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어쩌면 다시 오지 못할 순간




“왜, 가서 너 밥 먹어, 괜찮으니까.”


“나도 괜찮으니까 그릇 줘봐요 형.”


매니저 형 손에서 반찬그릇 가져간 정국이, 배식대 가서 직접 산더미만큼 반찬을 떠왔다. 그걸 들고 성큼성큼 연생들 테이블로 가. 떠들썩하던 그 테이블, 이쪽을 향해 앉아 있던 애들은 정국인걸 알아보고 순간 얼음돼. 


“이거 니가 먹고 싶다고 했어?”


“예 뭐..”


갑자기 반찬 산만큼 쌓인 접시가 자기 앞에 놓이는걸 보고 어리둥절한 연생 고개 들었다가.. 정국을 보고 마찬가지로 얼어붙었다. 


“아,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연습생 생활 힘들텐데 많이 먹어야지. 근데 반찬 떠오는 것 정도는 직접해.”


정국이 인사 받는 대신 정색하고 그랬다. 싸가지 연생이 당황한듯 눈동자 요동치다가 매니저 형을 쳐다봐. 알아서 상황 정리 해달라는 듯이. 하지만 매니저 형, 아무 말 안하고 보고만 있다. 도와줄 생각 전혀 없지. 별 수 없이 싸가지 연생이 어 그게..어물어물 변명해.


“그게 아니라..물 뜨는 김에, 바로 옆에 있으니까..”


“유치원생도 자기 물은 자기가 떠먹어.”


“어 그게..죄송합니다..”


“다음엔 죄송한 일 하지 말고, 매니저 형 말 잘 듣고. 스스로 할 일은 스스로 하자. 응원할테니까 열심히 해라.”


..네!! 얼어있던 연생들 갑자기 누가 땡 해준것처럼, 우렁차게 대답한다. 한껏 싸가지 없던 연생은 정국을 쳐다보지 못하고 이리저리 땅바닥만 보는 중. 그 얼굴을 잠시 지켜보다가 정국은 별 말 없이 자기 테이블로 돌아갔다. 묵묵히 밥을 먹어. 연생들 테이블에선 이후로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어. 




“이야 이게 무슨 일이고 정국아, 열있나 함 재보자.”


“형 왜 그런거 다 받아줘요, 버릇 없어지게.”


밥 먹고 매니저 형이랑 잠깐 얘기. 형은 민망하기도 하면서, 정국이가 거기서 편 들어준게 감격스럽지. 연생 때는 툭 건드리면 울 것 같던 애가 언제 이렇게 컸나 싶고.


“버릇은 원래 없더라, 내가 없어지게 한거 아니야.”


“미안해요 형.. 나 때문에 형 안해도 될 고생하고.”


“뭔 소리야, 니 매니저 하는 것보다 지금이 백 배 편한데. 넌 뭐 니가 엄청 다루기 쉬운 아이돌이라고 생각하나본데, 아니거든?”


“나중에 다시 형이랑 일하게 되면 그땐 아침에 잘 일어나고 말 잘 들으께요.”


“말이라도 고맙다.. 근데 전정국 오늘 이후로 호랑이 선배 타이틀 다는거 아니냐? 짬 차더니 무섭네~”


“그정도로 무슨요.. 지민이였으면 아까 걔들 가루 되게 까였죠.”


“하긴, 지민이 각 잡고 떽떽거리면 무섭지. 잘..지내지?”


“네. 저보다 훨씬 씩씩하거든요.”


조심스레 묻는 형 말에 정국이 미소 지으며 대답해.


지민이랑은 그날 이후 연락은 하지 않았다. 조그만 트집도 잡히기 싫어서, 정국이 진짜 숨겨둔 폰도 없거든. 지민이 말처럼 요즘 시대에 이게 무슨 일이냐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런 날들은 언젠간 끝이 난다. 지민이 대학 가고 우리가 성인이 되면. 정해진 데드라인이 있으니까 버틸 수 있어.


