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열 번 째 통화

 

- 우지니형. 토요일엔 고마웠어요. 진짜 사줄 준 몰랐죠.

- 그래...

- 더 빨리 전화하려고 했는데 일이 있어서 이제 전화했어요.

- 어...그래...

 

우진은 대휘의 말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여전히 제 손엔 민서의 손수건이 쥐어져 있었다. 우진 제 땀을 닦아냈는데도 땀 냄새는 커녕 이름 모를 꽃향기같기도 하고, 민서의 향기같기도 한 순결무구한 향이 베인 손수건이었다. 손수건에서는 순대국 냄새 따위는 나지 않았다.

 

- ...형...무슨 일 있었어요?

- 응?

 

아, 맞다. 대휘랑 통화중이었지...우진은 겨우 정신을 붙잡았다.

 

- 아이다.

- 형. 그거 알아요? 형, 당황하거나 불리해지면 사투리 쓰는 거.

 

우진은 대휘의 말에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민서도 늘 그랬다. 그거 알아? 너 당황하면 사투리 쓰는 거....민서야...우진은 혼란스러웠다. 미리 말하는 데 민서는 포기하는 게 좋을 걸요? 그쪽하곤 어울리지 않으니까. 무용과 고소영 심은하의 말이 떠올랐다. 그 여학생들은 알고 있었을까. 민서가 부잣집 딸이 아니라 순대국밥 집 딸이라는 걸. 그러고 보니...민서와 처음 밥을 먹던 날이 떠오른다. 학교 앞 순대국집, 감자탕집 앞에 데려갔을 때 얼굴을 찌뿌리던 민서. 압구정 로데오거리의 명품샾에서나 팔 것 같은 옷을 입은 부잣집 딸 민서와 순대국집 딸 민서. 우진은 자신이 아는 민서는 누구인지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이 와중에 가장 혼란스러운 건 우진 자신이었다. 자신이 어떤 민서를 좋아했는지 알 수 없었다. 부잣집 공주 같은 민서가 좋았는지 가난한 순대국집 딸 민서를 좋아했는지...그리고 왜 자신이 혼란스러운지...누구한테라도 묻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 형...무슨 일이예요? 그 누나랑 잘 안 되는 거예요?

 

어떻게 알았는지 대휘가 물어왔다. 어쩌면 시나리오작가 지망생답게 눈치가 빠른 건지도 모르겠다. 우진이 아는 대휘는 감성도 풍부하고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주는 아이였고 무엇보다 가까운 친구가 아니라 민서를 알지 못했고, 같은 시간을 사는 아이도 아니었다. 어쩌면 일기장 같은 친구였다. 대휘가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했던 제 짝사랑을 우진에게 말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우진의 이야기를 조용히 다 들은 대휘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 그래서...형은 그 누나가 부잣집 딸이어서 좋았던 거예요?

- 아니야. 걘 한 번도 자기가 부잣집 딸이라고 말한 적 없어.

- 그럼, 형은 그 누나가 가난한 집 딸이라서 싫은 거예요?

- 무슨 소리야. 아니야. 그게...

- 아니면...그 누나가 형을 속여서 화가 난 거예요?

- 아니...화가 난 게 아니고...

 

우진은 말을 더 잇지 못했다.

 

- 형. 사람은요,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대요. 왜냐면 그래야 자기 마음이 편하거든요. 일종의 방어기제죠. 어쩜 그 누나가 형한테 속인 게 없는데 형은 현실이 아닌 이상 속에서 그 누나를 대한 게 아닐까요?

 

역시 연영과 답게 생각하는 게 우진 저와는 달랐다. 글을 쓰는 사람은 책도 많이 읽고 영화도 많이 본다더니 기껏해야 경제학전공서만 읽는 우진 저와는 다르구나 싶었다. 그렇다하더라도 민서도 우진에게 거짓말을 했다. 왜 육중한 나무대문의 저택 앞 계단에 서서 다 왔다고 했을까. 그건 거짓말이 아닌가.

 

- 그치만...걔는 날 속였어...

