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하얀 남자가 남기고 간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금색과 연적색 끈이 묶인 축의금 봉투였다. 봉투를 뜯어 안을 쏟아내니 어디에 보관해둔 것인지 반으로 접힌 자국이 남아있는 돈들이 흘러져나왔다. 

축하해. 히지카타.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축하받을 일이 있었는지 생각해보았지만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남자가 두고간 돈의 의미를 알지 못할만큼 농판은 아니었다. 드디어 남자가 원했던 대로 자신을 떠나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殘果 1. 나무에서 따고 남은 과실. 2. 먹다 남은 과실. 3. 송장
[히지긴오키] 원작 AU 단편



긴토키와의 관계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죄를 저지른 기분이었다. 맞지 않은 신발을 신은 것처럼 갑갑했고 답을 아는 문제가 갑자기 생각나지 않아 결국엔 답을 적지 못하는. 그런 찝찝함만 남는 관계임에도 히지카타는 긴토키를 밀어낼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남자를 보는 제 시선이 변화하고 있어서였다.

그렇게 껄렁댄다 생각했던 말투가 이따금씩 살랑거렸다.

그렇게 썩은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던 눈동자가 고운 색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지저분하다고 생각했던 머리는 관계를 할 때도 한 번씩은 만지게 될 정도로 보드랍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히지카타는 이 것을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라고 속으로 스스로를 채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히지카타는 역시 자신이 맞았다는 것을 알았다. 신경쓰이는 여인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여인에게서는 그리운 향기가 났고 여인이 웃는 모습을 보면 가슴께가 울려서 직접 쳐다보는 것이 곤란했다. 자신이 처음 배우고 느낀 사랑과 비슷해서 두번째 사랑이 온 것임에 틀림 없어보였다.
히지카타는 긴토키와의 관계를 정리하려고 했다. 그런데 막상 그를 보면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렇게 어중이처럼 서있다 그가 하는 말에 이끌려 정신을 차리고 나면 자신의 아래에서 숨을 가쁘게 토해내고 있는 남자를 정신없이 탐하고 있었다. 관계가 끝나면 왜 또 말하지 못한 거냐고, 왜 거절하지 못한 거냐고 후회했다. 하지만 이내 손에서 느껴지는 잔열이 못내 아쉬워 이미 닫고 나온 문을 잠시 쳐다보고 가곤 했다.

오오구시 군은 왜 나랑 자는 거야?

그가 직접적으로 물어왔을 때 히지카타는 답이 필요했다. 그래서 너가 생각하기에도 속궁합이 나쁘지 않게 느껴지지 않냐고 말했다. 긴토키는 그 것을 긍정하며 우습긴 하지만 우리만큼 편한 섹스파트너도 없을 거라고 고개를 주억였다. 그러자 히지카타 안에서도 무언가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긴토키와 관계를 가지는 이유는 그가 편해서, 했을 때 괜찮았으니까. 그렇게 답을 정한 히지카타는 그 관계의 선을 유지하기 위해 긴토키에게 돈을 주었다. 처음이야 어찌됐든 그 뒤로 군말없이 다리를 벌려주는 건 긴토키였고 그러면 대가를 주어야하는 건 자신 쪽이 맞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허나 긴토키와 관계를 가지면 한 동안 마음이 불편해서 여인을 볼 때 어딘가 석연찮아지기 시작했다. 그 때엔 여인과 아직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기에 긴토키에게 주고 가는 돈의 양만 늘렸다. 이러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조금은 마음이 나아진 것 같았다. 어차피 남자는 한량처럼 살아가고 있었으니 돈이 필요한 것도 맞을 거고 자신이 틀린 건 없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여인에 대한 감정이 시간이 흐를수록 깊어진다고 느꼈을 때 히지카타는 정말로 긴토키를 끊어내야 할 순간이 온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를 보면 또 악순환이 반복될 거  같으니 차라리 안보는 쪽으로 천천히 멀어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순찰 구역을 바꾸기도 하고 일부러 그가 자주 다니는 장소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잘 알아서 정리되겠거려니 싶었던 히지카타에게 또 다른 문제가 생긴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긴토키가 보고 싶었다. 가끔 그와 하나도 닮지 않은 것을 보고 있는데도 구태여 남자와 비슷한 부분을 찾아내서 떠올리곤 했다. 보지 않는 것으로 결정해놓고 이리되니 히지카타는 다시 답이 필요해졌다. 그래서 이번엔 욕구불만인게 아닌가 생각했다. 욕구불만이야 어디서든 풀면 되는데 히지카타는 그렇게 답을 정하고 긴토키와 가끔씩 마주치는 상황을 만들었다. 그러면 또 남자가 한껏 무르익은 말투로 유혹해 올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더니 보고 싶어지는 게 차차 사그라들어서 이번에도 자신의 생각대로 틀린 것은 없었다고 생각했다.


