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에게 봄

세훈 외전 / 과거 이야기 (1)





그렇게 한참동안 게임을 하던 김준면이 하품을 했다. 그리고는 핸드폰을 끄더니 이내 끄응- 거리며 자리에 누웠다. 문제는 내 무릎을 베고 누웠다는 것이었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뭐라 할 새도 없었다. 





"나 좀 잔다. 우리 한 5분 전에 들어가자."





그리고 녀석은 또 너무도 자연스럽게 잠을 청했다. 누가 보면 내가 일부러 무릎을 내어 준 줄 알 것 같았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치다가 손을 뻗었다. 김준면의 얼굴 위로 햇살이 드리웠기 때문이었다. 손바닥으로 가리자 녀석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이왕 자는 거 잘 자야지, 뭐. 


그렇게 쿨쿨 소리까지 내며 잠이 든 녀석을 무릎 위에 눕혔는데 근처에서 공 차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뒤뜰에서 공을 차는 녀석들이 보였다. 나는 김준면을 힐끗 보고 고개를 들었다.





"야."





그러자 녀석들이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다행히 1학년들이었다. 뭐, 1학년이 아니었어도 그다지 상관은 없지만 선배가 아닌 게 조금 다행이었다. 





"다른 데 가서 차."





혹여나 공이 날아와 김준면이 깰까 봐 걱정됐다. 나를 알아본 녀석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이내 사라졌다. 뒤뜰은 다시 조용해졌다. 시선을 내려 김준면을 보았다. 잘 자네. 잠이 오냐. 하여튼 진짜 이상한 녀석이라니까. 이 학교에, 아니 이 세상에 너보다 이상한 애는 또 없을 걸. 









2. 그 봄의 우리

준면 외전 / 과거 이야기 (2)





"추워?"





두 손으로 팔을 감싸자 오세훈이 날 보며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더니 한 곳을 가리켰다.





"저기까지 뛸 수 있겠어?"

"저기까지? 왜?"

"춥다며."

"응."

"가자."





내게 손을 내민 오세훈을 따라 또 얼떨결에 손을 잡았다. 우리는 비를 뚫고 녀석이 가리킨 곳까지 뛰었다. 그 곳은 명품 가게들이 즐비한 5번가였고, 오세훈은 그 곳으로 나를 데리고 왔다. 그 중에서 한 매장 안으로 들어왔다. 구찌 매장이었다. 여기에 왜 들어온 건지 의아해하는데 오세훈은 직원과 자연스럽게 영어로 대화를 했다. 그러다 뒤를 돌아보더니 내게 손짓을 했다. 





"이리 와."

"어? 어어..."





비를 피하러 여기까지 왜 온 건가 싶었다. 뭐지?


하지만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오세훈은 내게 코트를 사주었다. 거기에 자기 코트까지 하나 산 녀석은 긴 장우산도 집어 들었다. 나는 직원이 코트를 입혀주는 걸 가만히 받다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옷 사게?!"

"춥다며."

"아니... 그렇긴 한데...!"





하지만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이건 너무 비싸잖아!' 라고 하기에 오세훈은 우리나라에서 손꼽는 재벌 중 한 명이었다. 끄응. 재벌 놈들이란.







3. Ready, set, go!

세훈 외전 / 세아의 체육대회





그렇구나- 하고 답한 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괜찮아! 다시 사랑하면 되니까!"

"그치. 싸워도 다시 사랑하면 되지."

"아빠."

"응?"

"그러면은 아빠랑 선생님한테도 곧 애기가 생겨?"





잠깐 물을 마시다가 하마터면 뱉을 뻔 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응? 왜, 왜?"

"선생님이 그랬어. 엄마랑 아빠가 서로 사랑해서 우리를 낳은 거라고."

"아... 그렇지."

"선생님이랑 아빠도 서로 사랑하니까 곧 아이를 낳는 거 아니야?"

"어... 우리는 그러지 않기로 했어."

"왜? 그럴 수가 있어?"

"응, 그럴 수 있어. 선생님이랑 아빠는 세아라는 딸 한 명이면 충분해서."

