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지, 설아야, 할미 품에 안겨볼까?"

"할미……"

"옳지. 착하다."


김옥자는 제 품에 안기는 어린아이를 꼭 끌어안으며 등을 토닥였다. 겉보기에는 3~4살쯤. 척 봐도 아이가 입기엔 커보이는 크림색 원피스에 휘어감긴 채 아빠를 찾으며 울먹이고 있었다. 아이는 <영유아부실>에 붙어있던 '추설아'의 사진과 똑같은 얼굴이었고, 눈매며 콧대가 아버지인 추민섭을 쏙 빼닮았다. 그래서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아이가 바로 <미네르바영화관 영상점>에서 사라졌던 추민섭의 딸, 추설아고─ 자신은 드디어 은혜를 갚을 수 있는 '좁은길'에 올라섰다고.


─실종자 무사합니까, 주임님?

"네, 네. 괜찮아요. 겉보기에… 상처는 없어요. 좀 지쳐있긴한데, 아마 아버지가 없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탓인 거 같네요."

─알겠습니다. 그대로 탈출 진행해주십시오.

"알겠어요. …자, 설아야. 할미랑 아빠 보러 가자. 아빠~"


아빠를 보러가자는 말에 활짝 웃는 설아를 내 새끼처럼 어르며 자모실의 안으로 걷다보면, 통신기 너머에서 작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안도한 뉘앙스의 한숨이라, 정승대 부장이 이 조사 내내 느꼈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는 걸 짐작해볼 수 있었다. 물론 그 걱정의 절반쯤은 김옥자 자신의 탓임을 알기에 미안한 마음도 들었고. 


반드시 찾겠노라 다짐했던 규현이가 머리와 발목만 돌아온 후, 센터는 규현이의 장례를 치르고 온 제게 우회적으로 퇴사를 권유했다. 나가려는 사람도 어지간해선 억지로 붙잡아앉히는 센터의 만성적인 인력부족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일이었고, 그만큼 김옥자를 살리고자 하는 현장조사팀의 의지가 강했다는 것을 증명했다. 연세도 있으신데, 이만큼 하셨으면 충분히 애쓰셨어요, 주임님. 돌아가서 자신의 삶을 살아주세요. 사장님도 저희도 모두 그러시길 바래요. 서 팀장 역시 퇴사면담에서 그리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듣고 순순히 물러설 자신이 아니었다. 남편이 실직하고 가세가 기운 뒤, 연고도 없던 부산으로 내려와 아득바득 허드렛일 도우며 모은 돈으로 시장 한복판에 옷가게를 차렸고, 장사 초에 시장 토박이들에게 받았던 괄시며 텃세를 모두 꿋꿋하게 견뎌내고 시장의 또다른 터줏대감으로 자리잡았던 '독종' 김옥자가 아니었던가. 젊은이들의 우려와 달리 김옥자는 아직, 더, 멋지게 해낼 자신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받은 은혜는 반드시 받아야하는 것이 김옥자의 73년 평생의 철칙이었다. 그래서 몇 번이고 반복되었던 퇴사권유를 번번히 고사했다.


센터에 와서는 보여준 적 없는 고집에 정승대를 위시한 많은 사람들이 당혹해하면서도 그녀를 설득하려 시도했으나(심지어 병상에 누워있어야할 추민섭 대리마저도 휠체어를 타고 왔다) "받은 은혜를 갚겠다"는 자신의 의지 앞에서는 두손두발 다 들고 물러났다. '그' 정승태마저도 "할머니 절대로 무리하지 마세요, 아셨죠? 정 안되면 우리 써먹어요. 아유, 나는 맘이 약해갖구 울 옥자 할무니 아픈 거 못 봐!"하는 너스레를 끝으로 더이상 퇴사를 권유하지 못했으니 알만했다. 완고하게 모든 권유를 뿌리치던 김옥자는 어떤 얼굴을 했더라.


"아… 여기구나."


