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없어도 돼 - 콜드

블러디 헬 프렌드

05




"이여주."



"얘기 좀 해."



높낮이가 일정한 음성이 두 마디를 덤덤하게 내뱉던 때, 나는 오른손에 든 핸드폰을 여전히 붙잡은 채로 멍하니 생경한 그 얼굴만 바라봤다. 문득 이동혁의 빗겨가는 시선이나 어정쩡한 의식 따위가 아니라 온전히 나를 향해 건네는 무언가가 참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싫어?"

"...."

"이제 나랑 잠깐 얘기하는 것도 어려워진 거면 말해."

"..야,"

"아직 그정도 아닌 거면 그냥 좀... 우리 얘기 좀 하자."



내게서 여전히 1m는 족히 떨어져서 멀거니 서있는 이동혁이 제 머리를 한 손으로 털털 헤집으며 말했다. 끝에는 답답하다는 듯이 손을 한 번 꼭 쥐었다 놓으며 땅바닥에 한숨을 뿌리더니 다시금 올곧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동혁이 천천히 내게 다가오는 동안 내 오른손에 들린 핸드폰은 여전히 진동소리를 내고만 있었다. 





당장이라도 원망의 언어들을 쏟아낼 것 같이 얘기 좀 하자던 이동혁은 나보다 한 발자국 앞에 서서 말없이 걸었다. 나는 이동혁의 동그란 뒤통수가 내 코앞에 있음에 익숙하고도 낯선 기분이 들어 땅바닥에 시건을 주로 두고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발걸음을 따라 걸었다.



내 시야에 연노랑 모래들이 들어차고 이동혁은 속도를 붙여 성큼성큼 걸어가 왼쪽에 있는 그네에 털썩 앉아 멈춰선 나를 바라보고 또 한숨을 내쉬었다. 난감했다.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 생생한 겨울날의 놀이터에 다시 오게 된 건 그 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내가 이해가 안 돼서 그래."


이동혁은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고개를 떨구고 바닥에 시선을 두고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이동혁 또한 고개를 떨구고 말을 이어나갔다. 


"처음엔 내가 너한테 잘못한게 있었나, 선물이 부담스러웠나, 아님 그냥 쌩까고 싶었나. 이런 저런 생각들 다 해보다가 그래 그냥 무슨 일이 있었겠지 하고 넘어갔어. 아니 넘어간줄 알았는데,"


쏟아내던 말이 별안간 멈췄다.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골머리 하던 내가 이동혁을 쳐다보자 이동혁은 어쩐지 머뭇거리는 얼굴을 하고 나와 눈을 맞췄다.


"... 나재민 걔는 뭔데. 둘이 만나?"

"...."

"... 아니 내가 이걸 왜 물어보고 있냐."


이동혁은 마른세수를 하며 제 손에 고개를 박은 채로 있었다. 답지 않게 횡설수설하는 이동혁의 모습에 당황스러웠다. 이동혁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만큼 나 또한 이동혁의 행동의 뜻을 읽어내기 어려웠다. 한편으로는 이유 모를 짜증이 났다. 이제와서. 무슨 대답이 듣고 싶은 건데.


"동혁아."

"내가 일방적으로 그랬던 건 미안해. 네가 나한테 잘못한게 있었던 건 아닌데 그땐 그냥.. 내가 좀 마음이 힘들어서 그랬어."  


좀 전까지만 해도 떠오르지 않던 대답들이 술술 입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적당한 거짓말과 적당한 사실. 이동혁은 내 말에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아니, 그니까 뭐가 힘들었는데? 그건 나한테 말 못 해주는 거였어?"

"응, 그땐 좀."

"... 그래."


이동혁은 어이가 없어 보였다. 내가 사람 대 사람으로서 예의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이동혁은 정말 하나도 몰랐다. 내가 저를 좋아했다는 것, 그래서 도망쳤다는 것. 아무것도 모르는 이동혁이 나를 답답해 했다. 진짜 답답한 사람이 누군데. 진짜 울고싶은 사람이 누군데 왜 네가 그런 표정을 지어. 마음 한 구석에서 묵혀뒀던 감정이 울컥 차올랐다. 