꾸벅 인사하고 연습실로 올라가는 정국이를, 매니저 형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생각보다 잘 지내는 것 같은데, 그래서 오히려 더 걱정이 되지. 힘들어도 힘든 티를 안내는 애란걸 아니까. 차라리 티가 나면 좋으련만. 




방학이 거의 끝나간다. 그와 함께 정국이는 설레. 개학 하면 학교에서 지민이를 볼 수 있잖아. 거의 셀프 감금한 채로 숙소와 연습실과 스케줄만 오가던 정국이한테, 학교는 지민이를 맘 편히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야. 요며칠 아침에 학교 가는 꿈을 꾸는데 야속하게도 꼭 교실문 열기 직전에 잠이 깨버린다. 문 열고 들어가는 것까지 하고 싶은게 그게 참 맘대로 안되대..


근데 맘대로 안되는건 현실도 마찬가지였다. 개학을 일주일 앞둔 날, 정국이 대표님 방으로 불려 올라갔지. 이사님도 아닌 대표님이라.. 예감이 좋지 않아. 그리고 안좋은 예감은 언제나 겁나 정확하더라.


“학교 말인데, 전학을 하는게 어떨까 해.”


대표님은 언제나처럼 사람 좋은 미소를 띄고서 말했다. 정국이한테는 하늘이 무너지는 말을.








고딩 슈스아이돌 x 까칠 모범생

w.맥심모카








“어째서.. 저 그동안 해야할거 다 했고 그 이상으로 노력해왔는데 어째서..!!”


“아, 잠깐 진정하고, 우선 들어봐. 우리도 일방적으로 결정해서 밀어붙이진 않을거니까.”


그럼 지금까지 일방적으로 해오신건 뭔가요. 라는 표정을 정국은 더이상 숨기지 않아. 그동안 내가 어떻게 해왔는지 잘 알면서, 지금 이럴 수는 없다.


“다녀봐서 알겠지만, 일반 학교는 아무래도 우리 일정상 무리가 있어. 학교 측에서도 이제 고3인데 학생들 입시 분위기에 영향이 있을까봐 우려하는 것 같고.”


“..그래서요.”


“남은 1년은 예고에 다니는게 좋겠어. 마침 회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적당한 학교가 있기도 하고.”


이미 논의는 다 해놨다는 뜻이다. 이건 일방적 통보였지 정국이 생각을 묻는게 아니야, 언제나 그래왔듯이.


“싫다면요. 그럼 바꿔주시나요? 아무리 생각해도 저 그동안 잘못한 것도, 제대로 못한 것도 없는데 왜..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냐고, 정말로 소리치고 싶다. 억울하고 화가 나고 막막한 심정. 이제까지 그거 하나만 보고 버텼는데 진짜 너무 한다, 이건 정말이지.. 처음으로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 들어.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좋아한 것 뿐이다. 아끼고 좋아해서, 그래서 더 열심히 했을 뿐이다.


속에서 천불이 나. 정국이 몇 번이나 심호흡 하는 와중에 대표는 사무적으로 말해.


“지금 제일 문제는 검사결과지야, 정국아. 그건 잘 알지? 자칫하면 이번 1년 그냥 날릴 수도 있어.”


“저한테 이러시면 검사결과가 나아지나요?”


정국이답지 않은 공격적인 말. 대표는 예상한 듯 덤덤하게 말을 이어. 


“솔직히 터놓고 말하지. 너한테는 1년이 걸린 일이지만 회사로서는, 사활이 걸려 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고 정국은 생각해. 다 걸고 달리고 있다고.


“너한테 이런 얘기까지 하는게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회사 입장에서도 아주, 아주 중요한 시기야. 솔직한 심정으로는 지금 너한테 무릎이라도 꿇고 사정하고 싶어. 제발 검사 통과해 달라고.”


“그건..”


“물론 알고 있어. 결과를 너 자신도 어떻게 할 수 없다는거, 너로서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알아. 담당 선생님 말씀이, 오히려 그 너무나 열심인게 문제라고 하시더라. 잠도 못자고 표정도 없어지고 일만 한다고.”