상념에 잡혀 걷다보면 커튼이 보였다. 조심스럽게 한 손으로 걷으며 안으로 들어서자 지침서에 써있는대로 작고 낡은 나무문이 하나 나타났다. 김옥자는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달달 외웠던 지침서의 내용을 떠올렸다. 분명 이 안으로 들어가면 통신이 잘 안된다고 했던가. 한 손으로 설아를 안은 채 통신기 버튼을 눌러 호출하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정 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뇨, 다른 건 아니고 이제 나무 문 안으로 들어갈거라, 통신이 잘 안될 거 같다고 말씀드리려고요."

─ …아아…

"지침서는 모두 숙지하고 있으니까 걱정 말아요. 탈출하는대로 연락할게요."

─ 네. 사람의 귀환을 기다리겠습니다.


굳이 두 사람이라고 강조해주는 마음이 고마워 작게 웃으면, 정 부장은 웃음을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지 잠시 말이 없었다가 "무언가 더 조언이라도 해드리고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제가 겪었던 일들 중 설명드릴 수 있는 부분은 이미 지침서에 적혀있어서요. 하지만… 현장이 현장인만큼 돌발상황이 없으리라고는 장담 못하겠습니다. 그래도 상정범위 내일 가능성이 높으니, 평소처럼 침착하게 대처하시면 괜찮을 겁니다." 하고 조언을 해주는 것을 끝으로 통신을 끊었다. 아들이 아직 살아있었다면 제게 이런 식으로 잔소리를 했겠지 싶어 괜히 품에 안긴 채 잠든 설아를 한번 힘주어 안았다가, 깜빡 깰새라 조심히 고쳐안고서 나무 문을 열었다. 과연 지침서에 적혀있던 대로 안에 들어가자마자 불쾌한 찌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통신이 뚝 끊겼다. 각오했던 바라 놀라는 대신 숨을 한 번 몰아쉬고 몇 걸음 더 걸어가면, 이내 시야가 거대한 강으로 가득 찼다.


"여기가 요단 강……"


어찌나 맑은지 찬란하기까지 한 푸른 강물은 소리도 없이 유유히 흐르고 있어 김옥자는 잠시 넋을 놓았다. 그러고보면 어릴 적 자란 동네에도 이런 강이 있었다. 어린시절 마땅한 놀이터가 없어 동네친구들과 강가로 가서 재첩을 따느니 송사리를 잡느니 하며 놀기를 반복하니, 어느새 크고 깊은 강도 집 앞마당처럼 익숙한 놀이터가 되기 마련이었다. 옥자야, 옥자야, 이 가시내 또 고기 잡으러 갔나. 놀더라두 밥이나 묵고 놀아라. 어여 집에 온나. 아부지도 기다리신다. 귓가에 그리운 어머니의 목소리가 메아리 쳐 저도 모르게 홀린듯이 다가가 강물에 손을 뻗으려는 순간, 무언가를 느낀 듯 품에 안긴 설아가 칭얼거리며 몸을 뒤채기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내 정신 좀 봐. 미안해, 설아야. 할미가 정신이 없었어."


몸을 가볍게 해야한다는 류의 충동을 불러일으킨다는 건 적혀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인간의 추억을 미끼로 삼아 홀린다는 기록은 없었다. 돌아가면 이 현상에 대해서는 보고해야겠다. 그리 다짐하며 한 손으로 제 뺨을 조금 아플 정도로 짝하고 친 옥자는 조사용 사원복이나 특수화 착용에 문제가 없는지 가볍게 체크한 뒤, 설아를 꼭 안은 채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맨정신으로 강에, 그것도 어린아이를 안은 채 들어가는 것이 꼭 자살이라도 하는 모양새라 마음 먹기 쉽지는 않았으나 이제 와서 못하겠다고 꽁무니를 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흡."


