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남자가 있는데
w.래용





나도 모르게 커플링이 자리 잡은 왼손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손바닥 안에 찝찝하게 땀이 맺혔다. 앞에 선 그가 내 왼손을 내려다 보더니 또 상처 받은 얼굴을 했다. 더이상은 안될 것 같았다. 보란듯이 손을 들어 올려 반지를 보여주곤 다시 힘없이 툭 떨어트렸다.


"보다시피 애인이 있네요..."


작게 더한 한숨을 알아챘을까? 그랬으면 좋겠다는 못된 감정이 슬그머니 기어들어왔다.


"...친하게 지내는 것도 안될까요?"

"...네."

"......."

"그건 제가 안될 것 같아서요."


또 다시 묘한 표정의 그가 내게 한발짝 다가온 순간 카페문이 열렸다.


"사장님!"

"아..유진아.."

"어...이야기중이셨구나."


예쁘게 생긴 여직원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이름이 유진인가보다. 반짝거리는 그녀의 눈동자가 나와 그를 번갈아 보더니 곤란해하길래 짜증나서 홱 뒤돌아 섰다.


"들어가보세요."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지만 뒤돌아 보지 않았다. 여기서 끊지 않으면 내가 한발짝 더 다가갈 것 같았으니까. 한걸음 한걸음이 이렇게 무겁게 느껴질 수 있을까? 군대에서 행군했을 때보다 더 무겁게 느껴진다.

놓치면 분명 후회하겠지...그런데, 형이. 내겐 형이 있는데. 난 진짜 나쁜새끼가 분명하다.

형과 헤어져야 할까, 그런 생각이 들었으니까.

방금전까지도 봤던 강다니엘의 얼굴이 선명하니까.

그의 향수 냄새가 미치도록 좋았으니까.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신발을 벗을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그 자리에 서있었다. 손에 쥔 핸드폰에서 카톡 알람이 울렸다.


진우형

[회식자리 왔어 걱정 말고]

[보고싶다 사랑해]


"하아............"


한숨이 절로 흘렀다. 답장할 생각도 못한채 그자리에 주저 앉아 빙글빙글 도는 것 같은 머리를 짚었다.



#



- 어..지훈아 형이 과음을 해서 상태가 영 아닌데..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잠을 설친 탓인지 나도 과음한 것처럼 컨디션이 영 꽝이었다. 그냥 맘편히 내일보자고 말한 뒤에 전화를 끊었다. 사실 나도 형의 얼굴을 보면 죄책감으로 표정관리가 안될 것 같기도 하고. 형의 얼굴을 보면서 그를 떠올릴 것 같기도 하고. 이래저래 마음이 불편했으니까.


침대에 누워 베개에 고갤 푹 묻었다가 다시 옆으로 돌려 핸드폰을 쳐다봤다. 얼추 점심시간이 다 되어 간다. 굶주린 배를 뭐라도 채워야 할 것 같아서 밍기적 밍기적 침대에서 일어났다. 간단하게 세수랑 양치만 하고 지갑과 핸드폰을 챙겨 두꺼운 후드를 뒤집어썼다. 


커피 마시고 싶은데 강다니엘씨가 있는 카페를 갈 수는 없으니 좀 더 걸어야겠다. 운동하고 좋지 뭐.


뭐, 뭐, 뭔데?


건물 입구에 길다란 인영은 이리 봐도 강다니엘. 저리 봐도 강다니엘.당황한 나는 뒤돌아 다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지만, 위로 올라가버렸네. 하하하. 시발.


"지훈씨-"


못봤길 바랐는데 그 긴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와 등뒤에서 날 부른다. 등골이 오싹하다. 와, 차라리 귀신의집을 가는게 덜 오싹하겠다.


"제가 잠 한숨 못자고 생각해 봤는데요, 대체 친하게 지내면 왜 안되는건지 도저히 납득이 안돼서요."


답답한듯 다다다 쏘아붙이는 그의 말을 듣고 뒤돌아 섰다. 괜히 화가 나서, 아니 나도 너무 답답해서 조금 찡그린 얼굴로 그를 올려다 봤다. 날 내려다 보는 그의 눈빛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조금 울컥했다.


"그러면...지훈씨가 안될 것 같다는 말이면."

"........"

"그런 뜻이면."

"......"

"저 기다릴게요."


심장이 미친듯이 쿵쿵 뛰었다.


"천천히 마음 정리하고 와도 돼요."

"........."

"........"

"...점심..먹었어요?"

"........아니요."


내 말에 슬픈 표정의 그가 고갤 가로저었다.


"같이 점심 먹으러 가요."



#



멀리 가기에는 너무 대충 나와서 건물 1층에 있는 큰손갈비탕에 들어갔다. 어색하게 마주 앉아 시선을 마주치기가 겁나서 컵에 물을 따르고 수저를 놓고 괜히 티슈로 테이블 위를 닦았다.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나를 그가 빤히 바라 보고 있는게 느껴져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만 좀 훔쳐 볼래요?"

"..훔쳐 본 거 아닌데요."

"......"

"대놓고 본 건데."


장난스러운 말투로 씨익 웃는데 나도 모르게 같이 웃어버렸다. 허탈하다. 이렇게 웃는 모습이 보고 싶었으면서, 이 얼굴이 그리 보고 싶었으면서 왜 그렇게 피했지?


"그래요. 강다니엘씨 말대로 친,"

"다니엘."

"......"

"성 빼고 다니엘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래요. 다니엘씨. 다니엘씨 말대로 친하게 지내요."

"와- 정말요? 지훈씨 번호 주세요."


번호라.....

