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커가 붙었다. 웬만큼 뜬 셀러브리티라면 꼭 하나씩 있는 것이 스토커라지만, 이번에 얻어걸린 놈은 개중 최고로 악질인 놈이었다. 가볍게는 온 스케쥴을 쫓아다니는 것부터 시작해 심하게는 가택침입마저 감행하더니 얼마 전에는 왜 자기 사랑을 받아주지 않냐며 피로 쓴 편지와 함께 핏물에 전 동물 사체를 보냈다. 

일이 이렇게 되니 괜히 간섭받는 것을 싫어하는 노엘 갤러거를 아는 소속사로서도 더 이상 손 놓고만 있을 순 없다며 특단의 조처를 하기에 이르렀는데, 바로 그 특별한 대책이 지금 여기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인듯싶었다. 노엘이 인사할 생각도 못 하고 인상만 짜붓 찌푸리고 있자 그가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권한다.

"오늘부터 경호원이 될 겜 아처야. 만나서 반가워, 친구."

"…노엘이요. 노엘 갤러거."

…어째 뭘 할 거냐고 물어도 대답을 안 주더라니. 소속사의 일방적인 결정에 노엘은 괜히 성질이 불쑥 튀었지만, 나이 스물아홉이면 이게 이 사람의 잘못이 아닌 것 정도는 알 정도의 어른이다. 노엘은 불퉁해지려는 표정을 애써 진정시키고 손을 내밀어 악수했다. 그래 생각해보면 정말 경호원이 필요하긴 하다. 그 스토커 새끼가 다음엔 완전히 돌아서 칼이라도 들고 덤비면 뭐 어쩔 건데? 이 비슷한 말을 며칠 전 리암도 하긴 했다. 그러니까 여기서 나 혼자 이거 싫대 봐야 걔도 내 편 안 들어줄 거란 뜻이었다.

"그럼 오늘부터 내내 붙어있어요?"

"이따 집에도 같이 갈 거야. 담당 매니저한테 못 들었어?"

"아니 씨발, 내가 일곱 살짜리 애도 아니고. 아무 말도 못 들었는데요."

표정이 진짜 왕창 구겨져서 화난 부엉이처럼 변한 노엘을 보고 겜이 막 웃었다. 어째 그럴 것 같더라니! 그러면서 제집처럼 사무실 냉장고를 열어 맥주 두 캔을 꺼내 하나를 내밀기까지 한다. 차가운 맥주 캔이 살갗에 닿자 그제야 열이 좀 가라앉는 듯한 기분에 노엘은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하긴 이 사람 잘못도 아닌 거 빤히 알면서 괜히 성질부린 거지. 이쪽보다 못해도 열 살은 많아 보이는 연장자에게 보일 태도는 아니었다. 그것도 나 지키겠다고 온 사람한테 보일 꼬라지는 더더욱 아니지, 진짜 아니지.

그렇게 노엘이 성질을 죽이고 얌전히 카우치에 앉자, 맞은편 빈자리에 앉은 겜 아처가 자세한 얘기를 해주겠다며 가져온 서류 가방에서 웬 프린트를 내밀었다. 내 계약서라 원래 네가 볼 일은 없는데 설명이 안 됐다니까. 그런 부연설명을 들으며 건네받은 종이에는 웬 작은 글자들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노엘은 그걸 한두 줄 읽어보려다 빠르게 포기하고 내려놓는다.

"저 난독증 있어서 읽는 데 한참 걸려요. 그냥 말로 설명해줘요."

"그래? 뭐 대단한 게 적힌 건 아니고…."

보통 이런 얘기 들으면 불쌍하단 표정으로 쳐다보고 그러던데. 갤러거 형제의 어린시절 불우한 가정사는 데뷔와 함께 온 영국인들의 가십거리가 된 지 오래였고, 노엘의 난독증 얘기를 들으면 다 저 얘길 꺼내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이 서글서글한 인상의 경호원은 여기에 말을 덧붙이지도, 심지어는 뭐 가엾어하는 표정도 안 짓는다. 노엘은 좀 전보다는 더 그가 마음에 들었다. 

