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속 재생"으로 배경음악과 함께 읽어주세요 

비록.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우리의 ‘그녀’를 구하기 위해 작은 희생이 있었지만, 그 희생은 가치 있었다. 희생된 ‘그’를 기리는 장례식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잃었던 것을 되찾고, 본래 누려야 했던 것을 마땅히 누리게 되었다.

반역자들을 처단하고,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 예전처럼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녀의 결혼식이 이뤄졌다. 이 나라에서 두 번째로 귀한 자인 황태자와 황태자비의 결혼식이었다.

두 사람의 앞날을 축복하기라도 하듯이 하늘은 청명했으며 바람도 맑고 따스했다. 아오아이 님의 대리인인 나는 그분의 이름으로 두 사람의 주례를 보며 축복했다. 멋진 예복과 웨딩드레스가 잘 어울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인이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아카데미를 함께 수학하며 반역자들과 싸웠던 동료이자 친우인 우리는 함께 모여 우리가 사랑했던 그녀의 행복한 앞날을 기원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날은 모든 것이 완벽한 날이었다. 

하지만.

반지를 교환하며 맹세의 키스를 하고 성혼이 성립되는 순간. 세상의 멸망이 찾아왔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너무나도 갑작스러우면서도 끔찍한 멸망이었다.

아르카디아 제국은 물론 유토피아 대륙에 존재했던 사람들과 찬란하게 빛나던 문명은 단 한 번의 대폭발로 인해 흔적도 사라졌으며, 허허벌판에 살아남은 인간은 마탑주인 대마법사와 아오아이 님의 은총을 받은 나뿐이었다.

모든 것이 사라진 절망적인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황량한 토지 위에서 우리 두 사람은 끔찍한 현실에서 정신이 나가지 않은 게 용했다.

우리가 사랑했던 그녀에겐 저주가 걸려 있었다. 모든 인간을 멸족시키고자, 이 세상의 종말을 꿈꿔온 ‘누군가’가 건 끔찍한 저주가 그녀의 영혼에 새겨져 있었던 거였다.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저주를 건 것은 누구지? 누가 이 세상을 저주했으며, 누가 그녀를 저주의 매개로 삼은 걸까. 어째서, 우리 둘만 살아남은 거지?

나는 무너진 세상에서 홀로 40일 동안 금식하며 눈물로 아오아이 님께 기도했다. 내 정성을 갸륵하게 여기셨는지 아오아이 님께선 응답해주셨다. 

희생을 통해서라도 모든 것을 되돌리고 싶으냐고.

우리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어떤 희생을 불사하더라도 되돌리고 싶다고.

아오아이 님께선 길을 알려주셨다. 

기적처럼 시간은 대륙이 멸망하기 11년 전으로 되돌려졌다. 

나는 회귀했다. 희생을 겸한 절대적인 제재를 가진 채. 

회귀 전의 일을 기억하는 것은 오직 나뿐이었다.

이번 생에 내게는 한 가지 목표가 생겼다. 어떻게든 ‘그’를 살려야 했다. 국가의 존립과 사람들의 생존을 위하여.

아니, 사실 국가의 존립이나 사람들의 생존 같은 거창한 목표보다…… 나는…… 나는 그저, 나의 동료들을 다시 한번 만나고 싶었다. 북부대공, 황태자, 대마법사, 그리고 내가 사랑한 그녀.

제발 부탁이니, 이번 삶에서는…….








피폐물 서브 남주가 내게 집착합니다 18

Chapter 3. 내 최애와 함께하는 캠퍼스 라이프 03

written by 휴위







사람이 쓰러졌는데 차마 두고 갈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홉월드를 포기할 윤기가 아니었다. 윤기는 스위츠를 너무나 좋아했으니까. 박지민을 어깨에 얹은 채 당당하게 홉월드로 들어갔다. 테이크아웃 하려는 거였다.

마차가 올 때까지 박지민을 보고 있을 테니 자유로운 몸으로 사 오라고 했지만, 윤기는 내가 박지민과 닿는 것조차 싫은지 너무나 단호하게 거절했다.

