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posty.pe/nko49s - 上편







꼬르륵, 넘실거리는 욕조 물 안으로 얼굴의 반 정도 가량을 집어넣은 마들렌에게서 기포가 일었다. 눈을 살포시 감고 몇 시간 전의 환상적이었던 경험을 상기했다.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았던 빙하 지형 속 왕국은 실로 아름다웠었다. 춥고 지형이 험준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경이로운 장소였다. 기다란 머리칼을 한쪽 어깨 위로 늘어트렸을까, 누군가가 욕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당연히 하인인 줄 알았던 마들렌은 낮은 음성을 듣고는 단번에 움직임이 굳어버렸다.


"마들렌, 나다, 벨벳. 잠시 들어갈게."

"자, 잠깐! 자네도 목욕을 하려고 하는 건가? 내가 지금 당장 나가겠다네!"


하지만 이미 벨벳은 커다란 욕실 문을 열고 들어온 뒤였다. 뿌연 증기가 미약한 바람을 타고 곳곳에서 제각각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마들렌은 무언가를 숨기는 듯, 한쪽으로 정리했던 머리칼을 황급히 아무렇게나 흩트리더니 눈 밑까지 물 속으로 푹 들어갔다. 당혹스러운 파란 눈동자가 쉴 틈 없이 깜빡거렸다. 벨벳은 목욕이 목적이 아니었는지, 마들렌이 몸을 담근 욕조로 다가왔다.


벨벳이 마들렌의 목욕 현장에 발을 들인 이유는 확인할 게 있어서였다. 오늘 그와 함께 드래곤을 타고 있었을 때, 벨벳은 마들렌의 뒷덜미에 있는 무언가를 발견했었다. 풍성하고 긴 머리칼 때문에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분명 보기에 좋지 못한 것이었다. 구불거리는 것이 마치 고대 문자나 마법진을 연상케 했다. 흉터라고 하기에는 상처가 아문 상태로 보이지 않았었다. 흰 살이 차오르지 못하게끔 그것은 뚜렷한 검붉은 색상을 띠고 있었다.


"첫 비행이었잖아. 몸이 많이 긴장해서 근육이 덜 풀렸을 거다. 상체 부분만 닦아줄게."

"이 정도론 끄떡 없다네! 몸은 내가 닦을 수 있어!"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벨벳은 마들렌의 모습이 또렷해지자 이곳에 들어온 걸 후회막심하기 시작했다. 희고 고운 살결이 뒤덮고 있는 쇄골과 어깨선이 적나라했다. 후끈한 내부 때문인지, 자신이 들어와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뺨에는 만개한 꽃처럼 붉은 기가 피어나 있었다. 거품 덩어리들이 물 위에 떠 있지 않았다면 벨벳은 그대로 뒤 돌아 나갔을 터였다. 빛의 속도로 눈을 한 번 감았다 뜬 벨벳은 마음속으로 국가(國歌)를 외며 욕조 옆까지 다가왔다. 심신을 편안하게 하는 향이 가미된 부드럽고 따듯한 타올을 들고 온 벨벳이 무릎을 꿇은 뒤 손을 내밀었다. 마들렌은 이 상황이 너무도 민망해서 머리가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 결국 한쪽 팔을 내밀자 벨벳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선의 윤곽을 따라 닦기 시작했다.


은은한 장미 향과 라벤더 향이 조화롭게 섞여들었다. 향에 심취한 마들렌의 표정이 한층 풀어졌다. 따듯하고 부드러운 것이 몸 위를 스치니 이상하게도 아늑함이 물씬 느껴졌다. 마들렌의 그런 모습을 본 벨벳이 픽, 하고 작게 미소 지었다. 오른쪽 어깨와 쇄골 부근을 차례로 훑은 벨벳이 치렁치렁한 머리칼 속에 숨겨진 목 부근을 만지려고 할 찰나였다.