이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그냥 계약서를 부분부분 짚어가며 항목들을 읽어줄 뿐이지만, 노엘은 이미 그의 목소리마저 마음에 든 참이다. 나긋나긋하고 좀 졸리게도 들리는 목소리로 그가 긴 줄글을 읊었다. 오늘부터 콜린 머레이 아처는 노엘 갤러거의 경호 업무를 담당한다. 여긴 보안 관련 항목이고…, 계약기간은 삼 년으로 지정하되 계약 시작일부터 반 년간은 투어 일정 및 사생활을 포함해 24시간 일체 근무를…,

"잠깐, 잠깐! 그게 무슨 뜻이에요?"

뭐? 노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몰라서 묻는 거 아니다. 어이가 없어서 묻는거지. 방금 뭐라고?

"못해도 육개월은 같이 붙어 살라 그러더라고. 친구가 싫어할 것 같다고 나도 말은 했는데."

"그쪽은 그걸 좋다 그랬어요?"

"아저씨 이름은 겜이야. 어쨌든, 나야 돈만 더 주면 상관없다 그랬지."

너희 사장님은 잠깐만 봐도 걱정 많은 사람인 거 알겠더라. 돈줄을 위태롭게 둘 바에야 그냥 네 짜증 좀 들어주고 말겠다는 거야. 겜 아처가 푸근하게 웃는 표정으로 신랄한 말을 늘어놓으며 계약서를 다시 집어넣었다. 월급 주는 사람도 개의치 않고 일단 까는 행태에 노엘은 점점 그가 마음에 들고 있었지만, 어쨌든 같이 사는 건 좀… 너무 갔다. 심지어 오늘부터라잖아. 아무리 마음에 드는 사람이어도 처음 본 날 당장 룸메이트가 될 순 없다. 사람 사는 법이 다 그랬다.

이걸 전화로 한바탕 지랄할까 생각하던 노엘은, 그러나 때마침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매니저를 보고 모바일을 집어넣었다. 저 인간 저거, 슬그머니 눈치 보면서 들어오는 걸 보니 일부러 이야기 다 끝날 즈음 맞춰서 들어온 거다. 이쪽 성질머리 빤히 아니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 먼저 욕받이로 보내놓은 거지. 좀스러워서 소리를 안 지를 수가 없다.

"제임스!"

"사장님이 롤스로이스 사준대!!!"

근데 염병, 매니저가 먼저 선수를 쳤다. 노엘이 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뭐요?"

"경호원 붙이고 사는 조건으로…, 너 갖고싶다고 했던 거 있었잖아. 괜찮지 않아?"

걸어지게 한바탕 하려던 노엘의 입이 기적처럼 꾹 다물렸다. 찌그러진 애벌레같은 두 눈썹은 남들 겁 깨나 줄 법한 험악함이 있었지만, 벌써 노엘과 몇 년째 같이 시간을 보낸 매니저는 알고있다. 저건 고민하는 표정이다. 그것도 예스와 노 중 예스에 상당히 치우친 쪽의 고민을 하는 얼굴. 첫 앨범 계약 얘기가 나왔을 때에도 딱 저런 식이었으니까.

솔직히 운전도 못하면서 차에 왜 저렇게 집착하는지 모르겠지만, 제임스도 눈치라는 게 있기 때문에 그건 속으로만 생각했다. 어쨌든 뭘 더 말해보기도 전에 노엘이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에 근질거리는 입을 길게 참을 필요도 없었다. 노엘은 그래도 뭐가 좀 찝찝한데 하는 표정으로 퉁명스레 계약서 써요, 했고, 그 말을 들은 매니저는 일찌감치 준비해 온 계약서를 노엘에게 내밀었다. 노엘이 이번 일을 입 다물고 넘어가면 롤스로이스를 사주겠다는 짤막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걸 읽은 노엘이 진짜 어이없다는 티를 내며 아래 서명란에 서명한다. 아니 씨발, 여기까지 미리 다 짜고 저지른 일이란 말이야?

근데 여기서 제일 웃기는 건 가만히 이 상황을 지켜보던 겜 아처였다. 그는 롤스로이스-사줄 테니까-제발-참아-계약서에 마침내 싸인 한 노엘을 바라보며 '와, 노엘 좋겠네~' 하며 짤짤 박수를 치고 있었으니까. 딱 유치원에서 칭찬스티커 받아온 애를 대하는 그 모양이다. 심지어 좀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럼 그렇지."