신발이 강물에 닿으면, 살에 직접 닿은 것도 아닌데 심장에서부터 싸한 감각이 퍼졌다. 이런 곳에 흐르는 강물이니 멀쩡하리라는 기대는 안했지만, 각오했다고 한들 불쾌한 싸늘함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장 발을 빼고 물러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꾸역꾸역 앞으로 나아가자, 지침서에 쓰여져있던 대로 바닥이 자연스럽게 낮아지며 걸을수록 몸이 강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강물이 가슴께에 이를 쯤해서 품에 안은 설아를 들어올리며 숨을 가득 들이마시자, 기다렸다는 듯이 단숨에 바닥이 꺼지더니 금방 온몸이 강에 가라앉았다. 설아가 빠질까 걱정되어 벌이라도 서는 듯이 번쩍 들어올린 두 손만 물이 묻지 않았고, 설아는 조용하게 잠들어있었다. 지침서에 따르면, 이것이 『물의 세례』의 시작이다.


'설아만은 돌려보내야해. 설아만은……'


저 자신에게 타이르듯 몇 번이고 속으로 되뇌며 눈을 질끈 감은 채로, 김옥자는 천천히 걸음을 앞으로 향했다. 유속은 빨랐지만, 힘을 주어 버티면 넘어지지 않을 정도라 견딜만 했다. 묵묵히 앞으로 걷다가 몸이 어디론가 쏠리는 거 같으면 그 느낌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직진했다. 그러다보면 숨이 턱턱 막혀오고, 들어올린 채인 팔이 아프기 시작했는데 신기하게도 괴롭지는 않았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어둠 속에서 제 어린 시절이 선연하게 떠올라서였을까.




어린 김옥자는 수영을 잘했다. 자수도 잘 놓았다. 무엇이든 꾸미고 화려하게 만드는데 재주가 있었다. 그러나 그 시절의 여자애들이 그러했듯이, 그런 재능보다는 건강해서 아들을 잘 낳을 상인 것이 김옥자를 인기 있는 신붓감으로 만들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김옥자의 부모님이 무남독녀 외동딸을 그 시절 치고는 아껴서, 좋은 신랑감을 찾아주려고 노력했다는 점이었다. 김옥자의 부모님이 노력한 끝에 찾은 신랑감인 주해군은 서울에서 태어나 조실부모하여 큰아버지댁에 얹혀살러온 청년이었다. 부드러운 서울말씨와 햇빛에 타지 않은 하얀 피부,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손에서 떨어질줄 몰랐던 '릴케'니 '괴테'니 하는 어려운 이름들이 즐비한 시집들이 그를 아름답게 치장했다. 김옥자가 밭일을 하느라 흙투성이가 된 손을 앞치마에 닦고 있거나, 물고기를 잡느라 물에 불어 주름진 손을 꾹꾹 눌러 말리고 있을 때, 그런 자신를 먼발치에서 지켜보던 주해군은 이따금씩 저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얼굴을 붉히며 참, 청명하게도 웃었던 것이다.


연애결혼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던 시대, 주해군과 김옥자는 그렇게 서로 '적절한 거리'를 둔 채 감정을 헤아렸고, 어른들의 주선으로 금방 결혼식을 올렸다. 서울에서 온 문학청년과 촌뜨기 계집애의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결혼은 이웃동네까지 입소문을 타서, 구경 온 하객들이 꽤나 많았던지라 양측 집안에서 손님 대접에 진땀 좀 뺐다지.


결혼하고도 한동안 처가살이를 했던 주해군은 자신의 장기를 살려 서울에 본사를 둔 모 신문사에 기자로 취직했고 김옥자도 주해군을 따라 서울로 상경했다. 그 사이 눈부시게 발전한 서울은 촌사람이었던 김옥자에게 너무나 눈부셔서, 지금도 김옥자에게 서울에 살던 시절은 꿈만 같이 고운 날들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꿈이라도 언젠가는 깨듯이, 김옥자의 짧은 서울생활도 주해군의 실직과 함께 끝이 났다. 서울에서도 제법 이름난 신문사였던 주해군의 직장은 그 이름값을 하려는듯 주해군을 비롯한 직원들에게 내부의 정치질(소위 "누구 라인"인지가 중요시 되는)과 외부의 압력("윗분"들의 입맛에 맞는 기사를 쓰라는 식의)을 동시에 가했고, 릴케와 괴테를 사랑하는 문학청년은 그걸 버텨낼 재간도 담력도 없었다. 누구의 라인에도 들지 못한 주해군은 보기좋게 정리해고 대상자가 되었고, 지금 그만두면 한 달 급료는 챙겨줄테니 얌전히 그만 두라는 부장의 강권에 못 이기는 척 사직서를 냈다고 했다.


