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없는 고요한 주방. 늦은 아침을 먹는 바냐 옆에 파이브가 나타나 앉았다.

"좋은 아침, 파이브."

"좋은 아침, 바냐."

파이브의 얼굴은 그리 좋아보이지 않았다. 바냐는 걱정스런 표정을 띠며 커피를 따라 파이브의 앞에 내려놨다. 파이브는 잔을 양손으로 감싸기만 할 뿐, 커피를 입에 들이지 않았다. 바냐는 파이브의 퀭한 얼굴을 보며 우물쭈물 말을 붙였다.

"무슨 일 있어? 낯빛이 어두운데."

"밤을 새서 그래. 계산할 게 많아서 말이야."

"또 벽에다가 썼어?"

파이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냐는 한숨을 푹 쉬었다. 시시가 알면 싫어할텐데. 바냐는 시시에게 어떻게 둘러대야 할지 머리를 굴리면서 파이브에게 넌지시 물었다. 

"계산이 잘 안 돼? 고민이 많아보이는 얼굴이네."

"아니, 계산은 끝났어 바냐. 그게 문제지."

그게 문제야. 파이브는 작게 중얼거리며 컵을 들었다. 설탕 하나 들어있지 않은 블랙 커피의 쓴 맛이 온 입안을 적셨다. 하지만 간밤에 느낀 절망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는 최대한 오래 커피를 입에 머금고, 삼킨 뒤에도 한참을 기다렸다. 마음을 가다듬기가 어려웠다.

"답을 찾았어. 이 모든 것들의 시작이자 끝."

바냐는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파이브는 바냐의 입 옆이 당겨지는 것을 보며 남몰래 속앓이했다. 이 미소를 다시 보고 싶어서 지금껏 달려왔음에도 맘편히 마주 웃을 수가 없었다.

"그래? 잘 됐네. 원인을 알면 이것도 끝낼 수 있는 거잖아. 그게 뭔데?"

"너야, 바냐. 네가 내가 찾던 알파고, 오메가였어."

"내가?"

바냐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켰다. 하하, 그럴리가. 불안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농담이지? 아니면 네가 실수했거나-"

"내가 실수하는 거 봤어, 바냐? 확실해. 계산하고 나서 틀린 게 있을까봐 검산까지 마쳤어. 수십 번도 더."

바냐는 말을 잃은 채 아래로 시선을 고정했다. 파이브가 짓궂은 장난을 치는 것이기를 바랐지만 파이브는 그런 장난을 칠 사람이 아니었기에. 주위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바냐는 주먹을 꽉 쥐어 떨리는 손을 숨기려 했다.

"바냐, 나도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어. 아니, 하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하지만 바냐, 널 살리기 위해서는 너를 죽여야만 해."

파이브의 목소리는 물 아래서 들려오는 것마냥 먹먹하게 들렸다. 둘 사이의 공기는 공명을 멈춘 듯 정지되어 있었다. 말도 안 돼. 바냐는 힘겹게 말을 꺼냈다. 귓가에서 웅웅거리는 소리 때문에 제 목소리조차 똑바로 들리지 않았다.

"바냐."

파이브는 손을 뻗어 바냐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색이 바랜 파란색 체크무늬는 어느새 아무것도 없는 흰색으로 변해있었다.

"앞으로 이틀이야. 그 뒤에는 세상이 끝나.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1960년에 세상이 멸망하면, 1989년의 우리는 태어날 수조차 없게 돼. 돌고 돌아서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거야."

"그래서 네가 하려는 말은, 지금의 나를 죽여서 어린 나를 살리겠다는 거야?"

"그렇게 된다면 어른이 된 너도 언젠가는 존재히겠지."

"하지만 그건 내가 아니잖아. 너와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는 바냐가, 정말 바냐 하그리브스야?"

파이브는 대답할 수 없었다. 고막을 찢어놓을 듯 웅웅대는 소리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시선을 올려 창백하게 질린 제 형제를 바라봤다. 홍채마저 하얗게 질린 일곱번째 형제. 전혀 평범하지 않은, 정 많고 따뜻한 바냐 하그리브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할 거야?"

"...해야 할 일을 해야겠지."

파이브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단어 하나하나가 묵직한 응어리가 되어 목을 꽉 채웠다. 그는 애써 그 무게를 삼켰다. 죄책감과 절망과 함께.

"그리고는?"

"그리고는... 돌아갈 거야. 모든 것을 잊고,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시간으로."

"잊을 수 있겠어, 피이브?"

"잊어야지."

"계산은 해봤어?"

"응."

"된대?"

"이론적으로는."

"그래."

공기가 다시금 숨쉬기 시작했다. 주변 소리가 또렷하게 들리기 시작하자 파이브는 고개를 들었다. 하얗게 얼어버린 시선 대신 슬픈 듯 웃는 헤이즐빛 눈이 파이브를 마주보고 있었다.

"그러면 얼른 해, 파이브."

"미안해, 바냐."

그는 손을 들어서 바냐의 목 위에 겹쳤다. 마지막을 목도하고 싶지 않아 눈을 꾹 감은 채였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박동이 잦아들고, 컥컥대는 기침소리가 정적으로 변한 후, 그는 고개를 돌리며 바닥으로 무너졌다. 그동안 가족들을 살리겠답시고 손에 그리도 많은 피를 묻혔는데, 피 한방울 흘리지 않은 살인의 무게는 그 모든 것을 압도했다. 지금껏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한 업보가 이렇게 돌아온 걸까? 바냐, 운명이 이렇게까지 우리에게 잔인하게 굴 필요가 있었던 걸까?

파이브는 눈물을 닦고 손을 꾹 쥐었다 폈다. 손끝에서 여전히 동맥의 박동이 느껴지는듯 했다. 환상지감처럼. 그는 눈물 섞인 한숨을 쉬고, 속을 가다듬은 뒤, 공간을 열어 어딘가로 뚝 떨어졌다.

기억을 잃은 소년 하나가 발견되었다. 친절한 사람들은 갑자기 뚝 떨어진 아이를 경찰서로 데려가주었다. 아이가 입은 교복은 곧 이름표나 다름없는 것이라서, 아이는 금방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아이의 법적 보호자인 레지널드 하그리브스 경은 '넘버 파이브는 식사 도중 밖으로 뛰쳐나갔으며, 사라진 지 고작 3시간밖에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이의 상태에 관해서는 '능력의 과부하로 인한 일시적인 기억 상실을 겪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넘버 파이브는 45년의 세월을 하얗게 지워버린 채, 어린 파이브가 남겨준 빈자리에 들어가서 그 대신 살아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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