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의료선은 한 해안가에 도착했다. 이렇다 할 배를 정박시킬 시설이 없어 어선들이 모래와 돌이 섞인 해변에 배를 대는 마을이었다. 의료선은 바다에 닻을 내린 후, 의사들과 필요한 물자들을 작은 보트에 나눠 여러 차례 나르기 시작했다.


의사가 온다는 소문을 들은 현지인들이 이미 근처에 모여있었다. 가장 먼저 내린 신해량의 팀은 며칠 동안 의료팀이 진료를 할 장소를 확인했다. 안전을 확인한 후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의료팀들이 본격적으로 캠프를 설치했다. 천막을 세워 과별로 간이 진료실을 만들고 물건을 옮겨 세팅을 하는 동안 경호팀은 몰려있는 인파를 적절히 통제하는 한편, 캠프 설치와 물건 옮기기를 함께 했다.


배에서 보트로 옮기고, 보트에서 다시 모래사장을 헤치며 물건을 들어 옮기는 일은 꽤 중노동이었다. 하지만 다음날부터는 의료팀이 본격적으로 진료를 해야하기에 의료팀과 경호팀 모두 부지런히 움직였다.


캠프의 준비가 끝난 후에는 먼저 치료를 받으려는 자들을 진정시키고 순서를 정하는 등, 주변을 정돈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때로 치료받다 오해가 생겼거나, 혹은 종교문화적인 이유로 치료를 반대하는 가족과 원하는 사람 사이의 물리적인 충돌때문에 경호팀은 이 천막에서 저 천막으로, 저 천막에서 또 외부로 쉴 틈없이 불려 다녔다. 심지어 의료팀이 모두 배로 돌아가 잠드는 밤에도 경호팀은 혹시나 있을 사고나 도난을 대비해 번갈아 경비를 서느라 편히 쉴 수가 없었다.


진료를 시작한지 일주일 정도 지난 저녁, 먼저 식사를 끝내고 온 서지혁이 신해량, 백애영 조와 교대하면서 길게 기지개를 켰다.




“아이고, 죽겠다. 저희 내일 떠나는 거 맞습니까?”

“그래.”

“엄살 작작 부려, 서돼지.”




백애영이 핀잔을 줬다. 더욱 과장되게 곡소리를 내며 서지혁이 목이며 어깨가 삐걱거린다며 관절 부위들을 돌리다가 신해량을 보더니 말했다.




“저희 중에 제일 못 잔 게 팀장님일 텐데 얼굴이 반짝입니다? 거 몰래 뭐 집어드시기라도 하셨습니까?”




신해량은 피식 웃었다. 서지혁이 어어? 하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진짜 뭐 먹었습니까?”

“아니.”




수상한데. 서지혁의 표정이 노골적으로 그렇게 말했지만 신해량은 무시했다. 잠들면 청룡을 만나 맛있는 걸 먹고 있기는 하지. 심지어 최근에는 어딘가 피곤해 보인다며 박무현이 더 신경써서 이런저런 음식들을 챙겨주고 있으니 서지혁의 감이 맞기는 했지만, 그걸 말한들 서지혁이 믿겠는가. 드디어 우리 팀장이 돌았구나, 미친 팀장 밑에서는 일할 수 없다며 신나서 줄행랑 칠 게 뻔했다.




“치과 텐트에 주의해. 아까 또 한명 잡았으니까.”

“아니…또 치과입니까?”




벌써 세 번째였다. 백애영이 어깨를 으쓱하면서 답했다.




“금을 어디 숨겼냐고 난리치던데.”

“엥? 금? 왠 금…아, 금니 때문에? 거참. 누가 그런 걸 여기까지 들고 옵니까. 꿈도 커라.”




서지혁이 쯧쯧 혀를 찼다.




“차라리 진통제를 노리면 슬쩍 눈이라도 감아줄텐데 말입니다.”

“서지혁.”

“농담인 거 아시면서 그러십니다?”




신해량은 서지혁을 빤히 보다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백애영과 함께 해변에 세워둔 보트 쪽으로 갔다.












마지막 밤은 신해량이 먼저 잔 후 새벽에 불침번을 서기로 했다. 아예 치과 텐트 안에 침낭을 깐 신해량은 목걸이에 매달린 돌을 손으로 꼭 쥐고 눈을 감았다.




“신해량씨, 역시 요새 무리하는 거 아닙니까?”




전각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음식을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던 박무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신해량은 무심코 손을 올려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 손으로 만지는 걸로는 별다른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지만, 서지혁이 반들반들하다 말할 정도면 꽤 괜찮을 텐데.




“그렇지 않습니다.”




