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 비문 무시







“드디어 깨어났군.”

청년이 깨어난 협탁 위에 수건과 편지 칼을 내려둔 붉은 머리 신부가 말했다. 그 목소리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남청색 머리 청년이 신부를 올려다보았다.

“당신은.”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아 잠긴 목소리가 볼품없었으나 다행히도 그 목소리가 더 흘러나오는 일은 없었다. 신부의 기이하도록 날카로운 손톱이 청년의 목을 틀어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청년이 숨을 들이켰다.

“피차 진명(眞名)을 밝혀서 좋을 건 없으니 대답해줄 생각은 없어. 다만 한 가지 묻도록 하지.”

.”

“이곳에 나타난 목적이 뭐지?”

공간의 온도를 한없이 차갑게 만드는 낮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청년의 목을 틀어쥔 손은 그와 대비되어 무척이나 뜨거웠다. 마치 손 전체가 타오르는 불길과도 같았다. 그 극명한 온도 차를 동시에 온몸으로 받아내는 청년은 닭살이 이는 몸을 떨면서 동시에 미간에 희미하게 맺히기 시작한 땀을 느꼈다.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는 아주 약하게 목을 압박해오는 단단한 손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윽.”

“틀렸어.”

대답을 끝마치기도 전에 방금과는 비교하지 못할 악력이 목을 거세게 틀어쥐었다. 청년의 얼굴이 금세 붉게 번져갔다. 어마어마한 힘을 쓰면서도 낯빛 하나 바꾸지 않은 평온한 얼굴을 한 신부가 다시금 물었다.

“다시 묻겠다. 이곳에 나타난 목적이 뭐지? 참고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수작을 부리면 부릴수록 네 명줄은 앞당겨 지기만 할 거다.”

금방이라도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것 같은 무자비한 행동하면서도 진실만을 말하는 것 같은 올곧은 두 눈이 청년을 담고 있었다. 순간 이대로 이 이름 모를 자의 손에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신부의 붉은 눈동자 사이에 괴로운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는 자신이 모습이 보인 순간 청년의 생각이 다시금 뒤집어졌다. 살기 위해 죄어오는 숨통에도 어떻게든 숨 줄기를 찾아 헐떡이는 추한 모습.

그래, 어찌하여 자신이 여기까지 왔는가. 그것은 살기 위해서였다. 오직 살기 위해 동포들을 목을 베었고 그들의 시체를 발아래 으깨며 살아남았다. 그런 주제에 이렇게 쉽게 목숨을 버릴 생각을 하다니.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다. 많은 희생을 내고 살아남았다. 그러니 자신은 살아야 했다.

결코 이렇게 허망하게 죽음을 맞이해서는 안 된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가려진 오른쪽 눈에 품은 희망에서 목에서 느껴지는 통증보다도 더 한 고통이 일었다. 순간 잠자코 목을 내어주던 것이 우습게도 강한 힘이 청년에게서 흘러나왔다.

탁, 신부의 손이 거세게 밀려났다. 날카로운 손톱이 청년의 목을 길게 베었다.

콜록콜록. 청년은 단번에 목구멍을 타고 밀려들어 오는 공기가 버거웠는지 한동안 기침을 해댔다. 드러난 한쪽 눈과 입에서 맑은 액체가 흘렀다. 신부는 자신이 밀려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 크게 헐떡이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 한 시선을 하고 청년이 진정하기를 마냥 ‘기다려주는’ 듯했다.

이윽고 기침이 잦아들고 고른 숨을 내쉴 수 있게 된 청년이 잔뜩 힘이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살고 싶어서. 그래서 왔어.”

“어째서지?”

하, 청년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날카로운 시선에 신부에게 닿았다 곧장 떨어졌다.

“당신도 알잖아. ‘우리’ 같은 것들은 죽음과도 같은 상황이 오면 살기 위해 더 강한 기운에 본능적으로 끌려간다는 걸. 그래서야. 나는 살고 싶었고 우연히도 멀지 않은 곳에 당신이 있었을 뿐. 그게 전부야.”

“흠.”

청년의 대답에 신부가 가늘게 눈을 뜨며 신음했다. 그리고 이내 협탁 옆에 편지 칼을 쥐고 천천히 청년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청년을 향해 다시금 질문했다. 회복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몸으로 자신을 뿌리치느라 많은 힘을 써 곧 쓰러질 듯 한 몸에 어느 정도의 힘이 남았을지 가늠해보며.

“자세한 사정은 나중에 들어봐야겠지만 일단은 납득했다. 그러니 이제 보여줄 차례야. 할 수 있나?”

.”

신부의 말에 청년을 고개를 끄덕였다. 청년의 드러난 왼쪽 눈이 감겼다. 이어 크게 심호흡을 한 청년의 주위로 검은 안개가 몰려들었다. 안개는 빠르게 청년의 몸 전체를 휘감았다. 이윽고 안개 사이로 삐죽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두 쌍의 검은 날개였다. 펄럭, 검은 날개가 짧게 날갯짓을 하자 서서히 안개가 흩어졌다.

그리고 드러난 것은 볼품없이 헤진 옷을 입고 있던 마른 인간 청년의 모습이 아니었다. 꽤 고급스러운 정장과 한쪽으로 늘어뜨린, 다소 푸석하지만 은은한 윤기가 도는 남청색 머리카락. 머리 양 끝에 돋아난 검은 뿔. 등 뒤에 돋아난 검은 날개.

