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


희조는 말문이 막혔다.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살짝 떼곤 하염없이 눈꺼풀만 빠르게 깜빡이며 어쩔 줄을 몰랐다. 느닷없이 누군가 있는 힘껏 제 멱살을 잡는 것만 같았다.


[내가 경찰 부르겠다고 하니까 그러면 아가씨도 같이 잡혀간대. 아가씨 돈을 그러엏-게 많이 빌렸다면서?]


희조는 휴대폰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승아에게서 황급히 등을 돌렸다. 혹여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승아에게 들릴까 봐서였다. 


[얼마나 빌렸길래 대낮부터 떼인 돈 받는 건달들이 우르르 쳐들어와 이렇게 깽판을 벌이는 거야?] 


“…….”


이번에도 희조는 대답하지 못했다. 너무도 비현실적인, 말로 담기엔 압도적이다 못해 폭력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액수 때문이었다. 그 돈은 지금 살고 있는 오피스텔 보증금의 족히 수십 배는 될 것이었다. 단언컨대 누군가는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어버리는 편이 낫겠다고 할 만한, 그런 금액이었다.


입 밖으로 꺼내면 그 누구도 자신을 한 명의 어엿한 인간으로 봐주지 않을 것만 같은 금액. 그렇기 때문에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빚의 실체.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제 뒤에-


승아가 있었다.


이제 희조의 온 신경이 휴대폰 너머 관리소장의 말소리에서 이젠 제 등 뒤에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을 승아에게로 향했다. 희조가 더더욱 빚의 액수를 말할 수 없는 이유였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갚아.]


끔찍한 목소리가 재생된 건 그때였다.


[더 이상은 못 미뤄줘.]


며칠 전 수화기 너머에서 들렸던 것이었다.


잊으려 애썼던, 요즘 하도 제정신을 쏙 빼놓는 사건 사고의 연속이라 정말 까맣게 잊고 있던 목소리. 일전에 제게 할머니의 신변까지 위협하며 돈을 갚으라던 이의 것이었다. 


소름이 돋았다.


알량한 자존심에 울고불고 했던 게 모두 허무해졌다. 기실 제겐 가히 목숨과 바꿀 만큼 중요하고 급박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 일은 이제 등 뒤에 낭떠러지까지 허락하지 않고 뾰족하게 날을 세우고 저를 쿡쿡 찌르고 있었다. 


한데 자신은 고작 화장실에서 슬픈 음악 한 곡 들었다고 눈물이나 질질 짜고 있었다니.


[기한 내 납부하지 아니할 때에는 저희가 정한 일련의 처리 규정에 의해 지연배상금과 ‘특수 조치’가 가해질 수 있습니다.]


희조는 할머니의 병동이 얼마나 외부인의 침입에 안전한지 가늠해 보았다.


그리고 빠르게 오늘이 며칠인지 셈했다.


“아.”


비로소 깨달았다. 세상에. 곧 디데이였다. 그러니까-


‘상환 기한.’


그 날짜가 코앞이었다.


[그런데 아가씨 한 푼도 안 갚았다면서?]


그런데 자신은, 아직 한 푼도 갚지 못했다.


[갚을 돈 없으면, 저기, 아가씨, 있잖아.]


갚을 돈도 없다.


[일단 오늘은 오피스텔에 들어오지 마.]


그래서 이젠 집에도 못 가게 생겼다.


[이건 내가 성가셔서 그러는 게 아니라 진짜 딸 가진 부모 마음으로 말하는 거야. 당분간 오피스텔엔 오지 마. 전화기도 꺼놓고, 어디 돌아다니지도 말고, 특히 이 근처엔 얼씬도 하지 마.]


관리소장은 짐짓 엄숙하고도 인자한 투로 덧붙였다. 아가씨 지금 엄청 위험한 상황이야. 돈 장사하는 것들만큼 악독한 인간들이 없어. 갚을 돈 없으면 당분간 죽었다 생각하고 조용히 지내야 해. 보자, 아가씨도 본가가 이 도시는 아니랬지? 


“……네.”


[잘 됐네. 요 며칠 동안은 부모님 댁에라도 잠시 내려가 있어. 아니면 친구 집에서 자든지.]


