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선을 긋는다는 건

 

“예재욱.”

 

걸음을 옮기던 재욱의 움직임이 멈췄다. 살짝 인상을 찌푸리던 재욱이 표정을 가다듬고 뒤를 돌았다.

 

“구 사장이랑 점심 먹고 헤어진 거 아니었어?”

“아…. 서류를 두고 오셨다길래.”

“그래서 사장실까지 가셨다?”

“어쩔 수 없잖아.”

 

재욱이 억울한 듯 진우의 어깨를 툭- 밀었다. 진우가 과장되게 밀리다 중심을 잡고 섰다. 재욱이 진우의 걸음에 맞추어 걸었다. 제 하나뿐인 (물론 형제라 둘이지만) 사촌 형의 걱정하는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재욱의 아버지가 넌지시 이야기를 꺼냈고, 같은 병원에 근무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진우에게도 승효에 대한 여러 가지를 물어본 것이 틀림없었다. 진우는 불같이 화를 내며 반대했지만, 선택을 한 건 재욱이었다. 좋아서 한 선택도 아니었지만 더는 기대감이 없었기에 할 수 있는 최후의 선택이기도 했다. 병원 입구까지 데려다준 진우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표정으로 재욱을 바라보았다. 재욱은 저 눈에 울컥 터져 나오는 감정을 말로 되받아쳤다.

 

“형, 내가 충고 하나 할까? 나는 성인이고 어린이가 아니라는 거야. 그런 슬픈 눈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거야. 물론 나도 그렇고.”

“아 뭐래. 이 충고 충이. 이 깊고 깊은 눈을.”

“그러니까. 내 걱정하지 말고 선우 형 데리고 치료실이나 자주 들러. 요즘 왜 안 와?”

“야, 나 때문에 못 가냐? 바쁘신 누구 때문에 못 갔지.”

“그래도 선우 형이랑 시간 내서 꼭 와.”

 

진우가 크게 손을 흔들었지만, 재욱은 못 본 척 얼른 뒤를 돌았다. 저 얼굴 때문에 그러지 않아도 온갖 시선이 다 쏟아지는데 더는 불편한 시선을 받고 싶지 않았다. 병원 주차장에 세워둔 차를 타고 병원을 벗어났다. 병원을 벗어나 또 다른 병원으로 장소를 옮기는 것이었지만.

 

복잡한 상황을 잊고자 틈틈이 논문을 들여다봤는데 그 논문을 잃어버릴 줄이야. 어제 오후 내내 사무실이며 차며 가방에 식당에 전화까지 해 찾았지만, 종이 쪼가리 하나도 못 찾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른 이의 손에 들어가 있었으니 당연한 결과였을 거다. 찾는 내내 심장이 철렁 떨어지는 것 같아 승효가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땐 바닥에 주저앉아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다시 볼 생각도 하지 않았겠지. 이대로 끊어내고 결혼을 무를 생각이었는데. 아무리 서로 주고받는 게 맞는다고 해도 한번 본 사람들을 결혼식장에 세우지는 않을 것 아닌가? 하지만 이젠 그 핑계도 사라졌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이 만남이 인연인지, 악연인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재욱이 처음부터 남자의 몸으로 아이를 낳기 위해 결혼 시장에 나서려던 것은 아니었다. 학생 때 만난 첫 번째 연인과 꽤 긴 기간을 만났다. 안정적인 가정을 갖고 싶어 했던 재욱은 이른 나이 결혼을 하려 했었다. 반류고 종이고 상관없이 그녀를 사랑했고 그 사랑을 지킬 책임감도 있었다. 우연히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던 동료와 키스를 하는 모습을 보기 전까진 그랬다. 바보같이 그 병원에서 재욱만 몰랐다. 누군갈 오랜 기간 만났다는 건 아무런 힘도 가지지 못했다. 재욱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표정은 전혀 슬프지 않아 보여 가슴이 아팠다. 재욱은 그녀를 칼같이 끊어냈다. 아니 끊어진 거라고 하는 게 맞겠다. 재욱은 그대로 사랑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로도 오랜 기간을 컴컴한 어둠 속에서 지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그 시작을 찾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사랑에 배신당한 것에 대한 반대급부였는지 한동안 연애를 하지 않다 가볍게 만나게 된 남자가 있었다. 악어 중종이었는데 자주 가는 바에서 술을 마시다 만나게 된 사람이었다. 처음엔 술친구 정도였는데 어느새 파트너처럼 주기적으로 몸을 섞는 사이가 됐다. 파트너라지만 그 사람만 만나는 기간이 길어지자 머리로는 가벼운 관계를 생각했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재욱은 제가 그어둔 선 안에 사람을 가볍게 들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순탄할 것 같기만 하던 만남은 감정의 무게가 한쪽으로 쏠리자 자연스럽게 삐걱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그 ‘사고’가 일어났다. 그에게도 재욱에게도 사고가 틀림없었다. 머리가 어지러워 방문한 병원에서 임신 진단을 받았다. 계획조차 없던 일에 정신없이 상황을 전달했다. 한편으론 관계를 진전시키기 좋은 상황이라고 판단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던 그는 재욱에게 낙태를 권유하며 진지한 관계는 싫다. 헤어짐을 고했고 둘 사이에 크지 않은 다툼이 있었다. 재욱도 놀랐으니 당연히 그도 놀랐을 거다. 