결국, 쌀 포대나 짐짝처럼 윤기의 어깨에 얹어진 박지민이었고, 윤기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홉월드로 들어갔다. 플렉스 있게 ‘여기서부터 저기까지’를 외친 것처럼 양손 가득 포장된 스위츠를 들고 왔다.

“형님이 좋아하는 초코 케이크랑 딸기 케이크도 샀어요.”

“고마워.”

칭찬해달라는 듯이 웃으면서 머리를 숙이는 윤기였고, 나는 원하는 대로 손을 뻗어 그의 복슬강아지 같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다. 윤기는 만족했는지 나를 보며 웃는다.

때마침 마차가 도착했고, 우리 셋은 함께 마차를 타고 아카데미로 향했다.

아니, 그래도 명색이 교황인데 너무 짐짝 취급하는 거 아니니?

윤기는 맞은편 좌석에 박지민을 패대기치듯이 눕히고는 내 옆자리에 앉았다. 손을 꼭 잡으며, 부담스러울정도로 나를 응시한다.

“형님, 날 봐요.”

마디마디가 굵고 커다란, 체온이 높은 손을 들어 내 턱을 만지며 제 쪽으로 돌리면서까지.

나를 보는 세모진 윤기의 눈은 까맣게 빛났는데 눈빛에서 간질거리는 듯한 묘한 감정이나 기류 같은 게 느껴져서 계속 시선을 마주치기엔 부끄러워졌다.

“넌 맨날 보는데?”

그래서 짧은 눈 맞춤을 하고 힐끔 시선을 돌려 잠든 지민을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이 사람 괜찮은 걸까? 교황이나 되는 존재가 호위도 없이 혼자서 여기까지 오다니. 그치? 게다가…… 우릴 아는 거 같았지?”

나는 대화 주제를 바꾸려고 노력했으나 윤기는 대꾸하지 않았다.

“형님이 다른 사람 생각하는 거 싫은데…….”

응? 뭐라고? 나는 눈알을 굴려 윤기를 바라보았고, 윤기의 눈빛에 숨이 멎을 뻔했다.

“형님이, 나 이외에 다른 사람에게 신경 쓰는 거 싫다고 했어요.”

윤기가 점점 내게로 다가왔고,

“어, 어. 유, 윤기야?”

나는 본능적으로 몸이 기울어 옆 벽에 닿았다. 윤기는 내 턱을 쥔 손이 아닌 빈손을 뻗어 일명 벽치기로 나를 가두곤 점점 얼굴을 내게로 기울였다.

쪽, 윤기의 입술이 내 오른쪽 볼에 닿았다.

“윤기야?”

쪽, 다음은 콧잔등.

“자, 잠깐만.”

쪽, 다음엔 왼쪽 볼에.

“윤기야~!”

윤기는 또 다른 부위에 뽀뽀하려고 했고, 나는 재빨리 양손을 뻗어 윤기의 턱을 막고 밀며 틈을 벌리고자 했다. 하지만 그동안 훈련을 얼마나 잘했는지 단단한 체격으로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내 턱을 쥔 손을 떼더니 곧장 내 양쪽 손목을 한 손에 움켜쥐고는 아래로 내리며 어깨를 잔뜩 움츠리는 내 이마에 진하게 입을 맞췄다.

심 여사를 닮아서 체구도 야리야리하고 뼈대도 가늘었던 탓에 윤기의 큰 손에 두 손목이 잡힌다는 게 어이가 없으면서도, 나도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뒤에는 벽이 있고, 윤기의 손에 잡히고 막혀서 피할 곳도 없었다. 그저 얌전히 눈을 질끈 감고 윤기가 하는 뽀뽀를 얌전히 받을 수밖에.

윤기는 내 얼굴에, 부위 부위마다 쪽쪽쪽 입을 맞췄다. 단 한 곳, 질끈 다문 입술만 제외하고.

윤기의 입술이 닿을 때마다 가슴이 벌렁벌렁할 정도로 심장이 쿵쿵 뛰었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게 열이 오르고 손에선 땀이 흐를 것 같았다.