이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듯 관리소장이 잇대었다. 절대 혼자 있지 마.


“…….”


[이런 때엔 옆에 누구라도 같이 있는 게 좋아. 괜히 혼자 도망 다니면서 지내다간 오히려 험한 꼴 당하기 십상이라니까? 아가씨 얼굴도 차암 곱고 예쁘장-하게 생겼더구만. 혹시 나쁜 짓이라도 당하면 어떻게 해?]


“…….”


[그리고 뭐…… 젊어서는 이런저런 일도 저질러 보는 거지, 뭐. 도대체 얼마를 빌렸는지 모르겠지만 감당 안 되는 수준이면 그냥 눈 딱 감고 부모님 찾아가서 손이 발이 될 때까지 빌어, 싹싹!]


비빌 언덕이 있다는 게 이런 거지. 막말로 부모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식 못 이겨. 당장은 아가씨 혼내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다 도와주게 되어 있어. 암, 그렇고말고. 무려-


[자기가 낳은 자식인데.]


“…….”


[그것만큼 사랑스러운 게 어디 있다고. 아무리 사고를 쳐도 결국 다 도와주게 되어 있어. 괜히 뻗대지 말고, 응? 그래도 이 험난한 세상에 믿을 건 가족밖에 없어. 힘들 때 손 벌릴 수 있는 건 엄마 아빠뿐이라고. 알겠지, 아가씨?]


“…….”


어쩐지 희조는 계속 입이 틀어 막히는 기분이었다. 대꾸를 못하게 하는 말만 골라 뱉는 관리소장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들을수록 허탈해지는 말들에 정말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새삼 서럽다거나 한스러운 마음에 코가 시큰거렸다든가 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아닐 것이다.


다만, 그저 자기 연민이라는 것에 한없이 빠지고 싶은 강한 충동이 일었을 따름이었다. 남들에겐 현실적인 해결책이 자신에겐 더없이 허무맹랑한 판타지일 뿐인 현실이 새롭게 씁쓸했다. 


타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뱉은 선의의 말이 종종 무심코 스친 잡초의 가시처럼 느껴질 때, 희조는 진정 상처를 입었다. 물론 스스로 의식하진 않았다. 않으려 애썼다. 그렇게 생긴 마음의 상처를 마주하게 되면, 새삼 어른 비슷한 게 되어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희조에게 어른이 된다는 건, 그다지 좋은 게 아니었다.


자신이 한없이 약한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되니까. 뼈저리게.


지금도 그랬다.


다시금 ‘독한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또 한 번 깨달았으니까.


자신에게 없는 것,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결혼 생활, 직업, 돈…….


부모, 형제, 친구…….


그리고 이젠 마침내-


‘집’까지.


남들에겐 너무도 당연한 것. 그러나 자신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것. 그 수많은 것들 중에 이젠 ‘집’이 포함되어 버렸다.


비참한 날.


희조는 먼 훗날 오늘을 기억한다면 그리 이름을 붙여 떠올릴 것이라 생각했다. 한참 어린 후배 앞에서 눈물을 펑펑 쏟고, 존경과 동경의 대상이자 이제는 자신을 밀어낸 후임자의 앞에서 울음을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온 것도 모자라 이젠, 이젠-


유일하게 제 한 몸을 오롯이 쉴 수 있는 집조차도 박탈당한 날이니까.


그래, 이건 박탈이다. 지금껏 매달 월급의 반 이상을 갖가지 대출 상환금으로 꼬박꼬박 압류당하는 와중에 푼돈을 아끼고 또 아껴서 마련한 보증금과 월세로 내리 4년을 살고 있던 유일한 안전 기지. 누군가에겐 그저 작디작은 오피스텔. 실 평수가 일곱 평 남짓인 그 협소한 원룸조차도 이젠 제게 허락되지 않는 것이었다.


삶이 이 이상 내게서 뭘 더 앗아갈 수 있을까.


-하고 시니컬하게 생각했던 걸 비웃기라도 하듯, 인생은 얄궂기 짝이 없는 얼굴로 이것도 있었지, 이것도 있었네, 하며 자신에게서 마지막 남은 존엄까지 갈취하고 있었다.


