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서 박재준이 커뮤니티에 잠시 나타났었다. 익명 게시판이니 사진을 내려달라는 댓글 정도는 남겨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꺼지라는 얘기만 듣고 별 소득 없이 상무님의 사진을 지우지 못해 유감이었다. 소소하게 사생활 침해로 고소를 진행하게 되는 상황이 올까봐 심히 걱정 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런 생각도 잠시 했다. 어차피 상무님은 정말 모르실 거 같은데 내가 그냥 통벽남 행세 하고 사진 내려달라 그럴 걸 그랬나. 그러다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제 뺨을 살짝 때렸다. 그런 생각 하덜 말아라 재준아. 아무리 급해도 상무님 사칭이라니. 그건 안 된다. 안 되고말고.

재준이 그렇게 복잡한 머릿속을 차근차근히 정리하고 있을 때, 경헌은 회의에 집중하느라 온 신경이 곤두서있었다.


올해 안에 새로 런칭 할 케이크 전문 프리미어 베이커리에 굉장히 공을 들이는 중이었다. 소상공인들에게 아주 눈총을 안 받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하여 완연한 반대를 받지 않는 선에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것은 절대로 쉽지 않았다. 3년 전 즈음 신규 오픈했던 체인형 이탈리안 레스토랑과는 아주 결이 달랐다.


“다른 의견이 있으신 분?”


장장 40분가량의 제품 회의의 끝이 보였다. 빨리 이 탁한 공기 속에서 벗어나고 싶던 경헌이 기다렸단 듯이 마침표 찍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메뉴와 섭외할 파티셰 등 어느 정도 구색이 갖추어진 기획안이 정리 되어가고 있는데, 다 구운 케이크에 누가 손가락을 꽂아 넣듯이 우는 소리를 덧붙였다.


“상무님, 저는- 그래도 아직 걱정이 되는데요.”

“……네. 한 팀장님, 어떤 부분이요?”


프로 불편러들은 어느 자리에나 꼭 있다. 경헌이 약간 꿈틀거렸던 안면근육을 잘 붙잡고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표정엔 일그러짐도 미소도 없었다.


“다른 베이커리 종류 없이 오로지 케이크로만 마케팅을 한다고 선언하고 확실히 소상공인들 농성이 좀 줄어들긴 했는데- 사실상 그럼 소비자들하고 접근성이 조금 멀어지지 않을까 싶어요. 케이크는 약간…… 특별한 날에만 먹는다는 이미지가 있잖아요.”

“저도 그 의견엔 좀 동의해요. 생일 아니면 크리스마스? 진짜 더 잘 해봐야 결혼기념일 기타 등등. 이미지가 아무래도 그렇죠.”

“그리고 지금이야 일반 개인 사업자들이 잠시 조용해졌지만, 만약에라도 사업이 잘 되는 날엔 또 잡음이 날 겁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우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경헌이 아주 짧게 한숨을 쉬었다. 빔 프로젝터 옆에 얌전히 앉아있던 재준에 도르륵 눈알을 굴려 경헌의 눈치를 살폈다. 상무님은 빡쳤을 때 한숨을 짧게 쉬시는 분이라는 걸 가장 가까이에 있는 재준이 모를 리가 없었다. 제품 회의의 주제에서 양껏 벗어난 질문이 마음에 안 든 것이 분명했다. 부디 한 과장을 비롯한 걱정쟁이들이 건강히 멘탈을 부지할 수 있길 빌면서 두 손을 마주잡아 기도했다.


“한 팀장님, 우리 방금까지 굉장히 멋진 상품들에 대해 논의하지 않았나요?”


그렇게 경헌이 운을 떼었고 회의실에 앉아있던 많은 이들이 아차 하며 자기 입술들을 깨물었다.


“그 의견 관련해선 사업 기획 단계에서 종결 됐다고 생각했는데요.”

“그래도 아직 이 사업이 지니고 있는 위험성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뭐가 위험하죠?”

“네? 그- 소상공인…….”

“우리가 사업을 잘해서 잘 된 거지 우리가 그쪽을 직접적으로 망하게 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정 그러면 한 팀장님께서 소상공인들 따라다니면서 마케팅 도와주세요. 그럼 괜찮겠네요. 기업 이미지도 챙기고, 마찰도 잘 막고.”

“그건……. 시, 실례했습니다.”

“남들이 손가락질하고 언성 높이는 거까지 신경 쓰시면 앞으로 더 많이 있을 더 큰일들은 하시겠습니까? 제발 배포 크게 쓰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려고 기획팀에 재정 쏟는 거잖아요?”


입이 백 개 있어도 할 말은 한 톨도 없을 날카로운 말들에 회의실에 냉기가 돌았다. 회의 종료 후 경헌이 빠르게 기획서들을 정리해갔다. 회의실을 나서기 전 마지막 점검 시간이었다.


“그리고 오늘 한 팀장님 준비해 오신 기획3팀 케이크 원 플러스 원 기획안 잘 들었습니다. 굳이- 프리미엄 소리까지 붙여가면서 차별화를 뒀는데, 원 플러스 원. 네……. 알겠고요.”