청년의 정체를 파악한 신부가 태연하게 말했다.

“역시 악마였군.”

“알고 있었으면서 굳이 확인까지 해야 했나.”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비죽 청년의 입에서 투덜거림이 흘러나왔으나 신부는 들은 체도 안 하며 청년이었던 악마에게로 다가갔다.

“뭐든 확실하게 해두는 것이 좋지.”

그렇게 말하며 악마 앞에 선 신부가 편지 칼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거침없이 반대편 손의 검지를 베었다. 툭, 손에 들려있던 편지 칼이 떨어지고 칼에 베인 검지에 긴 상흔이 생기며 붉은 액체가 흘러나왔다. 신부는 무언가 입 속으로 잔뜩 불만을 토하고 있는 보이는 악마의 턱을 들어 올렸다. 살짝 벌어진 입 속으로 신부의 멀쩡한 엄지가 들어찼다.

갑자기 고개가 들린 것도 모자라 입안으로 불쑥 들어온 손에 악마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코앞에 내민 무언가에 순간 악마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였다. 그리고 마치 예상이라도 한 듯, 신부와 벌써 아물어가는 검지에서 뚝뚝 흘러나오는 피를 번갈아보는 악마를 향해 신부가 말했다.

“벌려.”

저항 없이 벌려진 악마의 입 속으로 붉은 액체가 뚝뚝 떨어져 모습을 감췄다.

추웁춥. 붉은 혀가 기다랗고 하얀 손가락을 빠는 소리가 방안을 적셨다. 이미 손가락에 난 상처는 아문지 오래였고 더 이상 피가 흘러나오지 않은지가 한참 되었건만 악마는 신부의 손을 틀어쥔 채 열심히 손가락을 빨고 있었다. 이지가 사라진 혼탁한 눈동자를 보아 단 몇 방울에도 몸 속 가득 채우는 힘에 취해 버린 듯했다.

그 사이 신부는 악마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돋아난 날개와 뿔의 상태. 몸을 휘감은 옷 등을 보아 분명 하등계급의 것은 아니었다. 못해도 그 세계에서는 꽤 귀한 신분을 하고 있었을 자가 어째서 그런 큰 상처를 입고 겨우 동물의 형태만을 빌려서 이런 촌구석까지 흘러들어온 것일까. 의문이 생긴 신부가 남은 손으로 턱을 괸 채 생각에 빠졌다.

분명 이 악마는 살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들의 세계를 잘 알지 못하는 신부로서는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어쩔 수 없나.’

혼자 생각을 이어가봤자 의미 없는 시간 낭비에 불과할 것이다.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로 한 것도 있으니 슬슬 이 의미 없는 행위를 끝내고 악마의 사정을 들어볼 차례였다. 그리고 그 사정이 무엇인가에 따라 저 악마의 생사가 갈릴 것이다. 의식을 차리게 하기 위해 까마귀의 모습을 한 그날부터 내내 나눠준 자신의 피가 아깝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악마의 존재가 이 마을의 ‘위협’이 된다면 신부로서는 그를 살려둘 수 없었다.

“으음.”

신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른 채 여전히 본능에 취해 목을 울리며 손가락을 빠는 악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신부의 머릿속에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잠깐 스쳤다가 자취를 감추었다. 아깝다라. 무엇이 아깝다는 것일까. 오랜 시간 홀로 보내온 시간 동안 외로움이라도 느꼈던 것인가? 어처구니없는 생각에 낮게 코웃음을 친 후 악마에게 들린 손을 빼내었다.

축축한 타액이 묻은 검지를 잠깐 내려다 본 후 악마의 눈앞에서 딱, 엄지와 중지를 마찰시켜 큰 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풀려있던 악마의 눈이 서서히 원래의 빛을 찾아가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악마가 코앞의 신부와 그 신부의 흠뻑 젖은 검지. 그리고 그 검지를 적셨을 게 분명한 축축한 자신의 입술을 느끼고는 살짝 볼을 붉힌 채 뒤로 물러섰다.

“본능. 본능 때문이니까.”

보란 듯이 악마가 보는 앞에서 수건으로 손을 닦아낸 신부가 팔짱을 낀 채 악마를 바라보았다. 그 질긴 시선에 민망함에 움츠러들었던 악마가 신부를 향해 곁눈질을 해왔다. 내내 관찰자의 얼굴을 한 신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슬슬 말해줘야겠어. 네가 가진 그 자세한 사정.”

나직한 목소리에 순식간에 방 안 공기가 바뀌었다. 상기되어 있던 뺨이 빠르게 식었고 악마의 얼굴 위로 급격하게 어두운 그림자가 졌다. 깊게 들여다보지 않아도 분명 복잡한 사정이 있음을 예측할 수 있었다.

저 자의 말을 다 들은 후 자신은 저자의 숨통을 끊어야 하는 상황이 올 것인가?

신부는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고민에 빠진 악마를 기다려 줄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 굳게 닫혀있던 악마의 입술이 드디어 열렸다. 악마의 시선이 신부의 검은 사제복을 향했다.

“당신은 첫 순간에 내 정체를 알아챘지. 분명 나와 ‘같지만’ 어딘가 달라. 그러니까 물을게.”

“역으로 질문을 해도 된다고 말한 적은 없었지만, 그 질문이 내 질문에 대한 답을 위해 필요하다면 말해주지. 적어도 인간들이 지어낸 성경 속 이야기와 실제가 다르다는 것 정도는 알아.”

