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 리뉴얼 에피소드 다시 시작합니다! 꺄! 암구호로 시작하는 모험을 무척 좋아해요. 




야시장의 울긋불긋한 불빛은 눈이 내린 정월 거리를 비추어 등불이 아닌 곳도 붉게, 흰 눈도 주홍빛으로 차갑고 따스하게 반짝이도록 했다. 호객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리고 만두를 찌는지 국수를 삶는지 무럭무럭 김이 피어오르는 솥뚜껑이 어느 점포 너머에서 열리는 떠들썩한 광경에도 림은 놀라지 않았다. 일전에 융롱이 데려다 주어서 한 번 와 본 곳이었다.


그때는 무엇을 했더라. 시장에 자주 들락거리는지 융롱과 안면이 있는 상인들과 왁자하게 인사하고 간식을 얻어먹기도 했으며 별별 꼬치 구이나 야광주를 가지고 만든 신기한 장식물들도 구경했다. 야시장의 물건들은 하나같이 낮의 햇빛보다 밤의 불빛 아래에서 아름다운 것들뿐이었다. 혹은 그런 구경에 어느새 배가 고파진 사람들을 유혹할 수 있는 음식. 그러니 낮에 비단 가게였던 곳에서도 거울이며 구슬이며 장신구를 내놓고, 건어물을 도매하던 가게도 지금은 구운 어포에 술을 곁들여 팔고 있었다. 


지금은 혼자이니 그때처럼 신나게 떠들기는 어려울 것이되. 림은 숨을 쉬면 김이 호오 불어 나오는 겨울 바람 속에서 야시장을 두리번거렸다. 쓸 만한 장신구나 그 이외에도 선물이 있으면 융롱에게 사다 줄 셈이었다. 림의 발걸음은 넉넉하고 느긋했으며 추위 때문이든 옷차림 때문이든 종종걸음을 치는 여타 사람들과 달리 이 저자를 지금부터 둘러볼 셈이라는 의도가 확실해 보여 뭇 상인들도 함부로 그를 붙잡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변복했지만 은연중에 타고나 흘러나오는 군주의 위엄인지도 몰랐다.


산에서 살았다더니 림은 생각 이상으로 추위를 타지 않는 체질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겨우내 그저 날이 추우니 그러한가 보다 하고 화로와 갖옷을 껴안고 입고 지내던 림조차 새롭게 발견한 사실로서, 입동 무렵 황도의 대장군저에 내려와 지내기 시작한 림은 집안에서 부리는 사람들이 추위에 움츠러들고 거리에도 이전보다 다니는 사람이 적어진 동안 못에 풀어 놓은 물고기처럼 시내와 거리를 마음껏 쏘다니고 사람들을 만났다. 림은 대장군영에도 계속해서 드나들었고 융롱과 함께 병사들과 사담을 나누기도 했다. 영녕은 무예에 있어서 자신이 더 발전할 부분을 구했으되 황실의 사람으로서 행하고 받아야 할 예(禮)에도 능해서, 다들 범과 같은 군주의 재목이시라고 입을 모았다. 후계자가 될 일이 없다는 것은 그들에게 중요치 않은 듯했다.


"굳이 천자가 아니더라도 세상에는 통치자가 도를 다해야 할 곳이 많습니다. 군주께서도 나라를 위하는 충의를 마음에 품고 계시다면, 언제고 그 자질과 뜻을 발휘하실 때가 올 것입니다."


서 대장군은 바쁜 와중에도 영녕과 담소를 나누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리하여 영녕은 그 때부터 생각했다. 무엇을 할 수 없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황도에서 지내며 보고들은 바 소양과 태자는 황위 계승인이 있는 동기들끼리 생각 이상으로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소양공주가 자신에게 선물까지 주어 보냈던 것은 아무래도 고모인 천자가 자신을 안심하고 군주에 책봉했듯, 다툼의 가능성이 없는 인물이어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영녕은 했다. 