"... 내가 너 좋아했었어. 이제 이해는 못해줘도 대충 넘어가줄 수는 있지." 

"... 뭐?"


이동혁은 뭐냐고 물었다. 내가 지금 하는 말이 전부 뭐냐고. 놀란 얼굴로 입을 벙긋 거렸다. 이런 얼굴에 나는 어떤 말을 내뱉어야 했을까. 나를 돕겠다던 나재민의 올곧은 음성이 귓가에 웅웅 맴돌았다. 겨우 묻어뒀던 마음을 파헤치는 이동혁이 불편스러웠다. 화가 났다. 


"그리고 나 나재민이랑 만나는 거 맞아."

"이여주."

"근데 이게 너랑 내가 멀어진 거랑은 상관 없는 일이야."

"... 네가 그러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돼."


아까부터 이동혁의 입에서는 내가 하고싶은 말들이 튀어나왔다. 이동혁을 알고난 뒤부터 내내 하고싶었던 말이었다.  


동혁아, 나는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해.  


미안, 나 먼저 갈게. 이동혁의 원망이 서려있는 눈을 피해가며 먼저 일어났다. 이 놀이터에는 이상한 귀신이라도 옴붙은게 틀림이 없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항상 최악의 상황이 만들어질리가 없다. 항상 이렇게 괴로운 시간을 버티고 버티다 뛰쳐나올리가 없다.





bgm

November rain - 잔나비 


카페에서는 잔잔한 노래가 흘러나오고 옆 테이블의 커플은 꺄르르 웃었다. 나는 어디서부터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망설이느라 애꿎은 손톱만 만지작 대고 나재민은 그런 나를 천천히 바라봤다. 우리 둘 사이에 익숙치 않은 정적이 이어지는데도 나재민은 가만히 작게 웃고만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어제 집에 가다가 이동혁을 만났는데, 걔가 갑자기 얘기 좀 하자고 그러는 거야. 근데 어쩌다 보니까 내가 걔 좋아했던 걸 말해버렸거든? 아 근데 이게 중요한게 아니라, 근데 내가 홧김에 너랑 만난다고... 해버렸거든. 


횡설수설 이야기를 끝마치고는 나재민의 눈치를 봤다.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내 이야기를 듣던 나재민이 홧김에 저랑 만난다는 이야기를 했다는 구절에서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곤 고개를 끄덕거렸다. 


"잘했네."

"어?"

"여주 마음은 어떤데. 전보다 편해졌어?"


예상에 없었던 쪽으로 대화가 흘러갔다. 이 다음에 어떤 식으로 사과를 해야하나 말을 고르고 있었는데, 별안간 내 마음을 물어왔다. 나는 또 바보같이 나재민의 질문에 대해 곰곰히 생각하기나 했다. 이동혁에게 내 마음을 털어놨고, 나재민을 끌어들이긴 했지만 마음을 접은 사람처럼 굴어보이기도 했다. 뭐 하나 해결된 것 없이 불편하기만 했던 전보다야 마음이 편해진 건 확실했다. 평온한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된 거야. 난 오히려 더 잘 된 거 같은데."

"......"

"원래 포기하려고 했었잖아. 그치."

"... 응, 맞지."


고등학교 일학년때 내 수학점수를 두배로 뻥튀기 시켜줬던 나재민이 떠올랐다. 얘는 항상 안 될 것 같던 무언가도 전부 다 되게 만든다. 갈피를 못 잡고 불안하기만 했던 내 마음을 나재민의 눈이 붙잡고 타이르는 것 같았다. 다 잘 됐어. 잘했어. 그런 흔한 말들이 나재민의 입에서 나오고나면 나를 단단히 어루만졌다.