.”

또다시 악마의 시선이 신부의 얼굴에서 사제복으로 떨어졌다. 그의 눈썹이 기묘하게 일그러졌으나 신부는 아랑곳하지 않고 악마를 재촉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꽤나 이야기가 길어질 수도 .”

“본론만. 짧게.”

신부의 대답에 악마의 얼굴에 불만이 떠올랐다 이내 자취를 감췄다. 무언가 항의하려다 포기라도 한 듯 악마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곧 그토록 신부가 듣고 싶었던 사정의 첫 마디가 시작되었다.

나는 일족의 ‘배신자’야.”

-

세상을 한 꺼풀 벗겨보면 그곳엔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껍질 안의 세상이다.

빛과 어둠의 균형, 정돈된 규율, 생명력이 넘치는 세상에서 사는 이들. 인간은 신이 가장 사랑하는 피조물이다. 짧은 생을 살면서 가장 나약한 존재. 신은 그들을 불쌍히 여겨 지상 위에 다른 종족을 밀어내고 그들을 위한 터전을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인간에게 밀려난 이들은 자연스럽게 지하, 오직 어둠만이 존재하는 세계로 향했다. 빛이 없는 세상에 생명력은 없었다. 척박한 땅으로 내몰린 이들은 신을 원망했다. 반기를 드는 일도 있었다. 허나 자신의 힘을 믿고 신에게 발톱을 드러낸 이들은 모두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졌다. 제 아무리 강력한 힘을 가졌다 한들 그들도 결국 창조주의 엄중한 신벌 아래에 허무하게 지는 피조물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다만 그들의 희생이 마냥 헛된 것은 아니었다. 신은 자신에게 맞서려 한 이들을 절멸하는 대신 그들 역시 불쌍히 여겨 한 줌의 자비를 베풀었다. 척박한 땅에 새로운 양식을 얻고 터전을 이루고 살아가야 할 이들에게 인간 세상의 일부를 나누어 준 것이었다.

바로 인간 그 자체를.

신의 기준에 크게 거스르지 않을 정도라면 인간의 감정, 피, 육신 심지어 영혼을 취하는 것조차 눈감아 주기로 한 것이었다. 지금, 이 순간 인간의 역사에 돌연 찾아오는 광기, 살육, 역병, 재난은 대게 우리가 살기 위해 취한 것들의 결과였다.

그렇다. 신의 안배라는 것은 보통 이런 것이다. 열등한 존재는 감히 이해할 수 없는 공평하고 잔혹한 자비. 하지만 그것에라도 빌붙어 연명해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살아가기엔 부족했다. 땅 아래로 밀려난 존재들은 다양했다. 흔히 인간들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세상의 악(惡)을 대표하는 존재들. 온갖 마수와 괴수들은 오직 살아남기 위해 싸웠다고 했다. 무한한 것은 오직 어둠뿐인 곳에서마저 본인들이 더 많은 이득을 취하기 위한 욕심과 욕망을 앞세워 치열하게.

최종적으로 승리의 깃발을 잡은 것은 청년. 즉, 인간들에게 악마라고 불리는 종족 들이었다. 개체끼리의 전투였다면 다른 종족에 비해 형편없는 무력을 지녔지만 그들은 감정과 영혼을 뒤흔드는 데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간계를 부리는 세 치 혀로 분란을 조장하여 판을 뒤흔들고 가장 적은 피를 묻혀 승리했다.

그렇기에 최약체였음에도 영광스러운 승리와 그에 따른 넓은 영토를 차지한 이들은 지금 이 순간, 자신들이 가진 그 타고난 재능으로 인해 자멸의 길을 걷고 있었다.

악마는 말했다.

“우리가 분열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현상이야. 오히려 지금까지 하나의 집단을 이루며 존재해 온 게 이상한 일이지. 이번 대의 왕은 너무나도 부족하고 어리석은 자였어. 우두머리가 능력이 없으면 자연스레 아래에서부터 불만이 흘러나와.”

자조적으로 웃는 악마의 모습을 신부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악마 역시 이야기의 호응을 바라는 것이 아니었기에 지체 없이 말을 이었다.

“힘을 잃은 왕권 아래 세력이 갈렸고 내분이 일어나는 건 순식간이었어. 왕은 숙청당하고 주인을 잃은 왕관을 차지하기 위한 전투에서. 나는 나의 일족을 배신했어.”

“배신이라면?”

그냥 흔한 이야기야. 궁지에 몰린 비겁자가 목숨을 건지기 위해 적에게 아군의 기밀을 모두 실토했다든가 하는.”

아는 게 많은 듯 없는 것 같은 신부에게 간략한 과거의 이야기와 사정을 들려준 악마를 신부는 표정 변화 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서슴없이 내리꽂히는 한 쌍의 붉은 눈에 악마의 고개가 비스듬히 떨어졌다. 그리고는 한층 더 작아진 목소리가 힘없이 따라붙었다.

“내 배신으로 일족은 괴멸에 가깝게 무너졌고. 배신자의 낙인은 그렇게 찍혔어. 그리고 그렇게 구걸해서 얻은 목숨이 이번에는 내 옛 동포들의 손에 날아갈 뻔했지. 하지만 가까스로 도망쳤고. 살고자 하는 본능이 여기로 나를 이끌었어. 나보다 더 강한 힘을 찾아서.”

“구차한 이야기군.”