"뭐, 뭐가? 서명했으니까 계약서는 가져간다?"

"나한테 멀쩡한 사람을 붙여줄 리가 없단 소리지. 가져가고 이따 사본 챙겨줘요."

노엘이 그새 마음을 바꾸기라도 할까봐 후다닥 계약서를 집어넣은 매니저가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저었다. 얼핏 옆을 흘끔대는 걸 보니 겜 아처의 눈치를 보는 것도 같았는데, 아무래도 그게 사실인 모양인지 결국 구구절절 말을 덧붙이고 있다. 아냐, 이상한 사람 절대 아냐. 그러면서 겜 아처를 굳이 옆에 모셔놓고 한다는 말이 대충 이랬다. 이 분 스카웃 하는 데 되게 힘들었고, 데려가겠다는 사람도 엄청 많아서 그 사람들 다 엿 먹이느라(뭐요?) 엄청 애먹었고, 특수부대 출신이시라 실력도 믿을 만하다고. 

노엘은 매니저 바로 옆에서 이 얘기를 죄 들으며 머쓱해하는 겜 아처의 표정이 오늘 본 것 중에 제일 재밌었다. 아무리 봐도 옆집 형이나 아저씨 같은 인상인데 특수부대에 있었다니 잘 믿기진 않지만, 계약서에 서명까지 하고 난 마당에 이제 와선 그게 사기여도 뭐 어떤가 싶다.

"알았어요, 제임스. 이게 나 엿 먹이자고 하는 짓 아니라는 거 나도 알거든요."

그래, 안다. 가택침입을 시도한 스토커 얘기를 듣고 리암 다음으로 가장 끔찍하게 이쪽을 걱정했던 것도 이 사람들이라는 걸 알긴 알았고, 노엘은 그게 고마웠다. 그 마음이 이렇게 급발진한 형태로 나타나서 좀 문제긴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 방법이 최선인 것도 같고. 

시계를 흘끔 쳐다 본 노엘이 더 얘기는 않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볼일은 이게 전부였던 것 같으니 그만 집에 가보겠다는 뜻이었다. 따로 말은 않았지만 매니저도 대충 눈치는 챘는지 데려다 줄까? 한다. 노엘은 오늘 택시를 타고 싶은 기분이었다.

"근처에서 점심도 먹고 가려고요. 밥 먹으면서 여기 이 사람이랑 얘기도 좀 해보고."

"내 이름은 겜이야."

"그……, 알았어요, 겜. 겜이랑 알아서 들어갈 테니까 제임스도 쉬어요."

노엘은 문 밖을 나서며 생각했다. 세상에서 제일가는 또라이와 형제로 몇 십 년간 지내온 경험에 근거해 장담컨대, 겜 아처도 진짜 멀쩡한 인간은 아닐 거다. 하지만 싫으나 좋으나 이 밴드에서 같이 부대끼고 지내기엔 그 편이 낫긴 했다. 게다가 노엘은 겜 아처가 마음에 들었다. 매니저는 제발 이 사람과 싸우지 말고 오래 가길 비는 눈치였지만, 이 이상한 아저씨를 오래 봤으면 하는 것은 노엘도 마찬가지란 뜻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길거리에 선 노엘이 자기가 아는 한 가장 브런치를 맛있게 하는 카페를 가리키며 말한다. 점심 제가 살 테니까 수다나 좀 떨다 들어가죠?

***

카페 안은 적당히 조용하고 적당히 소란스러웠다. 노엘 갤러거쯤 되는 셀러브리티가 들어오니 어느 정도 사람이 몰리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그러던 중 겜 아처가 몸으로 교묘히 노엘을 가려 숨기는 솜씨가 과연 보통이 아니었다. 어찌나 잘 하던지 좀 지나서는 노엘을 못 찾고 돌아가는 사람까지 생길 지경이었으니까. 그는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아주 잠깐 안을 훑어보고선 몸을 숨기기 가장 좋은 자리를 골라내기도 했다. 보오자아, 자리가…. 하는 퍽 아저씨 같은 소리를 내면서도 뽑아내는 결과물이 죄 납득이 가니 되레 멋있게 보이기까지 하더라.