퇴직 사실을 알리며 멋진 남편이 되어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남편에게 화를 내기에는 김옥자에게 아직도 주해군은 저와 눈이 마주치면 새하얀 목덜미까지 붉히며 청명하게 웃던 소년이었어서, 김옥자는 당장 다음 달부터 똑 떨어질 생활비 걱정을 밀어둔 뒤 그이를 안고 괜찮다며 한참을 달랬더랜다.


김옥자가 주해군의 성품을 좋게 보았던 상사와 아직 여력이 남았던 처가의 도움으로 부산에 재정착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2달 뒤의 일이었다.




"푸하…!"


갑자기 강바닥이 솟아오르며 머리를 밖으로 꺼내주기에, 김옥자는 급하게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눈을 깜빡였다. 물이 줄줄 흘러내려 잘 보이진 않았지만 얼추 강의 3분의 1은 건너온 거 같았다. 양 손으로 받치고 있는 설아 역시 별 이상은 없는 듯했다. 깊이 잠들었는지 그저 가끔 "아빠……"하고 잠꼬대를 할 뿐인지라, 김옥자는 손의 위치를 조금 조정한 뒤 앞으로 걸음을 내딛었고 강바닥은 다시 가라앉았다. 귀에 물이 들어차며 먹먹해질 쯤이면 지루한 순례의 걸음은 다시 나아가고, 오래된 영화처럼 멈추어있던 김옥자의 과거도 다시 재생된다.




어렵게 정착한 부산에서 가장이 된 것은 김옥자였다. 주해군은 첫 직장에서의 경험이 트라우마로 남아 재취직하기 어려움을 솔직하게 고백했고, 대신 김옥자가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기쁘게 돕겠다고 했다. 매달 꼬박꼬박 생활비를 받아 살림을 꾸리는데 익숙했던 마님 김옥자는 상황에 빠르게 적응했다. 이제 안방마님이 아니라 가장 노릇을 해야할 때라는 결론이 나오자, 김옥자는 처가에서 보내준 돈과 상사가 알려준 연줄을 이용해 자신이 꾸준히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했고, 고민을 들은 상사의 연줄은 시장 장사를 권했다. 김옥자가 패션감각과 장사감각이 있다며 소정의 권리금만 받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 시장의 옷가게를 빌려주겠다는 솔깃한 제안이었다.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김옥자는 그날부터 인형에 눈 달기, 신문지 배달하기, 파출부 따위의 허드렛일을 닥치는대로 했다. 급여의 반을 떼서 꼬박꼬박 모았다. 자연스럽게 집안 살림은 주해군의 몫이 되었다. 처음에는 난색을 표하던 문학청년은 날이 갈수록 살림실력이 늘었다. 요리만 빼고.


각설, 마침내 권리금이 모이자 김옥자는 부산 모 시장 한켠에 『릴케 의상실』이라는, 옥분이네니 희정이네니 하는 구수한 이름들 사이에서 유독 튀는 이름의 옷 가게를 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체 무슨 생각이었나 싶다. 그냥, 옷 가게 이름을 볼 때마다 제가 사랑하는 남자가 웃는 걸 보고 싶었던 거 같다. 


