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 편이 마지막입니다



“말 안 할 거야?”

“................”

 

“복수하는 거야 지금?”

“별일 아니라고”

 

“별일 아닌데 왜 회사를 그만 둬”

“................”

 

“김태형!!”

 

 

태형에게 소리 칠 자격이 없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감정이 진정되지 않는다. 본가에서 어머니가 아무리 물어도 코대답도 않던 태형이, 집에 돌아와서라고 순순히 입을 열 리 없다. 참다 못한 석진이 소리를 질렀지만 이 역시 아무런 효과가 없다. 대체 어쩌자고 - 석진은 태형이 자신의 일을 얼마나 자랑스러워했고 또한 열심이었는지 잘 안다. 처음 태형을 만났을 때 가장 이해하기 힘들었던 부분이 바로 그것이었으니까.

 

“자기가 사람을 왜 못 믿었는지. 나 이제 알겠다”

“누가.. 배신했어?”

 

“자기가 처음에 그랬지”

“뭘”

 

“나더러 회사가 시키는 대로 다 하는 하찮은 놈이라고”

“내..내가 언제!”

 

“내가 자기한테 우리는 특별한 존재라고 말했었지”

“그건.. 기억 나”

 

“나 그 말 취소할게”

“..............?”

 

“우린 특별히 이용 가치가 높은 존재들인 거지. 특별한 존재들은 아니야”

“무슨 일.. 있었지?”

 

 

태형이 지금껏 했던 말 중 석진이 가장 감동 받은 말 중 하나가 바로 ‘당신은 특별한 존재’라는 말이었다. 남과 달라서 이상하거나 핍박 받아야 될 존재가 아니라, 남과 달라서 오히려 대우 받아 마땅한 그런 존재라는 말. 그 말이 어찌나 달콤하게 들리던지 태형이 꼭 다른 사람처럼 보였었다. 석진이 그 말에 꽤나 깊은 감명을 받은 줄 알면서도 태형은 자신의 말을 손수 수정한다.

 

우리는 특별히 이용 가치가 높은 존재들일 뿐이다-

 

조금도 틀림이 없다. 석진도 이미 그렇게 느끼고 있다. 그러나 그 말이 태형의 입에서 뱉어질 때에는 뭔가 자신이 느끼는 것과는 다른 질감이 묻어 난다. 그는 지금 무언가로 인해 짙은 배신감을 느낀 것 같다. 자신이 믿어 온, 자신이 사랑해 온 모든 것들이 한 순간에 등을 돌려버린 기분이다. 이제는 화도 나지 않는다. 추운 겨울날 차가운 바깥에 오래 서 있던 나머지, 아예 피와 살이 얼어 추위마저 느낄 수 없는. 그런 상태와 비슷하다.

 

 

“말해 줘.... 나도 알아야지. 자기 말대로 우리 이제 부부라며”

“........... 우릴 이용해 먹으려고 했어”

 

“어차피 알고 있었잖아. 우리는 걔네한테 그런 존재밖에 안 되는 거...”

“그게 다가 아니야...”

 

“그럼?”

“왜 자기한테 난임 치료 받으라고 권했는지, 의심 안 해 봤어?”

 

“아니.. 안 해 봤는데.. 왜?”

“우리가 애를 낳든 안 낳든 지들이 무슨 상관인데”

 

“...............”

“지민이가 이상한 문건 하나를 발견했어. 그 문건에... 우리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어떤 효용 가치가 있는지 연구한 자료들이 적혀 있고... 나중에 그 아이를 이용할 구체적인 계획까지 다 짜여 있었어”

 

“...............”

“이래도 내가 회사를 계속 다녀야 돼?”

 

 

석진은 태형으로 인해 많은 변화를 겪었다. 누구도 믿지 않았던 석진이 태형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을 믿으려고 애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실제로 믿기까지 했었다.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바보같이. 그러나 자신이 믿어야 할 사람은 결국 이 세상에 태형 하나뿐인 것 같다. 그리고 이제 태형에게도 믿을 만한 사람은 몇 명 남지 않았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사람이 자신이라는 건 확실하다.

