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지명, 인물, 사건들은 실제와 관련이 없음을 알립니다.


(오류로 인해 재발행 합니다. 죄송합니다.)

 

03. 유토피아


 [일본. 아시아 동쪽 끝에 있는 입헌 군주국. 일본 열도를 이루는 홋카이도, 혼슈.]

 

 약정이 한참 지난 낡은 핸드폰의 화면을 끈 뒤 규진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일본은커녕 제주도 땅도 밟아본 적 없는 규진에겐 멀디먼 나라였다. 갑자기 생긴 미지의 나라에 대한 호기심의 근원지. 물론, A였다. 이제 끄트머리를 향해 타들어 가던 담배를 발로 비벼 껐다. 규진이 바텐더로 일하는 '에이스'의 후문은 이미 암묵적인 흡연 구역이 되어 담배꽁초가 수북했다. 환경미화원의 근무지에서도 사각지대인지, 가끔 일면식 없는 아르바이트생이 바닥을 쓰는 것 외엔 그곳을 관리하는 사람은 없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여자, 그런 여자의 돈을 노리고 그를 부축하는 남자. 잔 밑에 깔린 지폐, 어제까지 밀린 방세에 허덕이던 놈이 차고 나온 명품 벨트. 아무리 금칠을 해도 저급해 보이는 사람들투성이였고, 그 언저리에 규진이 있었다. 서른셋 먹고 모아둔 돈 없이 이런 곳을 방황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앎과 동시에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느냔 신세 한탄이 섞였다. 덥고도 추운 바람이 스쳤다.

 

 "형, 일본까지 얼마나 걸리지?"

 "글쎄, 한두 시간 걸리겠지 뭐."

 

 종수가 그와 어울리지 않게 신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탈의실 간이 소파에 마주 앉은 둘은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고 대화했다. 갑자기 피어오른 호기심은 그저 다른 나라 사람과 일대일로 대화해본 적 없는 규진에겐 신선한 자극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장 모든 걸 버리고 갈 의지는 없었다. 태생부터 빠듯한 인생에 비행깃값을 낼 만한 여유자금 따윈 없었고, 손에 쥔 것 하나 없이 낯선 나라에 떨어진 자신은 지금보다도 굶고 다닐 게 뻔했다. 그저 A가 몸담은 땅이 궁금했을 뿐이다.

 

 "굳이 먼 데까지 가서 여자 만날 필요 없잖아?"

 "내가 무슨, 그런 거 아니야."

 

 규진이 소파에 몸을 뉜 채 시선을 돌렸다.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종수의 담배를 꺼내물어 불을 붙였다. 그저 자신의 정체를 숨긴 사람이 어떤 놈일지, 그게 궁금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진짜 일본행 비행기 푯값을 검색해본 나도, 어딘가에 홀려있던 것은 분명했다. 이끌린 건지, 이끌릴 작정이었는지는 몰라도. 규진이 기다란 손가락으로 눈썹 뼈를 매만졌다. 곤란한 일이 있거나 일이 복잡하게 흘러갈 때 나오는 규진의 습관이었다. 그것이 처음 나왔을 땐 처음으로 혼자 살기 시작한 후 정부 보조금을 전부 써버렸을 때였다.

 

 "그거 무슨 뜻이에요?"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팔짱을 끼고선 규진의 손목 아래에 있는 무늬를 가리키며 말했다. 처음 본 얼굴이었다. 살짝 걷은 와이셔츠 아래로 보이는, 지금으로부터 십삼 년 전 멋모를 스무 살 때 받은 엉터리 타투였다. 화려한 무늬의 단검은 그 아래로 여러 갈래의 가시나무를 짓누르고 있었다. 싼값에 받으려다 보니 혈관을 타고 다 번져버린 잉크에 그다지 멋스럽진 못했다.

 

 "혼자서도 잘 살아야지, 뭐 이런."

 "어렸을 때 받았구나?"

 

 잔을 받아 든 여자가 입술만 적시고선 잔을 내려놨다. 끝이 파마처리가 된 갈색 머리의 여자는 묶여있던 머리를 풀어 더욱 높게 묶으며 말했다. 그러자 귀 뒤에서 시작하는 듯한 타투가 여자의 어깨선을 따라 길게 보였다. 그 끝은 옷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나 그 타투 알아."

