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아의 별 것 아닌 취미는 필기구 수집이었다. 햇수로만 따져도 생긴지 꽤 오래된 취미였다. 

그 시작을 따져보면, 딱히 케이아가 책을 좋아해서라는 이유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어릴 적의 케이아는, 왜인지는 몰라도, 연약하다 못해 병약한 편이었다. 남들은 약 없이도 가뿐하게 나을 작은 감기 하나더라도 케이아가 걸리면 꼼짝 없이 침대에 사흘은 앓아누워있어야 했다. 다행히 크면서 그런 잔병치레가 없어지기는 했다. 지금 와서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려보자면, 그저 낯선 땅의 풍토가 안 맞았겠거려니, 할 따름이었다.

아무튼 그 때의 케이아는 글을 쓰기는 커녕, 펜을 쥐고 앉아있기만 해도 숨이 차는 슬프고 허약한 생물이었다. 펜을 잡고 무언가를 써내려간다는 것은 중노동이나 다름 없었다. 그녀가 입양된 날로부터 2년이 다 지나갈 때도 케이아가 생각하는 '쓰기'란 한 장을 겨우 두 문장으로 채워 흰 종이가 값아까울 수준인 반성문 작성 정도가 전부였다. 

그러나 다이루크가 라겐펜더의 오랜 전통에 따라 사냥조를 기르기 시작했을 때, 케이아가 혹시 가질 소외감을 우려한 양부는 그녀에게도 선물을 하나 주었다. 그건 사냥조가 아니었다. 케이아에게는 다이루크처럼 두터운 팔목 보호대를 끼고 몇 시간씩 들판에 앉아 동물과 교감을 나눌 인내심도 체력도 없었다. 게다가, 솔직히 말해 케이아가 동물 친화적인 성격이라고 보기도 어려웠다.(케이아는 처음 거대한 흑마―지금까지도 주장하길, 그건 일반적인 말이 아니라 기마에 가까웠다―를 봤을 때 경기를 일으키기 전까지 갔었다, 환한 낮이었는데도 말이다.) 만약 새의 발톱에 긁히기라도 한다면 또 어떤가? 다이루크처럼 제대로 대처하기도 힘들 것이었다. 

대신 케이아가 받은 것은 어린아이도 들 수 있을 법한, 그녀의 손힘에 맞춰 특별제작된 가벼운 깃펜이었다. 그것은 비싼 독수리 문양이 눈처럼 새겨져 있었고, 멋드러지게 윤택한 흑색, 갈색, 흰색의 깃은 결코 다이루크의 사냥매에 뒤지지 않았으며, 끝부분의 펜촉은 유일하게 묵직한 금으로 되어있어 사정을 모르는 어린아이라 하더라도 그 값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케이아는 반사적으로 부담스러워하는 것에 뒤이어, 자신이 가지게된 모든 값비싼 원단 옷과 반질거리는 구두를 제쳐두고, 그 깃펜을 자신에게 있어 가장 귀하고 값진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어른스러운 물건이라는 것, 양부가 직접 선물해줬다는 것, 진짜 새는 아니어도 새의 깃털로 된 것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케이아는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 그 뒤로 케이아는 어디든 푹신한 소파와 빈 탁자가 있는 곳이면 냉큼 앉아 빈 종이에 두서 없는 글을 써내려갔다. 물론 그렇게 써댔으니 그 깃펜은 금방 닳아버렸다. 그래도 클립스는 기뻐하며 그 뒤로도 간간히 케이아의 필기구를 교체해주었다. 어쨌든 늘 주눅들어있던 케이아가 무언가에 저리 열성적으로 임한다는 것이 클립스의 눈에는 나쁜 일로 보일 리가 없었다. 그 무렵 케이아는 이미 무언가를 쓰는 것에 있어서 상당히 익숙해진 후였으므로, 더 이상 손에 편한 얇고 가벼운 깃펜만 쓸 필요는 없었지만, 기왕 고른다면 언제나 녹색, 파란색, 흰색, 금색 등으로 휘항찬란한 깃펜들을 주로 골라 번갈아가며 썼다. 

