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는 한숨만 푹푹 쉬었다. 은주에게는 정국과의 관계를 들키든 말든 상관이 없었다. 설령 오해받는다고 할지라도 은주가 누구한테 말할 배짱이 없어 보여서, 여주의 마음은 평온 그 자체였다. 그 내면 어딘가에는 조금 통쾌한 마음을 느끼고자 한 것도 있었으니 오히려 속이 시원했다.

하지만 지민은 달랐다. 그간 여주의 연애 역사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지민은, 여주가 남자를 만나는 족족 한 달 이상을 못 갈 때에도 별다른 잔소리가 없었다. 그저 이번에는 또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하며 이야기해 달라 옆구리를 콕콕 찌른 정도였다. 그렇다고 여주가 말해 줄 리 없지만, 아무튼 결혼까지 한 마당에 다른 남자와 은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듯한 여주에게 지민이 아무리 그래도 이건 진짜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3년 연애 끝에 결혼까지 한다기에 이번에는 정말 임자를 만났나 했더니 갑자기 웬 바람이냐 꾸짖었다. 여주는 그런 게 아니라며 입을 달싹였지만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다시 꾹 다물었다. 이쯤 되니까 그냥 확 다 말해 버리고 싶은 짜증이 밀려왔다.

책상에 풀썩 엎드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부부라는 걸 밝히면 어떻게 될지 잠시 상상했다. 아마 회사가 뒤집히지 않을까. 벌어질 일들을 머릿속으로 가만히 그려 보던 여주가 그것만은 절대 안 되겠는지 눈을 질끈 감았다.

팀 사람들에게만 말할까 했는데 그것도 별로 내키지 않았다. 이제 유제국 사건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텐데, 두 사람이 부부인 걸 알면 팀 분위기가 와해될까 걱정이었다. 서로 냉정하게 일 처리를 해야 하는 상황에 그다지 좋은 조건은 아니었다. 상대 팀장보다는 제 팀장의 부인인 게 더 편할 수밖에 없었다. 여주는 무엇보다 그게 가장 싫었다. 공과 사 구분 안 되는 건 정말 질색이었다. 

한쪽 볼이 눌린 채 엎드린 자세 그대로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결국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공개 고백은 차마 못 하겠고, 지민만 어떻게 처리해 보자고 다짐했다.






여주가 팀장실을 나오자마자 본 건, 컴퓨터 앞에 세운 가림막을 옮기고 있는 지민이었다. 옆에서 다른 팀원들이 팀장님 허락 없이 그러지 말라며 발을 동동 구르는데도, 지민은 혼자 끙끙거리며 꾸역꾸역 열심히도 옮겼다.


“그거 왜 옮겨?”


여주의 물음에 흘깃 돌아본 지민이 입술을 삐죽이더니 홱 고개를 틀어 하던 일을 마저 했다.


“왜 옮기냐고.”


조금 감정이 섞인 말이 이어지자 지민은 그제야 못 이기는 척 대답했다.


“공조한다며. 일할 때 비밀 없다며.”

“다른 팀 사람들이 못 보게 하려는 목적도 있어.”

“그럼 문 앞에 세우면 되겠네.”

“너 왜 자꾸 그렇게 툭툭거려?”


지민의 말투가 톡톡 튀었다. 웬만하면 넘어가 주고 싶어도 여주는 대놓고 엇나가기 위해 자세 잡기 시작한 지민을 그대로 둘 수 없었다. 이번 한 번 그냥 넘어가 주면 앞으로 사사건건 삐뚤어질 것으로 생각했다. 왜 자꾸 툭툭거리냐는 여주의 말에 우뚝 멈춰 선 지민이 눈을 맞췄다. 둘의 대화에 정국 팀원들도 자연스레 시선을 모았다. 정국은 흥미로운 듯 턱을 괴고 삐죽 나온 지민의 입술을 빤히 보았다. 터질 듯 말 듯 정국의 입가에 걸린 웃음이 결국엔 쏙 들어갔다. 지민은 단번에 여주의 말을 부정했다.


“툭툭거린 적 없어.”

“아니. 너 지금 그러고 있어.”

“네가 잘못 들은 거겠지.”

“아무나 잡고 물어봐. 내가 잘못 들은 건가.”


후, 깊은 한숨을 내쉰 지민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여러모로 감정이 상하고 걱정되긴 하지만, 그렇다고 여주와 심하게 논쟁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감정을 누르고 맞추는 눈빛에 한결 누그러든 마음이 보였다.


“그럼 문 앞에 세워 두면 되지?”


지민은 구석까지 거의 다 옮긴 가림막을 다시 문 앞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혼자 낑낑거리는 모습이 안돼 보여서 정국 팀원 몇 명이 다가와 도와주자, 지민이 고맙다는 의미로 고개만 살짝 까딱였다. 여주는 지민 못지않게 심란한 듯 머리칼을 한 번 쓸어 넘기고는, 그대로 뒤돌아 사무실 바깥으로 나가 버렸다.






라떼 한 잔을 들고 회사 옥상에 앉은 여주 옆으로 누군가 다가와 털썩 앉았다. 여주는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을 방해받아 순간 신경이 곤두섰다. 자기도 모르게 욱하고 차오른 감정을 애써 삼키며 돌아보면, 팔짱을 끼고 앉아 여주를 빤히 보는 은주가 있었다. 깊은 한숨을 내쉰 여주가 다시금 시선을 앞으로 옮겼다.

‘사람 빤히 쳐다보지 말라고 얘기했을 텐데.’

그렇게 말하려다가 그냥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초대받기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러운 은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민 씨랑 싸웠나 봐요.”

“….”

“왜지.”

“….”

“오빠랑 팀장님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인 거 알았대요?”


여주는 고개를 홱 돌렸다. 안 그래도 짜증 나 죽겠는데 기름을 들이부으니 더 참을 이유가 없었다. 근데 온몸의 기운이 다 빠진 상태라 은주를 상대할 자신 또한 없었다. 그저 탁 소리 나게 커피를 내려놓고 미간을 구긴 채 은주를 바라봤다. 은주는 그런데도 여유롭게 미소까지 띠며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변한 것 같다고 생각한 여주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은주의 어리숙한 면이 좀 가신 듯했다.


“그게 은주 씨가 내린 결론이야?”

“뭐가요?”

“기분 나쁘게 사람 관찰하면서 내린 결론이 겨우 그거냐고.”