"벨벳, 이 정도면 충분히 되었다네. 자네 업무가 많이 쌓여있지 않나."


마들렌이 고개를 뒤로 내빼며 부드러운 손길로 벨벳을 저지했다. 그 의중을 진작에 파악한 벨벳의 눈이 가늘어졌다가도, 이내 단호하게 변했다.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나?"


그러자 마들렌의 얼굴이 일순 경악으로 물들더니 필사적으로 뒷덜미 부근을 손으로 가렸다. 대화가 끊긴 욕실 내부는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만이 청아하게 울려 퍼졌다. 감정을 억누르려는 마들렌의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고, 고개는 아예 반대 쪽으로 돌린 채였다. 그것은 분노보다 비통함에 가까워 보였다.


"억지로 대하지 않을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만 알려줘."

"……외적이 침략했었다네. 우라마야 왕조라 불리는. 이 상처는 당시에 입은 것이고."

"빛의 힘은 치유와 재생 능력이 있지 않나? 그 상처는 회복은커녕 아문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어."


새하얀 피부와 아늑한 백금색의 머리칼 사이의 흉터는 너무도 두드러졌었다. 벨벳의 정확한 관찰력에 마들렌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것을 빼앗겼기 때문이지."

"……뭐?"


빛의 힘은 절대적인 줄로만 알았던 벨벳이 충격에 휩싸여 공허하게 되물었다. 프랑크 왕국의 신관들은 빛의 힘은 단연코 절대적이며, 누구도 그것을 앗아갈 수 없고, 신의 가호를 받아 평생을 온전히 누릴 수 있다고 끊임없이 강조해댔다. 그런데 지금, 그 주장은 전부 다 거짓이고 엉터리였다는 게 되지 않는가.


"적군의 우두머리로부터 빼앗겼다네. 아마 이 상처는 그때 생긴 것일 거고."

"……."

"상처가 회복되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지. 빛의 힘이 사라졌으니까."


아직도 믿기지 않는지 벨벳의 두 눈은 흉흉하게 부릅떠져 있었다. 이윽고 찰랑이는 물소리와 함께 마들렌의 한쪽 팔이 허공에 위치했다. 허여멀건한 외피는 석고상처럼 딱딱해 보였다. 어딘가 푸르죽죽해 보이기도 했다. 전신을 휘감던 빛의 자락이 사라진 피부는 생기를 잃어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색이 빠져나가는 것 같다네. 이대로 조각상이 되어버리진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지."


담담한 어조로 말하는 마들렌과는 달리 벨벳은 목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손을 거둔 마들렌은 그제야 벨벳의 눈을 마주 보았다. 수축된 동공이 그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를 보여주었다. 그 속에는 두려움도 들어 있었다. 혹여 정말로 마들렌이 빛에 이어 숨을 잃은 하나의 조소품이 되지는 않을까.


"자네에겐 보이고 싶지 않았어. 물론 이미 더 떨어질 곳도 없는 밑바닥까지 추락한 처지이지만."


지금 이 순간 벨벳은 극도로 차오르는 분노와 죄책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피가 들끓다가도 차게 식기를 반복하는 기분이었다. 고통스럽게 고개를 떨군 벨벳이 물기가 어려 촉촉한 마들렌의 손을 제 손바닥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 쥐었다. 그런 벨벳의 행동에 마들렌의 푸른 눈이 살짝 커졌다.


"아프진 않았나? ……아니, 아팠겠지. 당장이라도 빌어먹을 시간을 돌려 과거의 나를 피가 터지게 두들겨 팬 다음 네 곁에 있고 싶은 마음뿐이야. 난 혼자 그곳을 빠져나와선 안 됐었어. 어떻게 해서든 너와 함께 떠났어야 했다. 믿을 건 아무도 없었는데 왜 널 혼자 두었지? 결국 너를 상처 입히고, 지키지도 못하는 한낱 쓰레기들 천지였을 뿐인데!"


