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모난 명함들은 어린 아쉬타드에게 있어서 어른의 세상과도 같았다. 나도 이제 나이가 두 자릿수예요, 하고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멀고, 성숙하고, 위대한 세상. 동그란 원을 타고 돌아가는 네모난 명함 카드들은 아쉬타드에게 미래를 꿈꾸게 했다. 나도 언젠가는 이 사람들을 만날 거에요, 하고 외치게 만드는 미래. 투박한 상자에 담긴 레시피집도 비슷한 미래를 상징했다. 나도 언젠가는 저 사람들과 저 레시피를 하나하나 맞추어 볼 수 있는 어른이 될 거예요.

한니발이 아쉬타드의 열 살 생일선물로 준 것이 그 미래의 한 조각이었다.

둘만의 만찬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그런 중대한 발표를 할 장소로 저녁식사 자리만큼이나 적합한 곳이 또 있을까. 아쉬타드가 제 몫으로 나온 작은 심장을 야무진 손으로 썰었다. 심장 안에 꽉 채워진 고기들에서 핑크빛 육즙이 흘러나왔다. 고기로 채워진 심장 조각이 곁들여 나온 으깬 감자 조금과 함께 아쉬타드의 입으로 들어갔다. 한니발이 아쉬타드의 맞은편에서 작은 입이 오물거리는 모습을 흐뭇하게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곧 네 생일이구나."

아쉬타드는 대답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와인 잔에 담겨 나온 사과 주스를 홀짝였다. 달콤상큼한 맛이 진한 사과향과 함께 입 안에 퍼졌다.

"열 살 생일이지. 10은 예로부터 우주를 나타내는 수였단다. 창조의 패러다임이며, 모든 수를 포함하지. 기독교에서 10은 모세의 십계를 나타내는 수란다. 유대교의 카발리즘에서 10은 '영원세계'를 뜻하는 히브리어 알파벳의 열 번째 문자 '요드'를 뜻하지. 저 옛날 피타고라스와 로마는 10을 완전한 숫자라고 생각했단다. 우리가 살아가는 문화권에서 10은 하늘이 내린 숫자야. 그러면 다른 문화권에서는 어떨까, 아쉬타드?"

"동양의 명리학에서 10번째 문자는 천간 계수(癸水)예요. 계수는 천간의 마지막 문자죠. 비, 구름, 안개, 눈 등 항상 변화하는 물을 뜻하는 문자가 바로 계수예요. 마지막의 다음이라는 의미도 있지요. 마지막은 9번째 단어인 임수(壬水)고요. 가끔 동양학에서는 10이 완벽을 의미하니 신의 숫자라고 하기도 해요. 그 외에도, 오늘날 우리는 10진법을 쓴답니다."

한니발이 자신의 몫으로 만든 심장을 조금 썰어먹었다. 아쉬타드의 심장은 반이 넘게 남아 있었지만, 한니발은 이미 제 저녁식사를 거의 끝마치는 중이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와인을 홀짝였다. 아쉬타드의 사과주스와 비슷한 빛깔을 가진 화이트 와인.

"10은 특별한 숫자란다, 아쉬타드. 하늘이 내린 숫자지. 그러니 나로서는 네 생일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어. 조금만 기다리렴."

아쉬타드는 말하며 일어서는 한니발을 눈으로 따라갔다. 한니발이 만찬 도중에 일어서는 일은, 음식을 가져오려는 의도를 제외하면 매우 드물었고, 그래서 아쉬타드는 그렇지 않은 척 하면서도 궁금증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한니발은 아쉬타드가 남은 심장을 거의 다 먹었을 때쯤에야 돌아왔다. 한니발의 한쪽 손에는 매끈한 사과주스 병이 들려 있었지만 아쉬타드는 제 왼쪽에서 채워지는 사과주스에 신경을 쓸 수 없었다. 한니발이 가지고 온 것은 동그란 명함판이었다.

"아버지."

아쉬타드는 한니발을 불렀지만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포크와 나이프가 딸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접시 위에 떨어졌다. 접시가 흔들리자 겨우 두 조각 남은 심장이 옆으로 툭, 넘어졌다. 한니발은 반쯤 몸을 일으켰다가 억지로 다시 앉는 아쉬타드에게 사과주스를 밀어주었다.

"마시고 조금 진정하렴."

사과 주스 몇 모금이 급하게 아쉬타드의 목으로 넘어갔다. 이전과 달리, 아쉬타드는 그 맛을 거의 느낄 수 없었다. 퀭한 눈이 반짝였다.

"제가 하게 해주시는 거예요?"

한니발은 고개를 저었다.

"데려가 주마."

기대에는 못 미치는 말이었지만 아쉬타드는 아무래도 좋았다.

"언제요? 오늘?"

"네가 원한다면 오늘도 괜찮지."

한니발은 명함집을 아쉬타드 앞에 놓아주며 자리에 다시 앉았다.

"고르려무나. 네가 가져온 명함도 좋고, 원래 있던 것도 좋아. 식사했으니 고르는 대로 출발하자."

아쉬타드는 명함을 하나씩 조심스레 넘겨보았다. 스치는 종이의 질감이 소름끼칠 정도로 어색하여, 그녀는 잠시 몸을 떨었다. 베일 것 같이 날카롭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종이 끝부분은 뭉툭했다. 갑자기 다가온 미래의 조각은 그녀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한니발이 다시 사과주스를 밀어주었다.

긴장 풀어야지, 아쉬타드. 은근히 건네지는 말이 아이를 떨게 했다. 사과주스는 여전히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진한 사과향도 색이 바랜 듯 밋밋하기만 했다. 미끄러지는 손이 계속 명함을 훑다가 한 곳에서 멈췄다.