“솔직히 이제는 오빠랑 어떻게 되든 관심 없는데, 저 팀장님이 좀 궁금해졌어요.”


은주는 몸까지 돌리고 앉아 여주를 바라보았다. 궁금해졌다는 말이 사실인지 흥미로운 주제를 발견한 듯 눈을 반짝이기까지 했다.

‘궁금해? 내가?’

여주는 반사적으로 방어 자세를 취하고 더 얘기해 보라며 고개를 까딱였다.


“공과 사를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분이 왜 자꾸 힌트를 줘요?”

“무슨 힌트.”

“안 들킬 수도 있었잖아요. 오빠와의 관계.”


그날 일을 이야기하는 거였다. 모든 팀원이 현장에 함께 나간 그날, 숙소에서 밤늦게 나란히 자리를 비운 정국과 여주의 일 말이다. 은주는 여주라면 충분히 정국과의 관계를 안 들킬 수도 있었을 거로 생각했다. 평소 일 처리를 확실히 하는 여주가 알고 싶으면 어디 한번 알아 보라 도발을 하는 듯해 이해가 안 됐다. 

여주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굳이 따라 나와서 본 주제에 왜 좀 더 조심하지 못했냐고 따지는 것 같아서 웃겼다. 코웃음을 친 여주가 어이없는 듯 미간을 구겼다.


“거기까지 굳이 따라 나온 사람이 할 소린가?”

“제가 보고 있는 거 알았네요?”

“어. 그게 왜? 난 은주 씨한테 교훈을 준 거야. 쓸데없는 거 궁금해하면 피 보니까 훔쳐보는 버릇 고치라고.”

“누가 훔쳐봤다고,”

“그날 일만 말하는 거 아니야. 매일매일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이야기하는 거야. 사람 관찰하지 말라고 했지. 그렇게 보면 내가 무슨 생각 하는지 다 읽혀?”


여주는 애써 모르는 척하려고 해도 따가운 시선이 이마를 콕콕 찔러 욱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가만 보면 은주의 모든 행동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는데, 이상하게 그 모든 게 여주에 대한 관심이기도 했다. 

은주는 처음 사진을 훔친 그때도 여주 표정을 보고 그 물건이 여주에게 무척 중요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헝가리 얘기만 나오면 발끈하는 여주를 긁으려고 회의 때 일부러 그런 말을 꺼냈다. 정국의 부인이 어쩌고저쩌고했지만, 사실 가장 알고 싶은 건 정국에 대한 여주의 마음이었다. 여주만은 정국에게 마음이 없었으면 했다. 그래서 여주한테 남자 친구가 있다는 걸 알자마자 씩 웃었다. 유부남이랑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화를 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이젠 그딴 거 관심 없다고 말했다. 은주의 가장 큰 목적은, 여주에게서 팀원을 지키는 거고 여주에게 정국을 안 뺏기는 거였다. 그만큼 여주를 견제하고 두렵게 생각하는 건데 본인은 자각을 못 했다. 그런 마음이 이제는 진짜 순수한 관심으로 조금 번졌다. 은주는 여주가 궁금했다.

반면 여주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여주라고 어떻게 하면 은주가 무너지는지 몰라서 가만히 있는 게 아니었다. 봐줄 때 알아서 수그리라니까,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는지 의문이었다. 스멀스멀 피어나는 화와 함께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말들을 애써 참아 낸 여주가 그중 단 한마디도 뱉지 않고 차분히 은주를 타일렀다.


“그래. 뭐가 알고 싶어? 은주 씨가 알고 싶은 걸 직접 물어봐.”


어느덧 말이 완전히 짧아졌다. 여주는 이제부터 전면전에 돌입하기로 마음먹었다. 단순히 밟아 주겠다는 마음은 아니었다. 제 밑에 두고 함께 일해야 하니 조금 알려 줄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어설픈 심리전으로는 알아낼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는 것과 자기 주제를 알고 체급에 맞는 상대를 고르는 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말이다. 친오빠와 다름없다는 팀원들은 한 번도 말해 준 적 없는, 은주는 조금 자존심이 상하고 여주는 아주 약간 통쾌해지는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다.

은주는 궁금한 걸 직접 물어보라는 여주의 말에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입술을 물었다. 이내 초롱초롱한 눈으로 이야기를 꺼내는 은주의 모습이 밝아 보였다.


“왜 갑자기 공조하겠다고 하신 거예요?”

“안 할 수가 없는 상황이라서.”

“안 하겠다고 했던 이유는요?”

“사람을 못 믿어서.”

“그럼 이제는 믿어요?”

“말했잖아. 안 할 수가 없는 상황이라서 수락한 거라고.”


은주가 시작한 건 일 얘기였다. 궁금한 게 고작 그것인가 싶어 여주의 머릿속이 복잡했다. 여주는 은주를 알다가도 모를 사람으로 생각했다. 전에는 그냥 별 이상한 애가 다 있다 하고 넘겼는데, 이제 슬슬 진심으로 궁금했다.

이쯤 되니 사람이 진짜 순진한 건 아닐까 헷갈렸다. 감정 조절을 못 해서 얼굴에 표정이 다 드러날 뿐, 여주에게 그리 큰 악감정은 없는 것 같기도 했다. 여주는 머릿속으로 답 없는 질문만 줄줄 이었다. 은주가 조금 편해진 표정으로 살짝 미소를 띠더니, 몇 가지가 더 남았다며 손뼉을 쳤다.


“일 관련 비밀 없다는 거 진짜예요? 오픈 안 할 것처럼 하시더니 의외로 자료가 꼼꼼해서 놀랐어요.”

“진짜야. 난 일할 때 숨기는 거 없어.”

“정말 단 하나도?”

“단 하나도. 작전 나가는 사람이 모르는 일은 없어야 돼. 내 도움 없이도 현장에서 알아서 대처할 수 있을 정도는 만들어 놓자는 게 내 생각이야.”

“왜요? 정보가 샐까 봐 겁난다면서요.”

“그게 겁난다고 무기도 없이 전쟁터로 내보낼 수는 없잖아. 여기는 정보가 곧 무기고 방패거든.”


