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GM은 연속재생으로 들어주세요 』



 준이 형
     지민아                                                                         

     혹시 바쁘니?      오후 8:40  


남준이 형! 

오후 8:42      아뇨, 안 바빠요 

오후 8:43       근데 웬일이에요 


 준이 형

    웬일이냐니 서운하다      오후 8:43


오후 8:45      제가 더 서운합니다 행님!  

 오후 8:55       왜 대답이 없으십니까  


 준이 형

    지민아, 우리 어제도 만났잖아..

    누가 보면 오해해..

    아, 그것보다 내가 부탁할 게 좀 있어서     오후 8:56


당연히 농담이죠   

      근데 부탁할 거라니  생전에 부탁 잘 안 하던 형이   

오후 8:59     어떤 건데요? 형 부탁이면 다 들어줄 수 있죠!   


 준이 형

    고맙다

    내가 부탁할 게 뭐냐면..     오후 9:01






익숙한 것보다는 익숙하지 않은 것이 흥미를 끌기 쉬우며, 기존에 있던 것들보다 마음속 더 깊이 자리 잡을 수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주위에서 익숙하게 봐왔던 것들이 아닌 예상치 못한 것으로 시선을 사로잡았을 때,

그 순간 그 사람은 어떤 사람보다도 강하게 인식되어

자신도 모르는 새 마음 한켠 깊이 자리 잡을 것이다.





“안녕, 정국아.”




봄바람을 닮은 나긋한 목소리, 꽃 내음과 분내가 날 것만 같은 이미지. 




“잘 부탁해.”




박지민의 첫인상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요즘같은 사회에서 보기 드문 사람 같았다.

물론 첫인상 하나로만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되지만 첫인상의 비중이 크지 않은가.

그래서였을까 막 스물이 된다면 성인이 되었다는 기쁨에 늘 어딘가 들떠있고, 유흥을 즐기거나 말로만 듣던 어린애들이 즐겨 하는 소꿉놀이 장난 같은 연애가 아닌 성인들의 연애를 하기 바쁠 줄 알았다.




“형, 애인 있어요?”



“뭐?”



“애인이요.”




하지만 첫인상으로 판단한 박지민에게선 그런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질문에 어떤 의미도 내포되어 있지 않았고 악의적으로 건넨 질문은 더더욱 아니었다. 18살이었던 나는 곧 다가올 스무 살의 삶을 동경하고 있었고 그 와중에 막 스무 살, 성인이 된 박지민을 만나 순수하게 부풀어 오르는 궁금증을 표출했을 뿐이었다. 꼭 박지민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막 스무 살이 된 성인이 주변에 있다면 붙잡고 물어볼 수 있었을 만큼 그 호기심은 증폭되어 있었다.

다만 그 호기심을 비롯한 궁금증들을 해소할 시기도, 대상도 적절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그 말랑말랑하고 연두부 같은 박지민의 얼굴이 삽시간에 구겨지는 것을 눈앞에서 확인했으니 말이다.




“정국아.”



“네?”



“네가 왜 그걸 궁금해하는데?”




이때부터 뭔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인지했고 곧바로 후회했다. 그의 예상치 못한 역질문이었기에 그에 맞춰 준비된 답변은 내 머릿속에 존재할 리 없었고, 그렇다고 당장 이 위기를 모면할 지혜조차 나에겐 없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닦아낼 것도, 담아낼 그릇조차도 준비하지 못한 나는 있는 그대로 이 상황을 맞닥뜨려야 했다.




“형, 그게 아니라 제 말뜻은….”



“그리고 난 네 형이 아니라 선생님이야.”




착한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이 화를 내면 더 무섭다는 말이 딱 이 상황에서 나온 말 같았다. 자신의 섣부른 판단과 철없는 질문으로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으니 명백한 자신의 잘못이었다.




“죄송합니다.”




누구나 시작이 좋을 수는 없다. 하지만 누구의 대상이 내가 될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그 덕분에 박지민과의 첫 만남은 평범에도 못 미치는 최악이 되어버렸다.






Forget  Me  Not







“내 이름은 박지민이고, 나이는….”



“스물.”




탁자에 내내 고정되어있던 시선을 지민 쪽으로 올려다보니 역시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와 제대로 눈이 마주쳤다. 지민은 몇 분 전의 일이 다시 떠올랐는지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자신이 사과를 했던 이유는 제 앞의 상대가 두려웠던 것도 아니고, 이 일에 있어 백 퍼센트 자신이 잘못을 했기 때문에 거짓 하나 없이 진심을 다해 사과했고 반성했다. 하지만 그는 그 사과를 받아줬다기보다는 어물쩍 넘어가며 자리에 앉았다.

제 주위에 남준을 비롯한 아는 형들은 꽤 있었으나 지민같이 속을 알 수 없는 스타일은 처음이었다.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면 뭐라도 해보겠는데 생각보다 더 빈틈없이 꽉꽉 막혀있는 지민과 어떻게 이 상황을 해결하고 나아가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남준이 형한테 대충 들어서 알고 있어요.”



“꼰대처럼 들릴 수 있는데 이래 보여도 부탁받고 정식으로 네 선생님으로서 온 거야.”



“알아요. 그래서 선생님이라고 불러달라고요?”



“응. 서로 예의는 갖춰야 할 것 같아서.”