 

 

“어디 가?”

 

갑자기 굳은 표정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석진. 태형이 석진의 팔을 붙잡았지만, 석진은 태형을 가볍게 뿌리쳤다.

 

“어디 가는데?”

“죽이러”

 

“누굴?”

“관련된 새끼들 싹 다”

 

“그렇다고 죽이기까지?”

“............. 살려 둬?”

 

“진짜... 든든하다”

 

죽이지는 못할지언정 면상이라도 박살을 내 놔야 분이 좀 풀릴 것 같았다. 석진은 정말로 그럴 작정이었다. 하지만 문득 자신의 도발 때문에 태형이 곤란한 처지에 놓였던 일을 떠올린다. 맥이 풀려버린다. 태형은 일어나서 석진의 어깨를 감싸 몸을 돌렸다. 딱딱하게 얼어 붙은 석진의 얼굴을 만지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랜다.

 

 

“이제 다른 사람이랑, 세상이랑 싸우는 거 안 해도 돼”

“............. 이렇게 뒤통수 맞고 가만히 있어 그럼?!”

 

“내가 대신 싸울 거란 뜻이야”

“하....”

 

“눈에 힘 풀어 자기야”

“때려 치워. 그래. 그게 맞아. 내가 먹여 살릴게”

 

“진짜?”

“내가 자기 못 먹여 살릴까봐”

 

“말이라도 고맙다”

 

태형이 석진의 양쪽 볼을 잡고 부드럽게 만진다. 석진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저 지금 이 순간, 마음이 가장 버거운 이 순간에 함께 있어 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석진이 얼마나 치열한 삶을 살아 왔는지 잘 안다. 그러니 그를 최전선에 내세울 수는 없다. 태형은 아버지와 함께 싸울 것이고 그러니 외로운 싸움이 아니다. 비록 완벽한 승리를 거두지 못한다 해도, 싸움을 걸었다는 것 자체에 의의를 둘 것이다.

 

“말만 그런 거 아니야”

“알아”

 

“회사 오래 다녔잖아. 이 참에 한 일 년 푹 쉬어”

“아예 일 하지 말란 소린 안 하네?”

 

“.............나도 그건 자신 없어. 솔직히”

“자기 때문에 이렇게 됐다는 생각만 하지 마. 제발”

 

“......알았어. 안 할게”

“아버지가 가만히 안 있는다고 하셨어”

 

“아버님이?”

“회사 법무팀 동원해서 소송 준비하고, 언론에 퍼뜨리실 거라고”

“..............”

 

“나보다 아버지가 지금 더 화가 나셨어”

“그럼 나는 뭘 하면 되는데?”

 

“아니. 자기는 아무 것도 안 해도 돼. 그냥 내 옆에 있어”

 

 

내가 정말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 가만히 되짚어 보면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존재로 말미암아 일어난 일이다. 석진이 충분히 자괴감을 느낄 만한 일이다. 그러나 예상 외로 심각한 자괴감이 들지 않는 것은, 석진을 이 일에서 한 발 물러나게 만든 태형 덕분이다. 지금까지 석진은 모든 일을 의논할 사람 없이 혼자 처리해 왔다. 자신에게 발생하는 모든 일들은 오롯이 제 몫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태형이 우선 한 울타리를 둘러 치고 있고 그의 아버지가 거대한 담장을 가로막았다. 석진은 그 담 너머를 애써 넘겨 보지 않아도 된단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그들의 든든한 보호막 안에 담긴 석진은, 이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는 자신이 이상스러울 정도다.

 

“이 얘기는 여기까지만 하자. 우리 다른 얘기도 남았잖아”

 

태형은 화제를 돌리려 한다. 그러나 그 역시 무거운 화제인 것은 변함이 없다. 석진이 과연 난임 치료를 계속 받으려고 할까? 자신에게 비밀로 한 것이 발각되었으니 쉽사리 엄두가 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태형은 석진에게 결정을 맡기려 한다. 이 일은 어디까지나 석진의 결정에 따라 행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병원... 계속 다닐 거야?”