재욱은 그의 당혹스러움마저 품어보려 했다. 하지만 정신과 육체의 괴리는 달리 손쓸 방법이 없었다. 홀로 남은 집에서 어지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재욱이 정신을 차리고 밀려오는 복통에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그에게 연락했지만 끝내 그는 오지 않았다. 겨우 구급차를 부른 재욱은 다시 정신을 잃었고 병원에서 연락을 받은 부모님은 아들의 임신 사실과 유산 사실을 한 번에 알아야 했다.

 


재욱은 그저 자신이 준 애정만큼 돌려받지 못한 것과 마음에 둔 사람들이 모두 떠나가는 것에 대한 서글픔 뿐이었지만 재욱의 부모님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것이 재욱의 약점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 이후 몇 년을 부모님과 소원한 관계를 유지했다. 저를 볼 때마다 한숨을 쉬거나 슬픈 얼굴을 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분 것인지 두어 달 전부터 갑자기 연락이 오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두 분의 할 일이 재욱의 결혼인 것처럼 행동하는 거다. 재욱은 조금 더 자신을 믿어줄 순 없었을까 생각했지만 이제 연애는 그만하고 결혼해 안정을 찾으라는 말을 할 뿐이었다.



승효가 처음으로 재욱과 선을 본 남자는 아니었다. 한번은 여성, 두 번은 남성이었다. 다들 재욱의 얼굴에 홀려 호감을 표하다 재욱의 말과 행동에 질려 하며 떨어져 나갔다. 사람이 차갑네, 순종적이지 않네,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네. 별의 별말을 다 듣고 헤어졌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하는 말은 재욱에게 아무런 상처가 되지 않았다. 재욱이 원한 결과였으니까. 이번에 승효도 비슷하게 헤어지리라 생각했다. 이걸 몇 번 반복하다 보면 부모님도 지쳐 나가떨어질 것이라고. 그러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일정표 조정으로 병원에 도착하니 조금 여유가 있었다. 잃어버렸던 물건도 제 손에 들어왔고 익숙한 곳에 도착하니 허기가 밀려왔다. 근처 커피숍에서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커피와 샌드위치를 사 사무실로 돌아갔다. 

불쑥 승효 생각이 났다. 이 결혼을 왜 해야 하는 거냐고 물어보던 얼굴이. 제가 원하는 조건, 주고받을 것만 말하는 사람들과 비슷하면서 다른 얼굴. 진우의 말로는 사람이 좀 정이 없고, 말을 막 하고 실리를 잘 따지는 사람이라고 했다. 인간미는 눈곱만큼도 없고 수치와 이익이 더 중요한 사람이라고. 그래서 그 사람 옆에 있으면 하나하나 다 값으로 치환되어 자신의 득실을 따지게 될 거란 말도. 그런 진우에게 제가 무슨 충고를 했더라? 재욱은 승효가 어떤 사람이었든지 관심을 두지 않으려 했지만 이미 내일 다시 만나기로 한 이상 최대한 피해 없이 끝낼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정신없이 일하는데 주머니에서 드르륵 문자 오는 소리가 들렸다. 급한 일이면 전화가 올 거라고 생각했다. 환자 치료를 마치고 사무실에 들어와 전화기를 확인하니 어머니의 문자였다. 