 

 여자가 이번에는 잔에 있는 술을 반쯤 마시곤 규진을 바라보았다. 묘하게 아는 사람을 만났다는 듯한 눈빛을 하는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돈을 줄 테니 한 번 자자는 눈빛도 아니고, 지금 천 년에 한 번 있을까 한 사랑에 빠졌다고 착각하는 눈빛도 아니었다.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야, 하는 귀찮은 소리를 속으로 삼켰다. 예의상 하는 아, 네. 하는 인사말도 없었다. 그저 가볍게 묵례를 하고선 술병을 들고 다른 테이블로 향할 뿐이었다. 그러자 여자가 그의 발길을 막았다.

 

 "그거 내가 한 거야."

 "."

 "십몇 년 전에, 홍대 근처에서. 맞지?"

 

 규진은 대답 없이 테이블 위에 양주를 내려놓았다. 그저 맡은 바를 다하는 성실한 바텐더처럼. 테이블에서 다시 여자의 앞으로 오기까지 여자는 규진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그 찰나의 순간에도 슬금슬금 자신을 향하는 눈빛들을 규진은 애써 무시했다. 오늘은 열리는 지갑을 향해 아양을 떨 생각 따윈 없었다. 다시 자리로 돌아와서 본 여자의 얼굴이 묘하게 낯이 익었다. 분명 모르는 얼굴이었는데. 타투는 생각보다 아팠고, 아무리 싼 값에 받았다곤 해도 덜컥 십만 원 돈이 빠져나가 며칠간 규진의 저녁은 생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자의 얼굴이 기억에 남았던 이유는.

 

 "뒷조사를 꽤나 열심히 하셨네요."

 "..우연히 들렸는데 너가 있던 거야. 착각하지 마."

 

 따지고 보면, 규진의 전 여자친구였기 때문이다.

 

 이렇다 할 추억거린 없었다. 앉아서 두 시간을 넘게 서로 마주 보며 낑낑대던 초짜 타투이스트와 멋모르고 가격에 홀라당 넘어가 버린 철부지가 단순히 눈 맞아서 한 달 남짓 교제하다 헤어졌을 뿐이었다. 그 뒤로 여자는 일 년가량 잊을 만 하면 전화가 오는 귀찮은 전 여자친구 역할을 도맡아 했고, 규진은 연애의 아픔인지, 바늘의 아픔인지 그 뒤로 몸에 그림을 그렸던 일은 없었다. 연락이 끊긴 후론 가끔 규진이 일하던 호빠에 손님으로 온다던가, 했지만 그럴 때마다 이렇게 발뺌했다. 물론, 그 바닥에서 쫓겨난 후 연락하는 사람이 뚝 끊긴 마당에 정말 여자가 우연히 이곳을 찾았을 확률도 제로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 여자, 이름이 뭐더라?

 

 규진보다 한 살 많던 여자는 이제 서른넷 됐겠다. 예나 지금이나 돈에 허덕이던 규진을 거둔 것도 이 여자였고, 철이 없었다 둘러대기엔 꽤 몹쓸 짓을 해대며 빌붙어 산 것을 받아준 것도 이 여자였는데 그 주변 요소들만 생생하게 기억이 날 뿐, 이 여자의 이름 세 글자, 혹은 그 이상 이하의 글자가 생각이 나질 않는다.

 

 "잘 사네요. 남의 몸에 이런 걸 그려놓고."

 "그 대신 그 이상으로 갚았잖아. 지금 보니 참 구리다 그거."

 "어떻게 알고 왔는데요?"

 "말했잖아. 진짜 우연이라고."

 

 여자의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가 끼워져 있다. 중간에 큼지막하게 다이아라도 박혀있으면 어쩌나 했지만, 그저 옅은 금색이 나는 심플한 반지였다. 결혼반지. 여자가 반지를 빼 황금빛 액체가 담긴 컵에 빠뜨렸다. 작은 거품을 내며 반지가 잔 밑에 깔렸다. 반지가 있던 자리는 어떠한 자국도 남지 않았다. 마치 한 번도 반지 따위 껴본 적 없다는 듯이.

 

 "나 지금 이혼하고 오는 길이거든."