은주는 의외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단 하나의 비밀도 없다는 말에 놀랐다. 여주가 팀원들에게 단호하게 말할 때도 믿지 못한 은주였다. 아무리 그래도 핵심 정보는 따로 빼놓을 줄 알았다. 정보를 주느니 다 폐기해 버리는 사람인데, 설마 그걸 넘겨주겠냐고 생각했다. 정보를 받고 난 직후에도 한 치의 거짓도 없다는 듯 무덤덤한 여주의 표정을 읽으려 애쓰며 부정하고 또 부정했다. 근데 곧, 방대한 자료를 확인하고 조금 의아해졌다. 여주는 심지어 급하게 정리해서 좀 허술하니 일주일 뒤에 더 완벽하게 작성해서 주겠다고까지 했다. 은주는 분명 꿍꿍이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도저히 속을 읽을 수 없어 답답했다. 어쩌면 그게 정말 진심이었을까 하는 마음이 자꾸 생겼다. 여주를 바라보는 은주의 표정이 묘해졌다. 은주가 다시금 빤히 보기 시작하자 여주는 인상을 팍 쓰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럼 질문 끝난 거지?”

“아, 잠깐만요.”

“더 남았어?”

“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다급하게 말을 덧붙인 은주는 마지막 하나가 남았다며 여주를 붙잡았다.


“뭔데?”


삐딱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여주의 모습에, 은주가 조금은 긴장되는 듯 침을 꼴깍 삼켰다. 전과 살짝 달라진 은주의 표정을 본 여주가 이번에는 조금 다른 질문을 하려나 궁금해할 때쯤, 조심스레 입을 달싹이는 은주였다.


“오빠랑은 실수였죠? 그날 밤에.”

“….”

“네?”

“….”

“팀장님?”

“…따라와. 말해 줄 테니까.”






여주는 은주를 팀장실 소파에 앉혀 놓고 책장 속 묵은 자료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평소 직접 맡은 프로젝트는 끝난 즉시 폐기하지만, 연습 삼아 공부했던 자료들은 빠짐없이 보관했다. 그래도 딱히 누굴 보여 준 적은 없었다. 비록 그중 일부는 조직 권한 밖의 사건이기는 하나 문제 해결 능력을 키우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됐다. 나중에 후임이 들어오면 알려 주려고 남겨 놨는데 이렇게 쓸 줄은 몰랐다. 자기가 생각해도 어이없는지 픽 웃음을 터트린 여주가, 얼떨떨한 은주 앞에 자료 뭉텅이를 내려놓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표시해 놓은 파일을 꺼내 은주에게 내밀었다.


“사적인 질문은 안 받는다고 했던 말 기억하지? 내가 내는 문제를 맞히면 질문에 대한 답을 해 줄게. 기회는 두 번이야. 대신, 틀리면 같은 질문은 두 번 다시 하지 않는 거다.”

“….”

“싫어? 싫으면 말고.”

“…해 볼래요.”


은주가 즉각 답이 없자 여주는 파일을 다시 가져가려 했다. 은주를 다루는 법을 조금씩 알 것 같은 여주였다. 깊이 생각할 기회를 주지 않고, 직접 선택할 수 있게 하고, 결국 선택에 대한 책임까지 지게 하는 것.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사는 탓인지, 제발 같은 이야기 하지 말라 백날 타일러 봤자 은주는 고쳐지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면서도 그렇게 못되진 않아서 본인이 뱉은 말을 번복하는 것에 조금 거부감을 느끼는 것 같으니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었다. 여주는 파일을 펼쳐 보지도 않고 은주에게 넘긴 채 조곤조곤 말하기 시작했다.


“2006년 쇼핑몰 테러 미수. 임금 체불에 불만을 가지고 직접 제작한 폭발물을 설치하려다가 발각돼서 미수에 그친 사건이야. 동료 직원이 범인의 행적이 수상하다며 신고해서 체포할 수 있었고, 범인은 집에서 잠을 자다가 잡혀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았어. 물론, 그의 집에서 증거품도 나왔고. 이 사건에서 이상한 점이 뭐라고 생각해?”

“음… 임금 체불에 대한 처사치고는 과하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해.”

“직접 피해를 준 사람이 아니라 다수의 선량한 사람을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 이상해요.”

“그건 틀렸어.”


여주는 은주에게서 파일을 다시 건네받았다.


“틀렸으니까 그날 밤 일은 실수였냐는 네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없어.”


이어지는 말에 은주가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런데도 동요 없는 여주는 또 질문할 것이 있느냐 물었다. 은주는 기대 있던 몸을 일으켜 정자세로 고쳐 앉았다.


“답이 뭔데요?”

“핵심은 미수, 동료 직원, 그리고 징역 5년이야.”

“….”

“범인의 처사가 과하기도 했지만 법은 더 과했어. 폭발물을 설치한 것도 아니고 사용처가 명확한 상황도 아니었는데 이례적으로 징역 5년이 나왔어. 게다가 행적이 수상하다는 동료 직원의 말만 듣고 출동부터 검거까지 두 시간이 채 안 걸렸지.”

“범인을 만든 건가?”

“사건을 만들었어. 그 사람 노조 위원장이었고 쇼핑몰 입점 과정에서 정·재계 커넥션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거든. 애초에 임금 체불은 범행 동기를 만들기 위한 속임수였어. 그 사이에서 돈 받아먹은 사람이 몇이나 될 것 같아?”


답을 들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던 은주가 턱을 살짝 쓰다듬었다. 곧 여주의 눈을 빤히 보며 조곤조곤 입을 뗐다.


“두 번째 질문이에요. 팀장님. 오빠한테 별다른 사적인 감정을 느껴서 그런 건 아니었죠?”


줄기차게 한 가지 주제만 파고드는 은주 때문에 여주가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고민 끝에 조금 낡은 파일을 하나 꺼내 은주에게 건넸다. 여주는 이번에도 역시 표지의 고유 번호만으로 무엇인지 알아차리고 망설임 없이 질문했다.


“은주 씨. 공작원 실제로 본 적 있어?”

“우리나라로 내려온….”

“아니. 그거 말고 남한에서 저 위로 올라간 공작원. 이 다섯 명 중에 누가 공작원인지 골라 볼래?”