[결혼식은 다음 달 안으로 했으면 좋겠는데.]

[확인하면 연락해주렴.]


이번 달이 일주일 정도 남아있는데 다음 달에 결혼이라니. 재욱은 이마를 짚으며 바로 전화를 걸었다.

 

“엄마야. 문자 확인했니? 그때 아무 일 없지?”

“....”

 

재욱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결혼을 시키고 싶어 하는 마음은 요 몇 달 사이에 활활 타오르고 있다는 건 이미 확인했고, 연애는 관두고 결혼을 하라고 하려면 자신에게 숨 쉴 틈은 내어주어야 했다. 재욱은 숨이 막혔다. 


“이렇게 서둘러야 해요?”

“어차피 하는 거, 빨리하는 게 좋지 않겠니. 엄마가 다 널 생각해서..”

“이만 끊을게요.”


전화 통화를 종료하고 나서도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대체 왜 자꾸 자신이 도망갈 구석도 없는 코너로 몰리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승효에게 건네받은 논문을 열었으나 집중을 할 수 없어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음 환자까진 여유가 있어 다행이었다. 재욱은 병원 옆 공원으로 가사 자판기 커피를 홀짝였다. 벌써 바람이 찼다. 답답했던 마음을 모두 불어오는 바람에 실어 보낼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그 마음은 재욱의 안에서 더욱더 단단해져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재욱은 치열하게 고민하고 결론이 나면 곧장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섣부른 행동보단 고민이 필요한 때였고. 연애를 망쳤다고 인생을 망친 것이 아님에도 부모님들은 재욱의 인생이 망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욱 견고하고 그럴싸한 가정이라는 성을 만들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겠지.


재욱은 마음속 여린 구석이 있었다. 독설가에 남은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그 안엔 사람에 대한 연민이 있었다. 그래서 진우가 전해주는 승효의 수식어를 들으며 묘한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고. 결론은. 그렇기에 제 부모 가슴에 상처 내는 짓을 하고 싶지 않아 참고 있다는 말이었다. 선 자리를 가장한 상견례를 했어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결혼을 진행하려 하더라도.



[내일 저녁 약속 잊지 않았죠?]


복잡하고 결론 내지지 않던 생각은 승효의 문자로 인해 멈추었다. 재욱은 확인하는 곧장 답장했다.


[네. 몇 시가 좋으시겠어요?]


재욱은 승효를 구슬려볼 생각이었다. 독설가에 실리를 따진다니 결혼을 할 때보다 하지 않을 때가 더 낫다는 걸 인지시킨다면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7시 반쯤 보죠. 이번엔 제가 가겠습니다.]

[네. 그러시죠.]


3일간 3번의 만남. 정리하기 딱 좋은 시기라고 생각했다.



승효와 약속 시각 전, 자리를 정리하는데 전화가 울렸다. ‘구승효’ 이름 세 글자에 재욱은 심호흡을 했다. 네, 예재욱입니다.



재욱은 운전석 옆에 있는 승효를 보고 가볍게 묵례를 했다. 


“일찍 오셨네요.”

“거리가 멀지 않더군요.”

“네.”


재욱의 대답 이후 더 오가는 말은 없었다. 조용한 차 안에 히터가 돌아가는 소리 정도만 들렸다. 재욱은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 고개를 살짝 돌렸다. 


“원래 그렇게 말이 없습니까?”


승효의 말에 재욱이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저희가 무슨 말을 해야 할 사이인가요?”


재욱의 물음에 승효가 작게 바람 빠지는 소리로 웃음을 삼켰다. 


“예재욱 씨는 저에게 궁금한 것이 없나 봐요?”

“서로 그렇게 애틋하게 무엇을 궁금해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서요.”