“............”

 

“아니”

“자기가 받고 싶으면... 해도 돼”

 

“아니. 안 할래”

“이 일은 자기가 결정하는 거야. 나는 권한 없어”

 

“어째서”

“자기 결정 존중하겠다는 뜻이야. 무조건”

 

“.................”

“미안해. 내가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

 

 

정작 사과는 태형의 입에서 먼저 나왔다. 속인 것은 석진인데 오히려 피해자가 미안하다고 한다. 이 남자는 대체 내가 무슨 잘못까지 저질러야 화를 낼까. 이런 와중에도 자신에게 한 수 굽히고 들어 오는 태형을, 석진은 말 대신 쳐다 보는 것밖에 할 수가 없다.

 

 

“내가... 잘못했어....”

“자기가 뭘 잘못해... 내가 자기 마음을 몰랐어”

 

“.................”

“아까 엄마 있는 데서 화 내서 미안”

 

“바보 같이 착하게 굴지 좀 마 제발...”

“원래 착한데 나?”

 

 

이제야 원래 있어야 할 나의 둥지로 되돌아 온 기분이다. 다시 병원 안 가야지 - 물론 태형의 말대로 지금까지 들여 온 노고와 돈이 아깝긴 하지만, 그래도 씻어낼 것은 빨리 씻어내는 게 맞다. 더군다나 그들의 농간에 낚여 치료를 받았다는 것이 더더욱 석진을 괴롭게 한다.

 

 

“지민 씨는... 어떻게 돼?”

“지민이도 나랑 같이 아버지 회사로 들어 가”


“아.. 진짜?”

“걔도 분명 이번 일로 회사에서 해고당할 텐데. 뒤는 책임져 줘야지 우리가”

 

“지민 씨한테 미안하네...”

“평생 박지민한테 구박 받을 거리 생겼다 이제. 큰일 났어 나”

 

과연 소송에서 이길 수 있을지. 그리고 승소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비용과 노고가 투입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금까지의 판례를 따져 봤을 때 일개 기업이 국제 기구를 상대로 행한 소송은 대부분 아주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국제 기구가 승소했다고 한다. 그러나 태형의 아버지는 꼭 승소만이 목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문제가 발생해서 재판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면, 그것만으로도 ISCA가 입을 타격은 꽤나 크다.

그래서 승소를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런 점을 노리고 덤벼든 것이다.

 

 

“아버님한테도 너무 죄송해”

“그런 소리 하지 말랬지. 자기 잘못 아니라고”

 

“많이.. 화 나셨어?”

“그렇게 화 내시는 거 첨 봤어. 본부장 바로 찾아 가셨어”

 

“진짜?”

“아마 모르긴 몰라도 한 대 맞았을 걸 본부장”

 

“근데... 그걸 본부장이 다 지시한 건가 그러면?”

“아니지. 미국에 있는 대표놈이 그런 거지”

 

“대체 왜....?”

“이래저래 욕심이 많은 사람이거든”

 

“욕심... 그 욕심을 채워 주려고 우리가 인형극 한 건가 그럼”

“비유하자면 그렇다고 할 수도 있지”

 

 

욕심 없이 살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무런 의식이 없는 식물에게도 생존의 욕구는 당연히 존재할 테니 말이다. 그러니 생존에 필요한 욕심이나 적당한 욕심을 마냥 나쁘다고 매도할 수는 없다. 항상 문제가 되는 건 정도에 어긋난 과욕이다. 내가 보기에는 전혀 매력적이지 않은 가치라도 남들은 집착하는 경우가 있다. 지금 태형과 석진에게는 자신들을 이용하려 한 그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ISCA 대표, 불법 배아 복제 계획 문건으로 피소]

 

[ISCA 이대로 몰락하나? 윤리도 양심도 잃어버린 과학의 이면]

 

[ISCA 한국 지부 본부장에게 구속 영장 발부]

 

[국제 사법 재판소에 회부된 ISCA 대표. 그를 재판소에 서게 한 사람은 과연 누구?]