 

 어떠한 변화도 없는 손가락을 보니, 반지를 낀 상태로 여름을 나진 못했나 보다. 오랜만에 외간 남자와 술을 마실 작정으로 이곳저곳을 둘러보는데, 본 적 없는 지하 펍이 보였고, 그게 하필이면 자기가 죽고 못 살았던 전 남자친구가 일하는 곳이었다며 규진이 묻지도 않은 말을 여자가 줄줄 뱉었다. 컵을 그대로 규진의 앞으로 밀어 넣고 여자는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갔다. 끝까지 여자의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무감각이던 몸에 한기가 서려서 창밖을 보니, 어느새 밖은 축 젖어 있었다. 규진이 뒷문에 서서 간신히 비를 피하며 담배를 얻어 피웠다. 집 창문은 꼭 닫고 나왔었는지, 또 비가 새서 윗집이랑 싸우게 되진 않을지, 하는 골치 아픈 생각이 든다. 거리에 네온사인들이 눈에 담기지만 그것이 뇌까지 전달되지 못하고 흑백으로 바뀌었다. 콘크리트 사이에 꿋꿋하게 핀 노란 민들레만이 그 빛을 담고 있다. 아, 봄이구나. 그래서 덥지도, 춥지도 않았구나. 비 덕분에 느껴지는 한기에 팔짱을 끼며 생각했다. 지금, 일본에도 비가 올까.

 

 [라일락: 여긴 비가 와.]

 [A: 여긴 맑음이에요. 어제도, 내일도.]

 

 예상대로 작게 열어둔 창문 틈새로 비가 샜다. 그 덕에 밑에 깔려있던 이불도 그대로 젖어 오늘은 바닥에 이불을 깔지 않고 자야만 했다. 젖은 이불을 세탁기에 밀어 넣고 돌릴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노트북을 켰다. 여자니, 뭐니 하는 내용의 글은 한 자도 쓰지 않았다. 사이트에서는 이따금씩 연락이 왔지만, 문자를 전부 씹으니 아예 규진의 글이 모두 내려간 상태였다. 그를 기다리는 이는 하나 없었고, 그 자리는 또 다른 저급한 글들이 채워졌을 뿐이었다. 오늘은 다른 의미로 키보드를 두드렸다.

 

 [라일락: 그래서, 대체 몇 살이야?]

 

 이름 같은 건 알려줄 리 없었다. 이것도 별 기대 없이 툭 던져본 질문이었다. 어리다고 했으니까 대학생 정도? 설마 고등학생? 아니, 요즘 애들은 빨라서 이런 이상한 사이트쯤 중학생이 되면 졸업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담 자신은 정체불명인 중학생, 것도 남자애와 며칠간 이상하고 유치한 대화를 나눴단 생각에 자기 자신이 조금 더 싫어질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얼굴도 모르는 A를 위해 배려차원에서 '혹시, 제가 당신의 나이를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따위의 말투를 쓰고 싶지도 않았다. A는 한동안 답을 하지 않았다.

 

 [A: 24.]

 

 스물넷. 규진과는 아홉 살 차이였다. 강산이 변할뻔했을 만큼 어리단 뜻이었다. 이제는 희미한 기억만이 자리한 규진의 스물넷에 대한 기억이 피어올랐다. 서른셋이라는 나이는 평생 나에게는 오지 않을 것만 같았고, 어떻게든 혼자 살아가다 보면 남들도, 나를 버린 부모도, 그 누구도 나를 무시하지 못할 위치에 오를 거라는 어떠한 자만심에 빠져 허우적거릴 철부지였다. 물론 그 뒤로 자신의 삶을 갈고닦지 못한 게으름이 컸던 탓에 축 젖은 방바닥 위에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던 거겠지만.

 

 A는 규진의 나이를 물어보지 않았다. 규진도 대충 엇비슷하게 거짓말을 칠 작정이었지만 물어보지 않으니 굳이 먼저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A는 여느 때와 같이 지독히도 일상적인 얘기들만 흘려놓고는 오프라인이라는 아이콘을 띄웠다. 그의 내용은 대부분 마당에 핀 민들레나, 오늘의 저녁밥이거나, 길을 잃고 울던 꼬마 이야기 등을 해댔다. 사이사이 의미 모를 일본어가 섞이긴 했지만, 그저 비슷한 말이겠거니 하며 대충 맞장구를 쳤다. 이렇게 지독히도 자극적이지 못한 문자들은 의외로 그 성질이 독했다. 자신이 어느새 그 이야기들이 없는 날이면 뭔지 모를 허전함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알아차리기까지의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것이 대화를 넘어 A의 존재 자체가 규진의 안에 그런 식으로 물들었단 사실을 알아차린 건 아주 나중의 일이었다.

