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제4행성, 서울

 

―도대체 왜 발정 난 토끼가 여기에 있는 거야?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슈와 테오를 바라보며 손짓하는 플로라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들 앞에서는 어른스럽게 행동하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플로라는 인상을 찌푸리다가 이내 주름 잡힌 미간을 곧게 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플로라 중령님!”

 

교복을 입은 새끼 황제펭귄은 오른손을 곧게 펼쳐 이마에 대었고, 그 진지한 얼굴을 바라보던 플로라는 웃음이 터졌는지 끅끅대며 그에게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테오는 무념무상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아하하, 하여간 슈는 못 말린다니까. 로랑이 그렇게 교육했니? 이런 데서까지 격식 차릴 필요 없어. 어서 앉아. 배고프지?

 

슈는 고개를 끄덕이며 테오의 옆에 앉았다. 테오는 그 틈을 타 슈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아니, 아니. 남의 어깨에 왜 팔을 올리시는 겁니까요?”

 

슈는 할 수 있는 대로 험상궂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테오는 능글맞게 웃었다.

 

“아까는 내 몸이 좋다며 난리 쳤으면서. 우리 슈, 부끄럼 타는 거야?”

“그, 그럴 일 없습니다요!”

―너희, 지금 내 앞에서 애정행각 하는 거니? 기분 나쁘니까 그만하지?

 

플로라가 수화로 말하자 테오와 슈는 갑자기 조용해졌다. 냉랭한 표정을 짓던 플로라가 활짝 웃었다.

 

―먹고 싶은 건 뭐든지 먹도록 해. 유성우가 내리면 3행성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질 테니까. 그 짜릿한 모습은 같이 봐야하지 않겠어?

 

슈의 담요를 그의 목에 묶어주던 테오는 슈의 목덜미에 난 상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플로라의 손짓을 보던 슈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곧 웨이터가 테이블 곁에 왔고, 세 명은 정찬을 주문했다.

 

“궁금한 게 있습디다, 플로라 중령님.”

 

레스토랑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떨어진 자리에 앉은 손님들은 은은한 재즈 음색에 맞추어 스테이크를 썰고 있었다. 

애피타이저를 먹고 샐러드를 맛본 뒤, 잘 익은 생선구이와 고기를 입에 넣을 때쯤, 슈가 고기를 우물거리며 말을 꺼냈다. 말투는 아저씨 같은데 밥을 먹는 모습은 아기 같다니까. 플로라는 그렇게 생각하며 오른쪽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테오는 먹는 데에 흠뻑 빠져 있는지 슈의 물음에 고개를 들 틈이 없어 보였다.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는 울림이 들렸다. 

플로라는 티슈로 입을 닦으며 그의 앞에 앉은 슈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말하지 마. 제발, 말하지 마.

 

속으로 애써 외쳐대었지만 운명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고것이…… 검은 도토리 녀석은 오늘 밤 죽습니까요?”

 

그 순간, 레스토랑의 모든 불빛이 사라지고 플로라와 슈, 그리고 테오가 앉은 테이블에만 스포트라이트가 비췄다. 마치 하나의 연극 무대 같았다. 

슈는 아무렇지 않은 듯,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눈을 깜빡였고, 여전히 테오가 국물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플로라는 소파에 등을 깊숙이 기댔다.

 

―앞으로는 검은 도토리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마. 슈, 그리고 테오. 검은 도토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특별한 존재야. 너희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뛰어난 생명체지. 검은 도토리는…… 신의 총애를 받는 아이야. 이렇게 말하면 너희들의 궁금증을 증폭시킬 수도 있겠지만, 이제부터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두지 않도록 주의하렴. 지금처럼,

 

플로라는 말을 한 번 끊고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열심히 이야기하던 여성의 손이 멈추자 슈와 테오는 플로라를 따라 고개를 들었다. 머리 위쪽이 뜨겁고 무거웠다. 두 남성은 끔찍한 광경이라도 본 듯 입을 다물지 못하고 천장에 눈을 둔 채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지금처럼 우리를 주시하고 있으니까.

 

그들의 머리 위에서 커다랗고 섬뜩한 눈동자 하나가 눈꺼풀을 움직이며 세 명을 지켜보고 있었다.

 

 

메리어트 호텔, 스위트룸

 

S.H.


“뭘 먹을까요―. 뭘 먹을까요―.”

 

식탁 앞에 앉은 도리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도리가 흥얼대는 멜로디에 맞추어 나는 메뉴판을 넘겼다. 테이블 아래에서 도리의 발소리가 들렸다. 콩콩, 콩콩콩, 콩콩콩콩. 귀여운 소리였다.

 

“메리어트 호텔 요리 중에는 어떤 게 가장 맛있어요?”

 

팔랑팔랑, 종이를 넘기던 내 손 위로 도리의 얼굴이 불쑥 들어왔다. 눈을 깜빡거리는 도리가 환하게 웃었다.

 

“도토리가 제―일 맛있어요!”

 

이런 식으로 나를 유혹하는 거죠, 도리 씨.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도리의 뺨에 뽀뽀했다.

 

“도토리가 제일 맛있네요. 아니, 도토리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요.”