“싸가지 없다는 소리 많이 듣죠? 성격 나쁘다는 소리도요.”

“구 사장님도 자주 듣는 말로 알고 있었는데요.”


재욱의 뾰족한 말에도 승효는 그저 웃기만 했다. 재욱은 다시 고개를 돌리려다 작게 입술을 깨물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싸가지 없고 재수 없는 상대로 남아 결혼이 깨지느냐. 납작 엎드려 합의하고 결혼을 깨느냐.


“추워요?”

“네?”

“손을 만지작만지작 하길래. 춥냐고 물어봤습니다.”

“아닙니다. 저보단 운전에 더 신경 쓰시죠.”

“컨셉을 바꿨습니까? 아니면, 이제 저한테 볼일 없다 이거예요?”


재욱은 따로 변명하지 않았다. 그저 작게 한숨을 쉬고 입을 다물었을 뿐이다. 차에서 내려 식당으로 들어가 준비된 룸에 자리를 잡을 때까지 둘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이제 말해보시죠. 예재욱씨가 이러는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 고민 중입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구승효 사장님은 이 결혼을 하고 싶으신지 먼저 물어보고 싶네요. 엊그제 나타나셨을 때 누구보다도 그 자리가 싫은 얼굴을 하셨고요.”

“.. 그랬습니다.”

“다음 달 안으로 결혼식 날짜를 잡았으면 좋겠다고 하시던데 들으셨습니까.”

“저희 어머니는 마지막 주 주말이 어떻겠냐고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침묵. 수저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재욱은 그마저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그 생각은 승효가 건넨 말에 저 멀리 사라졌다.


“그냥 하죠. 결혼.”


재욱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숨기지도 않고 승효를 쳐다보았다. 승효는 좋다, 싫다는 표정 없이 물끄러미 재욱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 당혹스럽네요. 결혼하지 않겠다는 쪽일 줄 알았는데요.”

“생각해보니, 손해밖에 볼 게 없더라고요. 결혼을 깨는 게.”

“결혼하면요?”

“누군가는 확실히 이득을 보겠죠. 그게 사업적인 거든, 보여주기식이든 말이죠.”


재욱은 급격하게 몰려오는 피로감에 고개를 들고 작은 무늬가 빽빽이 박힌 천정을 쳐다보다 시선을 내렸다. 재욱은 결심한 듯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손익을 따져 결정 내리셨다... 그럼 저에게 오는 이득은 없으니 이 결혼 없던 거로 하죠.”


재욱의 말에 승효는 그 말을 할 줄 알았다는 듯 웃기만 했다.


“아시겠지만, 저는 썩 좋은 성격이 아닙니다. 당연히 배우자로 서도요.”

“계속해 보세요.”

“남이 봐야 할 손해까지 제가 입으며 살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결혼하시겠다면 당연히 저는 양보 할 수 있는 게 없고요.”

“양보는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예재욱 씨에겐 이득이 없다고 하셨나요.”

“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예재욱 씨의 원하는 모든 것이 포함된 계약서를 쓸 거니까요.”


재욱은 할 말을 잊었다. 순간이나마 승효와 제가 같은 처지일 거라 생각하고 결혼을 막아보고자 했던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그렇게 인간을 겪고도 그 속내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제가 한심스러웠다. 승효의 제안은 계약 결혼이었다. 기간은 최소 3년. 임의로 3년을 잡은 것은 아이 때문이라고 했다. 조정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합의하고 기간을 조정하잔 말도 덧붙였다. 서로가 끔찍해 꼴도 보기 싫은 정도가 아니라면 서로 얻을 건 얻어가고 버릴 건 버리자는 뜻이라고. 재욱의 부모도, 승효의 부모도.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간 그 뜻을 관철할 사람들일 거라고.


“부모님들 입부터 막고 생각하죠. 예재욱 씨도 지금 코너로 몰리고 있는 것 같은데. 긁어 부스럼을 만들더라도 한 달 기간보단 삼 년이 낫지 않겠어요. 자신을 보호할 시간은 줘야죠. 그렇게 원하시는 결혼에 숨어서.”