노엘은 접시 위의 베이크드 빈을 스푼으로 가득 퍼 와앙 입에 넣고 씹다가, 앞자리에 앉아 진하고 시꺼먼 커피를 들이키는 겜 아처를 힐끔 쳐다본다. 아, 눈 마주쳤다. 그는 입 안 가득 밥을 욱여넣는 새끼고양이 보듯 노엘을 쳐다보며 씩 웃었다.

"많이 먹어. 잘 먹어서 보기 좋다."

"꼭 울 엄마같이 말하네."

"오늘부터 나랑 살 텐데, 엄마처럼 느끼면 편하고 좋긴 할 거야."

그리곤 자기 몫의 디저트로 나온 딸기 크림 쇼트케익을 노엘에게 밀어주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는 뭐 입맛이 없어서 지금 커피나 홀짝이는 게 아녔다. 왕창 나온 점심을 노엘보다 두 배는 빨리 조지고서 기다려주고 있던 거지. 신기한 건, 그렇게 식사를 빨리 하는데 게걸스럽거나 걸신들린 듯한 느낌은 전혀 못 받았다는 사실이다. 뭐 식사 예절이 왕실 권장 사양까진 아니었어도 되게 깔끔하긴 했으니까. 그래도 그렇게 밥을 빨리 먹으니 이유가 궁금하긴 했다. 뭐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말야.

"원래 습관이 그래요? 식사 빨리 하는 거."

"아무래도 느긋하게 식사할 분위기는 아니었거든. 총알 날아다니는 데서 먹는 걸로 꾸물거렸다간 밥 대신 욕이나 배부르게 얻어먹지."

주어가 빠져있었지만 그의 전 직장 얘기를 하는 것 같다. 그래, 특수부대에 있었다고 했지. 얘기를 들어보니 그리 쾌적한 직업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왜 그 일을 했냐고 묻자, 겜 아처가 뭐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대답한다. 돈을 많이 줘서. 아주 타당한 이유다. 하지만 그래서 노엘은 자연스레 그 다음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근데 왜 관뒀어요? 어디 다쳤어요?"

"친구는 궁금한 게 많네."

"아, 개인적인 일이라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요."

노엘이 그렇게 말하자 겜 아처가 또 웃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너 밥 먹고 있잖아. 그런 소리를 하는걸 보니 뭐 그렇게 비밀인 일도 아닌 듯 한데 왜 저렇게 의뭉스레 군담?

"뭔데요? 사람이라도 죽였어요?"

"그건 우리 일이었는데."

그 말을 하면서도 겜 아처는 여전히 잔잔하게 웃는 낯이었다. 노엘은 순간 목이 턱 막혀서 밀크티를 크게 세 모금 들이켰다.

"미안. 겁주려던 건 아니고."

"…겁먹은 거 아녜요. 그래서 왜 그만뒀는데요?"

거짓말이다. 사실 좀 겁먹었다. 하지만 노엘도 보통의 스물아홉 살짜리 청년은 아닌지라 뻔뻔한 낯으로 발뺌하자, 겜 아처가 아까 사무실에서 많이 봤던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저게 말하기 싫어하는 얼굴은 아닌 것 같고… 그럼 대체 뭐지? 그는 잠깐 침묵하다가 노엘이 포크를 들어 음식을 콕 찍을 즈음에야 슬그머니 눈치를 보면서 대답했다. 여기 음식 되게 맛있다~ 하는 것 같은 목소리로.

"새로 온 상관이 자꾸 자기 좆 빨아달라잖아. 싫다고 했더니 진짜 사지로만 돌리길래 관뒀어."

"……."

노엘이 먹던 소세지를 내려놨다. 말려줄 때 그냥 입 닥칠 걸….

***

이래저래 속 시끄러운 점심식사를 마친 노엘은 백화점에 들러 몇 가지 물건을 구매한 뒤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대단한 건 아니고, 집에 겜 아처가 쓸 물건들이 전혀 없어서 생필품들을 몇 개 샀다. 둘이 살 곳이 얼마 전 스토커에게 끔찍하게 시달린 뒤 급하게 옮긴 새 집이라 딱 한 사람 분 물건들만 있었던 탓이다. 심지어 침대도 하나뿐이어서 집으로 침대도 하나 주문했다.