여주는 사진 다섯 장을 차례로 늘어놓았다. 체격이 제각각인 남자 다섯이 얼굴을 가린 채 찍은 전신 독사진이었다. 북에서 건너온 공작원은 몇 번 봤어도 남에서 건너간 공작원은 한 번도 보지 못한 은주가 고민에 잠겨 입술을 물었다. 이내 가장 체격이 좋은 사람 한 명을 골라내 여주에게 내밀었다. 사진 속 남자와 제 팀원들의 체격이 비슷하기 때문이었다. 같은 조직에 몸담는 사람이니까 그 역시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여주의 답은 냉정했다.


“틀렸어.”

“틀렸어요?”

“응. 여기에서 올려 보낼 땐 대개 키가 165cm 전후인 요원을 선발해. 체격이 작으면 은신에 유리하기도 하고, 그쪽하고 비슷해야 튀지 않고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으니까. 여기 몸집이 가장 작은 이 남자. 이 사람이 공작원이야.”

“아….”

“이제 질문 없지?”

“있어요.”


은주는 곧장 한 번 더 하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주가 정리한 파일을 내려놓으며 어깨를 으쓱이자, 이번에는 직접 파일 하나를 골라 질문을 던지는 은주였다.


“이제 다시는 그런 일 없는 거죠? 오빠를 흔드는 일.”


포기를 모르는 은주를 보며 여주는 참 끈질기다고 생각했다. 질리는 듯 고개를 저은 여주가 별다른 대답 없이 고유 번호만 흘깃 확인하고 말했다.


“협상의 기본이 뭐라고 생각해?”

“내가 준비한 것 이상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요?”

“만약 상대가 무리한 요구를 하면서, 받아들이지 않을 시 협상을 파기할 수도 있다고 협박한다면?”

“바로 대답하면 상대의 페이스에 말릴 수 있으니 시간을 달라고 이야기해요.”

“잘 아네. 은주 씨는 방금 협상의 기본을 어겼어. 내가 분명 기회는 두 번뿐이라고 했잖아.”

“….”

“다시는 그런 일 없는 거냐고 물었지? 전 팀장님을 흔드는 일 말이야. 나도 생각 좀 해 볼게. 바로 대답하지 않고. 협상의 원칙을 따라서.”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제대로 못 했기 때문에 은주는 결국 원하는 것을 하나도 얻을 수 없었다. 게다가 은근슬쩍 하나 더 물어봤다가 매몰차게 거절당하기까지 했다. 작게 한숨을 내쉬는 은주를 뒤로하고 책상으로 걸음을 옮기던 여주가 순간 해 보고 싶은 게 생겨서 금고 앞에 가 섰다. 여주는 이제 막 나가려 하는 은주를 불러 세우며 금고 안에서 파일 하나를 꺼냈다. 자리로 복귀해 자료를 내미는 여주를 은주가 얼떨떨하게 바라봤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해 볼래?”


책장에 있는 것들과 달리 ‘보안’이라 큼지막하게 쓰인 문구가 눈에 띄었다. 그 때문에 은주가 펴 보기를 망설이고 있자, 여주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지금 우리가 진행 중인 케이스. 한진회 오른팔 김선태와 유제국 처남 박도진의 대화 내용을 모았어. 감청한 것도 있고 메시지 기록을 해킹한 것도 있어.”

“….”

“대화를 보고 둘이 어떤 관계인지 한번 파악해 볼래?”


여주는 은주가 정말 관찰에 소질이 있는지 궁금했다. 진짜로 뭐 아는 게 있어서 빤히 보는 건지, 아니면 쥐뿔도 없는 건지 말이다. 내심 결과가 궁금한 여주가 이번에는 되레 은주의 표정을 관찰하려는데, 은주는 파일을 펴서 한 번 대충 훑어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탁 소리 내며 덮었다. 한창 읽어 내려가야 할 시간에 덮어 버린 걸로도 모자라 다시 앞에 놓아 주기까지 하는 모습에, 여주가 의아한 마음에 미간을 구겼다.

‘모르겠다는 건가?’

아무래도 너무 어려운 걸 시켰나 싶어 어깨를 으쓱일 때쯤, 은주는 기다렸다는 듯 말하기 시작했다.


“유제국 처남 박도진은 김선태한테 자격지심을 느껴요. 아무리 그래도 자기가 유제국 처남인데, 사실상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거든요. 한진회 사람들은 다 김선태한테만 충성하니까요. 그래서 자기 매형 유제국을 통해 한진회를 압박하고 싶어 하지만 김선태는 꿈쩍도 안 하죠. 김선태는 한진회가 가장 밑바닥에서 시작할 때부터 줄곧 오른팔이었고, 유제국 한마디에 벌벌 떠는 성격도 아니에요.”

“….”

“김선태는 사실상 실세예요. 나이 든 회장을 대신해서 한진회를 이끌어 가는 실질적 운영자인 데다, 유제국한테 협조하면서 적당히 뒷돈을 챙길 줄 아는 배짱도 있어요.”


한 번도 쉬지 않고 이어진 말에 여주가 입술을 살며시 물었다. 5분도 안 돼서 나온 내용이라는 걸 믿지 못했다. 여주는 이걸 알아내는 데만 꼬박 한 달을 보냈다. 물론 이번에는 은주에게 충분한 정보가 주어지긴 했지만, 단번에 정리할 만큼 간단한 관계는 아니었다. 여주는 은주가 난놈이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며 터져 나오는 실소를 막지 못했다. 은주는 그런 여주를 향해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곧장 자리를 털고 일어나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답을 맞혔는데 질문도 안 하고 나가려나 싶어 빤히 보면, 은주가 뒤늦게 생각이 난 듯 아차 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여주가 한결 누그러든 표정으로 미소 띤 채 말했다. 


“정답이야. 질문이 뭐야?”


은주는 조금 망설이는가 싶더니, 우물쭈물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날, 저한테 이어폰 왜 주셨어요?”

“어?”

“편의점에서요. 첫 작전 끝난 직후에.”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여주는 보나 마나 또 오빠가 어쩌고저쩌고하는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은주가 대뜸 첫 작전 직후 일을 물어서 의아했다. 남자들의 고함에 몸을 떠는 은주에게 여주가 제 이어폰을 꽂아 준 그날 일이었다. 여주는 그게 왜 궁금한지 몰라서 볼을 긁적였다.


“그야 필요해 보여서.”

“절 싫어하시잖아요.”

“좋아하진 않는데 싫어하지도 않아. 그리고 아무리 싫은 사람이라고 해도 도움이 필요한 상황을 외면할 정도로 냉정한 사람도 못 되고.”