형이랑 있을 때 연락이 오면 어떡하지? 그 생각 부터 난 건 왜일까. 그냥 친하게 지내기로 한거고 아직은 친한사이일 뿐인데. 역시나 내 감정이 그냥 그런 사이가 아니길 바라서겠지.

멀뚱 멀뚱 그가 내민 핸드폰을 바라만보고 있으니 다시 힘주어 내 앞으로 조금 더 들이밀었다.


"...제가 먼저 안할게요..지훈씨가 편할 때 연락 줘요."

"아.."

"기다리는 입장에서 그정도는 감수해야죠."


눈치챘구나.

또 상처 받은 그의 얼굴이 괜찮은척 웃어보인다. 미안한 마음에 아랫입술을 꾹 깨물다가 그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받아 들어 번호를 입력해 전화를 걸었다. 주머니 속에서 내 핸드폰이 진동했다. 괜히 아무렇지 않은 척 물을 한 모금 삼킨 뒤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런 내 옆모습을 그가 흘끔 거리는게 느껴진다. 훔쳐 보지 말랬더니 저런다. 귀여워서 미쳐버리겠다. 하. 나 어떡하냐 증말.


"갈비탕 나왔습니다."

"아, 저쪽에 먼저 놔주세요."


어차피 똑같이 먹을 텐데 그런다. 날위한 사소한 배려도 너무 좋았다. 형은 어땠었지? 생각했다가 지금 무슨 말도 안되는 비교를 하는 건지 소름이 끼쳤다. 형 생각을 떨쳐내려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저 이 시간에 지훈씨랑 여기 있는 거 안 이상해요?"

"아!...카페. 쉬는 날이에요?"

"네. 지훈씨 때문에요."

"네? 진짜요?"

"하하..놀랐어요?"


놀라 눈을 크게 떠 깜빡이니 그가 귀여워 죽겠다는 얼굴로 날 바라봤다.


"지훈씨 번호는 모르고, 꼭 하고 싶은 말은 있고, 얼굴도 보고싶고."

"......"

"그런데 지훈씨는 저를 피해다니고. 오늘 직원도 휴무여서 그냥 닫아버렸어요."

".....직원이라면..그 여자 직원 말하는 거죠?"

"네. 유진이."


참나. 어마어마하게 다정하시네. 유진이? 유진이? 아, 왜이렇게 질투가 나지?


"유.진.이라는 분이랑 엄청 친하신가봐요?"

"네?"

"둘이 일하면서 그렇게 즐거워 보일 수가 없던데요?"

"어...유진이가 들어오고나서 지훈씨가 카페를 온 적이 있던가요?....."


아. 시발...이놈의 입방정. 지나가다가 몰래 훔쳐 본 건데.

귀까지 새빨개진게 느껴진다. 다급히 갈비탕 국물을 퍽퍽 퍼먹었다. 그런 나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하던 그가 슬그머니 웃었다. 미친...쪽팔려.


"저기요, 빨리 먹고 가죠."

"밥만 먹고 가려구요?"


그가 아쉬운 얼굴로 날 봤다.

아니 나 슬리퍼 끌고 나왔다구요. 누구 꼬실려고 작정하고 멋있게 하고 나오신 강다니엘님과는 지금 비교된다구요.

괜히 슬리퍼 안에 자리 잡은 발가락만 꼼지락댔다.


"아..약속..있으시구나."


크나큰 오해십니다.

그의 태평양 같은 어깨가 힘없이 축 늘어졌다. 숟가락으로 갈비탕 국물을 휘적거리는걸 보다가 너무 귀여워서 웃음이났다.


"없어요 오늘. 어제 회식했는데 술병났나봐요. 그래서 내,"

"아아아- 그런 tmi 사양할게요."


듣기 싫다는 듯 눈을 찡그리고 고갤 가로 젓던 그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형 얘기를 꺼낸 내가 실수한 거긴 하지만 질투하는 그의 모습까지 귀여워 보이면 심각한거겠지. 귀여워서 웃었더니 그가 날 흘끔 보더니 아, 웃지마요. 그러면서 왼손으로 자기 얼굴을 가려버린다. 큼지막한 손에 작은 얼굴이 다 가려졌다.


"..하아..웃으니까 더 예뻐..."


저기요. 중얼거리는거 다 들리거든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빨개지는 느낌에 헛기침을 해댔다. 심장은 미친듯이 날뛰고 밟아야하는 브레이크는 고장난듯 급발진을 했다. 그런데, 멈추고 싶지 않았다.


타이밍도 참...꼭 이럴때 전화가.

그것도 형의 전화가.


"......"

"받으셔도 돼요."


망설이는 날 보고 그가 괜찮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어..형."

- 지훈아..집이야?

"어?...아 밥먹으러 잠깐 나왔어."

- 혼자?

"어어..집 밑에..형 괜찮아?"

- 누워서 쉬고 있어.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 했어. 밥 먹고 집에 갈거지? 어디나가지마..불안해.

"...응 집에 바로 들어갈거야. 걱정말구. 목소리 안좋다. 푹 쉬어."


전화를 대충 마무리하고 그의 얼굴을 봤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눈치를 봤다.


"다 먹었으면 갈까요? 데려다 줄게요."


웃고는 있었지만 그의 얼굴은 매우 슬퍼보였다.


#


집에와서 강다니엘 카톡 프사만 들여다 보며 토요일을 보냈다. 정말 그는 그의 말처럼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카톡을 할까, 전화를 할까. 수도없이 고민했지만 결국 하지 못했다. 형은 하루종일 잔건지 저녁 늦게서야 내일 보자며 연락을 해왔다.

그리고 일요일에 형과 만났다.

잠은 안잤다.

일부러 피곤하다는 핑계를 댔다.

웃던 다니엘의 얼굴이 자꾸만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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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편도 빨리 써볼게요! 댓글 하트 구독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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