무슨 일이야. 얘 요즘 대체 왜 이러는 거지?

형제간의 애정 표현이라기엔 조금 지나친 거 아냐? 이건, 마치…….

“사랑해요. 형님.”

연인 간의 애정 표현 같잖아.

윤기는 수도 없이 나를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만 한 번도 내게 묻지 않았다. ‘형님도 나 사랑하죠?’라는 건.

내가 당연히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해서 물을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걸까, 아니면 본인이 사랑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걸까.

어느 쪽이든, 나는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나는 슬며시 눈을 떴고, 윤기의 그 눈빛이 조금 버거워서 박지민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

맙소사.

나와 눈이 마주친 박지민의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다. 안색은 창백해진 채.

설마, 다 본 거야? 아니, 언제부터 깨어있었던 거야? 깨어났으면 깨어났다고 말을 해줘야지~!










“크흠흠. 두 분, 우애가 매우 좋으시군요.”

박지민은 예를 갖춰 바른 자세로 좌석에 앉아 헛기침을 작게 하고는, 애써 조금 전 상황을 포장해주려고 했다. 조금 전 나와 윤기는…… 그래, 좀 미묘한 광경이긴 했지.

“연인이니까.”

“으왁! 윤기야!”

갑자기 급발진하는 윤기였고, 나는 듣다 놀라서 손을 뻗어 윤기의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늦었다. 이미 연밍아웃을 들은 게 확실한 박지민은 아까처럼 안색이 파리해져서 또 동공이 흔들렸다.

“아니, 그게, 연인이 아니라!”

“형님! 아니라뇨…… 읍읍!”

넌 좀 가만히 있어! 불난 집에 기름 끼얹지 말고!

내 변명에 흥분하며 외치는 윤기였다. 나는 윤기의 입술을 있는 힘껏 꾹꾹 누르며 말을 못 하게 막았다.

“그러니까 그게…….”

다시 변명을 이어가려 했으나.

응? 뭐야? 박지민 표정이 왜 저렇게, 갑자기 온화해졌지?

“다행이네요.”

뭐라고? 다행이라고?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저는 박지민. 아오아이 신전 소속의 교황입니다.”

어? 이렇게 넘어간다고? 그냥 장난으로 치부하는 건가? 그럼 다행이긴 한데…….

의외로 상황이 마무리되는 느낌에 손에서 힘이 느슨해졌고, 윤기는 기다렸다는 듯이 내 손을 내려 깍지를 꼈다. 박지민의 시선이 우리 손으로 향하는 게 보였지만, 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에라, 모르겠다. 내가 말린다고 손 안 잡을 애도 아니고. 나는 마음을 비우고 윤기의 행동에 맞추며 박지민에게 질문했다.

“호위도 없이 홀로 황도로 오신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홀로 와야 할 중요한 이유라도 있으셨나 보네요.”

“네, 대마법사 김석진 님을 만나야 합니다. 아카데미에서 마법학을 가르치는 교수님으로 계신다고 들었어요.”

김석진은 2년 전에 마탑주의 뒤를 이어 새 마탑주가 되었으며, 그 칭호는 대마법사가 되었다. 그런데도 마탑으로 돌아가지 않고 여전히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적성에 맞는 건진 알 수 없었지만.

박지민은 내년에 여주와 함께 입학하게 된다. 그전까지 접전이 없는 두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시점에, 김석진을 만난다고? 왜?

“교수님과 친분이 있으신가 보네요.”

“……네. 아주, 오래전에요.”

박지민은 그렇게 말하며 슬픈 눈빛으로 윤기를 바라보며 웃었다. 뭐야? 이 미묘한 눈빛은?

게다가 아주 오래전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아카데미에서 얘네들과 처음 만났잖아. 그런데 오래전이라니? 언제 만났다는 거야?

교황과 친분이 있었다면 김석진 입에서 한 번이라도 말이 나왔을 법한데, 걔 입에선 교황의 기역도 안 나왔는걸. 오히려 마탑과 신전은 사이가 안 좋다는 말은 했지만.