“저한테 원하시는거잖아요.”


“아니, 정국아, 우리는 기계같은 아이돌을 만들려는게 아니야. 사람들이 너를 보고 행복하려면 니가 먼저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물론 지금 이 말이 너한테는 전혀 와닿지 않겠지만.”


그런데 살다보면 그런 일들이 있어. 당장에 와닿지는 않지만 진심인 일들. 


“네. 와닿지 않네요.”


정국이 말에 대표님이 허허..웃는다. 이 상황에 아무리 대표여도 웃음이 나올 수가 있나 싶은 정국이, 혼란스러운데. 이어지는 말은 더더욱 혼돈.


“사실은 지민이하고 벌써 얘기 했다.”


“무슨.. 지민이를 왜요?!”


“진정해, 니가 예상하는 뭐랄까, 험한 말은 하지 않았으니까. 우린 할 수 있는 최선의 제안을 했고 지민이는 그걸 받아들였다. 우리가 제안한건..”


뭐라고 하는건지 분명 듣고는 있는데 머릿속에 바로 입력이 안돼. 회사에서 지민이를 만났다는 자체가 정국에겐 절대 있어선 안될 상황이어서. 그 상황만은 막으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 결국 그래봐야 소용없었던 거야. 이건 내 인생인데 어째서.. 정국이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데 숨이 막혀 말도 안나오지. 그때 다시 들리는 대표님 말,


“전학 가는 대신 한달에 한번 씩은 만나도 좋아. 대신 지정된 장소에서만. 마 기자 일 이후로 뭔가 낌새를 잡은 다른 기자들이 있을거야. 되도록 눈에 띄지 않는게 좋겠지. 그건 너도 동의하겠지?”


“계속 만나도 좋다는 얘긴가요?”


“솔직히 말하면 난 여기서 정리가 됐으면 했어. 둘다 어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바뀌는 나이잖아.”


정국은 그 말에 굳이 의견을 밝히지 않았다. 그럴 필요는 못 느꼈거든. 무슨 말을 하든 좋을대로 해석할텐데. 


“그럼 왜 그렇게 결정하셨죠? 내키지 않는다면서.”


“그건..”


대표는 잠시 생각하는듯 하더니 어깨에 힘을 빼고 대답해.


“그건 지민이한테 직접 물어봐. 아직 회사에 있을테니까.”


아마 식당에..


그 말이 끝나기 전에 정국이 벌써 일어나서 문 열었다. 원래 몸 가벼운건 알았지만 저렇게 동작이 빨랐나..뒤에서 지켜보는 대표 얼굴에 알듯 모를듯 미소가 지어지지.


30분 전, 방금 정국이가 앉았던 자리에 지민이가 앉아 있었다. 


이사를 통해 얘기는 들었지만 직접 대면한 지민이는 예상보다 더 만만치 않은 애였어. 고작 고딩 어린애한테 그런 느낌을 받게 될 줄은 몰랐는데.


‘멀리까지 오게 해서 미안하네. 길은 안막혔고?’


‘지하철 타고 왔어요. 오라고 하신 이유가 뭔가요? 저 학원 가야 돼서 시간 별로 없는데.’


무슨 말을 하든 난 신경 안써요, 라는 표정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있는 지민이. 산전수전 다 겪어본 대표 눈에는 어린애가 콩주먹 쥐고 방어자세 잡는걸로 보였지만, 그렇다해도 여기 불려와 있는 상황에 저렇게 씩씩하게 말할 줄 알다니. 나중에 크면 우리 회사 입사시키고 싶네?


대표는 지금 상황을 가감없이 설명했어. 지민이가 익히 알고 있는 것들도 있고, 처음 듣는 얘기도 있었지. 특히 정국이 검사결과가 상당히 부정적이라는 말에는 지민이 진심 놀랐어. 항상 괜찮다고 말하는 정국이 말을 다 믿은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런 검사 정도는 어떻게든 통과하겠지 생각했는데. 그게 그렇게 만만한게 아니었던거야. 