- 형...난 그 누나 잘 몰라요. 그런데 그 심정은 알 것 같아요. 현실이 너무 힘들어서 부정하고 싶었을지도 몰라요. 나쁜 의도는 아니지만...누굴 속이려고 한 건 아니지만...어쩌면 형이 너무 좋아서 형한테 잘 보이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아니면 형이 좋아하는 모습이 되려다 보니 본의 아니게 거짓말한 건지도 모르고...

- 솔직하게 말했어도 좋아했을 거야.

- 형. 진짜 좋아하면 그 사람한테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게 사람이예요. 형처럼 공무원인 아버지, 현모양처인 엄마의 사랑을 받으며 부족함없이 공부만 했던 사기캐들은 모르죠. 자신이 누군가에게는 워너비라는 걸.

- 사기? 내 사기꾼 아닌데?

- 다 슬펐나 보네. 이런 상황에서 질문을 하고. 영화, 특히 히어로물이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스펙터클 영화 속 남자주인공에게 감독들은 모든 재능을 다 부여해서 사기같다는 의미로 나온 말이예요. 외모에 능력, 실력, 경제력, 싸가지없는 것 같은데 따뜻하고 강자한테 강하고 약자를 도와줘서 여자들한테 인기는 좋지만 정작 본인은 시크하죠. 결국 마지막에 이기는 건 항상 그런 사기캐들이죠.

- 내 그런 사람 아닌데.

- 사기캐 맞네. 꼭 사기캐들이 그렇게 말해요. 나는 불완전한 남자요. 그대의 사랑을 받지 못하니.

- 나 그렇게 잘생기지도 않았어. 그렇게 잘나지도 않고.

- 형은 분명 좋은 사람이예요. 정직하고. 성실함을 사람으로 표현하면 박우진일지도 모르죠.

- 니가 날 언제 봤다고.

- 못 봤다고 모르나? 21년 후에 만날지 안 만날지도 모르는 애가 찌질한 짝사랑에 차였다고 저녁까지 사주는 사람은 흔치 않죠. 정말 고마워요.

- 니도 많이 좋아졌나 보네.

- 네?

- 이젠 목소리가 좀 편해져서.

- 아...

 

대휘는 멍해졌다. 우진을 위로하는 중이었는데 어느새 우진이 자신을 위로하고 있다니. 어제까지는 우진이 대휘를 웃게 해주려 애썼다면 오늘은 자신이 우진을 웃게 해주고 싶었다.

 

- 아마 그 누나는 형을 너무 좋아했나 봐요. 거짓말로라도 예쁘게 보이고 싶을 만큼.

 

이 말을 하는 데 이유도 없이 대휘의 마음 한 구석이 바늘에 찔린 듯 아파왔다.

 

- 더 잘해주세요. 그 누나가 어떤 사람이든 좋아한다는 걸 많이 표현해주세요. 그럼 곧 솔직하게 말할 거예요.

- 그럴까. 내가 더 믿음을 주면 나한테는 솔직하게 말해줄까. 결국은 내가 믿음을 주지 못했다는 거네.

- 형도 처음이잖아요. 누굴 좋아하는 거. 누구든 처음엔 다 서툴죠.

- 넌 모르는 게 하나도 없네.

 

우진은 제 마음을 알아주는 대휘가 고마웠다. 마치 일기장에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을 자신이 해주는 기분이었다. 대휘와 이야기를 하면 이렇게 편하게 모든 이야기를 할 수 있는데 정작 좋아하는 민서와는 왜 말 한마디 쉽게 하는 것도 힘들기만 할까.

 

- 내가 그랬으니까요. 얼마 전까지 나 그 선배한테 잘 보이려고 반도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책을 읽었어요. 혹시라도 그 책을 핑계로 한마디라도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자신과 똑같은 책을 읽으니 나를 좀 더 괜찮은 애로 봐주지 않을까. 난 좀 더 보편적이고 쉬운 영화 좋아하는데 그 선배가 좋아한다고 어렵고 난해한 영화 졸면서 봤어요. 선배가 즐겨듣는 음악이라는 말에 좋아하는 장르도 아닌데 듣고. 그 선배가 좋아할만한 사람이 되려고 애썼어요.

 

대휘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지 못했어요. 마치 나를 잃어버린 것처럼.

- 그 선배도 알고 있을 거야. 있는 그대로의 이대휘가 얼마나 멋지고 예쁜지. 다만 서로 인연이 아니었던 것 거야.