“하지만…… 아마 기억하지 못할 테죠.”

와, 이 눈빛. 한 100년 치 서사는 품었을 법한 우수에 찬 눈빛이잖아.

허, 미치겠네. 내가 기억하는 원작과 너무 다른데? 내 기억이 잘못된 건가? 숙소 돌아가면 <그불데> 줄거리 노트를 정독해야겠어.

“민윤기 공자께서는…… 행복해 보이는군요.”

응? 지금 뭐라고 한 거지?

박지민의 시선은 윤기에게 꽂혀 있었다.

“정말 다행이에요.”

“내 행복을 왜 그쪽이?”

윤기는 삐뚜름한 자세에 경계하는 눈빛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지민을 응시했다. 그런 무례한 반응에 당황스러워하는 건 나뿐이었다. 

아르카디아에서 제일 잘난 사람이 셋 있는데 첫 번째가 황제, 두 번째가 교황, 세 번째가 마탑주(대마법사)였다. 그중 교황은 황제보다 더 아르카디아 국민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다. 신의 대행자이자 그의 능력으로 기적과 이적을 행하였기에.

“윤기야, 예를 갖춰. 이분은 교황님이야.”

“……네에…….”

마지못해 하는 대답인 게 티가 났다. 그래도 ‘형님 말씀대로 했어요’라며 나를 응시하는 모습은 뭐랄까…… 마치 주인 외에는 따르지 않는 고고한 한 마리의 맹수 같다고나 할까.

나만 바라봐서 뿌듯하기도 하지만. 윤기야, 나한테 하는 것의 10분의 1이라도 좋으니 남들에게도 그렇게 대해 봐.

아카데미에 다니는 이상 여주와 마지막 섭남 박지민과도 언젠가는 만날 거로 생각했지만, 이렇게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다.

이러다 여주까지 올해 만나는 거 아냐? 아니야, 아니야. 혹시 또 모르니 절대로 이런 생각은 하지 말자.

“괜찮습니다. 아카데미에 동행할 수 있게 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인걸요. 아오아이 님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아. 저 온화한 얼굴과 자애로운 미소라니. 보기만 해도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는 것 같다.

박지민은 신의 은혜를 가득 받은 사람답게 온화하고 너그러운 대인배였다. 한마디로 착한 사람. 그래서 섭남 중 인기가 제일 없었다.

독자들은 윤기와 박지민을 비교하곤 했다. 윤기가 상대면 19금 피폐물인데, 박지민이 상대면 전체관람 순정만화가 된다며. 

박지민은 너무 순진해서 여주의 펫과 같은 역할을 했었다. 세상 무해함으로 여주의 포근한 쉼터가 되어주었지. 너무 소중하고 사랑해서 여주에게 손도 못 댄 순진한 섭남이었다.

그리고 우리 윤기와의 관계는…… 사이가 썩 좋지는 않았다. 윤기의 저주 때문에 여주와 관계 맺는 걸 김석진에게 들어 알고 있었기에. 혼전순결주의자였던 박지민은 결혼도 하지 않고 여주의 육체를 소유한 윤기를 미워하면서도, 저주받은 인생을 불쌍히 여기는 양가감정을 가졌다.

 아카데미에 가는 내내 나는 불편함과 의아함을 느껴야 했다.

박지민은 그리웠던 사람을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윤기를 보았고, 윤기는 오직 나만 바라보았기에. 꼬이고 꼬인 삼각관계처럼 느껴졌다.

“성하께서는 우리 윤기를 원래부터 알았던 것처럼 보시네요.”

결국, 질문한 것은 나였다.

“기억하세요? 거리에서 쓰러지실 때 저희를 보고 다행이라고 하셨던 거. 어떤 의미였는지 여쭤 봐도 될까요?”

“……제가요?”

“네.”

박지민은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곤란하다는 듯이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글쎄요. 기억이 나지 않네요.”

아닌 거 같은데. 기억하는 거 같은데. 신의 대리인이라며, 거짓말 하면 안 되지. 