 


어느 하루라도 관련 기사가 뜨지 않는 날은 없다. 애써 관련 기사를 검색해 보지 않아도 검색창에 가장 눈에 띄도록 링크된 것들은 모두 ISCA 관련 기사들이다. 처음 한 달은 조용했다. 정말 그런 사건이 발생한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고요했다. 하지만 그것은 정식 재판으로 가는 법적 절차가 다양하고 복잡하기 때문이었다. 달이 바뀌자 본격적으로 언론들이 보도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석진도 수많은 전화와 인터뷰 요청을 받았다. 그러나 단호히 거절했다. 당분간은 공방 문도 열지 않기로 했다.

외출을 최대한 자제하고 있으니 지겹긴 하지만, 밖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을 태형과 아버지의 노고에 비한다면 자신은 거저 먹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언론 기사들의 초점은 모두 ISCA의 결여된 도덕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태어난 아이를 이용할 계획을 넘어서서, 그들은 석진이 만일 아이를 갖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배아 복제까지 계획해 둔 상태였다. 물론 그것은 불법이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했어도 사람들은 과학이 결코 범접할 수 없는 선을 확실히 그어 두었다.

석진은 이런 기사를 볼 때마다 가슴이 저며 오는 듯 아프다. 세상은 역시 믿지 못할 곳이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태형 덕분에 비로소 마음을 열게 되었는데 도로 닫혔다. 이제 석진의 세상은 다시 좁아졌다. 그 세상 안에 들어 온 사람은 다섯 손가락 안이다. 태형과 그의 부모. 그리고 굳이 하나 더 꼽자면 지민까지. 그들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들은 다시 불신하게 됐다.

 

 

“자기야!”

“어?”

 

“방금 예식장에서 전화 왔어!”

“어디?”

 

“A-09구역 아미 웨딩홀”

“아 지난주에 전화 해 본 거기?”

 

“어. 날짜 나왔다는데? 예약되어 있던 것들 중에서 하나 취소됐데!”

“아 진짜?!”

 

하지만 인간이 느끼지 못해도 지구는 돌아가듯, 바깥 세상이 시끄럽게 북적여도 둘만의 청사진을 바꿀 수는 없다. 태형은 이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석진과의 결혼식 준비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 내년으로 넘기는 수밖에 없다고 거의 포기한 상태였었다. 올해가 석 달밖에 남지 않았으니 더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오늘 뜻밖에도 웨딩홀 한 곳에서 태형에게 연락을 했다. 예약되어 있던 결혼식 하나가 취소되었다고 했다. 더군다나 그쪽에서 제시한 날짜는 12월 4일. 정확히 석진의 생일이다.

 

“자기 생일날이야”

“...........말도 안 돼”

 

“안 믿기지?”

“어.. 진짜....”

 

“그럼 이때로 한다?”

“어! 내가 아버님이랑 어머님한테 말씀드릴게”

 

“알겠어”

 

결혼을 하기로 마음을 먹고도, 날짜가 잡히질 않으니 정말로 결혼을 한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제 정확한 날짜가 정해졌다. 비록 바깥일은 번잡하지만 울타리 안에 안락하게 둘러싸인 두 사람의 행복은 아무도 건드릴 수 없다. 석진은 주저하지 않고 곧장 태형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

[응. 밥 먹었어?]

 

“어머니! 날짜 나왔어요 예식장이요!”

[진짜? 어디? 언젠데?!]

 

“12월 4일요. A-09구역 아미 웨딩홀이요!”

[어머! 거기 저번에 가 보니까 시설 괜찮던데. 잘 됐다!! 여보, 여보 애들 예식장 나왔대! 태형이 아빠!]