.”

냉정한 평가에 악마의 조금 더 힘없이 떨어졌다. 본인이 들어도 구차했고 또 최악이었다. 단순히 비겁자의 질 낮은 사정이 전부가 아니었다. 악마의 이야기는 위험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위협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잃은 자들은 그 분노를 돌릴 자를 필요로 하고 결코 그자를 쉽게 놔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신부에게 매우 귀찮은 일이 될 것이다. 신부가 직접적으로 말한 적은 없으나 추궁을 한 이유야 뻔했다. 만약 악마가 해결할 수 없는 선의 골치 아픈 일에 연루되어있고 그로 인해 어떠한 형태로든 피해가 온다면. 신부는 악마를 죽일 생각이었다.

악마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도망치지 않은 것은 일종의 도박이었다. 혹시나 하는 자비를 바란 것이었다. 자신에게 그대로 내리꽂히는 서늘한 시선을 보기 전까지는. 악마는 그저 단념했다. 어쩌면 곱게 죽을 수 없을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그럼에도 쉽게 죽어주지는 않으리라. 마지막 발악이 될 반격을 위해 잔뜩 몸에 힘을 뺀 채 기회를 엿보았다.

신부가 조금의 틈을 내보인다면 그를 할퀴고 최대한 멀리 도망치리라. 그가 준 힘을 최대한 끌어모아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악마의 머리 위로 신부의 고저 없는 목소리가 떨어졌다.

“그들은 어떻게 됐지?”

누구를 말하는 거야?”

“널 쫓던 이들. 그자들은 모두 죽인 후에 도망친 건가?”

뜻밖의 질문에 악마의 고개가 번쩍 치켜 올라갔다. 신분은 어안이 벙벙한 악마의 얼굴을 보다 이내 어질러진 피 묻은 편지 칼과 수건 따위를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신부의 태연한 행동에 악마가 뒤늦게 대답했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아마. 지점도 여기서 한참 떨어진 곳이고.”

“널 발견한 장소는 이 성당 뒤쪽 숲인데 중간에 기절 건가?”

전혀 예상치 못한 희망에 슬금슬금 기색을 되찾아가던 악마의 얼굴이 순간 흐려졌다. 그리고 이내 악마의 드러난 양쪽 귓바퀴가 살짝 붉어졌다. 신부는 그것을 힐끔 보다 다시 손을 놀렸다. 나름 조심한다고 했는데, 저자를 돌보는 동안 이곳저곳에 피가 많이 튀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딱딱하게 굳어 잘 닦이지 않는 핏자국을 힘주어 닦는 중에 기어들어 가는 악마의 목소리가 귓가에 스쳤다.

“벼락.”

일순 내내 건조하던 신부의 얼굴의 흥미가 돋아난 것을 악마는 보았다. 제대로 말해보라는 듯 악마가 있는 쪽 방향으로 몸까지 튼 신부가 고개를 까닥였다. 그 어울리지 않는 능청스러운 행동에 악마가 입술을 짓씹으며 대답했다.

“벼락에 맞았.”

수치스러움을 느끼는 동시에 벼락이 몸을 꿰뚫었을 때의 끔찍한 감각이 다시금 온몸을 전율시킬 때였다. 예상한 목소리의 신부가 말했다.

“대충 짐작하고 있었어. 그날 밤, 나는 아주 큰 벼락이 내리쳤을 때 나는 천둥소리를 들었고 너를 발견한 자리에 나무는 새까맣게 타 있었거든.”

“알고도 굳이 말을 꺼내게 만드는 걸 보니 보기보다 성격이 좋지 않네.”

“척 봐도 좋아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해.”

.”

스스로에게도 가차 없이 박한 평가를 하는 신부에 할 말이 없어진 것은 이번에도 악마였다. 그런 악마에게 신부는 또다시 질문했다.

“그래서 고통스러웠나?”

너무나도 빤한 질문이었다. 큰 부상을 달고 목숨만 겨우 부지한 채 가까스로 금수로 변해가면서까지 도망치다 맞은 벼락이었다. 그게 어떻게 고통스럽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단 한 순간이었지만 악마는 자신의 죽음을 잠시나마 엿본 기분이었다. 순간 당연한 거 아니냐며 울컥하여 날 선 목소리가 나갈 뻔했다. 다행히 빠르게 이어진 신부의 말에 삼켜졌지만.

“흔히들 벼락은 신의 징벌을 뜻하지. 고대부터 내려져 온 성서나 여러 고문서들에서 말이야.”

신부는 그렇게 말하며 물수건을 담가두던 제법 깊이가 있는 은쟁반 위로 차곡차곡 물건들을 쌓았다. 다양한 물건을 쓰러지지 않게 균형 있게 쌓는 솜씨에 악마의 눈길이 자연스럽게 그쪽을 향했다. 귀는 여전히 신부의 목소리를 향해 열린 채. 그런 악마의 상태를 알기라도 하는 듯 신부가 쟁반을 들고 방을 나가며 말했다. 쟁반을 따라 움직이는 시선이 어느새 신부의 뒷모습에 고정되었다.

“그렇다면 넌 이미 신에 의해 너의 죗값에 걸맞은 벌을 받은 거고 나는 신의 말을 따르는 자로서 그분의 단죄가 끝난 이에게 더 이상 손을 댈 생각이 없어.”