- 형이 어떻게 알아요? 내가 예쁜지 어떤지.

- 알지. 내가 쫌 사람 볼 줄 알거든.

 

푸하하하하...대휘는 웃음을 터뜨렸다. 늘 진지하고 교과서같은 박우진이 이런 말도 할 줄 알고. 이런 박우진이기에 그 사람도 우진을 좋아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자신보다 21년을 먼저 태어난 우진이 꼭 사랑을 이루길 바라며 대휘가 말했다.

 

- 그 누나 참 강하고 용감한 사람이예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과 환경을 어떻게든 극복하려는. 우진이형. 그 누나가 어떤 사람이든, 가난하든 부자든 영원히 사랑하겠다는 믿음을 주세요. 어떻게든 그 누나 붙잡아요. 사랑도 많이 해주고요...

 

말 끝이 자기도 모르게 떨려서 대휘는 울 것만 같았다. 어쩌면 자기가 바라는 사랑이 이런 사랑 아니었을까. 아니면 자신은 받지 못한 사랑을 이름 모르는 그녀는 꼭 받길 바랬던 걸까. 그러나 이런 두 가지 이유로도 설명이 안 되는 헛헛함이 가슴에 남았지만 애써 모른 척 하며 하하 웃었다.

 

 

33. 1997년 우진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왼손으로 한쪽 턱을 받치고 현대무용이론 책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공부하던 민서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진에게 물었다. 그럴려고 그런 게 아닌데 우진이 저도 모르게 민서를 빤히 바라봤나 보다. 우진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자 민서가 생긋 웃으며 다시 책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대휘 말대로 민서에게 믿음을 줘야하는데 어떻게 해야할지 갈피를 못 잡으며 억지로 제 책에 시선을 옮기던 우진의 눈에 노란 카디건을 입은 민서의 소매 아래로 검붉은 멍자국이 보였다. 민서야...

 

워낙도 마르고 가는대다 피부가 투명한 민서인지라 멍자국은 더 눈에 띄었다. 생각해보니 무용을 한다던 민서는 치마를 입고 나오던 날 가끔 무릎에 멍이 들어있던 게 기억났다. 보려고 했던 건 아닌데 눈에 띄어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우진에게 민서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었다. 원래 무용실기 수업 때 기본 동작을 하다보면 무릎이 찧기도 하는데 자기는 쉽게 멍이 드는 타입이라고. 그렇게 생겼다고 하기엔 위치가 마음에 걸렸다. 어제 제 엄마와 실랑이를 하다 다친 자국일까.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우진으로서는 부모자식간에 싸우고 서로에게 상처준다는 건 상상도 해본 적 없는데다 어제 자신이 본, 제가 알던 민서가 아닌 것 같던 모습만 떠올랐다. 늘 조용하던 아이가 소리치고 울고 화를 내고. 묻고 싶다. 민서야. 왜 나한테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어? 그런 불안하게 흔들리는 우진의 시선이 제 손목에 느껴졌는지 민서는 얼른 소매 끝을 끌어내려 멍자국을 가렸다.

 

“무슨 생각을 해?”

“아...아니...내는 그냥...”

 

저도 모르게 다시 사투리가 튀어나왔다. 나름 장소가 장소인지라 조심한다고 목소리를 낮췄는데 시험기간이라 조용한 열람실에서 그 마저도 크게 들렸나 보다. 같은 테이블의 학생들이 고개를 들어 우진에게 시선을 주며 무언의 항의표시를 하자 우진이 미안하다는 듯 목례를 해 양해를 구했다. 불안한 우진의 눈빛에서 마치 자신의 치부를 들킨 사람처럼, 아니면 화난 사람처럼 민서의 얼굴이 굳어지면서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책상 위의 책이며 물건들을 착착 챙기고 있었다.

 

“미...민서야...”