그러나 지금은 정월을 앞둔 즐거운 연말이지 않은가. 영녕은 한길로 빠진 생각을 도로 붙잡고 야시장의 거리를 둘러보았다. 설이 되면 영녕도 왕부로 돌아가 식구들과 함께 명절을 맞이할 것이었으나, 아직까지는 새해가 밝지 않았다. 오늘은 새해 전 서 가의 가족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연말연시에 아무래도 가장 바쁜 것이 궁궐의 병사들이며, 명망 있는 대장군가 사람들은 온갖 연회에 초청되어 불려다니기 바쁘니 동지를 전후하여 미리 본가와 분가, 방계 친척들까지 모여 근황과 담소를 나누는 자리를 만드는 것이 이번 대에서부터 생긴 풍습이었다. 당연히 융롱도 그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고, 영녕은 굳이 가족이 모이는 사석에 자신이 자리해 분위기를 어렵게 만들고 싶지 않았으므로 이렇게 홀로 외출을 나온 참이었다.


처음에는 연말 풍경을 둘러볼까 하다가 날이 저물면서 림의 걸음은 자연스럽게 시장 거리로 향했다. 아무래도 인적이 드문 천변이나 조용히 밥 짓는 연기를 피워올리는 민촌보다는 구경할 거리가 더 있었기 때문이었다. 토끼털로 목을 두르고 도타운 누비옷을 껴입은 림의 뺨도 발그레하게 빛나 밤의 불빛 아래 그 차분한 눈이 조금 더 생기있게 반짝이는 듯했다. 그래서, 적당히 한 바퀴 시장을 돌아본 참인데.  점찍어 놓은 가게들 중 어디로 갈까…….


…하고, 영녕이 고민하던 참이었다. 길가에 사람들 몇몇이 모여 수군거리고 있는 것이 그의 눈에 띄었다. 저도 모르게 그 쪽으로 발을 옮기며, 영녕은 물건뿐만 아니라 떠도는 말들에도 두루 관심이 많았는지라, 귀를 기울였는데…….


"…는… 겠소?"

"정월이 가까우니 … 불꽃놀이를 하겠지."

"그래도 강남까지 가려면 시간이 걸려. 단속을 … 방법이 ……."


영녕은 눈을 한번 빠르게 감았다 떴다. 이야기를 더 듣고 싶지만 자리에 멈춰서서야 말을 나누는 이들에게 의심을 살 것이 뻔했다. 영녕은 대화 옆을 자연스럽게 지나치면서 그 쪽으로 쫑긋 귀를 기울였다.


"일단 강남까지 … 면 천랑국으로는 쉽게 …."

"배를 준비할 터이니 , ……."


영녕은 고민했다. 이 사람들은 무언가 밀거래를 꾸미고 있는 듯했다. 영녕은 주위를 구경하는 척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자신의 키 높이와 거의 비슷한 좌판의 가벽을 발견하고 그 너머에 착 붙었다. 그리고 물건을 구경하는 척 하면서 허리를 숙였다.


"오늘밤 자시(子時) 초에 각다관(珏茶館) 진청루(珍靑樓)로 가게. 먼저 물건을 확인하고 있으면 내가 그 치들과 협상함세."

"얼마나 온다고 했소?"

"최소 황도의 불꽃놀이를 감당할 만큼은 되겠지. 크게 남는 장사가 될 테야."


눈앞에는 울긋불긋 등불에 비친 과일들이 광택을 입고 늘어서 있었다. 각다관 진청루. 영녕은 장소를 가만히 귀에 담았다.


"강남으로 가는 배는 달이 고요한(月悄悄) 밤이라. 마지막 세 자야. 알겠지?"

"알겠소."


오늘 밤 자시였다. 영녕이 셈하기로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암거래를 하는 이들은 정해진 시각에 정해진 곳에서 한번 만나면 또 다음 접선을 정하고 차례차례 전략적으로 움직일 테니, 실마리를 잡을 수 있는 곳에서 잡지 않으면 자취를 감추기가 쉬웠다. 그리고… 등 뒤로 수군거리던 이들의 그림자가 지나가는 것을 느끼는 영녕은 눈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그들이 취급하는 물건은 화약인 것 같았다. 정월 초하루 불꽃놀이에 사용되는 양으로 인해 느슨해진 단속을 이용해 물건을 옮긴다지 않는가. 화약은 하제국에서도 엄격하게 사용과 거래를 규제하는 품목 가운데 하나였다. 