석진은 거실 TV옆에 놓인 작은 액자를 바라본다. 그 액자에는 할아버지, 그리고 할머니와 함께 찍힌 자신의 모습이 있다. 과거는 떠올리면 늘 어둡고 슬픈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 저 사진을 바라보니 그래도 행복했던 순간이 없지 않았구나 싶다. 분명 행복했던 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늘을 너무 크게 느낀 나머지 그 존재를 느끼지 못 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나 결혼한다?

 

과연 저 세상에서는 아래를 내려다 볼 수 있을까? 석진도 가 보지 않아 알 수 없지만, 그렇다고 믿고 싶다. 석진은 아직 자신의 삶에 있어서 행복의 최고점이 오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물론 눈이 부시게, 숨이 막히도록 행복하다. 하지만 그 절정은 나중에 올 것을 믿는다. 태형이 양손으로 단단히 붙잡아 끌고 올 것이다.

그 행복의 최절정에 올라 선 날, 함께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어 슬프기도 하지만 그 슬픔 역시 행복에 금세 뒤덮일 것을 믿는다.

 

 

[석진아, 아버지야. 그래, 예식장 날짜 나왔다고?]

“네 아버님! 방금 태형 씨한테 전화 왔어요”

 

[날짜가 언젠데?]

“12월 4일이에요”

 

[12월 4일...? 그럼 네 생일이네?]

“어? 제 생일 기억하고 계세요?”

 

[며느리 생일 기억 못하면 니네 엄마한테 쫓겨 나라고?]

 

 

이제 생일을 기억해 주는 사람들이 생겼다. 생일에 의미를 두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았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저주 받은 것과 다름없는 삶을 살게 된 것이 뭐 그리 축하할 일이냐며, 석진은 자신의 생일을 증오했었다. 그러나 미움 역시 애정이 없다면 생길 리 없는 감정이다. 애초에 자신의 삶에 대한 조금의 애착도 없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탄생을 미워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 석진은 누구보다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삶을 아끼는 편이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조금의 가치도 두지 않았다면 세상에게 가시를 세워 자신을 보호하려는 노력도 필요가 없어진다.

스스로를 사랑하기 위해, 그래서 생에 대한 마지막 애정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던 석진에게 애써 노력할 이유가 사라졌다. 모든 삶을 포기하게 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몫까지 자신을 사랑해 줄 사람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에게 받는 사랑만으로도 충분해서 더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선생님, 저도 얘네만 했어요?”

“그랬지. 그랬던 애가 이만큼 커서 벌써 결혼하겠다고 청첩장 들고 온 거고”

 

“얘네도 그럼 부모가 버린 애들이에요?”

“그래. 인공 포육실에 오는 애들은 다 그렇잖아”

 

그는 아직도 자신이 친부모에게 버림 받았다는 사실을 상처로 갖고 있는 걸까? 한 번 입은 상처는 절대 완전히 회복되지 않는다는 걸 석진 또한 그랬기 때문에 잘 안다. 새 살이 돋아 완전히 아문다 싶어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미세한 흉터는 남아 있다. 태형 또한 그럴 것이다. 아무리 양부모에게서 아낌없는 사랑을 받으며 자랐어도, 그는 친부모에게서 버림 받은 상처를 가슴에 늘 끌어 안고 있었다.

태형과 석진은 청첩장을 전달하기 위해 서울대공원 맹수사를 찾았다. 마침 정 선생이 인공 포육실에 있던 시간이라, 태형은 본의 아니게 자신이 한때 지냈었던 곳을 다시 찾게 됐다. 지금 맹수사 인공 포육실에는 호랑이가 두 마리, 사자가 한 마리. 그리고 곰이 세 마리가 있다. 그들 모두 어미로부터 버림받은 아이들이다. 어미의 건강이 좋지 않거나, 혹은 어미가 제 새끼에 대한 모성을 갖지 못했거나 등의 이유 때문이다.

 

“쟤들 중 누군가는 저처럼 될 수도 있겠네요”

“그래. 아직은 모르지. 좀 더 커 봐야 알겠지”

 

“잘 컸으면 좋겠다”

“잘 클 거야. 잘 먹고 잘 놀고 잘 자면 돼”

 

“............”

