌아온 모양이군. 자령이라니, 그것은 이제 옛 이름이 될 것이오. 곧 철쭉이 피는 이 도화원에는 다시 복사꽃이 만개하고, 떠나갔던 신선들이 돌아와 이 나라를 선계로 올려보낼 것이란 말이오." 

"선계?"


선이 대화하는 저 너머에서 일영이 손짓과 고갯짓으로 열심히 그러라고 신호를 보냈다. "아, 선계……. 그렇지. 그러니까… 나는 자령이 선계로 돌아가기 전에 어머님을 뵈려고……." 선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저희도 아주 오랜만에 돌아온지라 최근 소식에 사정이 어둡습니다. 자령이 선계로 되돌아간다는 말은 들었으되, 그것이 언제부터의 이야기인지 알 수가 있겠습니까?" 융롱이 일영의 귓속말을 듣고 나서서 거들기 시작했다. 


"당연히 이 세상에 구름이 걷히기 전부터요. 도화원의 전설은 자령국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것이란 말이오."

"그러면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선계로 올라갈 준비를 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입니까?"


이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때를 묻는 말이었다. 주인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는 듯 눈가를 찌푸리다가 더듬더듬 말했다. 


"글쎄, 한두 해가 지났나……. 잘 모르겠소."


"한 해 좀 전이면 주라가 말하길 자령이 유주에 통합된다 하는 방이 붙은 때쯤입니다. 그때부터가 아닐까요." 선이 속삭였다. "그래, 백성들을 수탈하는 것과 미신을 퍼뜨리는 시기가 비슷하거나 일치한다면 말이 되겠군." 일영이 끄덕이는데, 그때 길거리에 다니던 푸르고 해진 옷을 입은 사람 가운데 하나가 갑자기 가게 안으로 들어와 불렀다. "주인장 있는가." "아이고, 도사님!" 


일행이 뒤로 몇 발 물러나는 동안 주인은 반색하며 그를 맞이했다. 푸른 옷의 사람들은 성별을 가리지 않고 높이 올려 묶은 머리를 하고 있었고, 행색은 하나같이 말끔하나 초라했다. "요기를 좀 하러 왔네." "식사 말씀이십니까요? 네네, 이쪽으로 들어오시지요. 가게 앞은 아무래도 혼잡한지라……."


주인은 삽시간에 청의인을 데리고 가게 안으로 사라졌다. 세 사람은 아연하여 서로를 쳐다보았다. 


"저 자는 무엇이길래 갑작스레 밥을 내놓으라 하지."

"그보다 여기는 식당이 아닌 옷 가게가 아니냐."

"서로 아는 사이일까요?"


웅성거리며 그들이 추리를 하는 동안 주인은 안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더니, 그들이 다른 가게로 발을 옮겨 보려고 할 때쯤에야 다시 나왔다. 청의인을 보고 반색하던 얼굴과는 도로 딴판인 표정이었다. 


"그래, 또 용건이 남았소이까?"

"그, 거리에 이제 선계로 올라갈 사람들밖에 남지 않은 듯한데 그러면 옷을 사고팔며 저 옆집에서 취급하는 귀금속 같은 것을 구매해 가는 이는 누구입니까?"

"그건 매주 나루터로 가면 왕실에서 일괄 물품을 사입하고 곡식으로 되돌려 줍니다. 어차피 도화원이 오기 전까지는 먹고살기만 하면 되니 상관없는 것 아니겠소."

"저… 도사님들께서는."


융롱이 슬쩍 눈치를 보며 길을 걷는 몇 명의 또 같은 차림인 사람들을 보고 말했다.


"어떤 분들이십니까? 저희가 돌아온지 얼마 안 되어 뵌 적이 없으니 혹시 누를 범할까 싶어 그럽니다."

"흠흠. 푸른 옷의 도사님들은 도화 신선의 도맥(道脈)을 잇는 분들로서 곧 단호의 언덕으로 신선들이 내려오실 때 가장 먼저 마중하실 분들이시오. 여러분들도 이제 자령에 돌아와 함께 그 날을 기다리는 처지이니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도록 주의하시고."


그때 가게 안에서 식사를 마친 듯한 속칭 도사가 나왔다. "그대 공양은 잘 받았소. 내 답례로 주문을 외워 드리리다." "아이고, 이 덕을 어찌 갚아야 할지요……."


주인은 도사가 시키는 대로 가게를 떠받치는 기둥 아래에 도사와 마주보고 섰다. 도사는 주인의 어깨와 머리에 손을 얹더니 중얼중얼 무슨 경을 외기 시작했다. 


"완전히 이런 사람들밖에 남지 않은 모양입니다. 거리를 보면 문을 닫은 가게도 종종 있었습니다." 융롱이 속삭였다. "큰일이다. 자령의 백성들이 죄다 이런 꼴이라면 나라 전체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다는 뜻일 게야. 한시빨리 왕궁을 찾아가 사건의 전말을 알아야겠어." 


도사라는 사람이 떠나고서 일영은 주인에게 이것저것 알려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한편 혹 왕실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있으시냐고 물었다. 주인은 고개를 저었다. "영왕(榮王) 전하와 그 국서(國壻)*께서는 오래 전부터 몸이 편찮으셔 백성들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국서 : 왕의 남편을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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