아니나 다를까, 박지민의 동공이 흔들리며 이마에서 식은 땀이 주룩 흘러내렸다. 참, 투명하고 진실한 사람이네. 세상 모든 정치인이 이렇게 투명하고 진실되면 얼마나 좋을까.

“부탁이니, 더는 묻지 말아주세요.”

더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다는 걸까? 그의 성격과 지금 두 손을 모은 기도 손을 한 것으로 보건데, 조금 전 거짓말에 대해 회개 기도하는 게 분명해보였다.

박지민에게 어떤 이유나 사정이 있을 것 같다는 데에 강하게 촉이 왔다. 본인은 곤란해하는 것 같아서 더는 묻지 않았다. 그래도 궁금하단 말이지.










“여기에서 기다려주시겠어요? 교수님께 연락해볼게요.”

“감사합니다, 공자.”

아카데미에 도착해 사관으로 온 우리는 박지민을 로비 휴게실에 앉히고 김석진을 찾으러 갔다. 사무실에 들어가면 그와 연락할 수 있는 마법장치가 있으니 그걸 이용하려 했다.

사무실을 열려던 순간, 나이스 타이밍으로 문이 열리더니 김석진이 나왔다.

“퀸? 무슨 일이시죠?”

“저야 교수님을 찾으러 왔죠.”

“드문 일이네요. 황금 같은 주말에, 그것도 그를 달고?”

김석진은 흘끔 내 뒤에 선 윤기를 응시하며 피식 웃었다.

“교수님도 만만치 않아요. 주말에 사무실에서 근무하시다뇨.”

“월요일 모의 시험으로 낼 좋은 문제가 생각나서요. 그런데 무슨 볼일이시죠?”

“아, 교수님을 찾는 손님이 만났어요.”

“저를요?”

손님이라는 말에 김석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혹시 멍청한 멍멍이는 아니겠죠?”

“황태자는 아니고, 교황입니다.”

“……네?”

김석진의 미간이 판판해지면서 주름이 사라졌다. 더욱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요? 교황이요?”

듣고도 믿기지 않는다는 말투였다.

“네. 교수님을 봬야 한댔어요.”

“저를 왜요?”

“옛날에 친분이 있었다던데요?”

“전혀요.”

김석진은 말도 안 된다며 고개를 젓고는 사무실을 잠그고 함께 복도를 걸었다.

“교황이…… 확실한가요?”

“신분증을 봤어요. 아이에게 안수하는 것도 봤고요.”

“흠. 어디에 있죠?”

“로비 휴게실이요.”

우리는 휴게실로 향했다.

“호위도 한 명 없이 황도로 왔지 뭐예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더욱 수상하네요.”

휴게실로 들어가니 박지민은 소파에 앉아 막간을 이용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눈을 감은 채 기도하고 있었다.

참 신실하네. 그래, 이 정도는 해야 교황이라는 거지.

“저를 찾으셨다고요.”

김석진의 목소리에 박지민이 눈을 떴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당신이…… 김석진 마탑주?”

“그렇습니다. 교황이시라고요? 무슨 이유로 저를……!”

박지민은 좀 전에 우릴 봤을 때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는, 또 기절하고 말았다. 그나마 이번에는 소파에 그대로 쓰러졌다. 

아니, 대체 무슨 일이야? 얘 무슨 병이라도 있는 거 아냐?










숙소로 돌아온 나는 소파에 앉아 골똘히 생각했다. 혹시 내가 놓친 게 있나 싶어 원작 줄거리를 보려고 했지만, 윤기 때문에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윤기는 내 숙소를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껌딱지처럼 붙어서 테이블 위에 아까 사온 스위츠를 늘여놓았다.

“형님, 아~”

포크로 케이크 조각을 한 입 크기로 잘라 내 입가에 내밀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입을 벌렸다. 입 안으로 달콤한 초코 케이크가 들어왔다.

진짜 맛집이긴 해.

“형님, 무슨 생각해요?”

“응? 아니, 아무것도.”

“아닌데. 다른 생각하는 거 같은데.”

“…….”

쓸데없이 예리하다니까.

