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100m가 좀 넘는 계단을 숨도 돌리지 않고 한 번에 올라가, 일행이 도달한 곳은 양쪽이 탁 트인 넓은 공간이다.

아까 호숫가에서 본 것대로, 천장은 아치형으로 되어 있다. 앞으로는 테르미니 호수 너머의 산, 뒤로는 테르미니 시가지, 특히 사원과 조금 멀리 떨어져서 마주보고 있는 통유리 벽면의 쇼핑몰 건물이 보인다. 전혀 다른 시대, 전혀 다른 방식의 건축물임에도, 여러 번 봐도 결코 어색해 보인다거나 하지는 않다. 한 폭의 그림처럼 어울려 보인다.

탁 트인 넓은 공간의 양옆으로는 둥근 기둥으로 떠받쳐진 벽면 너머로 많은 방들이 보인다. 방마다 조각상이 하나씩 들어서 있는데, 그 앞에는 명판 같은 것이 하나씩 놓여 있다. 여기저기 녹이 슬고 반 정도로 갈라진 것도 있다. 현애와 세훈은 가까이 가서 그 명판들을 본다. 처음 보는 문자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어디서 많이 본 적 있는 것 같으면서도, 다른 문자들이다. 반 정도는 상형문자 같아 보이기도 한다.

“저기, 파울리 씨!”

알 수 없는 문자들을 보던 세훈이 뒤따라 올라오는 미켈을 부른다.

“왜죠?”

“이 문자들은 다 뭐예요?”

“아, 이거요? 처음 보시는 분들은 모르시는 경우도 있더군요.”

미켈의 답은 바로 나온다.

“이건 학자들이 ‘중세 이레시아 문자 C’라고 부르는 건데, 당시 이레시아인들은 모두 6가지의 문자를 사용했고, 여기 적힌 건 그 중 하나입니다. 이레시아인들의 언어 역시 지금과는 조금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문자만 알면 큰 어려움 없이 읽고 이해할 수 있죠.”

“그런데, 적힌 건 무슨 내용이죠?”

어느 새 조각상 앞에 모인 다른 일행도 미켈에게 이목이 집중되어 있다.

“대충 이레시아인들이 적어놓은 거라는 건 알겠는데...”

“아, 이것도 해석이 다 된 내용인데, 그냥 조각상에 해당하는 인물이 누군지 해설해 놓은 거라고 하더군요.”

미켈의 답은 바로 나온다.

“그럼, 이 건물의 원래 용도는...”

“사원이 아닐 가능성이 크죠. 정확한 건 자료가 더 나오고 조사도 더 진행되어 봐야 알겠지만, 아무튼 이 호수 사원이라는 건축물이 전적으로 종교적인 용도는 아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요...”

몇 명은 허탈하다는 반응이지만, 유익한 걸 알았다며 고마워하는 반응이 더 많다. 미켈은 다시 한번 목청을 가다듬고 말한다.

“아까도 제가 말씀드렸지만, 여기 호수 사원의 백미는 오래된 건축물과 현대 건축물들이 어색하게 동거하지 않고 조화롭게 어우러진 모습입니다. 이런 걸 ‘미학의 파괴’니 뭐니 하며 애써 부정하려 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는 건, 비극이 아닐 수 없죠.”

어느덧 일행은 미켈의 말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고 있다.

“그럼 여기서도 각자의 시간을 마음껏 즐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0분 후, 9시 55분에 다시 여기 계단 앞에서 모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9시 55분에 뵙겠습니다!”

미켈의 말이 끝나자마자, 일행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각자 흩어져서 사진 찍을 곳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어느덧 그 자리에는 현애와 미켈 둘만 남았다.

“후... 여기 서니까 뭐냐... 마치 내가 사제가 된 것 같은데.”

“그렇지?”

미켈이 운을 띄운다.

“자! 그건 그렇고, 잠깐만 따라와 봐.”

미켈이 현애를 잡아끈다. 어디로 가려는 건가? 미켈이 향하는 곳은 벽면 너머로 있는 조그만 문이다.

“응? 괜찮겠어? 이러다가 나하고 미켈 씨가 없어진 거 눈치라도 채면 어쩌려고 그래?”

“걱정하지 마. 20분 정도 시간을 줬잖아. 그리고 여기 사원 안에는 어디 도망가고 할 데도 없다고.”

“정말?”