아카네와의 사이가 확실해졌을 때 히지카타는 끊어내는 건 못했으니 아예 긴토키를 찾아가지 말자는 쪽으로 생각을 굳혔다. 애초부터 범연한 관계도 아니었고 이대로라면 아카네를 볼 낯이 없어지지 않는가. 쓸 때 없는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그녀와의 시간을 소중히 하는 것에만 집중하려 했다. 그러면 이전처럼 긴토키가 불쑥 생각나는 일은 없을 테니.

토시로 씨, 토시로 씨는 이런 걸 어떻게 다 알아요?

데이트를 하고 조금은 난안이 돋는 말을 하고.
연애를 하는 사이라면 누구나 할만한 것들을 하고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카네의 말에 히지카타는 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제가 말한 것들이,자신이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들이 평소 누구에게 들은 것을 기억하고 있었던 거였는지가 순식간에 밀려왔다.

알겠더라, 지금까지 얼마나 추악하고 끔찍한 자기합리화를 해왔는지.
알겠더라, 그녀에게 느꼈던 것은 지나간 사랑에 대한 죄책감이었음을.
뭐가 농판이 아니라는거냐, 이보다 두후한 머저리가 어딨다고.


" 당신 형씨한테 돈까지 줬어요? "


어떠한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 진짜 쓰레기네요. "


그런게 있을리 없었다. 이제와서 남자에게 느끼는 감정이 뭐였는지를 답 내리는 일도 할 수 없었다.
원하는 대로 된 것이다. 그렇게 내치고 싶던 남자를 드디어 떼어냈을 뿐이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느라 언제나 시끄러웠던 둔소가 평소보다 한 층 더 시끄러워져 있었다. 이야기의 화제는 오키타가 연애를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 오키타 소고가?
연애를 시작한 주인공인 남자 자체도 놀라운데 더 놀라운 것은 따로 있었다.
─해결사 형씨랑?
주인공 남자가 푹 빠져있다는 상대방이 누구도 생각지도 못했던 이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남자란 사실보다는 나이 차이가 어떻게 되냐는 이야기랑, 도대체 언제부터 였냐는 이야기로 뜨거웠다.

히지카타는 보고서를 읽어내려갔다. 오키타의 보고서였다. 최근에 일어난 소매치기 사건에 대해 조사하라고 하였더니 사건 조사가 아니라 자신이 어디에서 뭘하고 돌아다녔는지를 적어놨다. 그 것도 주로 사카타 긴토키와의.


" 이게, 뭐냐. 소고. "

" 보시다시피 보고서 입니다만. "


소매치기 내용이 들어가 있는 것은 첫 줄 뿐이고 오늘의 긴토키는 어땠는지, 뭘 사주었는지, 헤어질 때 아쉬웠다던지. 웃기지도 않을 연애 작문을 보고서라고 내놨다.


" 보고서가 아니라 시말서를 쓰고 싶은가 보군. "

" 소매치기 사건에 형씨 도움을 받았으니 사실 그대로를 적었습니다만. 도움 받아서 사례로 먹을 거 사준 것도 죄입니까? "

" 다시 써와. "


히지카타는 오키타가 써온 보고서를 찢었다.
하얀 조각이 녹물색 다다미 위로 흩뿌려졌다. 오키타는 그런 히지카타를 비웃듯 종이를 쓸어 모아 그의 작은 평상 위로 다시 올려두었다.


" 제가 시말서를 써야한다면 당신은요? "

" ……. "

" 나는 요새 당신을 진짜 죽이고 싶어요. "


찢어진 조각 중에 한 조각을 집어든 오키타가 조각에 적힌 글자를 읽더니 히지카타의 앞에 들이밀었다.