아예 케이아의 방 한 구석에는 그녀의 필적으로만 빼곡히 채워진 노트를 꼽아두는 책장이 따로 있을 정도였다. 책장의 아래에서부터 두 줄 정도는 헌 노트가 가득했다. 내용은 공부, 일기, 필사, 번역, 시, 노래 등 다양했다. 가끔은 다이루크도 함께 그 노트를 채우기도 했다. 중간중간 펼쳐보면 확연히 필적이 다른 문장이 몇 줄 보였는데, 그것들이 대개 다이루크가 옆에서 놀며 쓴 것이었다. 


결국 그것이 취향이 되어, 케이아는 기사단에 입단한 뒤로도 자신의 깃펜 취향을 바꾸지 않았는데,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폰타인에서 제작한 만년필을(몇몇 사람들은 나무에 흑연을 심은 연필을) 쓰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무리 공들여 만든 상급품이라 해도 굳이 깃펜을 고집하는 모습은 번거로움을 나서서 감수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사실 가격대를 생각하면 그녀의 고집은 라겐펜더의 일원으로서 걸맞지 않은 모습이기도 했기에, 실제로도 케이아 또한 외부용으로 묵직한 만년필 하나를 언제나 가슴팍에 챙겨다녀야 했다. 

하지만 케이아의 개인 책상 위를 보면 항상 깃펜이 두어개 씩은 잉크통에 꽂혀있었고, 그것들은 2주 뒤면 항상 종류가 바뀌어, 서무실에 드나드는 기사단원들의 소소한 흥밋거리가 되었다. 가끔은 몬드에서 보기 힘든 외국의 새깃도 무늬나마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커다랗고 예쁜 깃털이 하느작거리며 움직이는 모습은 어디 가서 보기 힘든 만큼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기에, 가끔 타박을 주는 이는 있어도 진지하게 교체를 권하는 이는 많이 없었고, 대부분의 기사단원들은 몇 달이 지나면 서류 한 장을 받아들 때도 케이아가 쓴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금방금방 구분할 수 있었다. 

그 무렵부터 케이아는 항상 장갑을 끼고 다녔다. 아무리 그래도 집에서 취미로 쓰는 양과 직장에서 업무로 쓰는 양이 같을 리가 없었다. 케이아의 손끝은 항상 잉크로 까맣게 물들게 됐는데, 한 번 묻으면 잘 지워지지도 않을 뿐더러 하루에도 몇 번씩 지우는 것이 안 그런 척 고역이었다. 이를 신경쓰던 케이아에게 다이루크는 손을 가릴 용도로 장갑 한 켤레를 선물해주었다…… 가 며칠만에 철회했다. 다이루크는 케이아가 무언가를 가리는데 익숙해지지 않았으면 했다, 그녀는 종종 자신감이 없고 위축된 모습을 보여주지 않던가? 다이루크는 어질러진 손을 감춰줄 비단장갑을 뻇고(케이아는 줬다 뺏어가는 거냐며 어이없어했다, 나름대로의 항의 표시였지만 다이루크는 깔끔히 무시했다.) 펜을 쥐고 있을 때도 방해가 되지 않는, 그리고 더럽혀져도 괜찮은 얇은 검정색 장갑을 대신 또 한 켤레 선물해주었다. 

선물을 어찌 더럽히냐는 불만 섞인 물음에, 옆에서 감시까지 해가며 잔소리해댄 결과, 케이아는 펜을 쥐고 글씨를 쓸 때 얇은 장갑을 끼는 것을 더 이상 어색하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그것에 더 익숙해져버려, 어른이 되고 기병대장으로 승진한 이후로도 케이아는 여전히 습관적으로 대부분의 날에 장갑을 끼고 다녔다. 피는 안 섞였어도 이렇게 보면 그녀도 가족으로부터 참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케이아는 키득키득 웃으며, 애완조의 부리를 가볍게 쓰다듬고 다리에 묶인 편지를 한 번 더 확인차 단단히 묶은 뒤 그것을 날려보냈다.