어쨌거나 연줄의 말대로 김옥자는 패션에서도, 장사에서도 탁월한 센스를 자랑했다. 주변 상인들의 텃세에도 눈 하나 깜짝 않는 강단, 좋은 원단이나 옷을 놓치지 않고 따내는 담력에 처음 오는 손님은 없어도 다시 안 오는 손님은 없게 만드는 싹싹한 접객태도까지 모든 것이 『릴케 의상실』을 유명하게 만들었다. 외지에서 온 가시나가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던 채소가게 이 사장도, 저런 이상한 이름으로 퍽도 장사가 되겠다며 혀를 차던 분식집 강씨 할매도 김옥자를 외지 가시나가 아니라 우리 식구, 미쎄쓰 옥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장사를 시작한지 딱 2년만의 일이었다.


서울에서 살 때처럼 환상적이진 않아도 살맛 나는 나날이었다. 살맛이 나다보니 아들도 태어났다. 우째 배가 바가지 엎어놓은 거 같더니 첫 번에 아들이고. 미쎄쓰 옥 대단하데이. 외국 물 좀 먹었다는 다방집 마담언니가 깔깔 웃으며 그리 말했다. 주해군으로 말할 거 같으면, 어찌나 감격했던지 "정말 고생했다, 고생했다 옥자야." 하며 펑펑 울어서 시장식구들이 저러다가 개구리 눈 되겠다며 놀릴 지경이었다.


늦둥이로 얻은 아들 원극은 심성은 아빠를 닮고 강단은 엄마를 닮게 자랐다. 어릴 때도 예민한 사춘기 때도 억척스럽게 시장에서 옷 파는 어머니와 뒤에서 뒷바라지하는 아버지가 부끄러울만도 한데, 한 번도 그런 내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잠 자고 쉴 시간을 쪼개 가게에 출근해서 무거운 것들을 번쩍 번쩍 들어옮겨주고는 했다. 원극이 니는 참말로 효자데이. 나라에 말해가 효자문 세워줘야하는 거 아이가? 강씨 할매가 그렇게 말하면 원극은 에이 별 것도 아닌디요, 하고 까까머리를 벅벅 긁었고 해군과 옥자는 서로를 바라보며 자식 잘 둔 부모들이 그러듯이 뿌듯하게 웃고는 했다.


애를 낳으면 세월이 살 같이 빠르게 흐른다더니 정말이었구나. 제 눈에는 아직도 오뎅 하나에 기뻐하던 어린애 같던 원극이 결혼하고 싶다며 여자친구를 데려온 날 김옥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김계현입니더. 원극 씨랑 교제한 지는 이제 4년 됐고예. 원극 씨한테는 두 분 말씀 많이 들었어예. 자기가 인생에서 제일로 존경하는 분들이라꼬예. 통통한 체격에 수더분하게 생긴 아가씨는 조근조근 말하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 침착함에 첫눈에 마음이 갔다. 전생에 무슨 인연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사지멀쩡하고 착하고 부모님 잘 모시는 효녀니 결혼을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사돈댁도 마찬가지였는지 결혼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결혼식날 큰절을 올리는 아들과 며느리를 품에 안아주며 잘 자란 자식을 떠나보내는 일은 슬프기보다는 기쁘다는 것을 알았다.


결혼 5년 째에 선물처럼 규현이 찾아왔다. 계현의 품에 안긴 채 응애응애 우는 갓난쟁이는 온통 새빨간데도 제 아빠와 엄마를 반씩 닮아있어서 생명의 탄생이 이렇게 신비롭구나 생각했다. 아기가 태어난 후로 집안은 더더욱 화목해졌다. 금방이라도 싸울 것처럼 분위기가 날카로워졌다가도, 규현이 웃거나 우는 소리 한 번이면 언제 그랬냐는듯이 사르르 풀렸다. 모두 규현의 손짓 발짓 한 번에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그런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어린아기들이 흔히 앓는다는 감기 한 번 없이 규현은 무력무럭 자랐다.


이때는 정말이지 모든 것이 완벽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옷가게는 여전히 성업 중이었고, 원극은 대기업에 취직해 아빠 노릇도 자식 노릇도 잘하고 있었고, 계현은 규현이를 돌보는 틈틈히 부업으로 초벌번역 일을 하며 돈을 저축하는 지혜로운 엄마이자 며느리였다. 해군은 술이 늘긴 했지만 건강했고, 옥자도 옷 가게를 같이 일하는 직원에게 물려줄까 고민은 했지만 여전히 건강했다. 주씨 일가의 행복은 이토록 단단하게 쌓아올려져 있어서 감히 그 누구도 깨트리지 못하리라 믿던 시절이었다.