그 말과 동시에 문이 닫혔다. 홀로 남은 악마의 눈이 한껏 커졌다가 아주 느린 속도로 감겼다 열리기를 반복했다. 이윽고 악마는 동강 나지 않고 그대로 머리가 붙어 있는 목덜미를 손으로 쓸었다.

“살았구나.”

솔직히 말자 하면 신부가 자신의 사연을 다 듣고도 곧장 죽이지 않은 것에 약간의 희망을 가졌었다. 하지만 그의 손에 편지 칼을 쥐어지고 있는 동안 쉬이 안심을 하지 못한 것도 맞았다.

조금만 수가 틀리면 그 작은 칼날이 악마의 목을 가차 없이 긁어버렸을 것이라 생각했다. 완전한 안심을 취한 지금에 와서야 생각해보면 악마의 목을 가를 생각이었다면 종이를 뜯을 때나 쓰는 날붙이보다 더 길고 예리하게 벼려진 신부의 손톱이 더 유용했을 텐데 말이다.

비실 웃음이 흘러나옴과 동시에 긴장의 끈을 완전히 놓아버린 몸이 침대 위로 쏟아졌다. 온몸이 통증으로 욱신거렸지만 악마는 고통을 잊은 것 같은 얼굴로 굳게 닫힌 문, 그 너머의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느슨해진 얼굴에 서서히 평온히 스며들었다. 이내 스르륵, 기다란 속눈썹이 내려앉으며 악마의 눈이 감겼다.

-

뉘엿이 지는 해가 흩뿌리는 주홍빛 석양에 악마가 눈을 떴다. 방 안에는 그 흔한 벽시계조차 없었기에 악마는 모서리에 금이 간 창문 밖의 태양을 보며 시간을 가늠할 뿐이었다. 뚜렷한 절기가 존재하지 않는 지하의 세계와 달리 인간의 세계는 계절이 존재한다.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과 양 뺨을 홧홧하게 만드는 저녁놀의 열기를 보아 지금은 아마 ‘여름’이라는 계절인 것 같았다.

악마는 거의 평생의 가까운 세월을 지하에서 살아왔기에 인간 세계에 관한 것은 이따금 ‘양식’을 얻으러 가는 동포들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 혹은 서적에서 얻은 얕은 지식이 전부였다. 마치 이 성당 어딘가에 있을 신부처럼.

“이게 여름이구나.”

지금 방안에 스며든 온화한 빛 대신 타들어 가는 고통을 주는 징벌의 화염을 제외한 따뜻한 온기가 없는 지하에서는 느껴본 적 없는 포근함에 악마는 목덜미에 끈덕지게 달라붙은 머리카락의 불쾌한 감각마저 기껍게 여기며 미소 지었다. 기분이 좋았다. 이 즐거이 붕 뜬 기분은 이 따스한 햇살 때문일까. 아니면 살아남았다는 기쁨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무렴 좋았다. 악마는 그저 오랜만에 찾은 작은 행복을 만끽할 뿐이었다. 별안간 건물 전체를 울리는 기다란 종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종소리는 길게 그러나 규칙적으로 6번을 울리고는 멈췄다. 얼추 예상한 것과 비슷한 시간대였다. 거기까지 생각한 악마는 침대에 비비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기다랗게 뻗은 팔다리를 쭉 늘리며 기지개를 켜자 악마의 머리 위에 등 뒤에 존재감을 드러내던 뿔과 날개가 사라졌다.

악마의 몸을 두르고 있던 고급 정장 역시 자취를 감추고 평범한 하얀 셔츠와 검은 바지가 악마의 몸 위에 덧입혀졌다. 시계는 없지만 얼룩진 거울은 방에서 자신의 모습을 재차 확인한 악마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문고리를 돌리는 순간, 혹시 그 신부에게 허락을 받았어야 했을까. 짧게 생각이 스쳤지만 고개를 저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신부가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을 쓸 위인은 아니라는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늘어선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갔다. 발을 딛을 때마다 나무 계단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정도면 보수 공사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자칫 잘못하면 큰 사고가 날 것 같아.”

인간의 감정과 영혼을 뜯어먹고 사는 종족인 주제에 인간을 걱정하는 소리를 하는 것이 웃겨 악마가 말을 하다 말고 피식 웃었다. 그러다 문득 건물 안이 몹시 고요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신부가 있기에 당연히 이 건물을 성당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곳곳에서 이곳이 성당이라는 것을 방증하는 소품들이 보여서 확신했다. 하지만 대게 성당이라는 곳은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라고 알고 있는 악마의 입장에서는 의아할 따름이었다. 예배 시간이 아닌 건가? 그런 의문을 가지며 예배당이 있는 1층으로 내려온 순간, 악마는 이곳이 왜 이토록 고요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낡은 것에 비해 제법 크기가 큰 성당 안 예배당은 텅 비어있었다. 가장 앞줄 정 가운데에 자리 한 붉은 머리의 신부를 제외하고는.

신부는 가볍게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이 적막한 공간에서 홀로 앉아 기도를 드리는 모습은. 가히 성스러움 그 자체였다. 신부가 내면에 품은 짐승을 알면서도 악마는 순간 경이로움에 짧게 경탄했다.

그리고 그 소리에 미동조차 없이 기도를 올리고 있던 신부가 낮췄던 몸을 일으킨 후 계단 중간쯤 애매하게 걸쳐있는 악마를 바라보았다. 가라앉은 붉은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자 악마가 어색하게 웃으며 마저 계단을 내려왔다. 잠깐의 방황을 하다 악마는 신부의 곁으로 가는 것을 선택했다.