 

석진은 태형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는다. 상처는 때로 혼자 갈무리해야 할 시간도 필요한 법이다. 서울대공원에 같이 가 달라고 태형이 요청했을 때, 석진은 태형이 결혼 전에 무언가 정리하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 복잡한 감정들을 정리하고 싶었을 것이다. 결혼을 앞두고 마음이 뒤숭숭한 건 비단 석진만이 아니다.

 

 

“어때? 바쁘지?”

“와... 이렇게 바쁠 줄 몰랐어요”

 

“정신 없어. 당일 돼 봐. 진짜 물 한 모금 편하게 못 마실 걸”

“피곤해도 괜찮아요. 행복해요 하루 하루가”

 

“..................”

“왜 그렇게 쳐다 보세요?”

 

“신기해서”

“뭐가요?”

 

“저랬던 애가 이렇게 커서 결혼한다고 하니까”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흐르는 시간을 막을 수는 없다. 흐르는 시간은 많은 것들을 바꾸어 놓는데 때로는 개중 걸작이 탄생한다. 소리 없이, 그러나 그 무엇보다 세찬 힘으로 흘러가는 시간이 빚어 놓은 작품. 태형은 잘 성장했다. 그리고 정 선생이 보기에, 그의 옆에 서 있는 그의 짝 석진도 시간이 빚어 낸 걸작 중 하나다.

둘 다 크고 작은 흉터를 갖고 있으면서도 그 흉터가 전혀 흉해 보이지 않는다. 상처마다 바르는 약의 종류는 다르다. 특정한 상처에 효능이 있는 약은 따로 있다. 그들은 나름대로 가장 치료가 빠른 약을 잘 찾아 낸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함으로써 그들의 새살은 훨씬 더 수월하게 돋을 수 있었다.

 

“태형아”

“네?”

 

“혹시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니?”

“뭘요?”

 

“네 엄마 아빠가 널 버렸다고”

“음... 그건 사실이니까요”

 

“그래서 원망스러워?”

“그건 아니에요 이제”

 

“..............”

“어차피 못 키울 거였잖아요. 그럼 떨어져 나오는 게 맞았어요”

 

“태형이 다 컸네 이제”

“다 큰 게 문제가 아니라 이제 곧 결혼 한다니까요!”

 

“그래 그래. 이제 삭을 일만 남았지”

“아아....”

 

“둘이 참 잘 어울려”

“그렇죠? 제가 생각해도 그래요”

 

 

태형은 어떤 표정을 짓든 어떤 각도에서 보든 잘생겼지만, 이렇게 웃는 모습을 볼 때 석진은 가장 환희를 느낀다. 더군다나 태형이 자신으로 인해 웃고 있다고 생각할 때의 충만감은 세상의 그 어떤 귀한 것과도 바꿀 수가 없다. 태형이 티 한 점 묻지 않은 맑은 웃음을 지을 때, 석진의 세상에서는 밤이 영원히 사라질 것만 같다.

 

 

 

 

 

 

“떨려?”

“아니. 떨리긴. 자기는?”

 

“내가 떨리는 것처럼 보여?”

“아니. 전혀”

 

“안 떨려 나도”

“꼭 우리한테 유리한 재판인 것만은 아닌 거.. 알지?”

 

“알아. 그쪽은 자원 빵빵한 국제 기구. 우린 그냥....”

“특이한 애들이지”

 

“아, 이제 특별한 애들이라고 하긴 싫고 특이한 애들?”

“맞잖아. 좀 특이하게 잘생긴 애들”

 

“.......... 요새 좀 잘난 척 심해진 거 알아?”

“잘나서 잘난 척 하는 건데 왜?”