"고마워, 다이루크. 이렇게 빨리 해결해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펜은 정말로 빠르게 수리되었다. 솔직히 어떻게 그 기간만에 수리가 가능했는지 의문이었다. 구조부터 부품까지 전부 처음 보는 것, 새로 만들어야 하는 것 투성이였을텐데 말이다. 역시 돈일까, 아니면 이름값일까? 뭐가 됐든 이 다운 와이너리에 잡혀 경력직으로 이틀 내내 굴려진 수당치곤 어떻게 불평할 건덕지도 없는 훌륭한 성과였다. 케이아는 웃으며 펜이 든 상자를 건네받아 잘 갈무리해 품에 넣었다. 그녀는 습관적으로 방실거렸다. 


"역시 다운 와이너리의 사장님이야, 일꾼 한사람의 부탁도 이리 정성껏 살펴주시고. 다음에도 또 부탁할 일 있으면 찾아와도 되지?"


짐짓 힘들었다는 투지만, 4년동안 쌩 맨땅에 머리 깨는 식으로 업무를 배워온, 기초를 건너뛰고 응용부터 시작해 와이너리의 재건과 서무장 발탁 모두를 성사시킨 케이아에게, 이 정도의 업무가 힘들리가 없었다. 양만 많을 뿐이었다. 오히려 이틀 만에 펜 수리를 끝낸 게 훨씬 더 대단하다. 진짜 어떻게 구워삶은 걸까…….


"케이아."


나가려던 케이아를 다이루크가 불러세웠다. 왜?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처리해놓은 서류 중, 기사단에서 마저 이어하면 좋을 것들을 품에 챙기고 기사단, 다시 말해 몬드의 제 숙소로 돌아가려던 참이었고, 다이루크도 그것을 모르지는 않을 터였다. 다이루크는 서랍을 열어 또 하나의 작은 상자를 꺼내 케이아에게 건넸다. 케이아는 한쪽 뿐인 눈을 깜빡거렸다.  


"이것도 가져가."

"어라, 일당이 아직 남았었나? 금화 주머니라기엔 크기가 좀 작은데."


케이아는 평소처럼 적당히 입을 놀리며 상자를 받아 열어보았다…… 그리고 그 상태로 굳었다. 상자 안에 들어있던 것은 대충 겉모습으로 짐작했듯, 펜이었다. 일단 깃펜이 아니라 만년필인 것에서 삐끗했지만, 케이아의 좋은 눈썰미는 슬프게도 그것이 일반적인 시장의 만년필이 아니라, 루미네의 것과 상당히 비슷한 구조와 외형을 가진 만년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폰타인의 기술자들이 고마워하더군. 네 덕에 새로운 영감을 얻었다고. 다음 상품의 시제품이야. 한 자루 뿐이니 여행자가 마다한다면 네 것이 되겠지."

"……아무리 상대가 이세계라지만, 특허법 만든 나라에서 거침이 없네." 케이아가 어이없어했다.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잖아, 다이루크. 줄 사람을 착각했어."


케이아는 펜 밑에 깔려있던 천으로, 첫 손을 타지 않게 조심하면서 펜을 살며시 들고 흔들었다. 펜에는 ' K. Ragnvindr ' 라 적혀있었다. 이 시점에서 케이아는 이미 자신의 이름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라겐펜더 가문의 호적에서 파버린 후였다. 아니면 이름을 잘못 새겼나? 한 아홉 글자 쯤? 그녀가 빈정거렸다. 


"그냥 가져가. 쓰는지 안 쓰는지 확인할 거니까."

"……이것저것 따지고 싶은 게 많지만, 다이루크……. 내가 아직도 열여섯 살인 줄 알아?"

"기껏 줬는데 말이 많군." 다이루크도 지지 않고 빈정거렸다. "왜 거기서 그러고 있어. 빨리 돌아가야한다고 하지 않았나?"

"지금 해보자는 거야?"


결과적으로 지게 될 싸움임을 알면서도 케이아는 괜히 언성을 살짝 높이며 건방진 동생을 연기했다. 어차피 귀환 시간만 늦어질 것, 왜 저런 태도만 보면 불퉁해지는 마음을 참을 수 없는지 모르겠다. 케이아는 이를 꽉 깨물며 대답했다. 싫은데? 절대 안 가져갈 건데? 이게 왜 내 건데? 어디 한 번 설명해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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