“근데 왜 갑자기 반말하세요?”

“그냥. 내 마음인데.”

“…네.”


은주가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작 반말 안 하고 참은 게 용하다고 생각했다. 여주에게 있어 반말이란 극도로 화가 났다는 걸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은주는 여주가 반말할 때마다 흔들리고 있다는 걸 눈치채곤 했다. 왜 저렇게 감정 절제를 못 하냐고 생각하다가도, 은주는 어느 순간부터는 여주가 자기한텐 감정을 숨길 필요성을 전혀 못 느낀다는 걸 깨달았다. 견제할 가치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게 약 오르기도 하고 또 조금 자극이 된 것 같기도 했다. 

이기려 들지 말고 참아 줄 때 닥치고 있으라는 그 말이 딱 은주에 대한 여주의 감정이었다. 여주는 심지어 이제는 대놓고 은주를 밟으려 하고 있었다. 자꾸 거스르는 행동을 하니까, 자꾸 사적인 감정을 끌고 오니까, 자꾸 기분 나쁘게 관찰하니까. 

은주는 여주가 제 버릇을 고치려고 단단히 마음먹었다는 걸 눈치챘는데도 어쩐지 기분이 마냥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 이유는 몰랐다. 은주가 문을 열고 나가려다 말고 다시 한번 여주를 돌아보았다.


“팀장님은 좋은 사람이에요, 나쁜 사람이에요?”

“또 질문하는 거야? 그럼,”

“아, 됐어요.”


여주가 또 문제를 내려고 파일을 뒤적거리자 은주는 필사적으로 손을 저으며 거절 의사를 내비쳤다. 곧장 문을 쾅 닫고 나와서는 그 앞에 멀뚱멀뚱 서 있었다. 

은주는 여주를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유부남과 불륜을 저지르는 걸 보면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남의 위험을 외면 못 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인격 모독에 가까운 말로 눈물을 쏟게 만들다가도 손수 정리한 파일까지 내주며 뭔가를 가르쳐 줬다. 대체 뭐 하는 사람인지 딱 정의하기 힘들었다. 여주가 은주에게 느끼는 그 감정을 은주 역시 똑같이 느끼고 있었다.

‘좋아하진 않는데 싫어하지도 않아.’

그렇게 멍하니 서서 여주의 말을 곱씹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갑작스레 들린 “은주 씨.” 하는 부름에 은주가 고개를 홱 돌렸다. 네, 소리가 반사적으로 튀어 나간 직후였다. 그곳에는 양손에 아이스크림을 들고 선 지민이 있었다.


“팀장실 앞에서 뭐 해요?”

“아, 그냥 좀….”

“또 혼났나? 아, 일단 이거 먹어요. 아이스크림.”

“고맙습니다.”


은주가 아이스크림을 건네받고 걸음을 옮기자마자 지민이 쪼르르 따르며 말을 이었다.


“여주 기분 어때요? 많이 화난 것 같아요? 지금 괜히 말 걸었다가는 역풍 맞을 것 같죠?”


은주는 그런 걸 왜 여기에 물어보는지 몰라서 어색한 미소를 띠었다. 굳이 자기한테 묻는 게 의아했다. 은주는 지민보다 여주와 덜 친한 걸로도 모자라서 심지어 사이가 안 좋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차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서 애써 덤덤하게 답했다. 


“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가 보시지 그래요?”

“아, 나는 좀….”

“뭔진 몰라도 그냥 사과하세요. 따뜻한 라떼 좋아하신대요.”


지민은 웃음을 터트렸다. 조언이랍시고 알려 준 그 말 때문이었다. 여주가 따뜻한 라떼 좋아하는 거 모르는 사람도 있냐는 표정이었다. 지민이 민망해하는 은주의 어깨를 살며시 토닥이다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나도 뭔진 모르겠지만 은주 씨야말로 마음 불편하면 먼저 사과해요.”

“….”

“여주 생각보다 그렇게 차가운 사람 아니에요.”






바깥 책상에 앉아 유제국 자료를 정리하던 여주는 머리가 지끈거려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호기롭게 일주일 안에 정리해 주겠다고 말하긴 했는데, 매일 서류만 들여다보고 있으니 구토가 나올 지경이었다.


“팀장님. 계좌 정리 끝냈어요.”


때마침 들리는 팀원의 목소리에 여주가 살짝 꺾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했어. 먼저 퇴근해.”

“벌써요? 아직 시간 안 됐는데?”

“어. 좀만 더 하면 진짜 토할 것 같아. 오늘은 이만하자.”

“오예. 그럼 사양 않고 퇴근하겠습니다.”


거절 따윈 없는 모습이었다. 팀원은 곧장 컴퓨터부터 끈 다음 자료를 착착 정리해 서랍 안에 넣고 겉옷을 걸쳐 입으면서 동시에 슬리퍼를 휙휙 벗어 가지런히 놓았다. 퇴근하라고 하니까 갑자기 동작이 엄청나게 빨라진 느낌이었다. 여주는 괜히 속으로 초를 세어 보며 과연 얼마 만에 사무실을 나서나 궁금해했다.


“저 먼저 가 볼게요.”


정확히 15초 만에 모든 준비를 마친 팀원의 모습에 여주가 웃음을 터트렸다. 자긴 아직 할 일이 좀 더 남아서, 팔을 위로 쭉 뻗어 기지개를 켜고 안경을 추켜올렸다. 대충 묶은 머리가 반쯤 흘러내려 풀릴 듯 말 듯 했다. 온몸이 찌뿌둥했다. 마저 끝내고 빨리 퇴근해야겠다 마음먹은 순간, 지민이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나도 퇴근할게.”

“뭐 했다고 벌써 퇴근해.”

“….”

“진심 어린 미소를 보여 주면 퇴근시켜 줄게.”


여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지민은 한껏 입꼬리를 올렸다. 내내 불퉁거리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그냥 한번 웃어 보라 제안한 건데, 말은 또 참 잘 들어서 웃겼다. 그래 봤자 눈은 하나도 안 웃고 있지만, 여주도 삐진 놈 하나가 자꾸 앞에 얼쩡거리면 괜히 신경 쓰여서 불편했다. 여주는 생각을 속으로만 삼키며 이만 퇴근하라 대충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자 지민은 기다렸다는 듯 가방을 메고 출입문이 아닌 상대 팀 공간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의아한 여주가 안경을 고쳐 쓰며 머리를 굴렸다. 새삼스럽게 인사라도 하려나 싶었는데, 대뜸 정국에게 말을 거는 지민 때문에 당황했다. 