 

내일은 국제 사법 재판소에서 1차 공판이 열리는 날이다. 여기까지 올라 오는 데만도 두 달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결혼식이 코앞인데 결혼 준비만으로도 24시간이 모자랄 정도임에도 불구하고 이 재판에 신경이 쏠려 있다. 내일은 석진도 함께 재판에 참석한다. 석진과 태형은 원고의 신분이다. 재판에 소요되는 모든 비용과 인력은 태형의 아버지가 담당하고 있지만, 결국 내일 재판에서 직접 발언권을 갖는 건 태형과 석진이다.

이들은 재판에서 자신들이 해야 할 말을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미리 정리 해 두었다. 그리고 대본처럼 외워두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청산유수처럼 말을 할 자신은 없다. 난생 처음 겪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긴장해서 말을 더듬지나 않을지 걱정이다.

한 침대에 누워 손깍지를 끼고, 나란히 천장을 바라보는 일은 이유 없이 즐겁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웃는 병에 걸린 것처럼 웃음이 실실 난다. 심지어 내일 재판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리라는 보장도 없는데 그렇다. 태형과 석진이 꼭 승소할 거란 보장이 없는 이유는, 이들이 ISCA의 비밀스러운 계획으로 인해 아직 가시적인, 혹은 정량적인 손해를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미래의 손해를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상황이기는 하다. 검사와 변호사도 그러한 사실에 중점을 두고 재판을 이끌어 나갈 것이다. 그러나 상대편에서 바보처럼 두드려 맞기만 할 리 없다. 그들은 태형과 석진보다 훨씬 더 입김이 세고 유능한 변호사를 대동할 수 있으며, 심지어 국제 재판소의 판사들에게까지도 줄을 댈 수 있다.

 

 

“내가 지금 가만히 생각을 해 봤는데”

“어?”

 

“우리가 만난 지 아직 일 년밖에 안 됐더라?”

“........... 아직 그것밖에 안 됐다고?”

 

“응. 근데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어”

“그러게...”

 

“그 전에는 이런 일들은 나한테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도 그랬어”

 

“근데 그게 나한테 일어나네?”

“그래서 좋다는 거야 싫다는 거야?”

 

“좋다는 거지 바보야. 꼭 이런 것까지 말로 해야 아냐”

“어 말로 해 줘. 말해야 알아. 난 바보라서”

 

태형이 가만히 날짜를 헤아려 보더니, 석진을 처음 만난 이후 지금까지 지나간 시간이 고작 일 년 하고 며칠 더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의 말대로 최근 일 년 동안 일어난 일들은 그보다 앞선 30년 동안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누군가를 만나서 결혼까지 하게 되는 인연을 맺고, 또 이렇게 큰 싸움을 벌이게 되고. 그러나 지금 겪는 골치 아픈 일들은 앞으로 누릴 행복을 위한 전주곡인 것 같다. 그래서 힘들지 않다. 오히려 더 기운을 내서 잘 해 내고 싶은 욕구가 솟는다.

 

“자기야”

“응?”

 

“나한테 나타나 줘서 고마워”

“............ 갑자기?”

 

“좀. 그냥 들어”

“어어, 알겠어. 계속 해”

 

“싫어”

“아아, 내가 잘못했어. 말 안 끊을게”

 

“난 혼자 외롭게 살다가 결국 죽겠지- 이렇게 생각했었거든”

“자기야”

 

“어?”

“난 자기가 어디에 있든, 어떤 모습이었든. 찾아 갔을 거야”

 

“우리가 솔직히 이런 일 아니었음 어떻게 만났어. 그동안 완전히 모르고 지냈는데”

“그럼 우리 지금 배은망덕한 짓 하는 거네?”

 

“왜?”

“우리 만나게 해 준 게 ISCA인데 우리가 고소했으니까”

 

“아... 그게 그렇게 되나”

“말하자면”

 

결국 모든 일은 생각하기 나름인가보다. 내 눈 앞에 닥친 모난 비극의 새까만 앞 얼굴만 쳐다 보면 그것은 비극이지만, 뒷면으로 시선을 돌리면 이렇게 또 다른 해석이 나타난다.

 


밥-뷔진-잠-뷔진-일-뷔진-밥-뷔진... 뷔진 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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