재욱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승효의 말 대로 결혼이 문제는 아닐 거다. 재욱은 사랑 없는 결혼이 두려웠다. 사랑이 있다고 생각했던 이들과도 어려웠던 것이 이제 세 번 본,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과 할 수 있을까.


“예재욱 씨가 손해 볼 일은 없을 거라고 장담하죠.”


재욱은 선뜻 선택할 수 없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자 이미 결혼 준비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생각할 시간은 길게 줄 수 없다고 말했다. 계약서를 쓰고, 공증을 하고 나면 어설프게나마 부모님의 행동에 장단을 맞춰야 한다는 말이었다. 승효는 재욱의 선택을 존중하는 듯했으나 결혼을 무른다는 선택지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결론은 이미 난 상황이나 다름없었다.



“안 타요?”


재욱은 고개를 저었다. 저 차를 타고 집까지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구 사장님 차를 타고 갈 기분이 아니라서요.”

“기분으로 행동하면 안 될 텐데. 기분이 태도가 돼서는 안 된다는 말 모릅니까?”

“지금은 알더라도 행동하고 싶지 않습니다.”


승효는 재욱의 말에 웃음을 짓다 이내 그 웃음을 지웠다. 재욱은 승효를 바라보며 대답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웃음을 지었다는 것도, 그 웃음이 사라졌다는 것도 알 수 없었다.


“그럼 알아서 하시죠. 전 이만 가겠습니다. 아, 긍정적인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재욱은 승효의 저 말. 자신에게 대하는 태도. 그의 행동이 이제 계속 마주해야 할 모습이라는 걸 깨달았다. 지극히 사업적인 행동. 상대가 원하는 걸 내어주고 내가 원하는 걸 챙기겠다는 뜻이었다.



재욱은 아무도 없는 집에 홀로 들어오며 가슴이 더 답답해진다고 생각했다. 누구에게도 말 못할 비밀이 또 생기고야 말았다. 멍하니 침대 위에 누워 며칠 새 일어난 일들을 곱씹었다. 또다시 오늘이 지나면 자신도 알 수 없는 방향으로 또 성큼 가겠지.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재욱이 할 것은 선택밖에 없었다. 하지만 재욱은 마지막까지 발버둥을 쳐보고자 했다. 선택이 하나밖에 없다면 칼자루를 쥐고 있는 사람을 흔들어 두겠다는 생각이었다. 재욱은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고도 승효가 같은 태도를 보일지 궁금했다.


재욱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출근 준비를 하며 승효에게 문자를 남겼다. 시간이 있느냐는 문자에 마치고 사무실로 오라는 승효의 답장이 왔다. 이 일이 매듭지어지냐 풀어지냐 하는 것은 오늘 이 만남에서  결정이 날 터였다.



“예 선생님 오늘 무슨 일 있으세요? 오늘따라 표정이 안 좋으신데..”

“아뇨, 아무 일도 없습니다.”

“그럼 다행이구요. 피곤하면 스케줄을 바꾸면 좀 낫지 않을까요?”

“김윤주 선생님. 제가 충고 하나 할까요. 받는 사람이 원치 않는 걱정은 일종의 폭력일 수 있습니다. 제가 괜찮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어머, 걱정을 해줘도 그러세요. 예 선생님은 너무 선을 그으신다니까.”


윤주는 섭섭한 마음을 드러내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물리치료실 한쪽 벽에 있는 거울에 재욱의 얼굴이 비쳤다. 잠을 못 잔 걸 티라도 내듯 얼굴이 퀭해 보여 마음이 좋지 않았다. 재욱은 비어있는 시간 사무실에서 잠깐 눈을 붙였다. 하지만 치료실에서 난동을 피우는 환자 덕에 그마저도 반납하고 상황을 정리해야 했다.



한 번 왔다고 익숙한 건물 앞에 섰다. 부디 끝날 때까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길 바랐다. 혹여 진우가 알게 될까 걱정이 됐기 때문이었다. 진우가 알게 된다면 부모님의 귀에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일 테니. 끝까지 속여야 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사장실 벨을 누르자 승효의 비서인 경아가 재욱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계셨어요.”