"그치만 나도 동생 갖고 싶은데."

"동생 갖고 싶어? 꿀꿀이 있잖아."

"꿀꿀이씨는 동생이 아니잖아. 나보다 음... 구십삼 살이나 많다구."





김준면, 애한테 뭔 얘길 한 거야.





"에이, 안 되겠다. 그럼 준호랑 내가 애기 가져야겠다."





또 물을 뱉을 뻔 했다. 도무지 물 마실 틈을 주지 않는 아이였다. 나는 이마를 짚으며 아이가 생기는 것에 대해 어떻게 얘기하면 좋을 지 고민하다가 결국 관두었다. 이건... 조금 더 큰 후에 얘기하도록 하자.









4. 토끼의 호수

준면 외전 / 세아의 입학식 그리고 여름 휴가





입학식이 열리는 학교에 도착하니 학부모들이 많았다. 학부모들을 위한 자리에 앉아 있는데 그런 우리 옆에 누군가가 앉았다. 고개를 돌리니 준호의 부모님들이었다. 





"어, 세아 주치의 분 맞으시죠?"

"아, 네. 안녕하세요."





다른 분들은 나를 세아의 주치의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항상 세아를 따라 다녀도 다들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준호의 부모님들과 악수로 인사를 나누었다. 오세훈도 마찬가지로 인사를 하고 각자 자리에 앉았다.





"아휴, 이번에 세아랑 준호랑 반이 나뉘었더라구요."

"예, 그렇습니다."

"세아가 서운해 하지 않던가요?"

"전ㅎ..."

"아유, 그럼요. 세아가 엄청 서운해 했어요."





무슨 소리냐는 듯 바로 대답하려는 오세훈의 허벅지를 살짝 치고 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으이구, 딸 바보, 딸 바보.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입학식이 시작되었다. 1학년 아이들이 곧이어 줄지어서 들어왔고, 우리는 그 중에서 단번에 세아를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가져온 카메라를 챙겨 세아를 열심히 찍었다. 줌렌즈까지 여러 개 붙여 찍고 있으니 꼭 포토그래퍼라도 된 기분이었다. 박수를 치던 오세훈이 내 쪽으로 살짝 몸을 기울였다.





"동영상도."

"알았어."

"저기 세아 얼굴 좀 더 클로즈업해서."

"응."

"세아 웃는다, 찍어."

"... 네가 찍어."





카메라를 내리고 녀석을 찌릿 노려보자 오세훈이 흠흠, 헛기침을 했다. 어휴, 이 딸바보를 어떻게 해야 하지? 지금도 이러면 나중엔 아주 업어 키우겠다.









5. 여름 안에서

세훈 외전 / 부산 출장 그리고...?





눈을 비비면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세아는?"

[학교 잘 갔지. 오늘 학교 음악 시간에 멜로디언 분다고 아침부터 뿌뿌거리면서 갔어.]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 어떤 그림일 지 머릿속에 상상이 됐기 때문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 섰다. 부산의 맑은 하늘이 펼쳐져 있는 게 꼭 그림 같았다.





"서울은 날씨 어때?"

[서울 좋지. 부산도 오늘 맑던데.]

"응, 날 좋다."

[점심에는 뭐 먹어?]

"경영진들이랑 먹기로 했어. 메뉴가 뭔 지는 모르겠네. 다 늙은이들이니까 그냥 한식 먹지 않을까?"





준면이가 웃음을 터트렸다. 나 역시 웃었다.





[늙은이들이 뭐야.]

"늙은이들을 늙은이들이라 하지 뭐라 그래, 그럼."

[어르신들이라는 좋은 표현이 있어.]

"그건 세아나 쓰라고 해."

[가만 보면 너 되게 싸가지 없어.]

"앞에서만 안 그럼 되는 거지, 뭐."

[보통은 앞이나 뒤나 똑같아야 한다고 가르쳐. 너 세아한테도 그렇게 말할 거야? 앞에서만 안 그러면 된다고?]

"틀린 말은 아니잖아."

[어휴, 이 아빠를 어쩌면 좋아?]