이름이 마음에 든다고, 아쉬타드는 생각했다. 사실 이름은 아무 소용이 없고 미끄러지는 손이 떨리기 전에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아쉬타드는 그 명함을 떼어내었다. 아쉬타드는 그 명함을 초록색이 예뻤던 명함으로 기억하리라 마음먹었다. 놀랍게도 그 명함의 촌스러운 디자인 사이의 초록색만은 찬란히 예뻤으므로.

한니발이 명함의 이름을 읽었다.

"지금 출발하면 딱 맞겠구나. 디저트는 다녀와서 만들어주마."

한니발이 일어나 테이블을 돌아 아쉬타드에게로 다가왔다. 베이컨을 감은 심장 두 조각이 접시 위에서 식어가고 있었지만 렉터 부녀는 그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한니발이 아쉬타드의 의자를 빼주었다.

아쉬타드의 마음이 몸보다 먼저 달려나갔다. 아이는 놀이터로 뛰어 나가는 다섯 살짜리처럼 코트를 걸치려 했으나 아버지가 그렇게 두지 않았다. 한니발은 나서기에 앞서 아쉬타드를 거실로 데려가 아무 소파에나 앉혔다. 잔뜩 신난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아이의 머리를 느린 손으로 풀어헤치고 한 줄기로 땋아 잔머리 없이 틀어올렸다.

"아쉬타드, 방으로 가서 코트와, 네가 가장 좋아하는 모자, 그리고 장갑을 가져오렴."

"옷은 안 갈아입어도 될까요?"

"괜찮아."

한니발은 아쉬타드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대신 코트는 몸을 충분히 덮는 걸로 가져오렴."

*

아쉬타드는 인형 위에 모자를 씌웠다. 보닛이었다. 가장 좋아하는 모자는 아니었지만, 머리를 다 감싸는 모자를 선택해야 함을 그녀는 알았다. 코트도 입혔다. 두껍고 길어 인형이 한참 더 무거워졌다. 깨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아쉬타드는 검은 구두를 인형의 발에 신겼다. 레이스 달린 흰색 양말이 그 안으로 앙증맞게 자리했다. 인형의 머리를 매만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평소와 다른 머리 모양이 어색했지만, 아쉬타드는 미소지으며 인형을 껴안았다.

인형의 옷을 입히는 일은 시간을 꽤 잡아먹었다. 하지만 한니발은 그 시간까지 계산에 넣은 것이 분명했다. 아쉬타드는 인형옷을 입히며 마음을 가라앉혔고, 어디에 따라가도 있는 듯 없는 듯 앉아 지켜보는 원래의 그녀로 돌아왔다. 차분한 마음과 퀭한 눈, 텅 빈 회색 눈동자와 비쩍 마른 듯한 느낌을 주는 몸을 가진 아쉬타드로.

한니발은 그녀를 차에 태웠다.

*

사실 살인 자체는 특별할 게 없다. 그것은 한니발과 아쉬타드 모두 동의하는 사실이었다. 살인은 허다했다. 그 행위를 진정으로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혹은 아쉬타드의 말을 빌려 어른스럽게 만들어주는 것은, 연출에 있었다. 어떻게 경의를 표하느냐에 있었다. 아쉬타드는 먹을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아이로 자랐다.

아쉬타드가 아직 '줄리아'이던 고아원에서, 원장은 매 식사 전에 감사 인사를 하도록 교육했다. 한니발 렉터의 저택에서, 한니발은 음식 자체를 특별하게 여기도록 교육했다. 먹는다는 것은 신성한 행위다. 그 생명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에 대해 감사할 줄 아는 것은 예의다. 그 감사를 아름다운 것으로 만드는 행위는 렉터만이 가진 능력이다.

한니발은 소파에 앉은 사람 위로 몸을 숙였다. 양복 위로 입은 비닐 옷에 피가 점점이 튀었다. 한니발이 행하는 모든 일들을, 그 모든 신성한 일들을 아쉬타드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독이 든 잔 세 개가 그들 사이에 놓여 있었다. 아쉬타드는 장갑과 모자를 벗지도 않은 상태였다. 잔에 넘치도록 따른 홍차가 잔잔한 파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피만을 병에 담았다. 다른 것은 필요 없었다. 디저트에 들어가는 돼지 피를 대체할 재료였다. 그날은 현장을 꾸밀 재료들이 많았다. 한니발은 잔잔한 미소를 띄고서 아쉬타드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생각하니, 아쉬타드?"

공허한 눈이 한니발을 향했다. 그가 다시 물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니?"

무미건조한 어투로, 아쉬타드가 답했다.

"저는 모빌이 좋아요. 어릴 때 갖고 싶었는데 고아원에는 없었거든요."

"그럼 그걸 생일 선물로 준 셈 치자꾸나."

한니발이 답했다. 그리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죽은 이는 음악가였다. 첼로를 이루는 은줄이 많았다. 한니발이 비닐 장갑 낀 손으로 첼로를 하나하나 해체했다. 송진이 흩날렸다. 비축해 둔 새 현들이 하나씩 뜯겼다. 장기들이 차례대로 묶여 천장에 매달리는 모습을, 아쉬타드가 멍하니 지켜보았다.

어른의 조각이 아이의 입맛대로 재탄생했다. 아름다운 모빌이라고, 아쉬타드는 생각했다. 선홍빛으로 빛나는 피가 굳어가며 점점 검은색으로 변했다. 떨어지는 피를 한 방울 받아 맛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면서, 아쉬타드는 잠시 아버지의 작품을 감상했다.

"좋은 모빌이네요. 생일 선물 감사해요."

"천만에."

한니발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쉬타드도 따라 미소지었다. 한니발이 나지막이 말했다.

"돌아가자꾸나. 디저트를 먹어야지."

STELLA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