“네. 안녕하세요.”


경아는 자연스럽게 재욱을 앉히곤 차까지 내주었다. 그리고 승효에게 귓속말로 소곤소곤 하더니 먼저 퇴근하겠다고 나가버렸다. 승효는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하고 책상 위를 정리했다. 좋은 향이 나는 재스민 차를 한 모금 삼켰다. 재욱이 말없이 차를 반쯤 비웠을 때, 승효는 작은 노트북을 들고 재욱의 맞은 편에 앉았다.


“결정은 하셨습니까?”

“그 전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결정보다 더 중요한 일인가요?”

“저보단 구 사장님께 더 중요한 일인지도 모르니까요.”

“저한테요.”

“네.”

“들어보죠.”


승효는 다리를 꼬고 앉으며 몸을 살짝 뒤로 젖혀 앉았다. 익숙한 자세. 어디 한 번 해보라는 태도. 재욱은 입술을 살그머니 물었다 놓았다. 생각했던 것만큼 술술 나오진 않았다. 목이 콱 틀어막히는 것 같은 설움은 아니었지만, 상처의 딱지를 강제로 떼는 것 같은 아픔 정도이긴 했다.


“제 종이 뭐냐 물으셨죠. 저는 토끼입니다. 토끼 중에선 인위적인 임신 벌레나 약물을 쓰지 않더라도 임신이 가능한 남성체가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게 예재욱 씨라는 거고요?”

“…”

“예재욱 씨?”

“... 임신과 유산 경험이 있습니다. 제가 임신 가능한 남성체라는 건 그때 알았습니다.”

“…”


재욱의 말에 승효는 다리를 풀고 몸을 조금 당겨 앉았다. 양팔을 무릎에 괴고 생각에 빠지는 모습에 재욱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이걸로 결혼을 깨신다고 해도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승효는 재욱의 말이 끝나자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긴장이 되어 발끝까지 힘이 들어갔다.


“그게, 예재욱 씨가 판단한 파혼 이유입니까?”

“있었던 일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결혼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중요한 일일 수 있으니까요.”


으음. 승효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욱은 승효의 그  태도에 표정을 굳혔다. 남의 상처에 저런 표정이라니. 재욱은 붉어지는 얼굴을 숨길 수 없어 화를 내듯 이야기했다.


“그럼 이 결혼은 없었던 일로 하는 것으로 알고 돌아가겠습니다.”


재욱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승효가 코웃음을 쳤다. 재욱의 기분이 바닥으로 내팽개쳐진 것 같았다.


“예재욱 씨. 언제도 한 번 이야기한 것 같은데. 자신의 말만 끝나면 남이야 어떻든 상관하지 않는 게 예재욱 씨의 특징입니까? 제 말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습니다. 앉으시죠.”


승효는 재욱을 빤히 올려다보며 재욱이 자신의 앞에 다시 앉기를 종용했다. 


“성급하게 행동한 건 미안합니다.”

“사과는 빨라서 좋네요. 우선 예재욱 씨가 토끼라는 건 참 마음에 듭니다. 토끼는 다산과 풍요의 상징이라죠. 저희 부모님들이 그렇게 결혼을 서둔 이유가 이거였겠군요. 아, 그리고 남성체인 경우는 대부분 인위적으로 자궁을 만들어야 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럴 필요도 없다니 그것도 좋은 소식이고요. 임신? 그건 예재욱씨의 몸이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결과 아닙니까? 유산은... 유감입니다. 조건이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데 왜 이 결혼을 깨야 하죠? 그런 결론을 낸 이유가 더 궁금하군요.”

“... 일반적인 결혼에선 그런 것들이 파혼의 이유가 되니까요.”

“일반적인 결혼이라. 저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겠네요. 그럼 예재욱 씨도 저의 제안에 동의한 것으로 알고 계약서 작성부터 하죠.”