월요일이 되고 여느 날과 다름없이 나재민과 나란히 걸어 등교했다. 나재민은 전처럼 굴었다. 사소한 장난을 치고 간식거리들을 한아름 안겨주고 이름만 불러도 싱긋 예쁘게 웃었다. 나 스스로도 이동혁에 대한 마음이 무뎌진 걸 느꼈다. 이게 이렇게 쉬웠던 일이었던가. 매일밤 울던 내 모습들이 머릿속에 스쳐지나갔다. 그때의 나는 뭐가 그렇게 다 어렵고 벅차기만 해서 매일 울었을까. 모든게 나재민의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어 나재민을 쳐다보면 나재민은 그저 눈썹을 씰룩이며 웃었다. 


학교에서는 나재민과 내가 사귄다는 소문이 돌았고 담임쌤은 종종 걱정스럽다는 눈으로 우리 둘을 나무랐다. 그렇지만 나는 소문에 대해 별다른 부정을 하지는 않았다. 복도에서 이동혁을 마주칠때면 나재민이 옆에서 손을 잡아왔다. 나는 그 손을 놓지도 이동혁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먼 산만 봤다. 여전히 어려운 건 이런 것들이다. 어린아이가 되어 어른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누군가 하나 속이고 있는 건 분명한데 그게 이동혁인지 나재민인지 어쩌면 나인지 그런게 어렵고 불편했다.


시간이 갈수록 모든게 안정적이고 평화롭기만 했다. 이동혁은 점차 나를 모르는 체 지나가고는 했고, 나재민은 여전했다. 나는 이런저런 생각이 줄었고 수험생이라는 명목 하에 공부에 몰두했다. 나재민은 내가 공부할때면 별다른 장난도 치지 않고 옆에서 조용히 앉아있었다. 그렇다고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면서 야자시간까지 착실히 내 옆자리를 지켰다. 조용한 교실에는 슥삭거리는 필기구 소리만 들려왔고, 나는 나재민의 팔을 쿡 찔러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재민아, 너는 대학 안 갈 거야?"

"응? 지금 나 디스하는 거지."

"아니 그게 아니라. 그니까,"


나재민은 당황해하는 나를 보며 큭큭 웃었다. 내가 대학 갔으면 좋겠어? 나재민이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고개를 저었다. 네가 가고싶으면 가는 거지. 아님 아닌 거고. 내 말에 나재민은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나는 대답없는 나재민의 눈을 피하며 말을 덧붙였다. 근데 그래도 네가 하고싶은 건 열심히 해봤으면 좋겠어. 그래야 후회가 없다잖아. 나재민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응? 왜 대답이 없어."


내 재촉에 나재민이 내 왼손을 천천히 잡아왔다. 우리 둘을 지나치는 이동혁도 없고 부쩍 가까워진 우리 둘 사이를 의아해하는 애들도 없었는데. 천천히 따뜻하게 잡아오더니 깍지까지 꼈다. 야, 뭐해. 문제집에 머리를 박고있는 반 아이들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나재민은 단단하게 잡은 손 위에 그제서야 대답을 얹었다. 알겠어. 뭐든 후회없게 열심히 해볼게.


그 말이 꼭 어딘가 결심이 선 사람의 것 처럼 단단하고 묵묵하게 들려서 나는 그 흔한 응원의 말 같은 것도 건네지 못하고 나재민을 바라만 봤다. 평화로운 균열이 낯설고 고요한 정적이 무거웠다. 그때 내 손을 잡던 나재민은 분명 웃고 있었는데, 나는 왜 순간 마음이 덜컥 내려앉고 숨이 턱 막혔을까. 나재민의 눈빛을 읽어내던 나는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나는 덮어두고 모르는 체 하는 일에 능숙해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치부해버리고 만다. 그때 나재민의 손은 놓아버리기엔 너무나도 무겁고, 커다래서 그저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고. 


언젠가는 다 들통나버릴 것들이 한없이 쌓여가고 있었다.


 




내가본바다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