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은 쉽사리 결론이 나지 못하고 장장 4시간에 걸쳐 이어졌다. 참석자 중 과반은 유라테의 편을 들었고, 일부는 그녀가 사생아가 맞다고 여겼다.

하지만 어느 쪽이나 유라테에게 상처를 입히긴 매한가지였다. 아무리 생모에 대한 기억이 없다 해도 면전에서 친어머니의 불륜 여부가 파헤쳐지는데 유쾌할 리가 없었다. 특히 그녀의 진짜 혈통과 신분이 걸려 있는 문제라면 더더욱.

마침내 밤을 지나 새벽이 가까워질 무렵, 눈가에 짙은 그늘이 생긴 대공이 회의를 중지시켰다.


“그만. 시간이 늦었으니 이야기는 여기서 마치겠소. 여기서 더 갑론을박한다 해도 정확한 결과는 나오지 않겠구려. 수사권은 요가일라와 발슈스에게 주겠소. 두 사람은 철저히 진위를 밝히고, 사흘에 한 번씩 내게 보고하게. 단, 은밀히 진행해야 함을 잊지 말도록.”


가신들과 알비나, 비클라우 백작이 고개를 숙였다.


“예, 전하.”


브로니우스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다들 돌아가시오. 굉장히 피곤하니까.”


끼익, 드르륵. 의자의 발이 돌바닥을 긁었다. 가신들이 하나 둘씩 방에서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라테는 나갈 수가 없었다. 아버지에게 다가가 뭐라도 말을 건네야 할 것 같은데, 막상 입과 발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녀가 간신히 입술을 달싹이며 말문을 떼려던 참이었다.


“유라테 님. 이만 가시지요.”


집사 요가일라였다. 그는 정중하지만 강한 손길로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잡았다. 아직 나가지 않고 딸을 기다리던 알비나 또한 유라테의 소매를 당겼다.


“그래. 네 침실로 돌아가자꾸나. 당장은 때가 좋지 않아. 날이 밝으면 내가 네 아버지께 얘기를 드리마.”


유라테는 잠시 아버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회의 내내 브로니우스 대공은 장녀에게 한 마디도 직접 건네지 않았다. 그 점이 마음에 걸렸으나, 아직은 상황이 나쁘다는 계모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무엇보다 지금의 유라테에게는 용기가 없었다. 오늘 하루치의 용기는 회의에서 도망치지 않고 자기 의견을 말하는 데만 모조리 소모되어 버렸다.

망설이던 그녀는 결국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계모를 따라 방 밖으로 나갔다. 유라테가 문지방을 밟던 순간에도 대공은 딸을 부르거나 바라보지 않았다. 그저 손으로 눈을 짚을 뿐이었다.




해뜨기가 무섭게 요가일라와 발슈스 자작은 수사를 시작했다. 그들은 먼저 안카 전 대공비와 조금이라도 연관 있는 사용인의 명부를 작성했다. 이름이 올라간 인물 중에는 로마스 경은 물론 안카의 출산을 담당했던 산파와 의사 또한 포함돼 있었다. 목록을 완성한 뒤에는 입이 무겁고 믿을 수 있는 사람 몇 명을 풀어 이들의 행방을 수소문하게 했다.

찾아야 하는 인물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투서를 보낸 자였다. 요가일라는 갖가지 핑계를 대어 전현직을 막론하고 대공을 모셨던 시종들의 필적을 수집했다. 그리고는 필경사 한 사람을 데리고 투서의 필체와 수집한 자료를 직접 일일이 대조했다.

첫 사흘은 별 성과 없이 지나갔다. 두 번째, 세 번째 보고일도 마찬가지였다. 약 3주가 흐르고 나서야 서서히 유의미한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로마스 경의 행방을 알아오라고 보낸 사람이 돌아왔습니다. 16년 전 갈라 수도원에 입회한 것은 사실이나 재작년에 이미 죽었다고 합니다.”


“무덤을 열어 시신도 확인했습니다. 틀림없는 로마스 경이었고요.”


“안카 님을 모셨던 시녀 중 두 명의 소재를 알아냈습니다. 이들은 성으로 압송해 오는 중입니다. 회임과 출산을 진료했던 의사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투서를 보낸 용의자를 다섯으로 추려 왔습니다만, 이 중 가장 유력한 인물은 부재증명(알리바이)이 되었습니다.”


필적 대조, 체포, 추적. 요가일라와 발슈스 자작은 있는 힘껏 보안을 유지했지만, 이 정도 규모의 수사가 몇 달에 걸쳐 이루어지는 상황을 영영 감출 수는 없었다. 기어이 성내에는 대공이 누군가를 찾고 있으며, 그 자는 유라테 아가씨가 정말 대공의 친자가 맞는지 확인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소문까지 돌기 시작했다.

함구령이 수포로 돌아가자 집사와 자작은 난색을 표했다. 말이 새어나가니 수사를 방해하는 요소도 늘어났다. 하지만 발슈스 자작과 요가일라 이상으로 곤란해진 이는 따로 있었다.


“죄송합니다, 유라테 님. 지금은 잉그리다 님이 미편하시어 만나뵈실 수 없습니다.”


대공의 작은딸 잉그리다의 처소. 화려한 무늬를 아로새긴 목재 문 앞에서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동생을 만나려고 하는 유라테와, 그런 대공녀를 막으려는 시녀의 언쟁이었다.

