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

53. 물의 효험 2

54. 꿈




53. 물의 효험 2


“그렇게 말하지 마. 그런 말 할수록 너무 슬퍼져서….”

울먹이던 그 목소리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뺨 위로 떨어지던 눈물방울에 어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어제는 참 아팠다. 칼끝을 세워 명치부터 찔러 넣는다고 해도, 그것보단 덜 아플 것이었다. 

어제만큼은 그러지 말았어야 했나. 매년 혼자서 축하를 건네던 그 생일에, 처음으로 우린 함께였는데. 나는 책상 앞에 앉아, 몇 시간째 멍하니 천장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키스해줘.”

그 당돌하던 목소리와 불빛에 일렁이던 얼굴을 떠올렸다. 시간으로 치면 고작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아득한 꿈결처럼만 느껴진다. 깊게 등을 묻고 있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들고 있는지도 몰랐던 펜을 책상 위로 미끄러뜨리곤 양 뺨을 감싸 쥐었다.

“미치겠네, 정말.”

의자에서 일어섰다. 정신을 다잡아보기 위해 의자 뒤로 와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팔도 위로 뻗어보고, 허리도 열심히 뒤틀어 본다. 그러면서 현재의 상황을 냉철하게 곱씹어본다. 

차분히 되짚어보면 볼수록 조금 전의 생각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만이 앞섰다.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고 있는 건 자기면서 기어이 미안한 맘까지 들게 해야 했냐고. 눈앞에서 고기가 흔들거리는 걸 지켜만 봐야 하는 내 심정을 자기가 알긴 하냐고. 괘씸함에 분노가 치밀었지만 그럴수록 평정을 되찾아야 했다. 한시가 바쁜 이때, 이런 생각조차도 사치고 낭비다. 

두 손에 힘을 줘 양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마음을 평소처럼 진정시키고 다시 의자를 꺼내어 앉았다. 책을 폈다. 펜을 든다. 5초도 채 되지 않아 다시 펜을 책상 구석으로 집어 던졌다. 제 말대로 모기이긴 한가 보다. 아무리 창문을 꼭꼭 닫아도 어느 틈으론가 들어와 피를 빨고 있는 걸 보면.

“한 번만 주라. 응?”

눈을 감고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런 말은 시험 준비하기 전에나 좀 할 것이지, 짜증 나게. 고개를 움직여 들레의 자리를 원망스레 쳐다보았다. 달라고 할 때는 언제고. 들레는 오늘 오전 내내 어딜 간 건지 보이지 않고 있다. 어제 일 때문이 아니었더라도 신경이 쓰이긴 매한가지였다.

“이렇겐 합격 못 해. 못 한다고.”

그 높다는 경찰 시험 경쟁률을 뚫기란 아무리 나라도 불가능이었다. 들레의 농간에 이다지도 완벽히 놀아나선 말이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안을 떠올려보다가 마침 좋은 생각이 났다.

“스터디라도 해야겠어.”

열람실에서 빠져나와 1층 게시판으로 향했다. 마침 스터디 멤버를 구한다는 글을 그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적당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여자 멤버들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하니 들레가 걱정할 일은 없겠다. 

“그나저나 얜 어딜 간 거야.”

게시판을 보면서 불만스레 팔짱을 꼬았다. 어디에 있냐고 전화하기도 뭐하고, 마냥 기다리기만 하기에도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그러던 때였다. 출입문이 활짝 열렸다. 나는 발소리만으로도 들레인지 아닌지를 구분해 낼 수 있었다. 인기척만으로도 들레임을 확신해낼 수 있었다. 들레가 의문의 외출에서 드디어 돌아왔다. 

반가운 티를 내기 싫어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문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기척은 등 뒤에서 얌체같이 지나갔다. 나는 그 움직임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말도 없이 어딜 갔다 오는….”

뒷모습이 평소의 들레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을 들레로 오인했을 리는 없다. 마침내 짐작을 한 나는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너 머리….”

들레가 뒤돌아선다. 달라진 들레의 모습을 두 눈으로 마주하고서, 나는 완전히 할 말을 잃어버렸다.

두근 -

살면서 욕을 한 적은 잘 없었지만, 욕을 하는 이유를 이 순간만큼은 알 것도 같았다. 입에서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씨발, 씨발, 씨발. 단발도 미치게 귀엽잖아. 

“저, 아세요?”

실로 오랜만에 느낀 감정이었다. 처음 느낀 게 정확히 언제였더라. 심장이 갓 잡은 생선처럼 팔딱거리고, 허파에 바람이라도 들어간 듯 부풀어 오르고, 귀가 잠깐 멍해지고,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핑크빛으로 물드는 이건 마치.

“개새끼 씨발 새끼 X 같은 새끼야!”

댕 - 댕. 

그날 들었던 종소리를 나는 자그마치 20년 만에 또다시 듣고야 말았다. 당황스러움을 주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쩌면 어리기만 했던 그날보다 더욱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기 힘들었는지도 모른다. 당장에 발부터 움직이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내고 말을 이었다.

“머리… 머릴 잘랐네?”

“난 분명 2센티라고 말했단 말이야. 기분만 좀 내고 싶었는데….”

제 딴에는 불행스러운 일을 겪고 돌아왔다는 듯 주절거리는데, 그 모습조차 비 맞은 강아지처럼 깜찍하기만 했다. 처음 보는 들레의 모습에 나는 그야말로 환장을 했다. 위태롭게 세워둔 눈앞의 벽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나도 모르게 성큼 다가섰다.

“미친, 완전 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들레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나는 이 마음을, 정녕 숨길 수가 없는 것일까.

“…귀가 보이네.”

어쩌면, 죽기보다도 힘든 일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가을 다 왔는데 목 춥겠다.”

자각하지도 못 한 사이에, 들레의 목을 어루만지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을 땐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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