 

우진의 목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우진으로서도 이런 상황은 당황스러웠다. 친구들과는 큰 소리 내는 법 없는 우진이었고 여자를 만나는 것도, 이렇게 어두워진 민서를 보는 것도 처음인데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얼른 알지 못했다. 다만 하나는 알 수 있었다. 민서에게만은 자신이 이성적이지 못하다는 거. 민서의 표정 하나 얼굴빛 하나에도 안절부절 못할 만큼 모든 감각과 감정이 오로지 민서에게만 집중하고 있다는 거. 민서는 제 물건을 다 챙겨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춤을 추듯 조용한 민서의 움직임과 다르게 우진은 갑자기 몸을 일으키는 바람에 우당탕탕 의자까지 넘어져 큰소리를 냈다. 가까운데 앉아 우진과 민서를 흘끔거리던 우진의 친구들까지 고개 들어 심상찮은 상황을 주목하고 있었다. 이제 우진에게는 조금 전까지 양해를 구할 만큼의 여유도 없었다. 우당탕탕 책을 떨어뜨리고 필통 속 물건들을 쏟아가며 제 물건을 욱여 넣다시피한 가방을 잠글 사이도 없이 열람실밖을 뛰어나갔다.

 

민서야!!

도서관 밖으로 나온 우진은 사방을 둘러봤다. 그 마르고 가는 애가 그렇게까지 빠르게 사라질 줄은 몰랐다. 우진은 당황했다. 만나야 미안하다 사과를 하든, 니가 부잣집 딸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고백을 하든 할 게 아닌가. 우진은 예술대 단과건물 있는 학교 위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숨이 턱까지 찼다. 민서야!! 한달음에 예술대까지 올라간 우진은 그날 꽈팅에서 파트너였던 심은하와 고소영을 찾을 수 있었다. 얼굴이 땀으로 범벅이 된 우진이 고소영 심은하 앞에 왔을 때 그들의 눈은 놀라서 커져버렸다. 오후 강의라 민서를 못 봤다던 그녀들은 우진에게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 민서에 대해 알았나 봐요?

 

그럼 자신만 몰랐단 말인가. 민서가 가난한 국밥집 딸이라는 걸.

 

- 그래서 실망했어요? 하긴 박우진씨같은 범생이는 이해 못하지. 하나 더 알려줘요? 걔 업소 나간다는 소문도 있는데.

 

우진은 저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리고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어른 남자들 옆에 앉아 수줍게 웃고 있을 민서를 떠올렸다. 새침한 얼굴로 한 번씩 생긋 웃는 민서는 심지어는 우진같이 무뚝뚝한 경상도남자의 마음을 설레게 할 만큼 매력적이었다. 어쩌면 다른 남자들도 그런 민서의 매력에 반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손목의 멍은 업소에서 남자들에게 붙들려 생긴 자국이란 말인가. 민서는 그럴 아이가 아니었다. 아니, 언제가 민서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누군가의 눈에 띄는 것,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걸 끔찍이도 싫어하던 민서는 우진에게 말했었다.

 

-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지만 그런 이야기를 다 믿는 건 아니지? 그래도 넌 조금은 좋은 애라고 생각했는데.

 

그 말은 그런 뜻이었을까. 이미 다 알려진, 부잣집 딸 같지만 알고 보면 업소에 나가는 가난한 국밥집 딸 강민서...

그날 강의가 귀도 들어가는지 눈으로 들어가는지 우진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 있다가 강의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미친 사람처럼 강의실을 뛰쳐나가 민서에게 수없이 호출을 하고 예술대로 뛰어 올라갔다.

 

 

34. 열 한 번째 통화

 

- 헐. 그래서 그냥 왔다구요? 그 말 다 믿는 건 아니죠?

- 믿는 건 아니지만...

- 소문 일 뿐이잖아요. 그 고소영 심은하가 질투해서 그렇게 말했을 수도 있어요. 그리고 그게 사실이라 쳐요. 그냥 알바뿐이었을수도 있어요. 부모 도움없이 공부하고 최소한의 생활을 유지하기가 쉬운 게 아니예요. 그 누나가 혼자 얼마나 힘들었을지 공감해주고 다독여줘야죠. 그동안 자존감 잃지 않고 애써왔는데 너무 예쁘고 고맙지 않아요?

- 나도 그 말을 믿진 않아. 그녀가 어떻든 난 그녀를 좋아해.

- 형. 여자들은 말이죠, 사랑하는 사람이 먼저 사과해주길 바래요. 집 알고 있다면서요. 기회가 좋잖아요. 집 앞에서 기다려 누나한테 말해주세요. 누날 사랑하는 만큼 누날 기다려주세요.