지난 4개월 간 유라테는 아버지를 거의 만나보지 못했다. 가족과의 식사처럼 얼굴을 맞대야 하는 자리가 생기면 브로니우스는 장녀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행여 꼭 해야 할 말이 있으면 최대한 짧게 끝맺거나 다른 사람의 입으로 전하게 했다. 덕분에 부녀 사이에 낀 알비나는 팔자에도 없는 고생을 하는 중이었고, 일의 전말을 전해 듣지 못한 어린 두 동생은 가라앉은 집안 분위기에 불안해 했다.

유라테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니, 일의 당사자인만큼 누구보다도 하루하루가 좌불안석이었다. 사생아임이 불확실한 지금도 이렇게 냉대를 받는데, 만약 자신이 아버지의 자식이 아니라면…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녀는 처소에 틀어박혀 계속 두려움과 초조함을 곱씹다가 벌떡 일어났다. 두 동생, 하다못해 자매인 잉그리다에게라도 상황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한다면 기분이 나아질 듯 했다. 그녀에게는 툭 건드리면 터져버릴 듯한 공포와 죄책감을 토로할 일종의 고해성사가 필요했던 것이다.

유라테는 용기를 내어 잉그리다의 방으로 찾아갔다. 머릿속은 온통 동생에게 어떻게 서두를 꺼내야 할지, 작금의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그리고 이야기를 다 들은 잉그리다의 반응이 어떠할지로만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동생의 시녀가 자신의 앞길을 막아 섰을 때, 유라테는 평소보다도 더욱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방금 전까지 멀쩡하게 나다니던 아이가 아프다고? 말같잖은 소리 말고 문이나 열게.”


대공녀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잉그리다와 얀을 돌보는 시녀, 테레사는 문을 열기를 완강히 거부했다. 시녀는 잉그리다가 몸이 좋지 않아 만날 수 없다는 말만 거듭 되풀이했다.

눈에 빤히 보이는 속임수였다. 잉그리다는 아픈 곳 하나 없이 멀쩡하며, 조금 전 아침 식사를 한 뒤 잠시 정원을 산책했다는 걸 유라테는 똑똑히 알았다. 테레사도 유라테가 자기 거짓말에 속지 않았다는 점을 눈치챘다. 그럼에도 그녀는 문 앞에서 비키지 않으려 들었다.


“자네가 못 열겠다면 비켜. 난 내 동생을 봐야겠으니까.”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에게 질릴 대로 질린 유라테가 문고리를 붙잡았다. 그러자 테레사는 아예 몸으로 대공녀를 막아섰다.


“무슨 짓이십니까? 몸도 안 좋으신 잉그리다 님께 어떻게….”


시녀의 뻔뻔한 태도가 기어이 유라테의 분노에 불을 지폈다. 가뜩이나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던 그녀는 이 한 마디에 그만 폭발하고 말았다.


“자네야말로 지금 뭐하자는 짓이야? 거짓말에 이어 이젠 하극상까지 하는가?”


조용한 사람이 화를 내면 무서운 법. 유라테는 평소 언성을 높이는 법이 드문 대공녀였다. 그런 상전이 복도를 울릴 정도로 쩌렁쩌렁하게 호통을 치자, 테레사 뒤의 하녀들이 겁을 먹고 고개를 움츠렸다.

그런데도 테레사는 기죽지 않았다. 되려 미간을 잠시 찌푸리더니, 눈을 부릅뜨고 유라테를 똑바로 응시했다. 말귀를 못 알아들으니 짜증스러워 죽겠다는 태도를 감추지도 않았다.


“말씀을 조심하십시오. 저는 작위가 있는 귀족이며 알비나 비 전하께서 직접 발탁하신 시녀입니다. 유라테 님이 대공의 따님이셔도 제게 이렇게 함부로 하실 수는 없습니다.”


말이 존댓말이지, 내용은 전혀 공손하지 못했다. 상황을 모르는 이들은 한낱 시녀에 불과한 사람이 뭘 믿고 이다지도 불손하게 행동하나 싶어 황망해 했다. 하지만 유라테는 아니었다. 테레사의 발언은 유라테의 아픈 곳을 송곳마냥 찔러 헤집어 놓았다.


‘작위가 있는 귀족, 내가 만약 대공의 딸이어도….’


나는 당당한 귀족이다. 반대로 대공의 친자가 아닌 당신은 사생아에 평민일 따름이고. 그마저도 뻐꾸기일 가능성이 더 크지 않느냐. 테레사가 쏘아낸 말에 숨겨진 뜻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 뜻은 정확하게 유라테에게 와 닿았다.

숄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도톰한 산호색 입술이 핏기를 잃고 희게 질렸다.


“대체….”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안 거지?’


분노를 참을 수 있었던 까닭은 두려움이 압도적으로 컸던 탓이다. 얼마나 공포가 심했는지 생존 본능이 발동할 지경이었다. 유라테의 머리가 순간적으로 팽팽 돌아갔다.

테레사가 유라테의 혈통 논란을 어떻게 접했을지는 짐작하기 쉬웠다. 그녀는 이번 사건의 수사 책임자인 발슈스 자작의 누이였기 때문이다.

일부러건 실수로건 자작은 여동생에게 수사 결과를 흘렸다. 그리고 오빠로부터 소식을 접한 테레사는 유라테가 사생아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대공녀를 면전에서 조롱하는 무모한 짓을 저지를 정도로.

아무래도 발슈스 자작이 유라테의 불분명한 혈통을 입증할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낸 모양이다. 그리고 한 번 흘러나온 소문은, 통제 불가능한 속도로 퍼지게 되어 있다. 유라테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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