어리석게도, 모든 불행은 늘 가장 행복할 때를 노려 닥쳐오는 법인줄을 그 시절의 김옥자는 미처 몰랐던 것이다.




"허억, 헉, ……"


강바닥은 그 사이 두 세번쯤 위로 올라왔다가 꺼지길 반복했다. 자신이 버틸 수 없을 시점을 기가 막히게 알아채선 올려보내주는 느낌이었다. 너는 더 오래 고통받아야한다는 것처럼 일부러 목숨을 연장시키는 느낌이 섬뜩했다. 올라올 때마다 들어올린 팔에 슬슬 감각이 사라지고 있음을 자각하게 되어 어떤 의미로는 더 지치기도 했다. 그나마 이리 비틀 저리 비틀하면서도 반 넘게 건너 온 것이 기적이었다. 한 가지 다행인 건, 물이 흘러내려 흐린 시야에도 강 건너편의 땅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가면 돼. 자신에게 다짐하듯 그리 중얼거리면서, 옥자는 지나온 강바닥에 내버려진 제 추억을 새삼 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지금 자신은 추억이 아니라 미래를 이어가고 있었으니까. 어차피, 모든 것이 끝나면 질리도록 주워담을 과거였다.


"설아야, 할미가 꼭 아빠한테 보내줄게."


팔을 조금 내렸다가 퍼뜩 올린 채 발을 내딛으면 강바닥이 기다렸다는듯이 서서히 아래로 꺼져갔다. 그 바람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옥자는 계속 말했다.


"그거 아니? 할미한테는 지금 설아만한 손자가 있었거든. 규현이라고 하는데……"


규현의 이야기를 꺼내자 별안간 강의 유속이 빨라졌다. 예상 못한 바는 아니었기에 옥자는 이를 악물고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하게 강을 나아가며 속으로 말을 이었다. 죄책감 탓에 급해진 유속은 강물이 마치 저를 갈가리 찢어발기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아픈 줄은 몰랐다. 아들과 딸 같던 며느리, 그리고 손자를 먼저 떠나보낸 후로 늘 느끼던 감각이라 새삼스럽게 고통스럽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정말 제 엄마아빠를 쏙 빼닮은 착한 애였단다. 엄마와 아빠를 창졸간에 잃고도, 그 어린 것이 세상에, 할미한테 그러더구나. 자기는 파워레인저가 될 거라고. 엄마아빠처럼 남을 구하는 사람이 될 거라고……




주해군과 김옥자의 자랑스러운 아들과 며느리고 주규현의 하늘과 땅이었던 주원극과 김계현은 한날한시에 함께 죽었다. 눈길에 미끄러진 트럭을 피하려고 급하게 핸들을 꺾었다가 덩달아 미끄러지며 가드레일을 뚫고 암벽에 처박혔다고 했다. 사고 원인인 트럭 운전사는 살았는데 그걸 피하려던 주원극과 김계현은 죽었다. 그들의 유일한 아들, 4살이 된 주규현만 남긴 채로.


며느님께서 사고가 나는 순간 손자 분을 꽉 끌어안아서 대신 충격을 다 받아주셨어요. 이만하길 기적입니다. 사고소식을 듣고 진둥한둥 달려들어온 주해군과 김옥자에게, 정확히는 시신을 확인하고 무너지는 주해군을 부축해주며 의사가 침착하게 설명했다. 주규현은 제 몸에 제가 깔려 오른팔이 골절된 것 외에는 외상도 내상도 없다고 했다. 김계현이 죽고 나서도 규현을 끌어안은 채 모든 충격을 대신 받아낸 덕이었다. 안 그랬으면 규현도 같이 죽었을 거라고, 차분히 덧붙이는 설명에 김옥자는 울어야할지 웃어야할지 몰라서 그저 입만 벌린 채 붕어처럼 뻐끔거리기만 했다. 