텅 빈 속을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지는 껍데기들. 제 속에서 허무한 공명이 일어나는 걸 느끼며 희조는 정말 벌거벗은 기분이 되었다. 이제 자신의 삶에 있는 것이라곤 남 좋은 일만 뼈 빠지게 하고 남겨진 극도의 허무함과 눈물자국뿐이라는 참담한 깨달음이었다. 이러니 지금껏 누구보다 견고하게 쌓아올렸던 눈물의 댐조차 와르르 무너졌던 것일 터였다.


[아무튼 아가씨, 한 번 더 말하지만 당분간 여기 오지 마, 알았지?]


실은 여기 오피스텔 건물주가 이 사실을 알게 됐어. 아가씨 당분간 안 왔으면 좋겠대.


“그게 무슨…….”


[하하, 그야…… 재계약이 쪼오끔 힘들 것 같다는 거지.]


“네? 하지만…….”


[아유, 아가씨. 나도 안타깝게 생각해. 흠흠. 나야 뭐, 지금까지 아가씨가 얼마나 집을 깨끗하게 써주고 잘 지내줬는지 알지만 건물주들이 그런 시시콜콜한 것까지 알겠어? 아니, 아가씨도 입장 바꿔서 생각해 봐. 대낮에 사채업자들이 찾아오는 젊은 여자…… 그런 세입자를 누가 좋아하겠냐는 말이야.]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그러게 말이야. 근데 어쩌겠어. 건물주가 싫다면 싫은 거지, 뭐. 여기 건물주 양반이 좀 꽉 막힌 사람이거든. 난 한낱 바지사장 같은 사람이라 도와주고 싶어도 힘이 없어.]


내 마음 알지? 관리소장은 마침내 자기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을 꺼낸 모양인지 급속도로 권태로운 투로 잇대었다. 게다가 어차피 깡패들한테 여기 주소까지 털린 마당에 계속 예전처럼 살 순 없을 것 아니야. 이왕 이렇게 된 거-


[한동안 부모님 집에 머물면서 다른 집 알아봐. 응?] 


“…….”


말문이 막힌 희조의 침묵이 결코 무언의 긍정일 리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관리소장은 곧잘 지내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


통화가 종료된 수화기를 한참 더 귀에 대고 있던 희조는 불현듯 멍해졌다. 그러다 곧 씁쓸한 안도감을 느꼈다. 문득 승아의 앞에서 이미 펑펑 울어버린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그때 몸 안의 수분을 다 쥐어짜낼 듯 눈물을 쏟아내지 않았다면 지금 또다시 어쭙잖은 자기 연민에 빠져 질질 짜고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오늘 실례가 많았어요, 관장님.”


앞으로도 계속 울지 않을 자신은 없다.


“내일 정식 출근해서 뵙겠습니다.”


희조는 승아를 쳐다보지도 않고 그리 말했다. 곧 도망치듯 황급히 몸을 돌려 나갔다. 겨우 마음을 추스른 것처럼 보이는 데에 성공했는데 또다시 승아의 앞에서 우는 얼굴을 보일 수 없었다. 


“작가님, 아니…… 팀장님.”


곧바로 하라를 찾아가 비슷한 방식으로 작별을 고했다.


하라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우아하게 앉아 있었다. 다만 테이블 위에 두 팔을 얹고 깍지 낀 손등 위로 턱을 괸 채 짓고 있는 그 표정은 어딘가 유쾌해 보이진 않았다.


“실례 많았습니다. 그런데…… 저 지금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민망함을 무릅쓰고 희조는 간신히 입을 뗐다. 여전히 완벽한 플레이팅을 뽐내고 있는 음식들이 어쩐지 무안하게 느껴졌다. 희조가 끝내 식사를 입에 대지도 않았지만 하라는 더 권하거나 탓하지 않았다. 예의상으로라도 앉으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 말조차 꺼내지 않는 게 지금 꼭 필요한 진짜 예의라는 걸 하라는 잘 알고 있는 여자였다. 희조 역시 하라가 이런 쪽으론 눈치도 빠르고 꽤나 융통성이 있는 사람이라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혹 하라가 괜히 위로를 해준답시고 왜 울었냐는 둥, 밥이라도 먹고 가라는 둥의 말을 했다면 필시 더 불편한 상황이 되었을 게 뻔했다.