 

**

 

 아주 차가운 겨울, 작은 쪽지만을 남겨놓고 규진의 부모는 그렇게 손에서 작은 생명을 놓고 홀연히 떠났다. 그 누구도 부모를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 규진의 손을 맞잡아준 수녀님은 항상 언제 어디서나 얼굴도 모르는 엄마, 그리고 아빠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으며 사랑으로 보듬어주고 있다는 말만 했다. 자신의 눈앞에 나와주지도 않은 사람들이 저 멀리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니, 규진은 정말 구름 위로 올라가면 이 땅 전체가 보이며, 그중 부모의 두 눈에 자신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일 거라는 일말의 믿음을 갖고 살았다. 진심으로 그 말이 규진의 마음을 울렸던 건 아니다. 그냥, 그렇게 믿지 않으면 미운 아이의 낙인이 찍혀버릴 것만 같아서였다.

 

 그때부터 규진의 삶은 우여곡절 속 평탄함이었다. 온갖 차별과 편견 속에서 살면서도 속으로는 자신에 대한 믿음이 강했다. 비록 내가 이 땅에 혼자 태어났을지언정, 무엇인가는 남겨놓고 떠나겠다는 꽤나 어린 소리도 종종 해댔다. 물론 그것마저도 이제는 십여 년 전 얘기가 됐고, 이제는 평탄하다 못해 무미건조한 하루살이 인생일 뿐이다. 그래서 갑자기 어렸을 적 이야기는 왜 꺼냈느냐, 하면 규진이 항상 이맘때쯤 꾸는 꿈 때문이다.

 

 보육원에서 순수하게 나의 생모, 생부는 어디 있냐는 물음을 건넸던 장면도 아니고, 부모가 없다는 걸 처음 알았던 초등학생 때 이야기도 아니었다. 열다섯, 호르몬이 판을 치고 자신의 것인데도 걷잡을 수 없이 튀어 오르는 감정을 제어하지 못 하는 말 그대로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막연한 자신감만이 규진의 모든 것을 담당하고 있을 때 만난 여자친구가 그 주인공이었다. 항상 또래보다 키가 컸던 규진은, 키만 컸을 뿐 속은 이제 막 거뭇거뭇한 수염이 자라나는 중학생이었다. 그 누나에게는 자신이 고등학교 이 학년이라며 밑밥을 깔고선 교제를 시작했다. 분위기는 이상야릇하게 흘러가고, 아랫도리는 제 맘처럼 되지 않고, 상대방의 기분따윈 생각할 노력조차 없던 어린 날의 기억이 어째서인지 생생하게 규진을 괴롭히곤 했다.

 

 그 누나를 만날 땐 항상 남의 옷을 훔쳐서라도 개중에 가장 괜찮은 옷을 입고 갔는데, 그날따라 조금 허술했던 게 화근이었다. 학교가 끝나고 곧장 그다음에 있을 데이트를 위해 보육원으로 뛰어가다 누나를 만났다. ○○중. 오른쪽 가슴팍에 대놓고 달린 자수가 누나의 두 눈에 비쳤다. 아아, 아직 키스도 못 해봤는데. 더 이상 탐닉하지 못한 누나에 대한 아쉬움 때문일까, 그 후에도 규진은 항상 연상의 여자들을 좋아했다. 그런데, 그 누나의 이름이 뭐였더라.

 

**

 

 "야 규진아, 너 보육원에서 자랐다 했지?"

 

 꿈자리도 뒤숭숭한데 지하로 내려가는 첫 계단을 딛자마자 불쾌한 소릴 들었다. 뒤에서 자신을 따라오던 종수의 목소리였다. 딱히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 숨겼던 적은 없었으나, 왠지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망쳐버린 첫사랑까지 함께 까발려지는 듯한 느낌에 미간을 찌푸렸다. 규진이 대답이 없자 잠깐 망설이던 종수가 자신의 핸드폰을 건넨 후 태연하게 오픈 준비를 시작했다.

 

 [홀로서기 시작한 사람들, 보호 종료 아동들의 부모 찾아준다.]

 

 "부모 찾아준다더라. 관심 없는 거 아는데, 그래도 혹시나."

 

 벽에 달린 네온사인의 불빛이 반짝거리면서 켜졌다. 터무니없는 기사 제목에, 부모가 있는 사람만이 온전하다는 내용, 그리고 핏줄을 찾아준다는 것이 마치 유토피아를 향해 나아간다고 믿는 사람들. 기사에 달린 댓글은 처참했다. 나는 부모의 얼굴도 모르고, 그들을 원망해본 적 없으나 실제로 보게 된다면 그러지 않을 거란 보장이 있는가에 대한 심정이 구구절절하게 적힌 글이 제일 공감을 얻었다.