털썩, 조심성 없는 소리가 옆에서 들려오자 신부가 아는 체를 해왔다.

“더 오래 자다 깰 줄 알았는데.”

꽤 오랜 시간 말을 하지 않았던 모양인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악마는 애꿎은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내 꼴이 지금 이래서 그렇지. 나 사실 그렇게 약하지 않아.”

“알아. 진짜 약했다면 여기까지 도망 오지도 못했을 테니까.”

그리고 당신이 준 힘의 영향도 있고.”

악마는 신부가 자신의 검지를 베어가며 넘겨주던 피의 비리지만 그만큼 달콤했던 맛 떠올렸다. 혈액이라는 매개로 자신의 힘을 나누어줄 수 있는 존재. 악마는 어렴풋이 떠오르는 신부의 정체를 목구멍 속으로 삼키며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여기 사람이 없네. 지금 예배 시간이 아니라 그런가?”

“아니. 여기는 원래 사람이 없어. 물론 아주 오래 전, 이렇게 낡아빠진 건물이 새것처럼 반짝이던 시절엔 밤이고 낮이고 사람들로 북적였었지.”

“그런데?”

신부는 악마의 물음이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해 성당 바닥을 찬란하게 물들인 색채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신부를 악마는 재촉하지 않았다. 아니 재촉할 필요도 없이 짧은 기다림이 지나고 신부가 대답을 들려주었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삶은 짧은 만큼 빠르지. 하나의 마을이 쇠락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아. 고작 두 세기라는 찰나의 시간은 번성하던 마을을 곧 명줄이 다할 소수의 노인들만이 남은 죽음의 마을로 만드는데 충분한 시간이야.”

.”

“이곳은 원래도 민가와 제법 떨어진 곳이었지. 그래도 마을의 인구가 많을 때는 그런 거리를 따지는 사람들이 없었어. 3층과 4층의 많은 방들은 이곳에 일하던 노동자들과 사제들을 품었고 그들이 집전하는 예배를 듣기 위해 아이부터 노인까지 예배 시간이 되면 이곳을 찾아 신께 기도를 올렸지.”

하지만 모두 옛일이다. 신부와 악마에게는 그 흐름조차 느끼기 힘들 정도로 순간. 악마는 신부의 두 눈동자와 마주치자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해버렸다.

“그런데도 용케 나를 받아줬네.”

성당의 근처 마을은 더 이상 자체적으로 치안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노쇠한 곳이었다. 그런 곳에 악마, 자신과도 같은 존재가 있다는 것은 긴말이 필요치 않을 정도로 위험한 일이었다. 언제 그들이 악마를 찾아내어 죽일지 모르니까. 그 과정에서 힘없는 인간들의 희생은 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악마는 옛일을 회상하던 신부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는 아마 저 아래 마을을 제법 아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악마가 눈을 뜬 바로 직후 어떠한 것에 대한 위협이 된다고 판단이 설 시 즉시 처단하려고 했을 정도니까. 염치라는 것이 악마의 가슴께를 짓눌렀다.

“불안해 할 필요 없어. 나를 얼마나 신뢰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한 번 뱉은 말을 바꾸지 않아.”

“아니. 나는 나보다.”

악마의 불안을 신부는 나름대로 해석을 했던 모양이었다. 실로 양심이 쑤셔와 악마가 서둘러 변명을 하려 하는 순간. 신부가 한쪽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웃는 건가? 신부의 표정을 마주한 악마의 얼굴에 작은 경악이 서렸다. 하지만 신부는 아랑곳 않고 말했다.

“네 손에도 나가떨어지는 녀석들을 내가 처리하지 못할 리가 없고.”

.”

어쩐지 쩌적, 하고 자존심에 크게 금이 간 듯 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악마는 덤덤한 목소리와 어울리지 않는 거만하기 짝이 없는 신부의 얼굴 그 사이에서 묘한 괴리감을 느끼는 한편 안심했다. 확실히 저자라면 믿을 수 있을 거 같았다. 힘의 법칙이 우선이 되는 존재들은 그게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무의식적으로 강한 자에게 끌리는 습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악마니 뭐니 하는 종족을 뛰어넘는 본능이었다.

악마는 강력한 힘에 끌려 이곳으로 흘러들어왔다. 그리고 예상대로 눈앞의 신부는 범상치 않은 힘을 가진 것이 분명했다.

‘이 자라면.’

악마는 감히 신뢰라는 단어를 가슴에 품었다. 그 대상인 신부는 눈치채지 못하도록 아주 비밀스럽게.

대체 얼마나 그에 대해 잘 안다고 무턱대고 믿는 건가. 스스로가 우스워 악마는 다른 대화 주제를 찾기 위해 눈알을 바삐 움직였다. 그때 마침 악마의 시선에 걸린 것이 여전히 굳건히 맞물린 신부의 두 손이었다.

“그나저나 꽤나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던데 뭘 빌고 있었던 거야? 역시 그 노인들만 남은 마을의 평화인가?”

신부에 대해 아는 것이 없기에 악마가 추론할 수 있는 것은 그 정도였다. 그래도 딱히 입에 올려서 그를 불쾌하게 할 만한 주제는 아니기에 운을 띄운 악마에게 신부는 뜻밖의 대답을 돌려주었다.

“빌지 않아. 아무것도.”