제몫까지 울어주려는 듯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아들의 시신 위에 엎어진 채 통곡하는 주해군을 부축할 동안에도, 온전한데가 없는 며느리의 시신을 천으로 덮어달라 부탁할 때도, 급한 골절수술을 마치고 나온 규현이 깨기를 기다릴 동안에도 그저 멍했다. 그리고 긴 기다림 끝에 깨어난 어린 것이 작은 팔에 깁스를 한 채로 병실 TV에서 나오는 만화를 보며 "나는 엄마아빠처럼 사람 구하는 파워레인저할래, 할머니. 나는 파워레인저 레드야!" 하고 까르르 웃었을 때가 되서야, 처음으로 울었던 것 같다.


주원극과 김계현의 아들 주규현은 자기가 한 말은 꼭 지키는 착한 어린이라서, 갑자기 괴물 밖에 없는 곳에 납치되고도 저보다 어린 아이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던졌다.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위험한 함정에 뛰어들기를 망설이지 않는 파워레인저 레드처럼.




그런 아이를 내 부주의로 잃었으니, 내 죄를 어떻게 다 셀 수 있을까. 그깟 코인노래방 하루쯤 늦게 데려간다고 큰일이 나지도 않을텐데 왜 나는 규현이의 떼를 견디지 못했을까. 다 내가 못난 탓이다. 규현이 괴이현상에 휘말린 이후로 김옥자는 아이의 손을 마지막으로 잡고 있었던 제 오른손을 내려다보며 하루에도 몇번씩 그리 생각했다.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주해군처럼 하루종일 술만 들이키는 것으로밖에 버티지 못할 거 같았다.


규현이 실종된 날, 주해군은 처음으로 김옥자에게 소리를 지르며 분노했다. 눈 뜨고 손주를 잃어온 죄인이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김옥자는 그 분노를 고스란히 견뎠다. 차라리 자신에게 욕해주는 이가 있어 다행이란 생각을 했던 거 같기도 하다. 분노가 가라앉고 나서는, 함께 규현을 찾아 뛰고 또 뛰었다. 경찰들은 아이가 유괴되었을 가능성을 이야기했지만, 코인노래방에 들어가는 짧은 1초 사이에 아이가 아예 증발해버린 미스테리를 풀진 못했다. 몸값을 요구하는 전화같은 것도 없었다. 범인도, 방법도 모호한 이 상황에 경찰은 두 손을 들었고, 단순가출이라는 택도 없는 소리를 하며 날뛰는 노부부를 내쫓았다.


발품을 팔아 규현이를 찾아다닌지 꼬박 2달 째부터 주해군은 가망이 없다며 주구장창 술만 마시기 시작했다. 알콜 중독이 찾아온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고, 먼 옛날 김옥자에게 수줍게 웃어주던 문학청년은 자취를 감추고 불콰하게 취한 채로 잃어버린 가족들을 찾아다니는 주정뱅이 노인만 남았다. 김옥자 역시 술만 안 취했지 사정은 비슷했다. 잃어버린 것의 흔적을 붙잡은 채 죽지 못해 살아가기를 1년 여, 우연히 소문 하나를 듣게 되었다. 갑자기 증발한 사람들을 찾아준다는 신기한 회사, '이상평복관리센터'에 대한 것이었다. <下편에서 계속>




한달만에 왔는데 분량조절을 실패했습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각월교회 막간의 첫 타자는 보시다시피 김옥자 명예주임님의 이야기입니다. 애착이 가는 캐릭터라 이렇게 분량이 대폭발을……🤦‍♀️


연말연초가 제일 바쁜 시즌이라 어쩔 수 없이 연재 주기가 늘어지고 있으나… 下편은 최대한 빨리 올려보겠습니다.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합니다.🙇‍♀️🙇‍♀️🙇‍♀️



나폴리탄이 사람잡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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