마들렌은 불현듯 눈앞의 남자가 십여년 전 별궁의 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르던 어린 아이로 보인다고 생각했다. 무릎을 꿇은 채 등을 굽히고, 고개를 떨군 모습이 왜소했다. 빛의 힘. 그것 하나 사라진 게 무어라고. 너의 삶 속 아주 작은 조각에 내가 겪은 시련을 갖다 대도 나는 발치에도 닫지 못하리라.


'마들렌 왕자님, 별궁 근처에는 가지 않는 게 좋으실 겁니다. 어차피 피가 온전히 섞인 형제도 아니지 않습니까. 왕자님께서 그런 불결한 곳에 발을 딛으실 이유는 없습니다.'


'국왕 전하, '그것'은 분명 성스러운 우리의 프랑크를 더럽힐 것입니다. 신께서 노하시기 전에 잿가루로 만들어 흔적도 없이 제거해야 합니다.'


'안뜰을 지나다가 얼핏 봤는데, 정말 끔찍하기 그지없더라. 그건 인간일 수가 없어. 저주받은 괴물일 뿐이야.'


마들렌이 벨벳과 관련하여 직접 듣거나 지나가며 엿듣게 된 내용은 하나같이 이러했다. 모두가 그의 존재를 부정하고 혐오했으며, 고위 신관들은 작은 생명체를 잔인하게 살해하기를 목 높여 간청했다.


그리고 결국 그의 인근 사람들은 모조리 숙청 당했다.


하지만 번져가는 증오의 불꽃 속에서 그는 악착 같이 살아남았다.


마들렌은 아래에 있는 벨벳의 손을 천천히 감싸 쥐었다. 그때보다 더 크고, 굵고, 거친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욕조 등받이에서 몸을 뗀 마들렌의 움직임을 따라 물결이 일렁거렸다. 다른 손으로 벨벳의 턱 부근을 건드리자 벨벳이 고개를 들어 마들렌을 바라보았다. 한껏 힘을 주며 근엄함을 유지하는 평소와 달리 독기가 빠진, 비애만이 남은 표정이 드리워져 있었다. 마들렌은 검은색 가죽으로 뒤덮인 벨벳의 오른쪽 눈가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나 또한 자네를 무척이나 걱정한다는 걸 잊지 말아줬으면 하네. 나에겐 자네가 무엇보다도 우선이야."


그러자 벨벳의 한쪽 눈이 커지며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들렌은 살짝 눈을 내리깔아 한눈에 봐도 튀는 커다란 오른팔로 시선을 옮겼다. 눈과 팔, 전부 다 오른쪽이었다. 분명 왕국을 떠나고 갖은 고초를 겪으며 모종의 사고로 달게 된 거겠지. 마들렌은 벨벳이 언젠간 저에게 본인의 이야기를 해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니 성급하게 굴지 않으려 애썼다.


"몸에 큰 이상은 없다네. 겉보기에 생기가 조금 빠지고, 빛의 힘을 쓰지 못하게 된 것뿐이니 말일세."

"문제가 있으면 바로 말해. 불편하거나 이상함이 느껴질 때도."

"명심하도록 하지."


마들렌의 대답을 끝으로 벨벳이 몸을 일으켰다. 욕실을 나선 후 조심스럽게 문을 닫자 달칵, 하는 작은 소리가 어렴풋이 났다. 그대로 이동하지 않고 다시 돌아선 벨벳은 문의 장식 위로 이마를 포개었다. 이윽고 윤곽이 짙은 입술이 열리며 낮고도 진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신을 처음 만난 날부터 저에게 있어 우선시 되는 건 당신뿐이었습니다, 전하."












그 날로부터 머지않아 벨벳은 마들렌 전담 의사를 고용했다. 사실 말이 의사였지, 본래 그 사람의 직업은 마법사였다. 가장 우수하고 뛰어난 황실 마법사로 꼽혔는데, 그런 작자를 노르누아 같은 소국에 보낸 것만으로도 얼마나 벨벳이 황제의 총애와 신뢰를 받고 있는지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빛의 힘이 마법의 한 영역일 것이라 추측한 벨벳은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이 제국에서 제일가는 마법사를 데려온 것이었다.