‘상담 닥터 의견은 지금 정국이가 너무 막다른 길에 몰려 있다는 거야. 더 문제는 스스로 그렇게 만들고 있다는거고. 그 애는 지금까지 참고 버티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을 모르고 살았어. 그래서 이번에도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걸 다 했겠지.. 아마 지민 학생을 위해서 더 그랬을거야.’


‘……’


지민이 처음으로 말문이 막힌다. 정국이가 나를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써왔는지. 그걸 다른 사람 입을 통해 들으니까 가슴이 더 아파. 


‘요점만 말할게요. 학교는 전학을 시킬 생각이야. 마 기자 일도 그렇고, 또 언제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는데 지금 학교는 위험해. 두 사람이 계속 붙어 있다보면 분명 누군가 눈치채지 않겠어요?’


‘..이제..다시는 못 만나는건가요..?’


지민이 떨리는 마음으로 묻는다. 누가 눈치 챌지 모른다는 대표 말에 반박할 수가 없지. 이미 준이랑 현이한테 들켰잖아? 걔들이야 백퍼센트 믿을 수 있지만 그외에는 아무도 못믿어. 지민이가 제일 무서운 것도 그거였고. 


‘다시는 만나지 말라고 하면 그렇게 할건가?’


‘죄송하지만, 아니요. 그건 저희 둘이 결정할 일이라서요.'


호오.. 대표 얼굴에 의외라는, 혹은 그럴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이 떠오른다. 분명 엄청 쫄려 있는데 그러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게 보통 강단이 아니다 싶지. 


‘우리도 지민 학생도 정국이가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은 똑같아. 지금은 회사가 악당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누구보다 정국이가 행복하기를, 잘 되기를 바라는게 우리거든.’


‘무슨 말씀인지 알아요. 근데 그것도 결국 정국이가 필요한 동안에만 잘 해주신다는 얘기잖아요? 그래서 정국이는 누구보다 필요한 사람이 되려고 저렇게 애쓰는거구요.’


떨고 있던 지민이, 점점 목소리가 단호해진다. 말하면서 깨달았거든.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저는 저대로 잘 할게요. 대표님도 잘 하세요, 정국이한테. 언젠간 재계약 해야할텐데 그때 놓치고 후회하시면 안되잖아요.’


지민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덧붙인다.


‘그리고 정국이한테 살 빼라는 말 그만 하세요. 살은 대표님이 빼셔야겠는데요?’


허허.. 맞는 말이긴 한데..보통 이렇게 대놓고 하지는 못할 말을, 지민이 또박또박 하고서 나갔다. 닫힌 문을 보면서 대표는 고개 끄덕끄덕, 역시.. 정말로 만만한 애가 아니지.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다행이라고 대표는 생각했어. 저 정도는 돼야 정국이 옆에서 버티지. 왜 정국이가 마음을 줬는지 알 것 같다. 자기 마음을 맡겨도 될만큼 단단한 사람. 언젠가는 그런 상대를 만나겠지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빠르네. 요즘 애들이란..


부쩍 나오기 시작한 배를 두드리며, 살을 좀 빼긴 해야겠다 싶지. 




“박지민!”


“아 깜짝이야.. 왔어? 너도 밥 먹어, 불고기 미쳤음 겁나 맛있..”


미친듯이 식당까지 뛰어내려 가봤더니. 지민이는 세상 태평하게 앉아서 밥을 먹고 있다. 지민이 앞엔 매니저 형이 같이 있었지.


“지민이 밥 안먹었다길래 여기서 먹고 가라고 했어.”


매니저 형 말에 정국이 갑자기 긴장이 탁 풀리지. 지금 밥이 넘어간다는건 지민이 상태가 별로 나쁘지 않다는 뜻이었고, 아니 그건 그렇지만..


결국 지민이 성화에 못이겨 정국이도 밥 먹는둥 마는둥 하고 나서야 식당을 나왔다. 


빈 연습실을 찾아 들어가서 지민이 어깨를 잡고 마주 섰어. 대표실에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정국이 질문이 쏟아지려는걸 지민이가 먼저 막았다. 쉿, 알아 니가 뭘 걱정하고 불안해하는지. 근데 전정국 난 말이야..