오늘 자시, 시장 끄트머리에 있는 다관의 가장 높고 유명한 누대였다. 어쩌면 화려한 행사가 펼쳐지는 와중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이목을 도리어 피해 접선하고 말을 나누기도 좋을 것이었다. 영녕은 마음이 급해졌다. 화약의 사적인 융통은 대죄로 마땅히 관에 알려 붙잡아야 할 텐데 바로 지금이 아니면 그들을 쫓을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잠시 생각한 영녕은 북쪽으로 발을 옮겼다. 진청루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아무래도 알아 두어야 할 것 같아서였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은 눈을 쓸어내고 또 발걸음에 녹아내려 살짝 진 정도에 불과했지만 지붕 위나 건물 벽 근처에는 아직도 도탑게 눈이 쌓여 있었다. 영녕이 거리의 북쪽까지 다다라 고개를 들어 보니 진청루에는 붉은 등이 처마를 따라 몇 개나 밝혀지고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과연 연회인가. 


영녕의 문제는 이제 무슨 수로 저 연회가 열리는 누각까지 올라가 밀거래를 하는 이들을 찾는지였다. 어찌한다… 하다가, 영녕은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장신구 가게를 들여다보았다. 붉은 구슬이 달린 퍽 아름다운 머리장식이 높은 곳에 옥 비녀와 금장식과 함께 진열되어 있었다.


"선물을 하려고 하는데, 저기 붉은 구슬이 달린 장식 한 쌍을 주시겠소?"


비단 보자기로 포장을 해 달라는 주문도 잊지 않았다. 비단은 조각이 아니라 폭이 넓은 원단을 여러 번 접어 모양을 내고 매듭끈으로 마무리한 것으로서, 포장 값까지 하여 영녕은 적지 않게 장식의 값을 치렀다. 이윽고 한눈에 보아도 귀한 선물인 비단 보자기가 영녕의 손에 쥐어졌다. 털 목도리를 둘렀지만 겉옷은 눈에 띄지 않도록 짙은 색을 입은 영녕에게서 그야말로 눈에 띄는 물건이었다.


영녕이 산 머리장식은 실제로 그가 시장에 처음 방문한 목적과 같이, 융롱에게 어울릴 만한 것이라 여겨서 구매한 것이었으나 지나칠 정도로 화려한 포장은 이유가 좀 달랐다. 영녕은 이것을 구실 삼아 저 화려한 연회가 펼쳐지는 진청루에 오를 작정이었다.


다관의 현관으로 들어서자 손님이시냐고 묻는 점원에게 영녕은 천연덕스럽게 심부름을 왔다고 답했다. 그리고 누구의 심부름이냐고 들었을 때, 그는 아무렇게나 곧장 떠오르는 이름을 빌렸다. "자 공자님께서 보내신 선물을 전달하러 온 것입니다."


점원은 과연 납득한 것인지 영녕을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다관 1층은 영녕도 이전에 한번 와 본 적이 있는 곳이어서 익숙했다. 위층으로 가는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에도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문과 벽으로 공간이 따로 나뉘어 있는 다실들이 여럿 있는 층들을 지나 영녕은 음악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오는 누각으로 향했다. 계단을 물들이는 주홍색 불빛이 영녕의 발끝에도 다다랐을 무렵,


"누구를 찾으십니까?"


하는 질문이 영녕에게로 떨어졌다. 영녕은 올라오는 동안 줄곧 생각하고 있던 질문을 말했다. "혹 여기에 강남에서 오신 손님들이 있으십니까?" 


"강남에서 오신 분들이요? 있기는 한데……."


객을 응대하는 상대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누각에 앉아 있는 손님들 사이로 되돌아갔다. 얼마 있지 않아 나이가 지긋하고 상당히 깐깐해 보이는 중년 여성이 나타나 영녕에게 물었다. "무슨 일로 찾으시는가."


"되돌아가시는 배가 있다고 하여……."


상대는 눈썹을 한번 올렸다가 그대로 응수했다. 


"달 고요한(月悄悄) 밤에 누구를 찾고 있는지 모르겠군. 새해를 맞아 도읍까지 왔으나 되돌아가는 사람들도 많다네."


영녕은 숨을 한번 들이쉬었다. 그리고 말했다. 


"서릉(西陵)으로 시집가는 소소(嫁蘇小) 아가씨가 여기 계시지 않습니까?"


그들이 읊은 것은 강남에 관한 정경을 묘사한 시의 마지막 두 구절이었다. 길에서 암구호를 확인하는 이들의 말에 영녕은 그 싯구를 떠올렸고, 접선의 신호가 되겠다 싶어 기억해 두고 있었다. 중년인은 뭐라 대답하지도 않은 채 "따라오게." 하고 뒤돌아 풍악이 울리는 누각 안으로 영녕을 들어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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