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의 만남은 특별하지 않았다. 특별했다면 진의 개인적인 상황만이 조금 특별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일의 시작부터 보려면 둘의 만남이 있기 전 한 달로 가야한다. 간추려 말하자면, 한 달 전의 진은 순식간에 백화점에서 엄청난 금액을 썼다. 그 금액을 사용했다는 확인 문자는 진의 부모님에게로 갔고, 진은 그날부터 용돈이 끊겼다. 진은 하루 이틀정도 대충 버티다가 사흘 째 되는 날, 결국 폭발했다. 다 자고 있을 한밤중에 진은 당장 차를 타고 부모님의 집으로 갔고, 예고도 없이 소리를 바락 지르며 둘을 깨웠다.

한밤의 소란에 진의 부모는 정신도 없는 채로 한 달 동안 제 손으로 직접 돈을 벌면 카드를 돌려주겠다는 합의를 했다. 아니, 해야만 했다. 진이 그냥 카드를 빼가려던 것을 겨우 막은 것이었다.


그래서 진은 난생 처음 알바라는 걸 했다. 아버지 친구 분이 소개해 준 카페 알바였다. 프렌차이즈 카페였고, 사람이 많았다. 진은 일을 아주, 매우, 정말로 편하게 했다. 일이 진에게 쉬워서 그랬다기보다는 같이 일하는 직원들이 진에게 일을 주지 않았다.

하루, 이틀은 진에게도 일을 시켰고, 알려 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 짧은 기간 동안 진이 깨먹은 식기가 쓰레기통을 채우고도 남을 정도였다. 식기를 그렇게 깨니 주문이라도 받게 하자, 해서 주문대 앞에 세워 두었더니 진이 주문 업무를 본 그날에만 컴플레인이 수도 없이 들어 왔더랬다. 결국 진은 가끔 매장 내 테이블 청소정도만 맡게 되었는데, 그 마저도 잘 하지 않았다.


진이 일을 그만 두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날, 매장에 레이가 들어 왔다. 여느때와 같이 진은 한쪽 구석에서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평소라면 누가 들어오든, 종소리가 나든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었을 진이지만, 우연인지 필연인지 문이 열리며 종소리가 나자 무심코 고개를 들어 열린 문을 쳐다보았다.

모델인 줄 알았다. 깔끔하게 뒤로 넘긴 머리와, 새하얀 코트, 그리고 얇으면서 탄탄하고 길쭉한 몸, 그리고 매장 안에 들어와서도 벗지 않는 선글라스. 진은 뭔가에 홀린 듯이 계산대 앞으로 가서 섰다.


주문하시겠어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

아이스요? 지금 밖에 꽤 춥던데, 아이스 맞으세요?


레이는 진의 말을 그냥 무시한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진은 그런 레이의 태도에 헛웃음을 쳤다. 난생 처음 받아 보는 냉대였다. 처음에 느꼈던 그 오묘한 감정은 다 잊은 채로, 진은 제 마음 속에 레이를 ‘날 무시한 새끼’로 저장했다.


카드 주세요. 결제해야 되니까.


진이 레이 쪽으로 눈을 치켜떴다. 레이는 매장 안에서도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는데, 그 선글라스 너머로 눈이 흐리게 보였다. 진은 그 눈을 보고 무심코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목 위로 잔뜩 올라온 그 타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눈이었다. 살기나 광기가 차들어 있기는 했으나 진에게는 그냥 예쁜 눈이었다. 그런 살기나 광기는 여태 많이 봤던 터였다.

둘은 아무런 말도 없이 한참을 그렇게 보고만 있었다. 둘의 그 몽롱한 시선을 깬 건 다른 직원이었다. 직원은 레이에게서 얼른 카드를 받고서는 결제를 끝냈다. 그 잠깐 사이에 진은 옆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레이와 진은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자유롭게 풀린 밝은 금발이 눈에 밟혔다. 진과 눈을 마주치며, 레이는 제 주문을 받을 때에 성질을 잔뜩 부리며 받던 것을 생각했다. 쟤는 여기서 돈 벌려고 일하는 게 아니구나를 단번에 알아챘다. 돈 많은 새끼들이 하는 서민 체험, 그런 건가, 하는 생각이 들자 레이는 헛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빨리 나왔고, 레이는 커피를 받자 바로 뒤를 돌아 매장을 나갔다. 레이가 뒤를 돌 때, 레이의 흰 코트가 크게 펄럭였고 진은 그 안을 얼떨결에 보았다. 허리춤에 뭐가 있었다. 진의 직감이 그게 뭔지 머릿속에서 잔뜩 떠들고 있었다. 칼이었다.

진은 그날 그 칼을 보고 하루 종일 내 목숨은 여기서 끝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도 낮의 그 남자를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바람에 결국 카페에서 한 달을 더 일하게 되었다.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레이가 다녀간 날 다음부터 진은 그래도 그전보다는 일을 열심히 했다. 이제는 커피도 내릴 줄 알게 되었다. 여전히 식기를 깨기는 했지만 그전보다는 덜 깼고, 들어오는 컴플레인의 수도 그전보다 줄게되었다. 그렇게 며칠을 꽤 일하다 보니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레이가 이 카페에 아주, 정말, 매우 자주 온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저 인간은 저를 죽일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레이는 평소처럼 그 카페에 아주 자주 갔다. 갈 때마다 항상 똑같던 카페였지만 요 며칠 새 자꾸만 저 밝은 금발이 눈에 밟혔다.


커피 어때요? 내가 내린 건데.