박무현이 드물게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아흐레 전과는 얼굴이 다릅니다. 그래서 음식도 더 신경쓰고 있기는 한데…아무래도 식사를 하고 바로 주무시는 게 좋겠습니다. 오늘은 밭에도 가지 말죠.”




걱정해서 하는 제안인 건 아는데,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신해량은 일단 탁자에 앉으면서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인간은 식사를 하고 바로 자리에 누우면 오히려 병이 납니다.”

“네? 그런가요?”




박무현이 깜짝 놀랐다. 잘 하면 넘어갈 수 있을 지도. 신해량은 조금 더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예. 식사를 하고 적절히 몸을 움직이는 게 중요합니다. 아니면 탈이 납니다.”

“그, 그렇군요…. 제가 신해량씨를 아프게 만들 뻔 했네요.”




순식간에 풀이 죽었다. 딱히 거짓말을 한 건 아닌데, 어쩐지 순진한 청룡을 속이는 것만 같아 마음이 콕콕 찔렸다. 신해량은 그를 살살 달랬다.




“모르셨으니까요. 저도 청룡에 대해선 아직도 모르는 게 많지 않습니까. 제가 피곤해 보인다고 하셨지만, 저는 오히려 다른 때보다 상태가 더 좋습니다. 아마도 박무현씨가 제게 주시는 음식 덕이 아닐까 합니다만.”




박무현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옅은 미소가 겨우 그의 입가에 돌아왔다. 신해량의 앞으로 음식들을 가까이 밀어 권하며 박무현은 말했다.




“그렇다니 다행이지만…그래도 제가 기억하는 신해량씨 얼굴보다는 상한 게 보입니다.”

“일이 조금 바뀌어서 그렇습니다. 힘든 건 아니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많이 바뀌었나요? 어떤 일을 하는 건가요, 요즘은?”




신해량은 식사를 하며 박무현에게 지금 그가 하는 일에 대해 되도록 쉽게 풀어서 설명했다. 호위와 의료팀이 하는 일을 설명하고 천막을 쳐놓고 일하는데 거길 임시 숙소 삼아 생활한다는 걸 들은 박무현이 말했다.




“저런, 제대로 쉬어야 할 텐데 힘들겠네요.”

“익숙해져서 괜찮습니다.”




그 말에 박무현이 더욱 안쓰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동정을 사려던 건 아니었는데. 신해량은 음식에 집중하는 척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했다. 박무현이 물었다.




“그래도 힘든 건 있지 않나요? 아쉬운 건 없어요?”




아쉬운 거라. 많다. 왜 매번 현지 인력들을 제 시간에 나타나지 않는가, 지혁이 놈은 왜 금연을 하지 않는가, 다음은 내륙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수배한 차는 멀쩡하게 굴러가기는 할까 등등. 하지만 청룡에게 말한들 하소연 밖에 되지 않는다. 


신해량은 박무현의 눈치를 살폈다. 뭐라도 해주고 싶어하는데 박무현이 신경쓸 필요 없는 문제라 말할 수는 없었다. 사실 박무현은 이미 그에게 많은 걸 해줬다. 


그가 매번 준비하는 음식들은 선내의 식사보다 훨씬 질이 좋았고, 호화로운 침상에서 편안히 잠도 잘 수 있었다. 박무현을 둘러싼 공기는 몸에 남은 한자락의 피로마저 다 가져갈 만큼 청량하고 달았다.




“박무현씨가 이미 너무 많은 걸 해주셔서…생각이 딱히 나지 않습니다. 이 음식도 저를 위해 일부러 준비해주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런 거라면 얼마든지 해드릴 수 있습니다.”




기쁜 듯 대답하는 박무현의 볼에 살짝 홍조가 떠올랐다.




“그럼, 제가 아직 안 해드린 것 중에 생각나는 건 없나요?”




박무현이 안해준 것? 의식주 중에 옷 빼고 다 주고 있는 셈인데, 옷은…이렇게 말하면 미안하지만 박무현이 입고 있는 옷은 실용적이지 않아보여 내키지 않았다. 그럼 그 외에는 뭐가 있지? 박무현이 해줄 수 있을 법한 사소한 게? 한참 고민하는 신해량의 귀에 흐르는 물소리가 들렸다. 그는 조심스레 말했다.




“그러고보니…”

“그러고보니?”

“캠프 생활을 하다보면 씻는 게 항상 아쉽습니다. 선내의 해수정화장치…그러니까 물을 깨끗하게 만들어주는 장치가 오래되었다 보니 자주 생활용 물이 부족해집니다. 빠르게 씻지 않으면 중간에 물이 끊길 때도 있습니다.”

“물이 부족할 수 있다고요…?”