“대표님 제안 받아들이면 어쨌든 한달에 한번은 볼 수 있는거잖아? 그정도면 나쁜 조건 아니지 뭐. 헤어지라는 것도 아니구.”


“그 약속이 제대로 안지켜지면? 전학 가면 진짜 얼굴 볼 일 없어지는건데.”


“야 전정국, 그럼 뭐 회사랑 싸워? 일인시위라도 할까, 우리 냅두라고? 무슨 세기의 사랑이야 뭐야..”


하며 지민이 웃어. 그러면서 정국이 뺨을 두 손으로 쓰담쓰담.


“두 가지를 다 선택한거야 나는. 아이돌인 너, 그냥 평범한 너, 둘 다 너잖아? 그러니까 둘 다 지킬거야.”


“지민아..나는,”


“넌 있잖아, 다 좋은데 뭔가 쫌 융통성이 없달까? 뭐 괜찮아, 내가 그래서 너 좋아하니까. 머리 쓰는건 나한테 맡기고 넌 그냥 내가 시키는대로만 하면 돼, 알았지?”


지민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그런다. 정국이 피식 웃어. 그러면서도 걱정되는 표정. 지민이 조금 진지한 목소리로 말해.


“나도 너 전학가는거 섭섭해.. 속상하기도 하고. 근데 가끔 보는건 허락받았잖아. 지금은 그걸로 충분해. 어차피 나도 학교에 너 없는게 나아. 나 이제 진짜 공부도 해야하고 전처럼 학교에서 너랑 못 놀아줘. 그리고 사람들이 그러는데 가끔 봐야더 애틋하고 사이 좋아진다더라? 맨날 얼굴 봐봤자 싸움만 나지 뭘.”


“우리 싸운 적 없는데. 니가 일방적으로 나한테 화낸 적은 많아도.”


“응 그건 그렇..야이씨? 내가 언제!”


그러는 지민이를 정국이 끌어당겨 안았다. 지민이 귓가에 정국이 또박또박 말해.


“니가 지금 참아준거, 나중에 다 갚을게.”


“..얼만 줄 알고..”


“얼마가 됐든.”


그러는 정국이 허리를 지민이 더 꼭 마주안아. 무슨 대답을 할까 생각하다가, 그냥 아무말도 하지 않기로 한다. 말보다 지금 끌어안은 서로의 몸이 더 진심이어서. 이것 이상으로 진실된 말이 생각나지 않거든.


“너 돈 겁나 많이 벌어야겠다 정국아.”


“열심히 해보께.”


오랜만에 주고 받는 헛소리 같은 농담들. 마음 속에 꽉 막혀 있던 뭔가가 스르륵 녹는 것 같지. 


“아까 매니저 형한테 들었는데. 너 막 요즘에 연습생 애들 혼내구 그런다며? 사춘기야?”


“혼낸건 아니고 그냥 할 말만 한건데.”


“어이구 우리 정구기~ 다 컸네 다 컸어? 그동안 교육 시킨 보람이 있네.”


“너보단 훨씬 크지 내가.”


야 훨씬까진 아니거든? 미세한 차이거든? 하며 입술 뾰족해지는 지민이, 거기다 대고 정국이가 막을 새도 없이 순식간에, 쪽- 버드 키스.


헐? 야? 미침? 누가 보면 어쩔려구! 퍽퍽! 정국이 가슴팍 사정없이 때려주는데.


“이 연습실 씨씨티비 없어.”


그 말에 지민이 멈칫, 어..그래..? 그렇다면,


“함 더 하자, 이제 자주 하지도 못할-”


..텐데, 라는 말은 서로 입술 꼭 맞댄채로 웅얼웅얼. 지민이 열린 입술사이로 불쑥 들어오는 달콤하고 매끈한 혀.. 순간 흠칫 했지만 지민이도 그만둘 생각은 없어. 정말로, 굉장히 오랜만이라는 기분이 들어 정국아. 너랑 이렇게, 불안함 대신 설레는 마음으로 끌어안은게, 입맞추는게. 