그럼 아까는 예의가 없었다는 건가. 무슨 말이라도 꺼내며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보려 노력했으나 묘하게 비꼬는 것 같은 지민의 말에 기분이 나빠졌다. 동시에 왜 자신이 부탁하지도 않은 과외를 사과까지 하며 들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리고 점점 이 상황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죠. 앞으로는 어떤 수업이던 선생님이 원하시는 예의는 꼭 갖추고 들을게요.”




일부러 선생님과 예의에 힘을 주어 말했더니 지민이 자신을 노려봤다. 이런 점을 보면 저와 또래의 수준으로 느껴지는데 이해가 되질 않았다. 첫날이니 수업은 없다며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버리는 지민을 보고 실소가 터졌다. 그렇게 예의를 중시하는 사람이 인사 없이 간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그러고 몇 분이 흐르자 이 상황의 원인 제공자한테 전화가 걸려왔다.




[ 정국아, 어땠어? ]



“형, 과외 안 하면 안 돼요? 아님 형이 해외연수 가기 전까지 해주고 다른 형들한테 부탁하면 되잖아요.”



[ 어…. 혹시 너희 싸웠어? ]



“아니, 내가 애인.. 하씌.. 아냐 이건 내가 잘못했다 치는데, 형이라는 말은 왜 안 되는데요?!”



[ 뭘 잘못했고 뭐가 안 되는데? 너 혹시 지민이 괴롭혔니? 엄청 씩씩거리던데. ]



“내가 괴롭히고 그럴 사람으로 보여요?? 그 형, 아니 선생님은 뭐가 그렇게 기분이 나빴다고!”



[ 야, 정국아. 인간적으로 지민이는 널 괴롭힐 위인이 안 돼. 그 반대면 몰라도. ]



“남준이 형! 너무한 거 아녜요? 나한테 사람은 공정해야 한다고 말해놓고 형은 지금 되게 편파적이거든요! 한 입으로 두 말하지마여!! 아니 그 형도 그렇게 예의중시하더니 인사 없이 가고,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결국 남준과의 통화에서 참고 있던 화가 터졌다. 속사포처럼 뱉어내는 말에 남준은 쩔쩔매다가 갑자기 교수님이 부른다는 핑계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결국 제 화를 이기지 못하고 남준에게 과외 안 한다는 문자를 보낸 뒤 몰려오는 피곤함에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그 뒤로도 남준과의 통화는 몇 번 있었지만 그가 과외 이야기를 할 때면 이야기를 돌리거나 급한 일이 있다면 전화를 끊어 회피했다. 그렇게 우리의 인연은 끝인 줄로만 알았다.

그날은 유난히도 비가 많이 쏟아졌다. 원래라면 남준이 부탁해서 시작한 과외를 하는 날이었으나 최악의 첫 만남으로 무산되어버려 평소처럼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있었다. 중간중간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으나 평소에도 모르는 번호는 받지 않았던 지라 가볍게 무시했다. 그게 실수였던 것이다.

밤늦게 돌아가던 길은 여전히 비가 많이 쏟아졌고 집 앞에 다다랐을 때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




집 앞에 쭈그려 앉아있던 사람은 지민이었고 그는 얼마나 비를 맞고 있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지만 창백한 얼굴과 막 빨래를 한 것처럼 축축하게 젖어버린 옷을 보고 꽤나 오랜 시간 기다렸다는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도대체 왜 이러고 있어요?!”



“네가 전화를 안 받았잖아.”



“그럼 그냥 가면 되죠. 왜 멍청하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우산이라도 사 와서 기다리던가!”



“그날 그렇게 가고 네가 남준이 형한테 과외 안 한다고 해서 일부로 내 전화도 안 받고, 없는 척하는 줄 알았단 말이야. 그게 아니더라도….”




추위에 조금씩 몸을 떨던 지민의 목소리도 떨려왔다. 그날 내가 피했던 시선을 옮겨 그를 처음으로 마주했던 것처럼 그가 파묻었던 고개를 들어 올려 나를 마주했다.




“내가 우산 사러 간 사이에 네가 오면 어떡해.”



“왜 어떡해요.”



“그럼 영영 못 볼 수도 있잖아.”




지민의 대답에 말문이 막혔다. 그의 눈빛에서 수만 가지 감정이 복잡하게 읽혀 헷갈렸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슬픔’


지민을 빈틈없이 꽉꽉 막힌 사람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 확신이 틀렸음을 이 순간이 증명했다. 그는 내 확신과 다르게 빈틈투성이였다. 단지 그는 그 많고 많은 빈틈을 숨기기 위해 경계했을 뿐이었다. 내가 함부로 판단했던 첫인상과 지민에게 가했던 모든 것들이 그를 너무 힘겹게 만들었다.




“일단 들어가요, 선생님.”



“괜찮아, 너무 늦었어. 다음에 올게.”



“이 손 놓고 보내면 영영 안 올 거잖아요.”



“아니야, 누가 그래.”



“나 못 볼까 봐 기다렸다면서요. 그럼 나도 선생님 기다리면 돼요?”



“정국아.”



“근데 나는 기다리는 거 잘 못해서 그냥 지금 볼래요.”




손안에 잡힌 지민의 손목이 빗물 때문에 차가웠는데 또 그의 체온은 뜨겁기도 해서 기분이 이상했다.

그와의 첫 만남은 최악이었고 동시에 우리의 인연은 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를 마주했을 때 이상하게 기분이 하나도 나쁘지 않았다. 그저 익숙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들이 손안도, 머릿속도, 마음속도 가득 차는 생소한 감정에 혼란스러웠을 뿐이었다.





JM BOTT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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