물론 계산은 죄 노엘이 카드를 긁었고, 겜 아처는 그걸 미안해했지만 노엘은 그걸 모른 체했다. 아니 사실 아예 재미를 붙여 안 사도 될 것까지 왕창 쇼핑하고 왔다. 그가 쓸 파자마와 슬리퍼 세 켤레(털 달린 거실 슬리퍼와 욕실용 슬리퍼, 침실용 슬리퍼), 배스밤 여러 개, 하다하다 그가 잘 때 쓸 나이트캡까지 샀을 즈음 노엘은 결국 겜 아처에게 연행되어 쇼핑백들과 함께 택시에 타야 했더랬다.

"더 살 수 있었는데."

노엘이 현관문 앞에 서서 투덜거렸다. 양 손에 쇼핑백을 왕창 들고도 그런 소리를 잘도 한다 싶어 겜 아처가 웃었다.

"너 아저씨 놀린다고 그렇게 돈 쓰면 안 돼."

"아, 놀리긴 누가 놀려요? 다 필요하니까 샀지. 요즘 누가 나이트캡도 없이 잔대?"

"그만하고 문이나… 너 손이 없구나. 열쇠 어딨어?"

들고 있는 쇼핑백들이 워낙 많아서 건네받기도 번잡스러울 듯하고, 바닥에 놨다 다시 전부 집어 들기도 귀찮을 듯해 그냥 겜은 그냥 자기가 문을 열기로 했다. 노엘도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겜 아처 쪽을 향해 살짝 상체를 숙이며 대답했다.

"자켓 안주머니 어디 있을 걸요. 아마 왼쪽…, 없어요? 반대쪽에 있나?"

"여기도 없는 것 같은데… 아, 찾았다."

겜 아처가 환하게 웃으며 노엘의 품에서 집 열쇠를 꺼낸다. 열쇠고리에 새로 맞춘 열쇠가 똑같은 걸로 두 개 달려있었다.

"하나는 아저씨 가져요. 얹혀사는 게 아니라 아저씨 집이다 생각했으면 좋겠거든요."

이건 빈 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겜 아처도 그걸 알았는지 달리 따지는 말없이 순순히 고마워, 대답 하며 열쇠를 품에 넣는다. 문을 여는데 쓴 나머지 열쇠는 다시 노엘의 안주머니로 돌아갔다.

"별일 없이 육 개월 보냈으면 좋겠다. 그치?"

"그러게요. 아저씨가 그 야성적인 힘을 발휘할 일이 없었으면 해요."

"하하, 아까 겁먹었던 거 맞구나? 이제 안 그래."

"존나 아니거든요! 빨리 문이나 닫아요, 진짜."

쾅, 기름칠이 덜 된 뻑뻑한 문이 큰 소리를 내며 두 사람 분의 목소리를 잡아먹는다. 시끄러울 것 같던 겜 아처와 노엘 갤러거의 동거 첫 날은 의외로 제법 순탄히 지나가고 있었다.

***

아니다. 이게 근데, 전혀 순탄치 않았다. 

별일은 다음날 아침 노엘이 눈을 뜨자마자 장렬하게 터졌다. 그래 오늘은 스케쥴이 없는 날이었다. 그런 날은 보통 점심 전까지 아슬아슬하게 늦잠을 자곤 했는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자꾸 모바일이 울리더라는 거다. 것도 날이 밝자마자 문자며 전화를 가리지 않고 뭐가 자꾸 날아들었다. 아 씨발, 나 쉬는 날이라고!

노엘은 온갖 쌍욕을 삼켜가면서 그것들을 죄 무시하려고 노력했지만, 지치지도 않고 장장 삼십 번째 걸려온 전화에 그만 손을 들어야 했다. 성난 부엉이 닮은꼴을 한 락스타는 왕창 짜증을 내며 전화를 받았다. 반쯤 예상하긴 했지만 역시나 제임스였다. 그리고 제임스는 또 노엘보다 빨리 선수 쳐 딱 한마디를 했다. 노엘! 집 밖에 나오지 마! 진짜 절박하게 외치기에 노엘은 그 스토커가 기어코 문 밖에 닭 피라도 처발라 놨나 싶었다.

'뭔데 그래요? 스토커가 또 뭐 했어요?'