어쩌면 이건 대표님이 너랑 나를 인정하겠다는 의미인지도 몰라. 물론 그 인정의 이면에는 ‘니들이 얼마나 오래 가겠냐’는 마음이 전혀 없진 않겠지만. 그렇대도 상관없어. 그쯤이야 뭐.


대표와 얘기하는 동안 이 사람은 냉정한 사업가인 동시에 정국이한테 정말로 애정을 갖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 어른들은 참 복잡하다. 정국이를 진심으로 위해 주는 동시에 철저히 계산적이지. 어떻게 그 두 가지가 그렇게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는지, 지민이 눈엔 그게 신기해. 


그리고 결심했다. 나는 정국이한테 사랑만 주겠다고. 나라도 그러자고. 


아참 근데..


“정국아.. 우리 앞으로 정해진 곳에서만 만날 수 있대.”


“들었어.”


“그게 어딘지 알아?”


“어딘데?”


그러고보니 그 얘긴 못들었다. 지정된 장소가 어딘지까지 물어볼 정신은 없어서. 지민이 장난스레 눈 반짝이며 알려줘.


“니 숙소래.. 내가 그래서 그 제안 오케이 한거거든? 나 잘했지?”


“아 그래. 그래..?”


아아 숙소구나 끄덕..하던 정국이 뒤늦게 깨달은 표정. 사람들 시선 없는 곳이어야 하는건 당연하지만 그게 설마 숙소일줄이야. 아니 대표님..감사합니다.


“지민아.”


“으응..?”


“이정도면 우리 대표님한테 정말로 결혼식 주례 부탁드려도 되겠-”


으이그! 못살아! 하며 지민이 괜히 정국이 어깨 팡팡 때려줬다. 그치만 정말 이 추세라면 그래도 될.. 아니아니, 나 지금 뭐래? 정국이한테 말려들지 말자. 우리가 잘 되려면 최소한 한 명은 냉정을 유지해야지! 


“야 간지..러어..!”


갑자기 뺨이며 콧등에 쪽쪽 입맞추는 정국이, 지민이 꺄르륵 웃음 터졌다. 너한테 냉정을 유지하기란..앞으로 점점 더 어려워지겠다 정국아. 아니. 사실은 이미 불가능한 것 같네. 왜냐면 있짆아, 나도 지금은 이 연습실 문을 열고 나가고 싶지가 않거든.


지금 이 연습실 문 밖에서는 예전 매니저 형이 ‘이놈들 언제 나오냐고..’ 초조하게 문을 지키고 있다는걸, 두 사람은 알 길이 없었지. 







“어머 서운해서 어쩌니, 정국이 그동안 친구들이랑 정도 많이 들었을텐데..”


“서운할거 뭐 있어, 어차피 본업도 따로 있고 바빠 걔.”


“박지민, 넌 애가 왜그렇게 정이 없어? 나중에 봐봐, 친구들이 소중한 재산이다 너? 아주 그냥 지 공부밖에 모르지 그냥..”


“아 몰라, 다녀오겠습니다!”


아니 다른 집 엄마들은 딴거 신경 끊고 공부만 하라던데, 울 엄마는 왜? 


투덜투덜 현관문 나섰다. 엄마한테는 그렇게 말했지만 지금 지민이 마음에도 큰 구멍 뚫린 것처럼 찬바람 휭휭 불어.


오늘, 드디어 개학날이거든. 동시에 더이상 학교에서 볼 수 없게 되는 날. 이미 결정된 일이었지만 막상 진짜 그날이 되니까 아쉽고 허전한건 어쩔 수가 없지. 


3학년, 새로 바뀐 반 교실을 찾아갔다.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지민이 최현이랑 김준까지 다 같은 반이 되고 말았지. 아 벌써 귀가 시끄럽다.


“정국이까지 같은 반 됐으면 환상의 반편성이었을텐데, 아쉽다..”


지민이 뒷자리에 앉은 김준이 그런다. 옆에 있던 현이가 진지하게 대답해.