성채 내 관상용으로밖에 쓰이지 않았던 탑에 처음 발을 들인 마들렌이 수많은 계단을 올라 꼭대기에 도착했다. 햇빛이 크게 들지 않는 내부는 성만큼이나 무게 있는 분위기를 풍겼다. 커다란 아치 모양 입구에서 서성이던 마들렌은 조심스럽게 걸음을 내디뎠다.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리는듯한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케케묵은 양피지 냄새, 향긋한 나무판자 내음 같은 것들도 공존하는 것 같았다.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니 널찍하고 둥근 내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짐을 정리하는 중이었는지 허공에서 여러 사물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쪽이 마들렌 경이십니까?"


넋 놓고 신기한 광경을 구경하고 있던 마들렌이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연구실을 연상케 하는 공간 한 가운데에 누군가가 다리를 꼰 채 앉아 있었다. 마들렌은 커피를 의인화하면 저런 사람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한 번 했다. 그는 전체적으로 색감이 어두웠다. 착용 중인 의복도 검었고, 피부도, 머리칼도 그러했다. 길쭉한 손 끝에는 흰 찻잔이 들려 있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남자가 마침내 눈을 떠 마들렌을 바라보았다. 앞머리에 가려지지 않은 왼쪽 눈꼬리는 아래로 처져 있었으나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이 다소 예민한 인상을 그려냈다.


"맞다네. 그런데 '경'이라는 호칭은 빼고 불러줬으면 좋겠군."

"경께서 바라신다면야."

"그대의 성함은 무엇이지?"

"계속 서 있지 말고 앉아서 얘기하죠."


마들렌이 맞은편 의자에 앉자 쪼르륵, 소리가 들리더니 마들렌의 앞으로 찻잔받침과 까만 액체가 담긴 찻잔이 우아하게 날아왔다. 생소한 나머지 마들렌은 눈을 몇 번 끔벅거린 후에야 공중에 떠 있는 물체를 손으로 들었다. 뜨끈한 열기가 고소히 피어올랐다. 호로록, 커피를 마신 마들렌이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저는 에스프레소라고 합니다. 황실 마법사로 근무하고 있죠."

"반갑다네. 에스프레소……라고 부르면 되는 건가?"

"마음대로."

"그럼 에스프레소라고 부르겠네."


갑자기 양피지 한 장이 날아오더니 에스프레소의 손에 정확히 안착했다. 적힌 내용 전체를 단 몇 초 만에 머리에 담은 에스프레소가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고 그것을 불태워버리자 마들렌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공 각하로부터 대충 설명은 들었습니다. 치유와 재생이 주(主)인 빛의 힘을 잃으셨다고."


마들렌이 고개를 끄덕이자 에스프레소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벽돌에 구두 굽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일정하게 들려왔다.


"……잠깐! 에스프레소 자네……!"

"상처를 봐야 진찰할 수 있으니까요."


백금색 머리칼을 걷은 후 마들렌의 목덜미를 빤히 내려다보던 에스프레소가 마치 못 볼 걸 봤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상처를 손으로 훑자 마들렌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손 끝을 타고 느껴지는 나쁜 기운에 검지와 엄지를 교차해 한 번 비볐다.


"아니나 다를까 흑마법을 부리는 자의 소행이었군요."

"흑마법이라고……?"

"빛을 갈망하는 존재가 뭐라고 생각하시죠? 마법 간에도 논리는 적용되는 법입니다. 현재까지 빛 마법에 해를 끼치고 그것을 흡수할 수 있는 건 흑마법밖에 없습니다."


처음 알게 된 정보에 마들렌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흑마법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안 좋은 기운과 불운이 감돌 것만 같았다.