'스토커는 스토컨데, 이번엔 카메라 든 스토커야….'

그럼 그건 파파라치라는 소린데. 걔들이랑 엮여서 좋은 꼴 본 적이 없거든. 다년간 셀러브리티로 살아온 노엘의 감이 먼저 좆됨을 감지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데 그냥 가슴이 싸했다. 개운하게 잘 자고 일어났는데 공연 시작 시간에서 십 분이 지나있으면 꼭 이런 기분일 것 같았다. 

하지만 불안한 건 불안한 거고, 이게 대체 무슨 난리인지 확인은 해야 했다. 노엘이 일 층 현관을 확인하기 위해 일 층 계단참으로 내려갈 즈음 때맞춰 겜 아처도 올라오고 있었다. 한 손에 신문 한뭉치를 든 그는 노엘보다 조금 더 먼저 이 상황을 확인한 눈치였다. 노엘이 다 눌린 머리를 머쓱하게 매만지며 이게 다 뭐예요? 묻자 그는 말없이 창밖을 가리키며 노엘에게 들고 있던 신문을 꼭 들려줬다. 창밖은 기자인지 파파라치인지 카메라를 든 놈들이 진짜 시장통처럼 바글바글했다.

하여간 요약하자면 범인은 더 썬이었고, 대망의 주인공은 겜 아처와 노엘 갤러거였다. [노엘 갤러거는 게이인가? 연상의 남성 연인과 동거 시작해….] 오늘 아침 일찍부터 온 영국을 시끄럽게 만든 건 바로 이 싼 티 나는 기사 타이틀 한 줄이다. 그 아래 일 면의 반을 가득 채운 사진들 역시, 그래, 겜과 노엘의 사진이었다. 어제 쇼핑하고 현관 앞에서 조금 뭉갤 때 어디서 찍힌 모양이었다. 

근처에 카메라가 있는 것 같진 않았는데, 멀리서 찍은 건지 화질이 좀 떨어지긴 했지만 사람 얼굴을 확인할 정도로는 선명했다. 그리고 그 사진 안에서 겜 아처와 노엘 갤러거는 꼭… 야릇한 스킨쉽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겜 아처의 손이 슬그머니 노엘의 옷 안에 들어가 있었고, 노엘 갤러거는 그에게 상체를 기대 얌전히 안겨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겜이 노엘의 안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낼 때를 맞춰 찍은 사진 같은데 그 각도며 타이밍이 너무 절묘했다. 노엘이 봐도 스킨쉽하는 커플처럼 보이니 말 다했지. 

거기다 겜 아처가 노엘에게 열쇠를 받아, 하나를 자기 품에 넣는 장면까지 연사로 찍은 듯 주르륵 실려 있었다. 어렴풋한 악의마저 느껴지는 연출이다. 여기서 노엘이 미친 듯이 화를 내지 않는 건, 최소한 겜 아처의 얼굴에는 모자이크가 돼 있기 때문이었다.

노엘은 자기 때문에 잘못 없는 주변인들까지 남들 입에 오르내리는 상황을 진절머리 나도록 싫어했다. 제임스가 아침 일찍 전화를 건 것도 다 그걸 걱정한 탓이었다. 물론 셀러브리티로서 그런 일이 아예 없기를 바라는 건 지나친 욕심이라는 걸 노엘도 알긴 했지만, 그래도 이번 일은 좀 정도가 심했으니까. 얼마 안 있어 다시 전화를 건 제임스는 노엘에게 오늘 안에 정정 기사가 나갈 예정임을 알려주고, 이미 고소가 준비 중에 있다는 사실도 귀띔해줬다. 노엘은 저 새끼들 연말에 몬스터먼치도 못 사먹을 만큼 뒤지게 털어버리라고 대답했고.

"미안해요. 좀 더 조심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마. 내 얼굴은 8픽셀로 나왔는데 뭐. 우리 친구가 큰일이지."

"그래도요, 아 진짜, 씨발…."

"롤스로이스 받기 쉽지 않다, 그치?"

근데 겜 아처는 진짜 전혀 걱정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그는 자다 일어난 사람답게 엉망으로 뻗친 머리를 해가지곤 태평하게 하품만 몇 번 하고 말았으니까. 심지어 노엘을 옆구리에 가뿐하게 끼고 부엌이 있는 일 층으로 내려가기까지 했다. 그리고 뒤늦게 일 층 광경을 목격한 노엘은 당황으로 입을 헤 벌렸더랬다.