“뭐?”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악마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 반응을 예상했는지 신부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돌려 단상 너머 거대한 십자가를 바라보았다. 대충 보았을 때는 보이지 않던 군데군데 검게 슨 녹이 보였다. 전혀 관리가 되어있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악마의 입술이 놀라움으로 벌어졌다. 아무도 없는, 그리고 오지 않는 성당을 지키며 홀로 기도를 올리던 그 성스럽게만 보이던 모든 장면이 지금 이 순간 악마의 머릿속에서 조금씩 비틀린 채 떠올랐다. 이내 벌어진 입을 다문 악마가 신부를 바라보았다.

“당신, 생각보다 가여운 사람이네.”

그리고 툭, 악마는 떠올린 말 그대로를 입 밖으로 내던졌다. 십자가를 바라보던 신부의 고개가 악마를 향했다. 신부가 마주한 악마의 시선에는 순수한 동정심이 깔려있었다. 신부가 되물었다.

“어떤 점이?”

“아무것도 빌지 않는다는 것은 바라는 게 없다는 거잖아. 그리고 그 말은 곧 어떤 욕심도, 욕망도 없다는 소리고.”

신부는 반박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말해보라는 듯 악마가 뒤에 이어서 할 말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악마는 그 기대를 충족시켜주기로 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본디 그 크기가 작든 크든 욕망으로 인해 살아가는 거야. 아무런 욕심이 없는 삶은 이미 죽은 삶이나 다름없어.”

“흥. 인간의 욕망을 이용해 영혼까지 갉아먹는 종족다운 소리를 하는군.”

신부는 악마의 동정을 가볍게 무시며 도리어 쓴 소리를 뱉었다. 다만 그런 소리를 하는 신부의 얼굴에 불쾌라는 감정은 떠오르지 않았다. 감정을 잘 갈무리하는 것인가 아니면 진정 아무렇지 않은 것인가. 악마에게는 진실을 알 길이 없었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있었다.

악마는 신부를 따라 다소 어색하게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잠자코 악마의 행동을 지켜보던 신부가 물었다.

“뭘 하려는 거지?”

그에 악마가 능청스럽게 하지만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대신 빌어주려고. 신의 벌을 받은 자의 기도를 들어 줄지는 모르겠지만.”

신부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악마의 행동을 저지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어색하게 손을 맞잡고 눈을 감은 악마의 옆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

길게 우는 밤새의 소리를 따라 숲길을 걷는 신부는 생각했다.

‘욕망이라.’

인간과 다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는 신부조차 멀게만 느껴지는 까마득한 과거에 어쩌면 신부도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적이 있었다. 지금은 바스러지다 못해 흔적조차 남지 않았지만. 신부는 이따금 그때 그 시절을 가늠해보았다. 어린 아이였던 신부의 머리통이 한손에 다 들어갈 만큼 큰 손으로 신부의 머리를 쓰다듬던 따듯한 손의 온기가 희미하게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너무 오래된 과거이다. 이제는 슬슬 그것이 진정 자신의 기억이 맞는지 조차 신부는 헷갈리기 시작했다. 오래된 육신이 멋대로 기억을 가공해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여기 이곳. 낡은 성당을 지키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며 신부는 모든 것을 잊더라도 결코 잊을 수 없는 한 가지를 떠올린다.

온기를 가진 손이 어린 신부에게 남긴 마지막 말. 그 한마디가 신부를 지금까지 오게 만들었다. 다만.

신부는 오랜 시간이 걸려도 답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는 스스로를 향해 낮게 조소하며 걸어 나갔다. 어느새 더욱 더 깊은 숲으로 들어섰다. 한 치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어둠 속. 바스락. 신부가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수풀을 헤치자 길게 울던 밤새가 소리를 그쳤다.

신부가 수풀을 건너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기다란 목을 축 늘어뜨린 채 밭은 숨을 뱉는 늙은 사슴 한 마리가 쓰러져 있었다. 신부의 붉은 눈동자 안에 비치는 사슴의 위로 짙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신부는 천천히 사슴에게 다가갔다. 가여운 짐승이 놀라지 않도록 발소리를 죽여 가며.

신부는 기꺼이 자신의 무릎을 죽어가는 사슴에게 내어주었다. 하얀 손이 사슴의 몸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아직 육신에 미련이 남은 영혼을 달래기라도 하듯이. 불규칙적으로 들썩이던 사슴의 몸이 점차 안정을 찾아가며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한껏 고르게 변한 호흡이지만 신부도 사슴도 알 수 있었다. 지금이야 말로 진정 죽음이 코앞에 있다는 것을.

예감대로 신부의 무릎을 베고 있던 사슴의 목이 사정없이 늘어지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순간 신부는 자신을 향한 사슴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 직후 사슴의 숨이 멎었다. 신부는 눈을 감지 못하고 죽은 사슴의 눈가를 어루만지며 천천히 그 시야를 닫아주었다. 그 행동에 우우-. 하고 밤새가 또다시 길게 울었다. 마치 사슴의 죽음을 애도하듯이.

밤새가 울음소리가 끝날 때까지 신부는 충분한 유예의 시간을 주었다. 따뜻하던 사슴의 몸이 완전히 차갑게 식어가기 직전. 울음소리가 그쳤고 신부는 마지막으로 사슴을 내려다보았다. 이내 시선을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콱.