" 제 보고서에 문제가 있다면 이거 하나에요. "


형씨가 웃었다고 한 부분.


" 뻥이에요. 안 웃었어요. 요새 잘 안 웃어요. 웃어도 웃는 거 같지 않게 웃거든요. "

" 소고, 이만 나가. 연애상담 받고 싶으면 밖에서 떠들고 있는 놈들한테 부탁해. 하루종일 그 이야기나 하고 있으니 본인이 가서 말해주면 아주 좋아할 거다. "

" 당신은 진짜 예나 지금이나 변한게 없어. 모른척하면 그걸로 행복할거라고 생각하는거야? 누님한테도 똑같은 짓 해놓고 혼자 웃기지도 않게 그걸로 된거라고 멋…. "


오키타의 고개가 큰 소리와 함께 돌아갔다. 히지카타는 손 살가죽 너머로 둥근함지와도 같은 뼈마디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세게 주먹을 쥔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붉게 터져오르듯 색을 입은 뺨을 부여잡고 오키타는 벌쭉 웃어 보였다.


" 나도 너같은 개새끼한테 형씨 얘기하고 싶지 않아. "


그런데 어쩌겠습니까. 안 좋아하기로 했다면서 여전히 바보같이 굴고 있는데. 오키타는 속말을 삼켰다.

긴토키에게 끈질기게 굴어서 시험삼아라도 좋으니 연애하는 모양새를 만들어냈다.
잘해주면 오히려 어색하게 뒷걸음질 칠 것 같고 못해주면 또 상처를 받을까봐 평소처럼 굴었다.
평소처럼 남자에게 건방지고 주제 넘는 짓을 했다.

그런 와중에도 조바심이 나서 그의 손을 잡기도 하고 뜬금없이 입을 맞춰보기도 하고 남자를 어떻게든 빨리 제대로 갖고 싶은 마음을 다 숨기지는 못했다. 긴토키는 딱히 그런 자신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손을 잡으면 웃어주었고 입을 맞추면 경찰이 이런데서 대놓고 이래도 되는 거냐며 비실거렸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남자에게 자신은 얼마든지 맞춰줄 수 있지만
남자가 자신에게 맞추려 하는 것은 그가 얼마나 힘들어하고 있는지 보지 않으려고 해도 보였다.
남자는 평소처럼 구는 것조차 거짓말을 하고, 거짓된 표정을 지어보어야 했다.

야위어져 가는 뺨이 그걸 말해주고 있었고
좋아하는 걸 사준다는데 몇 입 먹다말고 속을 게워내곤 했다. 썩은 걸 먹었더니 철 지난 감기같은 위염에 걸린거라고 집에 있는 꼬맹이들을 욕하며 별 거 아니라고 말하는데 그 꼬맹이들이 직접 따로 찾아와 집에서도 밥을 잘 안먹으니 혹시 만나면 밥을 좀 먹여달라고 부탁했을 정도였다.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지만 오키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가 또 괜찮다는 말로 오지말라고 자신과의 거리를 두고 이야기하고 있었으니까.


역시 이 빌어먹을 능금은 바라보기만 했어야 한다.

능금은 평과가 아니니까 먹어봐야 맛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미 가지에서 떨어졌으니 누가 주워가든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억지로 주웠다.
하지만 맛도 보기 전에 줍자마자 알아챘다. 이건 어딘가에 넣을 수도 없을 만큼 만숙하다 못해 괄익어버렸다고.
버려진 과실이었다. 진작 누군가 담아갔어야 할 것이었는데 담아가지 않아서 누르익는 것도 모르고 아직은 괜찮다고 그나마 제 몸에 어여쁜 빛을 내보이고 있었을 뿐이다.

썩은 면은 이미 봐버렸으니 버려졌어도, 누르익었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잔과는 잔과였다. 그 자리에서 썩어 다시 봄이오는 것을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잔과가 마무리 되었습니다.
뭔가 아쉽게 느껴지신다면 뒷내용이 아직 더 이어질 예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 포스타입에서는 하나 처음 마무리한 글이 아닌가..싶은..

이후 이어지는 내용은 수위가 있을 것 같아 비밀글로 공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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