“어느 도토리가 제일 좋아요?”

“흠, 흠. 서울에 사는 도리라는 도토리가 정말 끝내준답니다.”

“다람 씨는 행복하겠어요. 도토리랑 섹스해서.”

 

도리의 마지막 말에 하마터면 기침이 나올 뻔했다. 나는 도리의 뺨에 한 번 더 키스했다.

 

“당연하죠. 당신이 있어서 행복해요. 고마워요, 도리 씨.”

 

결국 우리는 식탁에서 한 번 더 사랑을 나눈 뒤 아홉 시가 넘어서야 룸서비스를 주문했다. 나를 부르는 도리의 목소리가 너무 야했다. 그것 때문이었다. 정말이었다.

 

“다람 씨. 다람 씨에게 말하지 않은 게 하나 있어요. 뭔지 궁금해요?”

 

양송이버섯 수프를 먹던 도리가 내게 말했다. 나는 포크로 셀러리를 콕 집어 도리의 입안에 넣어주었다.

 

“뭔데요? 궁금해요.”

 

도리는 내가 넣어준 갖가지 채소를 맛있게도 씹어 먹었다. 천천히 야채를 먹는 도리의 곁에서 나는 와인 잔에 물을 따라주었다. 도리는 물을 한 번에 들이킨 후 말했다.

 

“꽃술봉 말이에요.”

“네, 도리 씨.”

 

이번에는 토마토 수프를 작은 그릇에 담아 도리에게 건네주었다. 도리는 그릇째 들어 수프를 꿀꺽꿀꺽 삼켰다.

 

“사실……”

 

수프를 다 마신 도리가 말을 하다 말았다. 눈꺼풀을 깜빡깜빡 움직이던 도리는 헤헤, 하고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도리 씨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은데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헤헤.”

“정말요? 도리 씨가 위험하다거나…그런 일은 아닌 거 확실하죠?”

“응, 진짜예요. 정말로. 난 이렇게나 건강한 도토리잖아요! 봐요. 우리 오늘도 몇 번이나 사랑을 나눴는지 몰라요. 그런데도 난 팔팔하잖아요!”

 

도리가 의기양양하게 두 팔을 펼쳐 보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예리한 눈빛으로 그를 훑어보려 했으나 그 귀여운 모습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쿡쿡 웃다가 다시 양상추를 도리의 입에 넣어 주었다.

 

“와인 마실래요?”

“응. 좋아요.”

 

도토리와 다람쥐가 와인잔을 기울이는 소리가 들렸다. 청명하고도 아름다운 소리가 다이닝룸에 울려 퍼졌다.

 

S.H

 

 

 

제4행성, 서울

 

침묵이 흘렀다. 눈 깜짝할 새에 스포트라이트가 꺼지고 모든 것이 되돌아왔다. 유리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고, 커트러리가 그릇에 닿아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적했던 레스토랑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웨이터들은 정신없이 테이블을 오가며 술과 음식을 날랐다.

슈는 더는 어떤 말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테오는 그런 슈의 얼굴을 흘금거리다가 다시 잔치 국수를 꿀꺽꿀꺽 들이켰다. 슈는 툭 치면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테오는 깨끗이 비운 그릇을 탁 소리 나게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는 슈의 손을 꽉 잡았다. 플로라는 쓸쓸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메리어트 호텔 앞 거리

 

신호등 위로 검은 새 한 마리가 날아왔다. 잠시 그 위에 앉아 날개를 접은 까마귀는 메리어트의 전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까마귀의 눈동자처럼 붉던 신호등이 녹색으로 바뀌자,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자동차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시의 소음이 들렸다.

머릿속에서 다람쥐가 도토리를 먹는 상상이 반복됐다. 도토리를 되찾고 싶어서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검은 도토리를 삼킨 레빈과 몸을 섞던 날을 떠올리자 온몸이 전율했다. 간지럽게 그의 뺨을 타고 내려간 전류가 가슴께부터 여러 갈래로 뻗기 시작했다. 

아름다웠던 레빈의 몸을 생각하며 까마귀는 도토리를 생각했다.



모스크바, 우주 통합 관리국

 

두 남성을 양쪽 어깨에 매고 집무실 문을 열어젖힌 로랑은 거의 던시다시피 남성들을 소파에 내려놓았다. 테이블과 의자가 놓인 창 곁으로 다가가 블라인드를 올리자 저 멀리, 태양 빛을 받아 반짝이는 행성 하나가 보였다. 조금 있으면 별처럼 빛나던 행성 하나를 더는 보지 못 하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로랑은 테이블 위에 놓인 체스 말들에 눈을 돌렸다. 레빈의 집무실에서 옮겨 놓은 것인가. 왜인지 검은 액체가 묻어 있었다. 로랑은 킹을 들어 올렸다. 피 냄새가 났다.

 

남성들을 그대로 두고서, 로랑은 집무실을 나섰다. 긴 복도를 걸어 레빈의 집무실 앞에 섰다. 주무시고 계실까, 일어나 계실까. 궁금했다.