푸스스 웃음이 났다. 세아를 키우는 걸로 준면이랑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았다. 








6. 마지막 할로윈

준면 외전 / 세아의 마지막 할로윈





"근데 세아가 이제 할로윈에 안 놀겠다는데?"

"왜?"

"몰라. 이제 자기는 의젓한 아이니까 그런 거 안 놀겠대."





셔츠의 단추를 풀던 오세훈이 아, 하고 이마를 짚었다. 내가 모르는 뭔 일이 있었나?





"하여튼 노인네."

"응? 왜?"

"추석에 집 갔을 때, 한 소리 들었거든."

"누가? 세아가? 누구한테?"





스타일러에 오세훈의 코트를 걸다가 고개를 돌렸다. 오세훈은 셔츠를 마저 벗었다.





"노인네가 얼른 커서 아빠 사업 물려받으라고 했어."





오세훈이 말하는 노인네는 언제나 회장님이었다. 그러니까 오세훈의 할아버지이자 세아의 증조할아버지. 오세훈은 그 분을 항상 노인네 아니면 회장님이라고 불렀다. 그나마 회장님이라고 부르는 건 나름 존중을 할 때였다. 보통은 노인네라고 불렀다.





"그게 왜? 예전에도 그런 말씀 몇 번 하시지 않았나?"

"그리고 애처럼 굴지 말라고도 했거든."

"에에? 세아한테? 세아가 얼마나 의젓한데."

"그러니까. 그리고 애한테 애처럼 굴지 말라는 게 무슨 말이야. 내가 지한테 노땅처럼 굴지 말라고 하면 화낼 거면서."

"어휴, 진짜."





말을 듣다가 오세훈의 등짝을 한 대 때렸다. 옷을 갈아입으려다 내게 등짝을 맞은 오세훈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왜."

"할아버지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야."

"여기에 없잖아."

"그래도. 세아 앞에서도 그렇게 말하잖아, 너."





내 말에 오세훈이 입을 꾹 다물고 조용히 옷을 갈아 입었다. 나는 그런 오세훈을 뒤에서 꼭 끌어안았다.





"아무리 싫어도 세아 생각하면서 조금만 이쁘게, 응?"

"... 알았어."

"그리고 노인네라고도 부르지 마. 차라리 회장님이라고 불러."

"응."

"이렇게 말 잘 들으면서, 어? 왜 회장님 말씀은 그렇게 안 들어?"

"그 노인네... 아니... 맨날 짜증나는 것만 시키잖아."

"다 너 좋으라고 시키시는 거잖아."

"그게 싫다니까."





아이처럼 투덜거리는 모습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났다. 나는 오세훈이 샤워를 하러 욕실로 들어간 동안 갈아입을 속옷과 옷을 앞에 두었다. 








7. 꿀토끼

꿀토끼 외전 / 우당탕탕 한 가족





"아빠." 

"응, 딸." 

"선생님이 그거 다 하구 침실 등 갈아달래." 

"알았어. 선생님은 지금 뭐 하셔?" 

"TV 보는데?" 

"... 왜 자기가 직접 안 하ㄱ... 아니다. 아빠가 할 테니까 그냥 두라고 해." 

"응~! 꿀꿀이씨, 안녕~"       





그리고 이 집의 막내인 꼬마 아가씨의 이름은 세아야. 성은 뭔지 모르겠지만 아마 오세훈이라는 사람의 아기니까 오세아겠지? 그 꼬마 아가씨는 날 참 좋아해. 그런데 뭔가 이상한 게 있어. 꼬마 아가씨는 나한테 참 깍듯하거든. 이렇게까지 예의를 차릴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예의가 바른 편이야. 





"꿀꿀이씨. 오늘도 날이 좋아. 이따가 창가에 데려다 줄 테니까 바깥 구경도 같이 해요!"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어. 주인이 내 나이를 글쎄 백 살도 넘는다고 소개했지 뭐야? 인간은 거짓말을 하면 엉덩이에 뿔이 난다는데 아마 주인의 엉덩이에는 뿔이 오십 개쯤 나 있을 거야. 