박무현이 살짝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신해량은 자신이 한 말이 그렇게 충격적일 일인가…? 싶어 고민했다. 그는 눈을 굴렸다. 하긴. 여기는 항상 물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아 보이니 부족할 일 자체가 없을 터였다. 게다가 눈 앞의 청룡은 물을 만들어내는, 비를 뿌리는 존재다. 박무현이 팔을 모은 채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건 제가 해드릴 수 있겠군요.”

“…예?”




뭘? 설마 선내에 물을 채워준다는 건가? 바닷물을 채워주기라도 하면 큰일인데. 신해량이 이걸 말려야하는 건지 구체적으로 캐물어야 하는 건지 고민하는데 박무현이 물었다.




“혹시 온천 좋아하십니까?”

“? 좋아합니다.”

“그럼 같이 갈까요?”




환하게 웃으면서 박무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해량은 얼결에 같이 일어나면서 물었다.




“여기…온천이 있습니까?”

“있지요. 가는 길이 멀어서 그 동안은 안내하지 않았는데, 진작 말해주셨으면 좋았을 뻔했습니다.”




제멋대로 길을 줄였다 늘렸다 하는 청룡의 기준으로 먼 거면 얼마나 먼거지? 새벽 불침번이라 오늘은 일찍 일어나야하는데 그때까지 돌아올 수 있을까? 신해량은 조심스레 자신의 걱정을 박무현에게 말했다. 박무현이 고개를 끄덕하더니 말했다.




“걱정마세요. 제가 태워갈 테니까요.”

“? 예?”

“먼저 나갈 테니 잠깐만 기다렸다가 나오세요.”

“예? 잠깐만요,”




태워간다니 무슨 소리인가 싶어 다시 물어보려했지만 박무현은 제 할말만 하고 나가버렸다. 


탄다고? 이 세계에서 탈 것이라는 걸 본 적이 없다. …설마 신해량을 등에 업고 간다거나 하는 걸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밀어내는 팔 힘을 생각하면 겉보기와는 전혀 다른 힘을 갖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박무현은 그보다 키도 체격도 한참 작다. 자신보다 한참 작은 남자에게 업힌다거나 매달린다는 건 신해량으로서는 할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었다.


고민을 이어가는데 밖에서 강한 바람이 밀려들어왔다. 해풍 특유의 습기와 비릿한 바다내음이 섞인 바람이었다. 신해량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어서 타세요, 신해량씨.]




그리고 그는 박무현이 말한 ‘태워간다’가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거대한 청룡이 신해량에게 손, 아니 발을 내밀고 있었다.




“박…무현씨?”

[예.]




울리는 목소리로 청룡이, 박무현이 답했다. 그는 아연하여 눈 앞의 아름다운 존재를 봤다.


항상 걸치고 있었던 도포와 꼭 닮은 광택의 남색 비늘이 그의 전신을 덮고 있었다. 빛에 따라 금색으로 반짝이는 것이 꼭 보석을 아로새긴 것만 같았다. 머리 위에는 사슴의 것과 꼭 닮은 연한 하늘빛의 뿔이 투명하게 반짝였다. 신해량의 얼굴만큼 큰 두 눈은 한 쪽은 파란색, 다른 쪽은 검은색이었다.


자신에게 내민 앞발이 그의 상체를 가볍게 틀어쥐고도 남을 크기인 것을 보고나서야 신해량은 왜 박무현이 자신을 보고 작다고 말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얼른 타세요.]




박무현이 발을 조금 더 앞으로 내밀어 신해량이 올라타도록 재촉했다. 인외적인 존재에 대한 신앙도 외경심도 없는 신해량이었지만, 찬란히 빛나는 남색 비늘과 등줄기를 따라 흐르는 연하늘색의 한줄기 비늘, 그리고 옥을 깎은 듯한 연한 하늘색의 뿔을 보고 있자니 정말 이런 존재의 등에 올라타도 되는가 싶었다.




[머리까지 올라와서 뿔을 잡으세요.]




박무현이 다시 재촉했다. 신해량은 머뭇거리다가 박무현의 발을 밟고 다리를 기어 올라 박무현의 등에 올랐다. 머리의 뿔을 잡으라고 했는데, 그러면 꼭 머리채를 잡는 것과 비슷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외에 달리 잡을 곳이 없어 신해량은 하는 수 없이 박무현의 양 뿔을 꽉 잡았다.




[잘 잡았나요?]

“예, 잡았습니다.”




신해량이 답하자 박무현의 몸이 서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 마치 호버링 하던 헬기가 상승할 때와 같은 움직임 이었으나 요란한 소리도 거센 바람도 없이 그저 고요했다. 


전각의 지붕이 신해량의 손바닥 만큼 작아졌다. 청룡은 곧 먼 하늘을 향해 빠르게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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쪼그만공 신해량과 아주아주커다란...대형떡대수 박무현



....물론 뜨밤은 인간 버전으로 할 겁니다...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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