"당신이 프랑크 왕국의 왕자였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프랑크 왕국의 왕자. 그 세 어절을 들은 마들렌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그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떳떳하지 못한 모습으로 마들렌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딱 한 번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실로 아름답더군요. 이곳과는 달리 온난하고 지형도 평탄한 것이. 그런 곳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 유감입니다."


마들렌은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에스프레소 또한 상대의 반응을 바라고 말한 것은 아니었는지, 아무렇지 않게 커피를 한 잔 더 내리기 시작했다.


"그곳에서는 빛 마법에 대해 뭐라 하던가요?"

"……'왕가 혈통에서만 나올 수 있는 빛의 힘은 신의 가호와도 같다. 따라서 필히 절대적이며, 평생을 온전히 누릴 수 있다.'……라고 배웠다네."

"그것참 세상만사 편한 내용이군요. 이래서 무지한 것들이 주제 넘게 굴면 망한다는 겁니다."


마지막 서술어의 주체가 마치 프랑크 왕국인 것처럼 들리자 마들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들렌은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려 커피를 내리고 있는 에스프레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주위에서 티스푼과 반짝이는 가루 같은 것들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엉터리 투성이라 하나하나 고쳐 말하기도 어려울 것 같으니 기본부터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또 다른 찻잔을 든 에스프레소가 의자에 앉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마법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됩니다. 하나는 일반 마법인데 그 안에서도 다양한 갈래로 나누어져 있죠. 기본적으로는 물, 불, 흙, 바람 총 네 가지 속성이 있습니다."


순간 에스프레소의 안경알이 한 번 번득임과 동시에 너머로 가늘게 뜬 눈이 마들렌을 향했다.


"그리고 나머지 두 개가 각각 빛 마법과 흑마법입니다. 특히 빛 마법은 참으로 고귀하고 신성한 마법이죠. 몸에 활력을 불어넣어 신체 능력을 높여주고, 자가 치유와 재생을 가능하게 하니 말입니다. 여기까지는 아는 내용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네."


마들렌의 대답을 들은 에스프레소가 푹신한 등받이에 기대어 오만하지만 고상한 자태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른 마법과는 달리 마력을 잃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빛 마법입니다."

"……."

"그래서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닙니다. 이만큼이나 비효율적이고, 이기적인 마법은 없거든요."


냉소적인 에스프레소의 발언에 마들렌의 눈동자가 흔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원래대로 돌아왔다. 사실 마들렌도 그러한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제 몸 하나만 챙기는 능력이 뭐가 대단한가. 아프고 상처 입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어야 쓸모 있는 것인데. 또한 전장에서 다친 기사들을 치유할 수 있다면 인력과 국방비 등의 면에서 매우 큰 효율을 취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빛 마법은 절대적이지도 않고, 빼앗길 위험도 있으며, 오직 보유자만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그대의 말이 맞아. 말 그대로야. 결국 난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어……."


마들렌은 느슨히 맞잡은 두 손만 내려다보며 말끝을 흐렸다. 곧게 뻗은 흰 마디들이 힘 없이 떨리고 있었다. 에스프레소의 무미건조한 눈빛이 그것들을 잠깐 훑고 지나갔다.


"당신을 나무라려던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일국의 왕족이 적군의 습격 속에서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

"이제 본격적인 내용으로 들어가도록 하죠. 누구에게 어쩌다가 빛 마법을 잃게 되었습니까?"


찻잔을 든 채로 물은 에스프레소의 표정은 심드렁했다. 그는 단순히 마들렌이 적군에게 붙잡혔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하물며 자기네들끼리 신의 가호니 뭐니 하며 칭송해대는 빛 마법을 소유한 왕자가 아니었던가.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서 귀하게 자랐을 게 뻔했으니 도망을 치던 중 호위 기사들이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당했을 게 분명하다고 에스프레소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어진 마들렌의 말을 듣던 에스프레소의 가느다란 눈이 서서히 커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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