그의 거창한 기획안이 경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가장자리로 밀려났다. 경헌의 뒤에 앉아있던 재준이 빠르게 다가와 그 기획안을 주워갔지만, 그 회의실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차경헌의 손을 떠나 박재준의 손에 들어가는 것들은 모두 폐기 대상이란 것을. 승진 꽃길만 기다리던 한 팀장이 보이지 않는 눈물을 삼키며 포커페이스를 일관했다.

‘차경헌 앞에선 절대로 속내를 들키지 마라.’ 임원 참여 회의 시간의 주요사항 중 하나였다. 경헌과 두 번 이상 의견을 나누어 본 기획팀 사원들은 몸으로 직접 익힌 표정관리 스킬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엔 차경헌의 포커페이스를 따라갈 자는 없었다.


“실례합니다. 갑작스럽게 연락이 와서…….”


달리 연락 올 것이 없는데 휴대폰이 세차게 진동하고 있었다. 중요한 전화라도 온 걸까 했는데 더 엄청난 것이었다. 오후 3시 15분. 위시의 데뷔일에 맞춰 뜬 예정에도 없던 무언가였다. 그것도 위시 오피셜 계정에서 직접 올린.

그 짧은 찰나에 경헌은 수도 없이 많이 흔들렸다.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조용한 곳으로 달려가 영상을 재생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손이 떨릴 것 같았지만 손가락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떨림을 조절하려 노력했다.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꿀꺽,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재준의 심장도 쿵하고 떨어졌다. 상무님이 이대로 회의실을 박차고 일어나 어디론가 가버리시면 나는 그 파국을 어떻게 수습을 해야 하는가. 최악에 최악의 상황을 떠올리며 그 상황을 모면할 최고의 수를 떠올리는 재준의 머리통도 바쁘게 돌아갔다. 하지만 그가 보좌하는 사람은 겨울왕국 얼음 대마왕 차경헌이었다.

그분은 분명 기함하고 계셨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바깥으로 내색하진 않으나 필히 내적 비명을 지르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이미 마음속으로 이루다의 이름을 천 번 쯤을 부르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공과 사의 구분은 확실했다. 뒷목에 식은땀이 삐질 흐를 정도로 참고 계셨다. 필사적이었다. 마치 목적지를 앞두고 화장실을 참는 급한 사람처럼.


“오늘 회의 이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회의 출력물들 정리를 대충 마치고 노트북에 꽂혀있던 USB까지 챙긴 경헌이 차분하고 보폭이 넓은 걸음으로 먼저 회의실을 벗어났다. 한 걸음 한 걸음씩 회의실에서 멀어질수록 걸음이 바빠졌다. 얼마 안 가선 거의 뛰다시피 한 속도로 개인 사무실 문을 열어젖혔다.

경헌이 작은 테이블에 회의 자료들과 USB를 요란스럽게 던져놓고 곧장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거 하나 꺼내면서도 얼마나 손을 떨었는지 이내 손 안의 핸드폰도 우당탕탕 떨어트렸다. 테이블 맞고 바닥에 추락한 핸드폰을 냉큼 주워 든 경헌이 의문의 영상을 재생시킴과 동시에 재준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노크도 없이 등장한 재준을 보고 놀란 경헌이 또 한 번 핸드폰을 빠자자작 떨어트렸다.


“아 깜짝이야!”

“왜 놀라고 그러세요?! 상무님 저한테 죄 지으셨어요?”

“하- 박 비서. 내가 노크 하고 들어오랬잖아.”

“노트북이랑 마우스랑 상무님이 걸러버리신 인쇄물들까지 들고 오느라 손이 없어서요.”


재준이 얄궂은 얼굴로 남은 손이 없음을 표현했다. 경헌이 됐으니까 나가보라는 말을 손짓 몇 번 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예고에도 없던 정체 모를 영상 감상에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재준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차곡차곡 노트북과 부속품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상무님이 뭔가를 재생하시는 소리를 들으며 괜히 말을 붙였다.


“뭐 떴어요? 상무님 아까 엄청 손 떠시던데.”

“어. 말 시키지 마.”

“전산 팀에 노트북 반납은 알아서 하고 오겠습니다-. 가져오신 서류들 검토하시고 결재 건도 꼭 챙겨주시고요. 아까 밀어내신 서류는 제가 가는 길에 폐기할게요. 그리고-.”

“박 비서, 이거 안 들리니까, 지금 나갈 거 아니면 조용히 하라고.”

“하? 이어폰을 끼시면 되잖아요.”

“그럼 박 비서 목소리가 안 들리잖아.”

“중요한 말씀은 다 드렸으니까 괜찮아요.”

“아니. 박 비서가 내 욕 할까봐.”

“하여간 눈치 무지하게 빠르시네요. 헙!”