“근데 김준, 정국이 있었어도 니보다 성적 잘 나왔을껄. 현역 아이돌보다 공부 못할바에야 정국이 없는게 낫지.”


“야 성적이 전부가 아니야 인생은! 말 한마디 없이 전학 가버린 전정국도 냉정하지만 니들도 마찬가지네 진짜, 졸업하면 아주 모르는 사람 되겠다?”


언제나처럼 김준 혼자 방방 뛰는데. 현이도 역시 이건 좀 서운하지. 정국이 정말로 연락 한 통 없었으니까. ‘지민이 너한텐 연락왔지 그래도?’ 묻는 애들한테 대충 얼버무린다. 그렇지 뭐.. 


다행히 정국이 폰은 다시 쓸 수 있게 됐는데. 그렇다고 또 막 맘놓고 통화는 못하겠거든. 어쨌든 한번 회사에 불려갔다 오니까 지민이도 여러가지로 더 조심하게 되고. 통화할 때도 타이머 맞춰놓고 5분을 넘기지 않으려고 노력중이야. 번번이 실패하긴 했지만.


“이대로 다시는 정국이 못보는걸까? 쫌 섭섭하네.. 그동안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나만 그랬나..”


“뭐..바쁘면 그럴수도 있지.”


둘 대화 들으면서 지민이 아무말도 안했다. 애들 섭섭한 마음 충분히 알겠거든. 안그래도 이래저래 신경 쓸거 많은 정국이한테 애들까지 챙기라고 하기도 그렇고..지금 자기 하나 챙기기도 힘들 정국인데.


그렇게 오전 시간이 흘러갔어. 오늘은 점심 먹고 하교야. 4교시 끝나는 종이 울리고 지민이 느릿느릿 책 챙겨넣는데. 뒤에서 김준이 ’아오 진짜 느려터졌네!’ 재촉하는 바람에 급식실까지 질질 끌려 내려갔다. 야 늦게 가도 밥줘, 며칠 굶었냐? 


어, 오늘 반찬 제육이네. 정국이 이거 무지 좋아하는데. 뭐 거기 회사 식당이 더 맛있겠지만. 나도 참 별 걱정을 다..


“왜..?”


그때 갑자기 입구가 소란스러워지더니, 잠시 후 준이 현이 시선이 지민이 머리 위에 고정 됐어. 지민이 식판 위로 드리워지는 그림자..? 


“전정국! 야 너! 이제 우리 잊어버린줄?! 뭐야 갑자기, 나 보고 싶어서 왔어?”


준이의 호들갑, 지민이 고개 돌려보니 어, 진짜 전정국..


“너 왜.. 왜 왔어?”


반가우면서 어리둥절한 지민이 물음에 정국이 옆자리 앉으며 대답해.


“오늘 반찬 제육이더라고."


그러는 정국이 식판엔 아닌게 아니라 제육볶음 산더미. 하하..얘를 진짜, 어떡해야 돼? 이 사랑스러운 생명체를?


너무 사랑스러워서, 지민이 말없이 정국이 어깨 한번 찰싹 때려줬다. 정국이 과장되게 ‘아야아야’ 어깨 부여잡고. 


“인사하러 왔어, 이제 자주 못 볼 것 같아서.”


하는 정국이 말에 친구들 말없이 고개 끄덕. 그동안 친해졌다고 생각한건 정국이도 마찬가지였던거야.


네 친구는 어느새 예전으로 돌아간 듯 도란도란 화기애애-각종 비난과 공격이 난무하는-대화를 하며 급식을 먹었어. 어쩌면 다시 오지 못할 순간, 친구들 모두 그걸 알아. 그래서 평소엔 5분 컷으로 먹고 끝났을 점심시간이, 오늘만큼은 자꾸자꾸 길어진다. 


급식실이 한산해지고 마지막에 넷만 남을 때까지, 할 수 있는한 오래오래.















보인다

끝이 보인다 얘들아!!

☺️








잠깐의 휴식☕️

맥심모카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