- 하지만...그럼 내가 걔 뒤를 밟은 걸 알게 되잖아.

- 지금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예요. 아니면 내일 강의실에 다시 찾아가세요. 그리고 무조건 무릎 꿇고 말하세요. 내가 잘못했어. 널 이상하게 본 게 아니야. 난 네가 아픈 게 싫어. 좋아해. 네가 너무 좋아서 쉽게 말하지 못했어. 네가 누구든 상관없어. 내가 힘이 되 줄게. 날 믿어줘. 한번만 더 기회를 줘...그리고 꼭 안아주세요.

- 그럼...날 받아줄까?

- 우리 엄마도 아빠 그렇게 만났대요. 가난한 고학생이었던 우리 엄마가 가장 힘 들었을 때 아빠가 그랬대요. 그냥 너라서 널 사랑할 수 밖에 없다고. 지금 널 사랑하지 않으면 내가 평생 후회할 것 같다고. 넌 너무 소중하고 사랑스런 사람이라고. 한번만이라도 자기를 믿어 보라고. 네 짐을 같이 져주고 싶다고. 우리 엄마, 아빠의 그 용기와 진심에 뻑 갔대요. 아빠의 댓가없는 사랑과 진심이 그대로 느껴져서 아빠를 사랑할 수 밖에 없었대요. 형도...그런 사람이잖아요. 한번만 더 용기를 내보세요.

 

대휘의 말에 우진은 비로소 자신이 해야 할 일이, 할 수 일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지만 동시에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 그래...결국...난 그 애에게 아무런 믿음도 못 줬네. 오히려 그녀를 슬프게 만들었네.

- 처음이니까...모를 수 있죠. 하지만 형 말 들으니까 형은 진짜 그 누나 사랑하는 거예요. 왜냐면...진짜 사랑한다면 이성적일수가 없으니까요. 이성적이라니...그게 사랑인가요? 말하세요. 더 늦기 전에.

 

대휘와 이야기를 하고나니 마음이 진정되고 머릿속이 맑아지는 것 같아 말끝에 대휘의 목소리가 흔들리는 건 느끼지 못했다. 연영과에서 시나리오를 공부해서 그런지 대휘는 감정이 풍부했고 섬세했다. 그래서 우진의 고민에 공감할 때 우진의 감정을 대변해주는 건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건지 경계가 모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정작 대휘는 이렇게 말하면서 마음 한 구석이 허전했다. 우진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면서 한편으론 우진이 그녀와 함께 행복해하는 모습이 그려져 한없이 부러웠다. 우진의 사랑을 받는 그녀는 얼마나 행복할까. 심은하 고소영 보다 예쁜 오드리 헵번 같았다는데 <로마의 휴일>, <티파니에서 아침을>, <마이 페어 레이디>, <사브리나>...그 수많은 영화 속 오드리 헵번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모른다. 그녀는 예쁘겠지. 아름답고...움직이는 게 춤을 추는 것 같았다니 우진이 얼마나 그녀를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다. 고백조차 망설일만큼. 제 말 한마디가 그녀에게 상처가 되면 어쩌나 조심스러울만큼 그녀를 아끼는 마음이 22년의 시간을 건너 대휘에게도 느껴져서 대휘는 오히려 낮게 한숨이 나왔다.

 

- 고마워. 니 말을 들으니 용기도 나고 희망도 보인다.

- 그래요. 홧팅!! 혹시 알아요. 우리 아빠엄마처럼 유명한 CC가 될지. 아! 맞다! 형 경제학과랬죠? 우리 아빠도 경제학관데.

- 진짜?

 

영통도 아닌데 대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아빠의 지인으로 우진을 찾아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21살의 우진도 나이답지 않게 이렇게 생각이 깊고 의젓한데 43살의 어른이 된 우진은 얼마나 더 멋있을까. 아버지처럼 지적인데다 다정다감하면서도 로맨틱한 분위기의 어른 남자가 눈앞에 떠올랐다.

 

- 누군데? 96, 97학번이면 내가 다 안다. 아니면 예비역 형들인가?

- 아! 우리 아빠도 96학번이예요.

- 잠깐, 네이버인가 네버인가에 나는 안 나온댔지? 네 아버지는 나와? 거기?