“태워줄게.”

“아뇨, 괜찮습니다.”


울었던 눈을 보이는 게 싫어 희조는 제 핸드백을 집으며 필사적으로 하라에게 눈을 맞추지 않으려 노력했다.


“오늘 정말…… 정말 실례가 많았어요.”


다음에 꼭 제대로 인사드리겠습니다. 희조가 목례를 하곤 말했다. 지극히 사무적인 톤이었지만 그 목소리는 좀처럼 듣기 어려운 젖은 음색이었다.


“어차피 네 집 가는 길이랑 겹쳐.”


나도 지금 바로 퇴근하면 되거든.


“아.”

“아직 ㅇㅇ동 살지? ㅇㅇ사거리 오피스텔? 맞아?”


어쩐지 하라는 속삭이는 투로 다정하게 말했다.


“나, 새로 구한 집이 네 집이랑 가까워.”

“…….”

“아마 가는 길이 완전히 겹칠지도 몰라.”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같이 타고 가. 하라가 몸을 일으켰다.


“아뇨, 전…….”

“여기서 기다릴래? 차 금방 빼올 테니까.”


대놓고 어르고 달래는 어조. 누구라도 못 이기는 척 따를 수밖에 없을 것만 같은, 그런 ‘어른’의 말투.


“아뇨, 작가님. 아니, 팀장님…….”


입에 익지 않는 호칭. 늘 듣기만 했던 호칭. 한때는 제 것이었던 호칭. 그 호칭을 쥐어짜내듯 입에 담고 희조는 부러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정말 괜찮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희조는 여전히 하라에게 눈을 맞추지 못한 채로 겨우 말을 맺었다. 실로 난감한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상대의 친절을 어디까지 거절해야 무례가 되지 않는 걸까.


희조는 이따금 제게 노골적인 호의와 거절하기 어려운 선심을 보이는 이들을 만났고, 그럴 때마다 단호한 태도를 보이려 노력했지만 늘 그 선을 가늠하는 게 어려웠다. 거기다 지금까지 그런 경우는 십중팔구 남자들이 그 상대였다.


때문에 하라처럼 ‘같은 여자’가, 그것도 업계에서 자타 공인 최고의 셀럽으로 추앙받는 사람이, 심지어 이젠 자신의 후임자, 아니- 


또 다른 상사가 되어 버린,


그런 인물로부터 받는 배려와 다소 사적이라고 할 만한 친절에 희조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더군다나 하라는 자신보다 훨씬 능란한 사람이었다. 행동은 시원했고 거기에 담긴 마음은 따뜻했으며 언행은 유연했다. 이런 태도와 분위기가 바로 하라를 거부할 수 없게끔 하는 것이었다.


“사실 오늘 꺼내긴 불편할까 봐 일부러 안 가져온 서류가 있어.”

“서류……요?”

“응. 중요한 거야.”


법무팀에서 그동안 네가 기획했던 전시들에 대한 책임 귀속을 명확히 하라고 서류를 하나 줬어. 앞으론 네가 맡았던 거 모두 내가 처리하게 될 테니까 나한테 인계자로서 서명만 해주면 돼. 공식적인 서면으로 담당 책임자 바뀌었다는 걸 알려주는 것도 중요한 예의일 거야. 다른 계약 파트너들이나 작가 에이전시 쪽에선 아직 이런 사실을 모를 테니까.


“근데 그 서류, 내 차에 있거든.”


상대를 설득하면서 묘하게 리드까지 해내는 내공.


“그러니 오늘 하기 싫은 일 해치우는 셈 치고 나랑 같이 퇴근하는 거야, 오케이?”


희조에게 ‘연상’이란 이런 지점에 이른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럼 오 분 뒤에 나와.”


하라는 자신의 주변에서 그런 경지에 있는 유일한 여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웹소설(GL) zezemem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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