 

 "그럴 세금 있으면 차라리 보육원 하나 더 지으라 해."

 

 규진이 테이블 위로 핸드폰을 살짝 내려놓았다. 핏덩이들 하나 살려주질 못할망정 온갖 풍파 다 겪으며 자라난 사람들 앞에 이제야 살만해진 부모가 나타난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으랴. 그냥 엿 먹어봐라, 이거지. 보나 마나 뻔히 이러다가 말 기획이었다. 욕이나 진탕 먹고 올린 사과문이나 봤으면 속이 편하겠다.

 

 "그럴 반응일 줄은 알았는데, 진짜 그런 반응뿐이네."

 "여기서 더 뭐, 마음 아플 시기는 애진작에 끝났어."

 

 규진이 담배에 불을 붙이며 대답했다. 조용하다 못해 살짝 목소리가 울릴 정도로 고요한 내부는 은은한 조명과 네온사인만 빛을 내고 있다. 테이블 위로 걸레를 툭 던진 종수가 가만히 있지 말고 먼지 좀 닦으라는 듯이 턱짓을 했다. 규진이 오른손엔 담배를, 왼손엔 걸레를 잡고 대충 그 위를 훑었다. 물 자국 위로 담뱃재가 떨어지면 대충 털어 닦고, 또 떨어지면 또 대충 털어 닦고를 반복했다. 안 하느니만 못한 청소였다. 그 동작이 반복되다가 이제는 아예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며 담배를 태우는 데에 열중했다.

 

 "그러면."

 

 종수가 규진이 아무렇게나 내팽개친 걸레를 들며 말했다.

 

 "니네 엄마아빠가 너 찾는다고 하면, 어떡할래?"

 

 규진이 천장을 향해 후, 담배 연기를 뱉어냈다. 눈앞에 하얀 연기가 드리웠다가 이내 흩어졌다. 실내라 그런지 뿌연 잔상을 남기긴 했지만, 뚜렷하게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진 않는다. 여기저기 흔적을 남긴 담배 연기 덕에 원래 더 하얬을 것 같은 벽지가 누렇다. 저런 건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다. 그 모습이 어딘지 나와 닮았다.

 

 "..좆같겠지."

 

 [라일락: 좆같겠지.]

 

 오랜만에 꾼 꿈 때문인지, 별 같잖은 기사 제목 때문인지, 자신과 닮은 게 고작 누렇게 바랜 벽지 때문인지. 규진이 말도 없이 조기 퇴근을 했다. 남몰래 짐을 챙겨 담배를 피우러 나가는 척 그대로 택시를 잡고 집으로 향했다. 짐이랄 것도, 집이랄 것도 없었다. 그저 지갑과 핸드폰, 그리고 빗 자국, 곰팡이 자국이 가득한 방 한 칸이었다. 유토피아. 가려고 길을 미친 듯이 닦는 사람들만 봤을 뿐 그곳에 도달한 사람의 소식은 한 명도 듣질 못했다. 마치 어디선가 뉴스에서 봤던 사이비 종교 교주들의 말처럼 어디 하늘 위에 자리한 곳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끝은 죽음인가.

 

 저도 모르는 사이 오늘 있었던 일을 글을 쓸 때보다 빠르게 타자를 써 내려갔다. 얼굴을 마주 보고 하지 않는 대화가 어색했던 것도 잠시, 그렇기에 여과 없이 말을 해대고 있었다. 것도 자신보다 아홉 살이나 어린 A에게.

 

 [A: ユートピア]

 [A: 그런 건 없어요.]

 

 A는 유토피아가 없다 답했다. 가만히 자신의 이야길 듣던 A의 성격을 자세히 알진 못했으나, 여느 때와 같이 힘들었겠다느니 하는 구구절절한 위로 섞인 말을 들을 줄 알았는데 예상외의 답변이었다.

 

 [라일락: 일본이나, 한국이나 살기 쉽지 않구나.]

 

 아직 어린 A가 부러웠다. 후에 알았으나, A는 규진의 나이가 부럽다 말했다.

 

 [A: 아니요.]

 [A: 여긴 지옥이에요.]

 

  어디 있어? A. 지금은 유토피아가 보여?

쫌쫌따리 쫌쫌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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