“그래. 봐봐. 너희 일행은 다들 사진 찍는 데 정신이 팔려 있잖아.”

미켈의 말대로, 세훈을 포함한 일행은 다들 각자 사진을 찍는 데 여념이 없다.

“이럴 때가 딱 좋은 때지. 좀 더 좋은 구경거리를 보여 주려고.”

“뭔데?”

“아마도, 나만 알고 있는 곳일걸. 보면 후회 안 할 거야. 어때?”

“네 말대로... 좋겠...지?”

현애는 미켈의 손에 이끌려 사원 안에 나 있는 한 통로로 향한다.

 

잠시 후, 사원 내부의 통로. 희미한 조명의 반사광이 빛나는 통로는 어둑어둑하다. 완전히 깜깜한 것보다도 더 어둡게 느껴질 정도다. 경사가 약간 급하기도 한 계단과 계단참이 반복된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숨이 차거나 하지는 않다.

“응? 우리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좋은 구경거리 보러 가는 거, 맞기는 해?”

“와 봐. 와 보면 안다니까.”

미켈의 손에 이끌려간 지 약 2분이 지났을 때...

“아, 이제 다 왔다! 이 문만 열고 나오면, 또 다른 풍경을 볼 수 있을 거야.”

둘의 앞에는 금속으로 된 문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

“또 다른 풍경이라니?”

“아 글쎄, 보면 안다니까. ”

미켈이 앞장서서, 문을 열자...

 

시원한 바람이, 현애와 미켈의 얼굴에 닿는다.

그리고 두 사람 앞에 보이는, 또다른 풍경. 호수 너머로 보이는 크고 높은 산들이 두 사람의 눈앞에 바로 보인다.

“아, 여기 괜찮네.”

“맞아. 통로가 숨겨져 있어서 사람들이 잘 모르는 곳인데, 여행사들이 만든 호수 사원 내부 답사 코스에서도 여기는 빠져 있어. 그래도 아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찾아서 오더라. ”

“어, 그래?”

사원을 둘러싼 호수의 잔잔하고도 고고한 풍경이 막 현애의 온몸을 사로잡는다. 호수 너머의 산을 배경으로 몇 장 사진을 찍는다. 마치 탄산음료를 마신 듯 속이 뻥 뚫리는 듯하다. 혼자서 사진을 찍고 나서, 미켈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막 부탁하려던 그때...

“잠깐...”

별안간 현애가 발걸음을 멈추고는,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핀다.

“왜 그래?”

“아무래도 여기 우리 말고 또 누가 있는 것 같아.”

“그게 무슨 소리야.”

미켈은 현애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되묻는다.

“여기에는 우리 두 사람밖에 없는데? 봐봐. 문은 하나고, 달리 나갈 곳은 아무 데도 없어. 이런 데 뭐가 있으려고!”

그러나.

다음 순간!

“어, 미켈, 미켈 씨!”

미켈이 보이지 않는다. 또다시. 뭔가 일이 벌어졌다. 나갈 데라고는 아까 들어온 문밖에 없는 데서, 도대체 미켈은 어떻게 됐단 말인가? 심상치 않다. 아까 골목길에서처럼 누군가의 공격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한번 더, 큰 소리로 불러 본다.

“미켈 씨! 미켈 씨! 어디 간 거야!”

“......”

“좀 들리면 말해!”

하지만 여전히 미켈은 대답이 없다. 정말로 어디로 증발해 버리기라도 한 듯 말이다.

“어이, 미켈! 들으면 말 좀 해!”

바로 그때.

숨이 턱 막히는 듯, 뭔가 현애의 가슴을 짓누르는 듯하다.

“뭐야, 여기 또 누가 있는 거야?”

이상한 예감이 머리를 스친다. 급히 위아래를 훑어본다. 분명 이상한 예감은 있는데, 보이지는 않는다... 아니, 정확히는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해야겠지만!

“어떤 놈이냐! 나와!”

“훗, 바보인가. 나오라고 나오게.”

남자의 굵은 목소리다. 하지만 어디서 들리는 건지, 갈피를 못 잡겠다. 위, 아래, 옆, 어느 쪽인가?

“빨리 나와. 자신이 없으니까 이렇게 숨는 거 아니야?”

“그 수작, 알고 있지. 내가 모습을 드러내면 네 녀석은 그걸 기회 삼아서 나를 쳐 버릴 거고. 모를 것 같나?”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가 악을 쓰듯 끓어오른다.