바깥쪽으로 난 창이란 창이 죄다 빈틈 하나 없이 틀어막혀 있었다. 심지어 현관문 위로 작게 난 투명 창까지 죄다 막혔다. 바깥에서 안을 들여다 볼 건덕지라곤 하나도 없는 훌륭한 엄폐였다. 잘 보니 현관문에 난 외시경까지 까만 덕 테이프로 막아놨고, 어제까진 못 보던 잠금장치도 몇 개 더 달려있다. 저건 언제 단 거야? 문에 뭔 짓을 하면 소리가 나야 하는데 노엘은 어제 아무런 소리도 못 들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 눈만 껌뻑이고 있으려니 겜 아처가 노엘 앞에 따뜻하게 탄 밀크티를 밀어준다. 딱 노엘 취향대로 탄 것이… 좋다. 만족스럽긴 한데.

현관 밖으로는 아직도 촤르르 흐르는 듯한 셔터소리들이 울려 퍼지고 있다. 여기 이 밀크티를 달콤하게 타는 남자와 스캔들이 난 덕분에.

"야아, 저걸 진짜 어쩌지?"

겜 아처가 자기 몫의 밀크티를 들고 자기가 단단히 막아둔 현관 밖을 구경하는 척 한다. 완전 남 일 얘기하는 것처럼 심드렁하고… 아니, 잘 보니 이 인간 멍 때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하도 태평해서 잔뜩 긴장한 채던 노엘도 덩달아 힘이 쭉 빠졌다. 

그래 하긴 걱정한다고 이 답 없는 상황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고. 현관 밖에서 계속 번쩍거리는 불빛들을 보고 있자니 어째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도 같다. 노엘이 맹한 목소리로 겜 아처에게 말을 걸었다.

"특수부대에서 배운 거 뭐 없어요? 이럴 때 쓸 만한 거."

"사람 안 죽이는 쪽으로? 없지…."

"뭐 그런 큰일 날 소리를."

겜 아처가 농담이야, 하며 웃었다. 진짜 농담 같지 않았다.

"큰일은 저기 밖에 벌써 났잖아. 다들 아침잠이 없나 봐."

"반은 아저씨 얘긴데 진짜 태평하다…."

심지어 어제 노엘이 사준 파스텔핑크색 파자마까지 입고 있어서 더 맥 빠져 보인다. 결국에 나이트캡은 안 쓴 모양이네, 그런 생각을 하던 노엘은 곧 자기한테까지 저 맹함이 옮은 것을 깨닫고 화들짝 놀랐다. 이거 옮는 건가? 근데 나쁘지 않다. 아까보다 훨씬 마음이 편했다. 계속 이대로 있어도 손해 볼 건 없지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둘은 완전 남 일 대하듯 데면데면하게 바깥 풍경을 바라보다가, 커다란 머그컵이 텅 빌 즈음에야 언뜻 정신을 차렸다. 이번에도 먼저 말을 꺼낸 건 겜 아처였다. 빈 컵을 싱크대에 갖다놓은 그가 정신 차려보라는 것 마냥 노엘의 뺨을 톡톡 치며 이렇게 속삭였다.

"들어가서 맥주나 마시자. 진짜 답이 없다, 애기야."

그리곤 냉장고에서 여섯 개들이 맥주 한 팩을 들고 먼저 안쪽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근데 방금 나더러 뭐라고? 겜 아처의 마지막 말을 몇 번씩 되새겨 봤지만, 암만 생각해도 저 인간이, 날더러 '애기야' 했다. 진짜 그게 맞았다. 장난스레 뺨을 톡톡 치던 그의 손에선 옅은 찻물 냄새와 시원한 스킨 냄새가 났고……,

"씨, 씨발, 나 미쳤나??"

노엘의 양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바야흐로 저 말도 안 되는 스캔들에 아주 쬐끄만 신빙성이 생기는 순간이다.

"애기야, 안 와?"

"그, 그렇게 부르지 마요!"

"대디 아직 기다린다~."

"아, 진짜 하지 말라고!!!"


변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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