“별건 아니고. 교황이 무슨 일로 교수님을 보러 왔을까 하는 생각.”

그것도 호위 한 명도 없이.

“일단 신전에 연락했고, 교수님을 보러 왔으니 교수님 숙소에 재우고 있긴 하지만. 궁금해.”

“……곰랑아, 김석진 교수 엿보고 와.”

“!?”

곰랑이가 있었어? 아니, 대체 어디?

나는 곰랑이가 내 숙소에 있는 건가 싶어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어디에도 곰랑이의 기운을 느낄 수도, 볼 수도 없었다.

“곰랑이 찾아요?”

“응. 여기 있는 거 아니었어?”

“아니요, 데이트하는데 곰랑이가 있으면 형님이 곰랑이한테 신경 쓰니까 자유 시간 줬어요.”

어쩐지 곰랑이가 안 보인다 했어.

“안 보여도 네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야?”

“네, 계약 덕분에 어디 있든 곰랑이는 내 명령을 들을 수 있어요.”

윤기는 또 포크로 케이크를 한 입 크기로 잘라 내 입가에 내밀었다. 나는 또 입을 벌려 윤기가 주는 걸 오물오물 먹었다.

“그래도…… 엿듣는 건 좀 아니지 않을까? 두 사람의 일인데.”

“그럼 하지 말까요?”

“…….”

하지 말라기엔 궁금해 죽겠는 걸 어쩌지.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고, 윤기는 싱긋 웃으면서 포크를 접시 위에 내려놓고는 은근슬쩍 내 어깨를 감싸더니 포옹했다.

“형님,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 말해요. 형님이 원하는 건 다 들어줄게요. 그게 무엇이든 간에.”

내 귓가에 느른하게 속삭이는 다정한 말투가 숨을 불어넣는 듯 간지러워서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또 심장이 뛰었다.

나를 위해 뭐든 들어주겠다는 말은 저 하늘의 별도 따다주겠다는 종류의 플러팅처럼 들려서 기분이 간질거리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푸후후…… 뭐야~ 든든하네. 황제가 되고 싶다고 하면 황위도 줄 거 같은데?”

“네.”

……응? 뭐라굽쇼? 지금 잘못 들은 거 아니지? 너무 즉답 아니야?

“……정말?”

농담이지?

“형님이 원하시면. 황태자든 황제든 황족들 다 없애고 형님 머리에 왕관을 씌어드릴게요. 황제의 왕관은 가장 비싸고 아름다운 보석으로 만들어졌다는데…… 형님께 잘 어울릴 거 같네요. 그리고 제 실력으로 그리 어렵지 않을 거 같고요.”

뭐. 얘가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니. 이렇게 상큼한 얼굴에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반역이야기라니? 대공가를 네 대에서 끊을 작정이야?

“아니야, 아니야, 그건 아니야. 윤기야, 설령 내가 황제가 되고 싶다고 해도 너는 안 된다고 말해야지.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생각이라고. 해서도 안 되고.”

“왜요?”

윤기는 품에서 나를 놓고 빤히 눈을 응시했다.

“뭐? 당연한 말이잖아. 그건 구족을 멸하는 반역…….”

윤기는 내 손을 잡아 손등에 가볍게 입 맞추고는, 묘한 열기가 감도는 하백안으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덕분에 난 말문이 막혔다.

“제게 형님보다 중요한 건 없고, 형님의 바람보다 우선인 건 없어요.”

“……왜 그렇게 날 생각하는 거야?”

“연인이니까. 사랑하니까 당연한 거잖아요.”

이 눈빛은, 절대로 형을 바라보는 동생의 눈빛이 아니었다.

그 순간, 심장이 철렁거렸다. 

연인을 바라보는 꿀 떨어지는 눈빛과 내게만 허락된 달콤한 말투, 나를 독점하고 싶어 하는 마음 등등. 모든 것이 하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걸 단번에 인정하고 말았다.

“……그거, 말인데…… 윤기야, 연인은…….”

사실, 계속 모르는 척하고 싶었다. 설마 그런 건가 싶었지만, 나는 계속 모르고 싶었다.