차 상무의 핸드폰에서 들려오는 중독성 있는 멜로디에 이리저리 몸을 흔드느라 마음의 소리가 튀어나와버린 박 비서가 헉, 하고 입을 막았다. 재생되던 영상이 일시정지 됐다. 경헌의 사무실에 고요함이 감돌았다. 호랑이 앞의 쥐처럼 바들바들 떨던 재준이 아직 덜 꾸린 노트북 가방을 아무렇게나 이고 지고 후다닥 뛰어나갔다. 살기가 서린 그 방에서 탈출하는 것에 성공했다.

드디어 온전히 혼자가 된 경헌이 숨을 고르고 다시 영상을 처음부터 재생시켰다. 경건한 마음으로 최애의 컴백 영상을 감상하는데 숨이 턱턱 막혔다. 핸드폰을 들고 있는 손이 감격에 겨워 덜덜 떨리는 바람에 영상을 몇 번 더 돌려봐야 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사내 컴퓨터로 다시금 로그인을 하여 두어 번의 재생 더했다. 더 크고 좋은 화면으로 영상을 감상하던 중엔 결국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기쁨의 포효가 나오려다 들어가길 수차례 반복했기 때문이다. 경헌은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어찌할 줄 몰라 바득 바드득 책상을 긁고 있었다.


어쩜 이렇게 금발 머리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까? 컬러 렌즈를 끼지 않아도 저렇게 색소 옅은 갈색 눈은 미국인인 아버지를 닮은 것이겠지. 캘리포니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음에도 뽀얀 피부는 태생이 그런 거라던데 하느님 감사합니다.

경헌은 기도와 감탄을 번갈아했다. 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벅차오른 감정을 열심히 다스리던 중, 노트북을 반납하고 들어온 재준에게 순수한 덕질의 현장을 또 들키고 말았다.


“상무님!”

“아악!”


시선이 오로지 모니터에만 꽂혀있던 경헌은 소리 없이 들어온 재준의 인기척을 당연히 느끼지 못하고 놀라버렸다. 급하게 인터넷 창을 꺼버리며 손에 꽉 쥐고 있던 핸드폰을 다시 한 번 빠장창창 떨어트리고 말았다. 약 30분 동안 세 번째의 추락을 견뎌내지 못한 경헌의 소중한 핸드폰은 그렇게 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허리 숙여 핸드폰을 집어 든 경헌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눈치 빠른 박 비서가 다시 한 번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쳐 출구에 바짝 붙어 섰다.


“괜찮으……세요?”


행복한 시간을 방해한 것도 열 받는 와중에 핸드폰 액정까지 산산조각 났는데 괜찮을 리가 없었다. 경헌이 양질의 덕질을 위해 일부러 크고 넓고 최신형의 핸드폰으로 바꾼 지 딱, 한 달 째 되는 날이었다.

떨어트린 건 자신인데 재준에게 화를 내면 그것도 참 이상해질 것 같고 그렇다고 괜찮다고 말하자니 안 괜찮고. 입을 꾹 다문 경헌이 박살 난 폰을 얌전히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양쪽 시력 1.5에 빛나는 매의 눈 박재준이 상무님의 표정과 핸드폰을 못 보고 지나칠 리가 없었다. 목 뒤에서 식은땀이 삐질삐질 흐르는 것 같았다. 지금 튀면 영원히 회사에서 튀어 나가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내적으로 발을 동동 구르는 중이었다. 두 손은 어찌나 가지런히 모았는지 마주잡은 손가락 사이사이에 땀에 땀이 차는 중이었다.


“박 비서.”

“네, 상무님.”


차갑기 짝이 없는 상무님의 부름에 칼 같은 대답을 한 재준이 축지법처럼 그 분 곁으로 다가 섰다. 가까이 가니 더 잘 보이는 액정 상태에 정말 환장 해버릴 것 같았다.

내가 왜 언성을 높혀서 상무님 손 안에 있던 핸드폰을 놓치게끔 만들었을까. 그냥 가만히 노크나 몇 번 더 할 걸! 하고 후회해봤자 이미 늦었다. 3년이나 가까이에서 차 상무님을 보필한 박재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서비스 센터가 이 근처에 있나? 내가 회사 밖으론 멀리 안 다녀봐서.”


차경헌은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더 차분한 사람이고.


“아 그게- 저……. 저희 고등어조림 먹으러 가는 곳 아시죠? 그쪽에서 길 한 번 건너고 좌회전 우회전 하시면 도보로 15분 정도 걸립니다.”

“그래. 잠시 나갔다 올게.”


행동력 있는 사람이었으며.


“지금요?”

“그렇지. 이걸 계속 쓰면 손가락도 베이고 얼굴도 베이고 귀도 베이고 피가 철철 흐를 거야. 그 때 돼서 병원을 가느니 서비스 센터를 가는 게 낫지 않겠어?”


뒤끝도 좀 있는 사람이란 걸.


“제가 수리 시간 예약한 후 차로 모시겠습니다, 상무님.”

“아아- 그럼 나야 고맙고.”


차경헌에게 있어 자비라는 것은 오로지 최애에게만 존재하는 것이었다. 재준은 잠시 잊고 지냈던 상무님의 까탈을 대뇌피질에 한 번 더 깊게 새기며 이를 꽉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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