“전 팀장님. 저랑 술 한잔하시죠.”

“내가? 그쪽이랑?”

“예. 할 말도 있고.”

“무슨 할 말?”

“가서 말씀드릴게요.”


여주는 재빨리 자세를 고쳤다. 바라는 대로 퇴근시켜 줬더니 술을 마신다고 하니까 황당했다. 별로 친하지도 않으면서 정국에게 그러는 지민의 모양새가 꿍꿍이 있어 보였다. 못마땅한 게 한두 개가 아니라서 여주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정국 마음도 여주와 크게 다르지 않은지 구겨진 미간이 돌아올 생각을 안 했다.


“글쎄. 별로 안 내키는데.”


별다른 고민 없이 이어지는 정국의 대답에, 지민은 앉아 있는 정국을 향해 몸을 살짝 숙여 귓속말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몰라서 여주의 불안감이 극에 달했다. 표정 변화 없이 담담하게 듣던 정국이 지민을 향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나 오늘은 와이프랑 선약이 있어서.”

“아….”

“다음에 해요. 나도 좀 궁금하긴 하네.”


그냥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었는지 정확한 날짜와 시간까지 정하고 나서야 지민은 사무실을 나섰다. 뭐가 궁금하다는 건지, 귓속말로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한 건지, 궁금해서 미쳐 버릴 것 같은 여주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책상 위로 틱 던졌다. 그러자마자 핸드폰 진동이 울리며 메시지가 왔음을 알렸다.


-여주야 일 끝났지? 식당에서 바로 보자. 먼저 가 있을게.






“왜 안 먹어? 가락국수 먹고 싶다고 노래 불렀잖아.”


여주는 음식을 앞에 두고도 내내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는 정국의 말에 여주가 아예 젓가락까지 내려놓고 턱을 괴었다.


“자기야.”


나지막한 여주의 부름에 정국 역시 먹던 걸 내려놓고 여주와 눈을 맞췄다.


“아까 지민이가 귓속말로 뭐라고 했어?”

“아, 그게 궁금해서 여태 안 먹었어?”

“응응. 얼른.”


어서 말해 달라며 재촉하는데도 정국은 어쩐지 답이 없었다. 그저 미지근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이고는 흠, 하며 고민하는 추임새를 내뱉었다. 여주 손에 다시 젓가락을 쥐여 준 정국이 씨알도 안 먹힐 소리를 했다.


“신경 쓰지 마. 별말 아니었어.”

“별거 아니니까 알려 줘!”


참다못한 여주는 짜증이 치밀었다. 무슨 말을 했는지 신경 쓰여 죽겠는데 정국도 바로 말해 주지 않으니 답답했다. 정국은 그런데도 서두르는 기색 없이 웃음을 터트리며 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여주야. 뭐가 그렇게 짜증 났어?”

“아아, 자기야. 알려 줘. 응?”

“알려 주면 뭐 해 줄 거야?”

“…진짜 치사하게 그럴래.”


여주는 결국 눈을 흘겼다. 정국은 아까 분명 아내와 약속이 있다며 지민의 제안을 거절하면서도 얼굴 가득 궁금증이 떠올랐다. 지민이 시시한 이야기를 했을 리 없었다. 게다가 지민은 일부러 여주가 못 듣게 하려고 귓속말로 했다. 거짓말이거나 팩트 폭행일 확률이 높았다. 뾰로통해져서 노려보는 여주의 모습에 정국이 웃을 듯 말 듯 입술을 달싹였다.


“자기야. 알려 줘. 나 진짜 궁금해. 안 알려 주면 밥 안 먹을래.”


말도 안 되는 여주의 투정이 이어졌다. 정국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여주 머리칼을 살짝 헝클이며 남이 들을세라 조용히 속삭였다.


“여주야. 박지민이….”

“응응.”

“너 개쓰레기래.”






잔뜩 약이 오른 여주가 맥주를 다섯 잔째 들이켰다.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벌컥벌컥 들이붓느라 어느새 볼이 발그레해지고 눈은 반쯤 풀려 울상이었다. 정국의 말이 적잖이 충격이었는지 같은 말만 반복하며 입술을 삐죽였다. 


“개쓰레기라니… 개쓰레기라니….”

“….”

“내가 왜 개쓰레기래?”

“이유는 나중에 말해 준대. 내가 같이 술 마셔 주면.”

“뻔하지, 뭐. 내가 자기랑 바람피우는 줄 알고 그래.”


여주는 눈꼬리를 축 늘어트렸다.


“그러니까 누가 사무실에서 뽀뽀하래. 박지민이 이제 내 말 안 들으면 자기가 책임질 거야? 전정국 너, 내 입술 번진 거 알고도 모르는 척했지? 아냐, 괜찮아. 나 진짜로 그런 거 하나도 신경 안 써. 사실도 아닌데 뭐. 그치? 아니 근데, 왜 개쓰레기래?”


웃었다가 울상을 지었다가, 자기라고 했다가 전정국이라고 했다가, 여주가 쉴 새 없이 오락가락하며 롤러코스터를 탔다. 정국은 그런 여주를 귀여워하며 한참을 웃기만 했다.

쉼 없이 쫑알거리던 여주는 어느 순간 어깨가 축 처져서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정국 역시 같은 표정이 되어 여주의 볼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왜, 왜. 내내 잘 웃다가 왜 그래.”


정국이 달래 줘도 여주의 눈꼬리가 올라올 생각을 안 했다. 시무룩한 얼굴만큼이나 목소리도 기가 죽었다.


“그러고 보면 진짜 웃기지 않아? 난 우리 팀원들 가족처럼 생각하는데도 남편 얼굴은 못 보여 주겠더라. 내 일터에 자기를 끌고 오면 진짜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날 것 같았어.”

“….”

“나만 그러는 거 아니야. 나도 걔네 애인 한 번도 본 적 없어. 이름도 몰라. 우리는 그냥 말 안 해도 암묵적으로 서로들 그래. 웃기지?”

“아냐. 우리도 그래.”