레이가 매장에서 커피를 마시던 적이 있다. 레이는 그냥 별것도 안 하면서 창가를 내다보고 있었다. 유니폼 차림을 한 진이 레이에게 다가오더니 자연스럽게 맞은편에 앉아 턱을 괴고 물었다. 진의 말에 레이는 커피를 한 모금 더 삼켰고 진을 뚫어지게 보았다. 씁쓸한 맛이 났다.


써.

커피가 쓰지 그럼, 안 써?


레이의 말에 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시 계산대로 가 입이나 비죽 내밀고 있었다. 레이는 그래도 먹을 만하다는 말을 씁쓸한 커피와 같이 삼켜 버렸다.

진은 레이가 매장에서 커피를 마실 때면 항상 가서 맛이 어떠냐고 물었다. 그 말에 레이는 항상 쓰다고만 답했지만, 진은 항상 물었다. 그리고 진이 쓰다는 대답에 자리를 뜨는 바람에 여태 레이가 진에게 먹을 만하다고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진은 총 두 달의 알바를 마치고서야 카드를 돌려받았다. 마지막 출근 날, 레이는 카페에 오지 않았다. 진은 다시는 못 볼 흰 코트를 생각했고, 그 허리춤의 칼을 생각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진은 일을 그만둘 때 느꼈던 공허함과 무력감은 다 잊고 쇼핑을 잔뜩 했다. 밤늦게까지 쇼핑을 했고, 집에 갈 때에는 항상 택시를 잡았다.

그날도 진은 쇼핑을 잔뜩 했고, 택시를 잡으려 기다리는 중이었다. 택시를 부르려 휴대폰을 꺼내려는데, 주머니가 허전했다. 휴대폰이 없었다. 반대쪽 주머니에도, 다른 쇼핑백을 아무리 뒤져도 없었다. 시발. 정말 시발이었다.

그래도 진은 이 주변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를 대충 알고 있었고, 어느 길이 빠른 길인지도 알고 있었다. 보통 지름길이 그렇듯이 좁고 후미진 골목이었다, 그 길도. 오렌지 색 가로등이 달빛 역할을 하는 그 골목을 신발을 질질 끌면서 지나가는데 앞에 웬 남자 셋이 있었다. 걸음걸이가 이상한 게 술에 잔뜩 취한 것 같았다.


아.... 오늘 일진 왜 이러냐.

아가씨, 어디 가요? 이 밤에.

너희가 무슨 상관이세요. 그냥 술 처마셨으면 들어가서 조용히 잠이나 처주무시지.


진은 걸어가면서 답했고, 남자들도 그 뒤로 진을 따라오며 추근덕댔다. 술냄새만 나는 게 아니라 구역질나는 냄새도 났다. 진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로 걸었다. 갑자기 그 중 하나가 진의 앞을 막아섰다. 순식간에 진은 셋에게 둘러싸이게 되었다.


어디 가냐고. 같이 놀자, 아가씨.

아이, 씨발....


앞을 막아선 남자의 말에 진은 들고 있던 쇼핑백들을 죄다 바닥에 내던졌다. 그러더니 남색 하이힐을 신은 그 발로 앞에 선 남자의 사타구니를 갈겼다. 남자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는 쓰러졌고 진의 뒤를 둘러싸고 있던 남자들이 욕지거리를 하며 진의 팔을 뒤로 잡았다.

레이는 아까 전부터 그 상황을 보고 있었다. 아까 전이 언제냐 하면 진이 그 골목을 들어갈 때다. 간만에 보는 금발이 반가워 뒤를 밟았다. 한참을 뒤를 밟는데 웬 남자 셋이 나오더니, 곧 한 명이 쓰러지고, 곧 진의 손이 뒤로 잡힌 것도 보았다. 도와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생각도 할 거 없이 레이는 당장 그쪽으로 걸어갔다. 안 그래도 긴 다리인데, 큰 보폭으로 걸으니 금세 그 무리에 닿았다. 순식간의 그들의 뒤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뭐 하는 건가.


낮은 목소리가 소름 끼쳤다. 그 소름 끼침은 남자들을 도망가게 했으며, 진은 얼굴에 웃음을 잔뜩 띄게 했다. 순식간에 남자 셋은 사라졌고, 진과 레이만이 그 골목에 오렌지 빛을 잔뜩 받으며 서 있었다.


언제 도와 주려나 했네.

.... 알고 있었나.

그렇게 큰 사람이 따라오는데 어떻게 몰라?


진은 깔깔거리며 레이의 손에 제 쇼핑백을 쥐었다. 레이는 영문도 모른 채 자연스레 쇼핑백을 받아들었고 멀뚱히 걸음을 떼는 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진이 독촉하는 소리가 들렸을 때야 겨우 발걸음을 떼었다.


오빠, 이름이 뭐야? 앞으로 우리 자주 좀 보자.

레이. 그런데 자주 보자는 게 무슨 말인가.

뭐, 내 보디가드 같은 거나 좀 해 줘. 쇼핑도 같이 좀 하고.


레이는 진의 말에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제가 여기서 거절을 하든 어쩌든 결국에 저는 저 애와 엮일 거라는 생각이 섞인 한숨이었다.


사실 그 몽롱한 눈빛서부터 느낀 이상한 필연 같은 것이 결국에는 저 애와 저를 엮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필연 같은 것은 평생 못 느낄 것 같은 레이는 본능인지, 그것 또한 필연인지 모를 무언가로 진과 엮이는 길을 택했다.

장르 부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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