 

“대령님. 081455 로랑입니다.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아무 대답이 없었다. 침을 꿀꺽 삼킨 로랑은 노크를 하고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부드럽게 돌리자 문이 열렸다.

 

“대령님.”

 

대령은 의자에 앉아 책상 위에 엎드려 있었다. 불을 켜지 않아 어두운 방 안에서 홀로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걸까. 로랑은 그의 곁에 다가갔다. 문은 저절로 닫혔다.

 

“몇 분 뒤, 제3행성이 사라질 것입니다.”

 

레빈은 몸을 일으켜 두 팔을 쭉 뻗었다. 죽이려는 걸까, 나를 원하는 걸까. 로랑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생각했다. 그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작은, 아주 작은 생명체가 로랑에게 안겼다.

 

“플로라가 다녀갔다네.”

 

레빈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침착했다. 느긋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자, 로랑은 그제야 경계 태세를 풀었다. 로랑의 단단한 가슴이 레빈의 부드러운 몸 위에 닿았다. 로랑은 그를 들어 안고 의자에 앉았다.

 

“허락도 없이 내 의자에 앉다니. 자네는 간이 배 밖으로 나왔나 보군.”

“레빈.”

 

지금 당장 레빈을 안고 싶다고 생각했다. 규칙적이고 짧은 통증이 머리를 괴롭혔다. 작은 생명체의 열기가 느껴졌다. 로랑의 품에서 나온 레빈이 로랑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스레한 불빛이 그의 눈동자를 촉촉이 적셨다.

 

“자네도. 네 놈도 검은 도토리를 사랑하는 게지.”

 

그의 말에 로랑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고개를 저었다.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네. 그러나 신의 총애를 받은 검은 도토리는 모든 것을 유혹하지. 그래서 모든 이가 그를 사랑한다네.”

 

레빈은 말을 한 번 끊고서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로랑 소령. 로마노프가 검은 도토리를 따라갔다고 플로라가 말해 주더군. 나는 그 검은 도토리가 괘씸해서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네. 그 작은…… 움켜쥐면 터져버릴 작은 생명체를 없애버리고 싶어. 그를 죽여버리고 로마노프를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 내가 검은 도토리를 삼키지 않아도 그가 나를 봐주었으면 좋겠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네. 나는 애초에 버림 받은 존재니까. 검은 도토리와는 달리.”

 

로랑은 레빈의 몸을 껴안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천천히 소파에 그를 눕혔다. 아름다운 백금발을 쓸어 넘겼다.

 

“레빈. 난 당신을 사랑해. 그날 이후로 당신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 당신 때문에 미칠 지경이라고. 당신의 그 발갛게 달아오른 두 뺨이 좋아서 미칠 것 같단 말이야. 난 여전히 여기에, 당신 앞에 있는데 그런데도 내가 검은 도토리를 사랑한단 거야?”

 

로랑은 자신이 내뱉은 말에 놀란 기색이었다. 그는 스스로 입을 막았다. 입을 막은 손이 덜덜 떨렸다. 낯뜨거운 말을 해 버렸다는 생각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한편, 이제 죽겠구나, 하는 생각 때문에 몸이 덜덜 떨렸다. 레빈 또한 당황한 표정이었다.

레빈은 로랑의 목덜미에 팔을 두르고 그를 껴안았다.

 

“……대, 대령님. 송구합니다. 죽여주십시오.”

 

제3행성보다 그 관리자가 더 먼저 사라지겠어. 로랑은 눈을 질끈 감았다.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죽음 대신 레빈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자네는 참 한심하군. 한심하고 멍청하기 짝이 없어.”

 

 

...

 

 

밤 11시.

유성우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그리고 무수히 쏟아지는 별들이 보였다. 밤하늘은 온통 은빛 물결로 가득했다. 모든 것이 멈췄고, 모든 것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제3행성의 궤도가 혜성의 먼지에 들어갔다. 소행성의 파편과 먼지들이 행성의 중력에 이끌렸다. 대기권에서 불타 없어지는 우주의 먼지들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레빈과 로랑은 침실 안에서 모든 순간을 바라보았다. 로랑은 레빈의 하얀 살갗을 어루만지며 그의 눈두덩에 키스했다.

 

플로라와 슈, 그리고 테오는 소리 없이 사라지는 행성을 지켜보았다. 별 하나가 안개에 가리웠다. 한 행성의 멸망은 별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같았다.

 

마르크와 세라는 꿈을 꾸었다. 인간을 살리기 위해 식량 대체 알약을 만든 여성은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것을 보았다. 남성은 그의 곁에 있었다.

 

로마노프는 기척을 내지 않도록 조심하며 통유리창 곁에 다가섰다. 다람쥐와 도토리가 보였다.

 

다람과 도리는 서로를 껴안았다.

 

“도리 씨. 괜찮아요. 유성우가 떨어지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어요.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요. 내가 곁에 있잖아요.”

 

도리를 품에 안은 다람은 그에게 속삭였다. 낮고 차분한 다람쥐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자, 도토리는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아 애인의 손을 잡았다.

 

모든 것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다람과 도리를 품은 메리어트 호텔의 스위트룸은 깊은 물 속에 서서히 잠기기 시작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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