“나 사실 예전에 남자 친구 사귀었다 하면 한 달도 못 갔어. 나보고 자꾸 친구 소개해 달라 부모님 소개해 달라 하는 게 짜증 나서 금방 질려 버리더라. 내가 친구한테 소개 안 하는 이유가 숨기는 게 있어서래. 진짜 웃긴 게, 난 걔네가 내 정보 캐내는 스파이라도 되는 줄 알고 하루 만에 차 버린 적도 있다?”


여주는 순식간에 눈시울을 붉혔다. 다시 빠르게 깜빡이며 진정하긴 했으나, 순간적으로 분명 물기가 스쳐 지나갔다.


“자기는 한 번도 안 그래서 너무 좋았어. 매일매일 나 보고 싶다는 말만 하고, 우리 부모님 보고 싶다 내 친구 보고 싶다 안 그래서. 나만 보고 싶어 해서… 나 말고 다른 건 안 궁금해해서….”


말끝을 흐리며 얼마 안 남은 맥주를 탈탈 털어 넣은 여주가 종업원에게 한 잔 더 달라며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였다. 정국은 그런 여주를 말릴까 하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대신했다.


“누가 알았나. 자기도 나랑 같은 마음이라 그런 거라는 걸.”

“….”

“자기도 내가 꼬치꼬치 캐묻지 않아서 좋았지?”

“….”

“궁금해하지 않는다고 좋아하는 커플은 우리밖에 없을 거야.”

“….”

“어쩔 수 없어. 서로가 비밀일 수밖에.”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중얼 말을 잇던 여주는 때마침 나온 맥주잔 손잡이를 잡았다. 단번에 여주 옆으로 넘어온 정국이 잔을 빼앗으며 살짝 고개를 저었다.


“이제 그만 마셔. 취했다.”


술을 못 마시게 해 심통이 난 여주가 입을 꾹 다무는데도, 정국은 말없이 대신 맥주를 들이켰다. 여주는 반쯤 포기 상태가 되어 입술 새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정국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자기야, 하며 취기가 가득 묻어나게 불렀다. 응, 소리로 곧장 대답이 들려와 기분이 좋았던지, 여주가 살짝 미소 띤 채 눈을 꼭 감았다.


“그래도 난 자기가 내 비밀이라 좋아.”

“….”

“나한테 비밀이라는 건….”

“….”

“그만큼 소중하다는 뜻이거든.”






-마시기로 했던 술 오늘 하죠.


지민은 정국이 보낸 메시지를 보자마자 약속 장소로 달려 나갔다. 머리를 감은 직후 급하게 나온 탓에 덜 마른 머리칼이 살짝 뻗쳤다. 웬일로 이렇게 빨리 제안을 받아들였을까 생각하며 룸 형식으로 된 술집 문을 열어 보면, 시큰둥한 얼굴로 올려다보는 정국이 있었다. 그리고,


“…여주랑 같이 있으셨어요?”


그곳에는 여주도 함께 있었다. 정국 어깨에 기대 깊은 잠에 빠져 있긴 했지만, 어쨌든 한 공간 안에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담배와 지갑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맞은편 자리에 털썩 앉은 지민이 어이없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전 팀장님 유부남이라면서요.”

“근데요.”

“전 있죠. 처음 보자마자 전 팀장님이 여주한테 관심 있는 거 알았어요. 그래서 사실 솔직히 말하면, 여주랑 잘되게 해 주겠다 좀 놀려 주려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근데?”

“근데 유부남이라고 하니까, 내가 오해했나 했죠. 게다가 여주도 팀장님 유부남인 거 안다니까, 걱정 안 했죠.”

“그렇구나.”

“그렇구나? 지금 그렇구나라는 말이 나와요? 당신 여주 가지고 놀아요? 보란 듯이 날 불러낸 이유가 뭔데?”


지민은 분노가 차올라 가빠진 숨을 필사적으로 가다듬었다. 이내 소주 한 잔을 단번에 입 안으로 털어 넣고 탁 소리 나게 잔을 내려놓았다. 여주가 난감할 걸 알면서도 굳이 지민을 불러낸 정국의 행동이, 여주를 농락하는 것 같아 불쾌감을 감추기 힘들었다.


“내가 아는 여주는 절대 그럴 사람 아니니까, 잘못은 분명 당신이 했을 거야.”

“아까는 개쓰레기라며.”

“그야 당신 떼어 놓으려고 한 말이지.”

“싱겁네. 그거 궁금해서 불렀더니.”

“…뭐? 이 새끼 최악이네.”


당장 멱살이라도 잡을 것처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지민이 거칠게 호흡하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게 궁금해? 근데 생각보다 싱거워서 시시해?’

그렇게 눈을 질끈 감고 화를 참아 내려 얼마나 노력했을까. 지민은 두 사람 곁으로 자리를 옮겨 서서 여주의 팔을 살며시 잡아당겼다. 여주가 순간 기댈 곳을 잃어 몸을 휘청이자, 지민이 여주의 머리를 감싸 제 품 안으로 끌었다. 지민의 배에 닿은 여주의 머리를 보며 정국이 한쪽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지민은 정국과 똑바로 눈 맞추고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뱉었다.


“그런 식으로 가볍게 여길 거면 처음부터 시작하지 말았어야지. 뭐 얼마나 대단한 마음이라고 불륜까지 저지르면서 애를 흔들어?”

“….”

“여주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그것도 아주 많이. 그러니까 이쯤 하시죠.”

“….”

“당신 같은 사람 때문에 행복을 깨기에는 여주가 좀 많이 아까워서.”


말을 마치자마자 지민이 몸을 살짝 숙여 여주를 업으려 했다. 그런 여주의 어깨를 감싸 다시 제 쪽으로 당긴 정국이 지민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이제 더 참기 힘든 지민이 주먹을 꼭 쥐고 떨리는 목소리를 뱉었다. 그런데도 정국은 담담한 표정으로 여주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살짝 쓸었다. 순간 여주가 끄응 소리를 내며 뒤척였다. 행여 깰까 조심스러운 손길로 여주를 제 어깨에 기대게 한 정국이 다시금 지민과 눈을 맞췄다. 지민은 술김에, 그리고 잠결에 정국의 품으로 파고드는 여주를 보며 아랫입술을 터질 듯 세게 물었다.


“여주 많이 취했습니다. 함부로 껴안지 마세요. 당신 자꾸,”

“너야말로 임자 있는 사람 자꾸 그렇게 껴안지 마.”

“허,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내가 얘 남편이야. 무슨 자격이 더 필요하지?”