날카로운 송곳니가 사슴의 목덜미를 꿰뚫었다. 이어 쓰으으으. 무언가를 힘 있게 빨아들이는 듯 한 소리가 사슴과 신부 사이에서 들려나 왔다. 정확히 말해서는 사슴의 목덜미와 신부의 입술이 맞물린 사이에서. 사제복 위로 살짝 드러난 신부의 목울대가 바쁘게 오르고 내렸다.

그렇게 한참이 흘렀다. 죽었으나 그 형체가 훼손된 것은 아니던 사슴이 마치 영겁의 시간을 보낸 것처럼 비쩍 마른 뼈와 가죽만을 남긴 채 쓰러져 있었고. 그 곁에는 조금 젖은 입술을 한 신부가 서 있었다. 신부가 손짓을 하자, 어디에 숨어있었는지 모를 커다란 새 몇 마리가 사슴의 사체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마치 허락을 구하듯 신부를 쳐다보았다. 신부는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허락의 표시를 하고 뒤를 돌아 발걸음을 옮겼다. 신부의 등 뒤로 살점이 뜯기는 질척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무와 수풀이 빼곡한 깊은 숲에서 점차 드문드문 키 작은 나무가 늘어선 숲의 초입으로 돌아올 무렵이었다. 가까운 곳에서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건만 어느새 익숙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보던 짐승이었나?”

신부가 걸음을 멈추고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당연하게도 악마가 서 있었다. 그는 묘한 얼굴을 한 채 신부에게 한 걸음씩 다가왔다. 신부 역시 피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악마가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악마는 걸어오는 내내 대화를 걸어왔다.

“당신 역시 흡혈귀였구나.” “어쩐지 피가 달더라.” “그거 알아? 나 흡혈귀는 처음 봐.” 쉴 새 없이 입을 놀리던 악마가 신부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인간은 건들지 않아?”

“번거로우니까. 나는 너희들과 다르게 정신계를 건드리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져. 한순간 암시를 걸어 피를 취할 수는 있지만 딱 거기까지야. 뒤처리가 깔끔하지 못하지. 그에 반해 짐승은. 비교적 피를 취하기 쉬워서.”

‘효율적이지.’ 신부, 흡혈귀에 대답에 악마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상냥하네.”

칭찬하는 목소리는 악마의 입에서 흘러나왔으나 정작 그 소리는 흡혈귀의 머릿속에서 둔중한 통증을 동반하며 울려 퍼졌다. 흡혈귀는 이것이 바로 눈앞의 악마의 능력인 것을 단번에 알았다. 내내 특이하다 생각한 은구슬 같은 색의 눈동자 위로 별과 닮은 동공이 떠올랐다.

흡혈귀의 시선이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악마의 눈동자에서 움직임을 멈춘 것을 악마는 느꼈다. 악마는 잘게 웃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흡혈귀에게 다가섰다. 살짝 아래에 있는 눈높이가 맞춘 듯 딱 맞았다.

“줄까? 적어도 산짐승의 피보다는 맛이 있을 거라 장담할게.”

악마는 헐겁게 여며진 셔츠 깃을 드러내며 말했다. 붉은 시선이 악마의 눈동자를 타고 길고 매끈하게 뻗은 목덜미로 향했다. 달빛을 받은 구릿빛 피부가 자신을 취할 포식자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 꽤 먹음직스러운 자태로 드러나 있었다. 순간 흡혈귀는 하지 않아도 되는 셈을 해보았다. 자신이 죽거나 혹은 직전의 짐승이 아닌 것의 피를 마지막으로 취한 것이 언제였는지.

그것 역시, 따듯한 손길의 역사만큼 아주 오래된 기억이었다.

죽어가는 피는 결코 따듯하지 않고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깨끗하지 못하다. 하지만 지금껏 흡혈귀에게 피의 양질 따위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꾸준히 인간을 착취한 상급의 피를 통해 힘을 얻고 연명하는 여타 열등한 것들과 달리 사제복을 입은 흡혈귀는 태생의 고귀함을 등에 업고 강력한 힘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였다. 그런 그에게 흡혈이란 행위는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어도 집착의 대상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가여운 짐승을 돌보고 그 대가로 그들의 생이 끝나는 순간, 일종의 거래를 통해 취하는 하급의 피만으로도 흡혈귀는 긴 시간을 살아왔다.

그런 그에게 악마의 빤한 유혹 따위는 통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랬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지금 흡혈귀는 악마의 시답지 않은 제안을 거절하지 않고 갈등하고 있었다. 왜 일까. 저자가 말한 대로 실로 저 악마의 힘이 생각보다 대단한 것이었던 걸까. 아니면.

‘아무런 욕심이 없는 삶은 이미 죽은 삶이나 다름없어.’ 문득 그 순간, 흡혈귀의 뇌리에 오후의 햇살과 함께 들었던 악마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악마의 속삭임에 걸려 느리게 굴러가는 머리로 흡혈귀는 고민에 빠졌다.

그때, 흡혈귀의 머릿속으로 또다시 울림이 퍼져나갔다.

“구실이 필요하다면 이건 어때?”

.”

“나를 살려준 대가.”

방금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뇌 전체에 달라붙는 진득한 목소리. 대가라. 듣기 좋은 울림이었다. 흠. 이번엔 흡혈귀의 입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 미소가 악마의 눈에 선명이 새겨졌다. 그리고 얼마의 시차를 두지 않고 따끔을 넘어선 아릿한 통증이 악마의 목덜미 전체로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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