재욱은 다른 의미로 가슴 한쪽이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자신에겐 상처로 남았던 일이 남에겐 그저 유감이라는 말 한마디로 끝이 났고, 결혼에 대해 걱정을 한 것이 무색하게 일반적인 결혼이 아니라고 잘라버리는 말에 재욱의 마음에서도 무언가 툭- 잘려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승효는 재욱에게 계약이 끝나면 남기고 싶은 것이 있느냐 물었다. 돈이면 돈, 병원이면 병원. 승효가 해줄 수 있는 범위 내에선 모두 해주겠다는 말이었다. 시작부터 끝을 바라는 결혼. 아니 계약에 재욱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이제 자신과 승효 모두 한배를 타게 되었으며 적을 알 수 없는 링에 발을 붙인 것이다.


“바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럼, 계약되지 않는데요. 그럼 비워두고 생각날 때 다시 조율하는 것으로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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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


갑: 구승효

주민번호 / 주소

을: 예재욱

주민번호/ 주소


결혼의 주체인 구승효(이하 “갑”이라 함)와 예재욱(이하 “을”이라 함)은 다음과 같은 계약서를 작성한다. 모든 내용은 갑과 을의 합의 하에 변경될 수 있다.


제 1조. (계약 기간) 계약이 효력을 갖는 날짜는 갑과 을의 결혼식이 끝난 00월 00일 이후 24시간 이내이며 총 기간은 3년으로 한다. 그러나 계약 갱신에 의하여 기간은 연장할 수 있다. 


제 2조. (장소) **시 **구 **번지 00호를 계약 관계가 유지되는 장소로 하며 갑과 을의 공동명의로 해당 주소에서 함께 사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제 1항. 갑은 계약 기간이 끝나면 해당 장소를 을에게 명의 이전한다. 

제 2항. 해당 계약이 을의 귀책 사유로 결혼 생활을 영유하지 못하더라도 제 2조 1항에 의거하여 해당 장소를 을에게 명의 이전한다.

제 3항. 갑과 을의 합의에 따라 장소는 변경될 수 있다.


제 3조. (재산) 갑은 계약이 유지되는 동안 매월 10일 총수입의 50% 을은 30%를 공동 생활비로 제공하되 결혼 유지를 위한 생활비 이외 다른 재산은 각자 관리하기로 한다.


제 4조. (경조사) 갑과 을은 각자의 경조사가 발생할 경우 원칙적으로 공동관리하는 것으로 하며, 사안에 따라 쌍방 합의에 따라 결정할 수 있으며 적극 협조한다.


제 5조. (자녀) 갑과 을은 계약이 유지되는 동안 생기는 자녀에 대해 공동 육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제 1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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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재욱 씨는 어떻게 하고 싶습니까?”

“뭘요?”

“아이를 만들려면 성관계를 해야 하는데.. 임신할 때까지 매일 하는 거 가능하지 않잖아요.”

“아.. 월에...”

“그렇게 임신 확률이 높습니까?”

“주에 1번으로 하죠.”

“그래도 임신이 안 되면 어떻게 할 겁니까?”


계약이 이럴 줄 알았으면 다시 생각했을 거였다. 집 문제도 부득불 이건 을의 합의 사항이 아니라며 당혹스럽게 하더니 이번엔 섹스가 문제였다. 임신이 언제 어떻게 될 거라 예측한단 말인가. 재욱은 붉어지는 얼굴을 감추려 애써야 했다.


“6개월 이상 관계에도 임신이 되지 않는다면 주 2회로 늘리겠습니다. 임신하게 되면 당연히 관계는 없을 거고요. 아, 예재욱씨도 아시겠지만, 계약 기간 안에 생긴 자녀는 계약 이후엔 모두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잠깐, 왜 모두죠?”

“이혼한 배우자에게 양육을 맡길 만큼 무책임하지는 않습니다.”

“그럼 그건 그때 가서 다시 정하는 거로 하시죠. 이 계약에는 제 책임도 있는데 구승효 씨 혼자 책임감이 어쩌고 하는 건 굉장히 기분 나쁘네요.”


재욱은 기분 나쁜 티를 숨기지 않았다. 재욱의 그런 말투에 승효는 되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컴퓨터 안에 적히는 자그마한 글씨에 집중한 재욱은 끝까지 승효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재욱은 드디어 승효와 한 배를 타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멍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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