난데없는 황당한 말에 지민은 미간을 구겼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며 단번에 되받아칠 만큼 조금도 믿지 않았다.


“당신이랑 장난할 기분 아니니까 여주 이리 주세요.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듯 표정이 굳어 버린 지민을 보며 정국이 입가에 웃음을 걸었다. 이내 빠른 속도로, 그러면서도 정확한 발음으로 해야 할 말만 딱 했다. 


“직업 특성상 여주 사진은 하나도 안 가지고 다니고, 결혼식은 가족끼리 해서 우리 팀원 중에는 여주 얼굴 아는 사람이 없고. 그래도 내 친구 몇 명은 알고 있는데 걔네랑 통화라도 시켜 줄까?”

“….”

“내가 그랬지. 너 없는 3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 줄 알고 나보다 더 가까운 사이라고 확신하냐고.”

“….”

“지난 3년간 난 여주 남자 친구였고 남편이었어.”

“….”

“여주가 따뜻한 라떼만 마시는 것도, 기관지 약해서 좀만 건조하면 바로 기침하는 것도, 구두는 불편해서 두 시간 이상 못 신는 것도, 예민할 땐 식욕 없어서 밥 대신 두부만 먹는 것도, 우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것도. 그거 다 너만 아는 거 아니야.”

“….”

“왜. 더 이야기해 줄까?”


정국은 소주 한 잔을 털어 넣었다.


“뭐 해. 서 있지 말고 앉아.”


정국이 맞은편을 향해 살짝 고갯짓하니, 멍한 표정으로 스르르 자리에 주저앉는 지민이었다. 지민은 충격받은 표정과 별개로, 여전히 불신에 가득 찬 말을 뱉었다. 


“당신이 여주 남편이라고? 거짓말하지 마. 그냥 어떻게 하다 보니까 특징 몇 가지 알게 된 거겠지.”

“그럼 네가 모르는 거 하나 알려 줄게.”

“….”

“여주가 너 많이 좋아해. 내가 너랑 여주 사이 오해하는데도 변명 한마디 안 할 만큼.”

“….”

“널 이야기하려면 자기 바닥을 보여야 해서 너무 괴롭대.”


지민은 숨도 쉬지 않는 듯했다. 그대로 굳어 버려 한참을 눈만 깜빡이다가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여주가 자신을 바닥이라고 표현했다는 건, 그의 마음을 온전히 다 드러낸 것이라는 걸 잘 알았다. 여주 본인을 제외한 남에겐 절대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았다. 정국 입에서 지민과 여주의 과거 이야기가 나온 순간, 지민은 정국이 남편이라는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믿기지 않아도 그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여주가 순간의 감정에 취해 자신의 바닥을 내보일 리 없었다. 여주는 털어놔도 된다고 타이르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도 항상 괜찮다며 웃기만 했다. 그런 여주가 지민 이야기를 했다는 건 상대가 특별하다는 뜻이었다. 정확히 남편인 것까지는 몰라도, 정국이 여주와 매우 긴밀한 사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하지만 지민은 그러면서도 혼란스러운 머릿속이 쉽사리 정리가 안 됐다. 계속 같은 질문이 맴돌았다.

‘왜? 전정국한테 그런 얘기를 왜 했어? 진짜 전정국이 네 남편이야? 그럼 왜 나한테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않았어? 여주야. 너 여전히 무서운 거야?’

순식간에 차오른 눈물이 행여 떨어질까 입술을 물어 보아도, 애석하게 눈물은 한 방울 두 방울 테이블 위로 뚝뚝 떨어졌다.

‘날 이야기하려면 바닥을 보여야 한다고. 그게 너무 괴롭다고.’

지민은 정국의 말을 곱씹으며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사람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속일 거면 평생 속이든지. 저한테 갑자기 그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뭐예요.”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뱉은 지민의 말에, 정국이 소주를 한 잔 더 털어 넣으며 어딘지 모를 곳을 바라보았다.


“나한테 비밀이라는 건….”

“….”

“사랑한다는 뜻이거든.”

“….”

“사랑하는 사람을 괴롭게 하면서까지 비밀이고 싶진 않으니까.”

“….”

“그리고 네가 좀 믿을 만한 사람인 것 같아서.”


푹 떨군 고개를 간신히 들어 새빨개진 눈으로 정국을 바라본 지민이 울음을 참지 못해 어깨를 들썩였다.


“여주가 정말 그랬어요? 날 떠올리면 괴롭대요?”


애원하는 듯한 지민의 말에 정국 역시 표정이 조금 굳었다. 얼마 전 추모관에서 주저앉아 오열하던 지민이 생각나 작게 한숨을 내쉬는 정국이었다.


“응. 근데.”


조금 끊어지듯 정국의 말이 이어지고, 한참 만에 눈을 맞추며 나지막이 문장을 완성했다.


“너를 보고 싶어 했어. 내내.”


지민은 정국이 보든 말든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소리 내며 서럽게 울었다. 슬픈 것보다 괴로워하는 마음이 더 커 보였다. 자꾸 힘을 잃는 몸을 테이블에 기댄 지민이, 지난 세월 차곡차곡 쌓인 설움을 토해 내는 듯 제 허벅지를 세게 쥐었다.


“미련한 것, 나쁜 것, 나한테도 한마디 말도 없이…. 괜찮다고 했으면서, 괜찮으니까 내 걱정만 하라면서. 왜 괴로워해. 대체 왜 아직도 못 벗어나.”


엉엉 소리 내는 지민을 보다 못한 정국이 곧장 휴지를 몇 장 뽑아 건네니, 지민은 몸을 가누지 못해 휘청이며 눈물을 벅벅 닦았다. 정국은 그런 지민을 빤히 보며 테이블 위로 팔을 올려 턱을 괴었다.


“너 우는 거 보니까 난 알겠는데. 여주가 왜 말 안 했는지.”


담담한 정국의 말에 지민이 빨개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국은 가벼운 실소를 터트리며 지민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였다.


“울지 마. 너 울면 여주 마음 찢어져.”

“….”

“그리고 앞으로 함부로 안지도 마.”

“….”

“그럼 형이라고 부르는 거 허락해 줄게.”



이어지는 내용이 궁금하세요? 포스트를 구매하고 이어지는 내용을 감상해보세요.

  • 텍스트 1 공백 제외
100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