아무튼 그래서 꼬마 아가씨인 세아는 날 참 좋아해. 내가 토끼 나라에서 온 손님이라 생각하는 것 같아. 물론 나는 정말 토끼 나라에서 오긴 했지. 그걸 어떻게 알아냈는지 모르겠다니까. 





"자, 다 했다. 가자." 

"응! 꿀꿀이씨, 이따 봐~" 

"준면아. 점심에 뭐 먹을까?" 

"나 오늘 칼국수 땡긴다~" 

"칼국수? 세아도 칼국수 좋아?" 

"응! 완전 좋아!"      





어쨌든 이렇게 우리는 한 가족으로 살고 있어. 내 주인인 김준면, 주인의 안사람인 오세훈 그리고 그의 딸 오세아. 거기에 나까지. 꽤 재미있는 가족 구성이지? 앞으로의 얘기는 더 재밌을 거야.









8. 열 개의 사랑

세아 외전 / 세아의 첫 데이트





메뉴판을 보고 있는데 준호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어요. 저는 크림 함박 스테이크를 가리켰어요.





"나는 이거 먹고 싶어."  

"그리고 또?" 

"또? 나 하나만 먹을 건데?" 

"두 번째로 먹고 싶은 거 없어?" 

"왜?" 

"그럼 내가 그거 시켜서 너 나눠 주게." 





왠지는 모르겠는데 저희가 대화하는 걸 듣고 선생님이 웃음을 꾹 참는 게 느껴졌어요. 왜 그럴까요? 아, 역시 준호가 또 귀여워서 그런 걸까요?





"너 먹고 싶은 거 먹어두 돼." 

"네가 먹고 싶은 게 내가 먹고 싶은 거야." 

"왜? 너 나 사랑해서?" 

"응, 나 너 사랑해서." 





선생님이 메뉴판으로 얼굴을 가렸어요. 아무래도 준호가 또 귀여워서 그런가 봐요.





"그럼 나는 소시지 볶음밥 먹을래." 





준호가 저를 이만큼이나 사랑하는데 저도 질 수 없죠. 아빠는 가끔 말해요. 제가 은근히 승부욕이 있다구요. 그럼 선생님이 또 말해요. 은근히가 아니라 대놓고 있다구요. 승부욕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을 승부욕이라고 한 대요. 저는 준호랑 대결이나 경쟁을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준호가 저한테 주는 만큼 저도 돌려주고 싶긴 해요. 그래서 소시지 볶음밥을 골랐어요. 왜냐하면 준호가 소시지를 무척 좋아하기 때문이에요.





"소시지 볶음밥? 알았어. 음료는 뭐 마실 거야?" 

"나는 딸기 에이드 마실래. 너는 키위 에이드 마실 거지?" 

"헉, 어떻게 알았어?" 

"왜냐하면 너는 키위를 좋아하잖아." 





준호가 좋아하는 걸 미리 알고 있어서 왠지 모르게 뿌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열심히 사랑하는 건 이런 기분인가 봐요.








9. 육아일기

세훈 외전 / 육아일기





아이가 오이를 안 먹어서 걱정이다. 오이 하나 정도는 안 먹어도 영양에 전혀 문제없다는 게 준면이의 입장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편식하지 않는 어른으로 키우고 싶기 때문이다. 준면이는 억지로 먹이려 드는 게 더 아이의 정서와 교육에도 좋지 않다고 말한다. 당연히 나도 억지로 먹일 생각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아이가 가리는 음식은 없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오이로 만드는 요리를 연구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오이를 거부하지 않고 맛있게 먹일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다. 전문 셰프의 도움도 받아 여러 요리를 만들어 보았지만 여태 성공한 건 단 하나도 없었다. 공모전이라도 열어서 아이가 거부감 없이 먹는 오이 요리를 만드는 사람에게 포상금이라도 줘야 할까 싶다. 


아, 괜찮은 생각인데? 그룹 내 공지를 한 번 돌려봐야겠다. 푸드 계열사에서는 제법 괜찮은 아이디어가 나올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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