여주에게 했던 충성맹서를 나에게 했을 때부터 감이 왔지만, 나는 애써 모르는 척했던 건지도 모른다. 설마, 아니겠지, 하는 마음으로.

“형제끼리는 연인이 될 수 없어.”

“그렇죠.”

응? 알고 있어? 그럼 이제까지 연인이라고 한 건 뭐야?

“친형제는. 하지만 우리는 피가 섞이지 않았잖아요.”

“!”

윤기의 손길에 몸이 기우뚱하더니 좌방석에 등이 닿았다. 시야엔 내 몸 위로 올라와 싱긋 웃고 있는 윤기가 보였다.

심장이 뛰었다. 평소 같은 두근거림이 아닌, 두려움이.

아,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잊었어요? ‘우리’가 처음 만난 날. 형님이 내게 한 맹세.”

―나 민호석은 삶이 다하는 날까지 너의 행복을 위해 살 것을 맹세할게.

“내 행복을 위해 살겠다고 맹세했잖아요. 기억 안 나요?”

“!”

“형님이 내 연인이 되는 게 나의 행복이에요. 맹세를 어기면 저주받는 거 알죠?”

한국에서는 흔하게 쓰는 ‘맹세’라는 단어였다. 믿어달라는 말보다는 좀 더 믿음을 주기 위해 결의에 찬 단어를 찾다가 맹세라고 해버렸는데, 설마 그게 내 발목을 잡게 될 줄이야.

내 동공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윤기는 나를 바라보며 피식 웃으며 볼에 뽀뽀했다.

“어, 어…… 윤기야, 다시 생각해 봐. 너는 다른 좋은 영애랑…….”

“오직 나라서, 나 그 자체를 좋아해 주는 좋은 사람이랑 사랑해야 한댔죠.”

그, 그랬던가?

“이 사람이 정말 날 좋아하는 거 맞나? 라며 헷갈리게 하지 않는 사람. 온전히 마음을 다 주는, 다정하고 상냥하고 좋은 사람.”

그, 그랬던 거 같기도 하고…….

“확정했어요. 처음 만난 내게 형님이 맹세해준 순간부터, 형님은 나의 연인이 될 운명이었던 거예요. 그렇죠?”

하, 할 말이……. 나는 대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입술만 달싹였다.

윤기는 할 말은 많으나 차마 말하지 않겠다는 듯이,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감정을 담은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며 입술을 열었다.

“……형님이 누구든 상관없어요.”

이게, 무슨 소리지? 누구든 상관없다니. 뉘앙스가 이상한데?

윤기는 세상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진중하게 말했다.

“지금 내 눈앞에 존재하는, 내 품 안에 있는, 내 손길이 닿은 ‘당신’이, 내 연인이니까요. 사랑해요.”

“읏?”

처음이었다. 윤기가 내 얼굴이 아닌 목덜미에 입술을 묻은 것은.

“아, 아파, 윤기야!”

입술을 벌려 치아로 자근자근 씹는 거로 모자라 두 입술로 깊게 빨아들이면서 흔적을 만들려고 하는 행위는 틀림없는 키스마크를 만들려는 거였다.

어디서 이런 걸 배워온 거야! 난 이런 스킬 가르쳐준 적 없다구!

나는 힘껏 윤기를 밀치려고 했으나 마차에서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나는 윤기를 밀어낼 힘이 없었고, 윤기는 내 저항을 가볍게 막으며 계속해서 내 목덜미를 빨며 깨물었다. 쪽쪽 빠는 소리가 야하게 귓가에 선명하게 들려와 얼굴이 화끈거렸다.

버둥거리면 거릴수록 나를 막는 윤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체념한 듯이 저항을 멈췄고, 덩달아 윤기의 힘도 약해졌다.

내 목덜미를 깨물고 빠는 혀로 핥는 행위도 처음보다 부드러워졌고. 정말로, 연인이 하는 듯한 행위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아이의 행위에,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기에.

어떡하지? 내 최애가, 나를 사랑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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