- 당연히 나오죠. 얼마나 훌륭한 분인데.

 

대휘의 말에 우진은 살짝 부러워졌다. 96학번 자기 동기들 중에 20년 후에 성공해있을 동기는 누구일까. 얼마나 성공했기에 아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어른이 된 걸까.

 

- 영석이는 좋겠네. 이렇게 똑똑하고 귀여운 아들도 있고.

 

기분이 좋은 듯 대휘가 하하 웃었다.

 

- 왜요? 스물 한 살 우리 아빠한테 말해주게요? 나, 니 아들이랑 전화한다 하고?

- 지금부터 친하게 지내려고. 나중에 친구 덕 좀 보게.

 

우진의 농담에 대휘가 까르르 웃었다. 우진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농담 잘 못하는 사람이 나름 한다는 농담이 너무 아재스러웠다. 역시 이래서 아재유머라고 하는 건가...

 

- 이영석이요.

 

영석의 이름을 들었을 때 우진은 잠시 멍해졌다. 1학년 때부터 과대표였던 영석은 과 수석을 놓쳐본 적 없어 늘 장학금을 받는 수재였고 성격은 밝았지만 쓸데없이 말이 많은 녀석은 아니었으며 성격도 비슷해 우진과도 친했지만 적어도 우진이 아는 한 여자친구는 없었다. 그런 영석이 22년 후 대휘만한 아들이 있다니 어떤 운명의 상대를 만났기에 그렇게 일찍 결혼한단 말인가. 우진의 침묵의 의미를 안걸까. 대휘가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 아빠랑 엄마는 만난 지 얼마 안 돼 고백하고 사귀기 시작하고 날 임신하고 결혼했대요. 우연히 아빠가 집에 도둑이 들어 위험에 빠진 외할머니랑 엄마를 구해줬대요. 정말 대박적이지 않아요? 완전 백마 탄 왕자, 정의의 사도, 여왕을 지키는 기사죠. 그때 사건이 마무리될 때까지 아빠는 엄마 곁을 떠나지 않았구 엄마는 그런 아빠가 너무 든든했대요. 원래도 외갓집은 넉넉지 않은데다 절도까지 당해 엄마는 학교를 더 다닐 수 없었는데도 아빠가 알바를 해서 엄마의 꿈을 이룰 수 있게 해줬대요. 사랑은...그런 거 잖아요. 댓가를 바라지 않고 내 마음을 모두 주는 거. 무슨 이유 때문에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저 너라서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거.

 

부모님의 이야기를 하면서 스스로가 감동을 받은 걸까. 아니면 스스로가 감정이입을 한 걸까. 이야기를 하는 대휘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연영과 학생이고 시나리오작가를 꿈꾸는 아이답게 천부적인 스토리텔링에 대휘의 말만으로도 상상이 가 우진은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영석이에게 그런 로맨틱한 구석이 있었다니 어쩌면 저와 영석 모두 비슷한 상황에서 고민만 하는 저와 다르게 행동으로 옮긴 그 용기가 멋있다 못해 한편으론 부럽기도 했다.

 

- 영석이의 운명의 상대는 누군데? 알려주면 안되나?

- 미리 알면...재미없잖아요.

- 대신 우리끼리 비밀. 됐지?

- ...우...리? 우리요?

 

고작 그 한마디에 대휘의 마음 한구석이 고백을 받은 것처럼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몽글몽글해졌다. 미쳤어. 이대휘...이 사람과는 22년의 시간이 가로막혀 있다고. 아니 아빠의 친구라고. 그런 사람의 말에, 그것도 사랑 고백도 아니고 ‘우리’라는 말에 얼굴이 빨개질 일이야. 주체할 수 없이 쿵쾅쿵쾅 뛰는 심장에 수화기 저쪽에서 저를 부르는 우진에게 힘들게 말했다.

 

- 대신 스물 한 살 우리 아빠한텐 말하지 말아요.

- 약속!

- 으음...강민서요.

- 누구?

- 강민서요...무용...과...

 

미처 말을 끝맺지 못했는데 전화가 끊겼는지 휴대폰 너머에서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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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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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휘라서 가능했습니다.

 



그대의 놀라운 힘이 나의 꿈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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