“그리고 너, 잘 걸렸다. 파울리 녀석에게 숨겨진 동업자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 말이 사실이었군.”

“하, 아니, 아까 만나는 녀석부터 도대체 다들 왜 그래?”

현애는 황당했는지 헛웃음소리를 낸다.

“어디를 봐서 내가 그 파울리라는 사람의 동업자라고 쓰여 있는데? 응? 좀 말해 줄래?”

“왜, 그렇게 숨기려고 하면 내가 못 알아챌 줄 알고?”

어디서 들려오는지 알 수 없는 그 남자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다.

“어제 분명히 너는 콘라트 뮐러하고 상대하고, 그 녀석을 죽였어. 그 일이 있고 얼마 안 되어, 콘라트가 잡고 있던 이권들이 모조리 파울리에게 넘어갔지. 채 반나절도 안 되는 시간 동안에 말이야. 이게 네 녀석이 파울리와 한패라는 증거가 아니면 뭐냐?”

“마음대로 생각하라고.”

“그럼 좋다. 이대로 네 입도 열어 주겠다!”

남자가 악에 받친 소리를 지른다.

순간 현애의 눈에 들어온다.

웬 고치 같은 게 벽에 매달려 있는 게 보인다. 한눈에 봐도, 마치 거대한 곤충이 그런 것처럼, 수많은 흰 실들이 뭉치고 엉켜서 그 안에 있는 누군가를 옥죄고 있다. 크기로 봐서, 저건 미켈이 확실하다!

이리저리 몸부림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럴수록 그 ‘고치’는 강하게 옥죈다. 마치 그 고치에 의지가 있기라도 하듯 말이다.

“보고 있나?”

“이런다고 내 입을 열 수 있기나 해?”

“오, 굳이 말해 달라고 하지는 않겠어.”

남자의 목소리는 은근히 현애를 약올린다.

“왜냐하면, 내 능력을 겪은 녀석들은 그게 누구건 내 뜻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으니까. 네 녀석도 금방 입을 열 수밖에 없겠지!”

“아... 그래?”

현애는 잠시 겁을 먹은 듯 몸을 떤다.

“정말, 내가 말을 할 수밖에 없게 되는 건가?”

“그렇지. 입을 열든가, 아니면 여기 고치에 싸인 파울리 녀석처럼 되든가.”

“역시나...”

현애는 잠시 말이 없다. 공기 중에 남자의 음산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오는 듯하다. 잠시 말이 없는 현애를 보고 조바심이 났는지, 그 남자는 계속 현애를 재촉한다.

“현명한 선택 하라고!”

말이 없던 현애가, 이윽고 입을 연다.

모습을 여전히 드러내지 않는 남자를 대놓고 조롱하듯, 입에는 웃음까지 띠고 있다.

“아, 미안한데, 이제는 아니야.”

“뭐야, 이 자식!”

“이제껏 너는 두 가지 선택지만 요구해 온 모양인데,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거든?”

“네게 거부할 권리는 없을 텐데...”

“그럼 지금, 첫 반례가 생긴 거라고 해도... 되겠지.”

“그래? 말 잘 했군. 그럼 좋다.”

남자의 목소리가 끓어오른다.

“네 녀석에게도 더 이상 선택권은 주지 않겠다!”

남자의 끓어오르는 목소리가 멎자마자...

“엇...”

현애의 왼쪽 뺨에 뭔가 축축한 감촉이 돈다. 어제 미켈과 싸웠을 적의 그 느낌과는 비슷하면서도 많이 다르다. 이건 마치, 어린 시절에 거미줄을 처음 만져 보고 기겁했을 때와도 같이, 불쾌한 무언가가...

얼른 왼손을 들어 뺨에 묻은 뭔가를 만져 보려고 한다.

그때다.

“어?”

순간적으로 뭔가가 현애의 손가락을 잡아 버린다.

이건... 거미줄이 아닌가! 그것도 매우 끈끈하고, 떼 버리기 힘들 정도로 단단히 옥죄고 있는!

“좋아! 연결됐다, 제대로...”

위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의기양양해진 목소리다.

“하하하, 내 함정에 제대로 걸려 버렸군! 꼴 좋다!”

글 쓰고, 가끔 그림도 그립니다.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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