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출근하기 싫다.

엔노시타 치카라는 넥타이를 매며 한숨을 쉬었다. 월요일 아침에 출근하는 걸 좋아하는 직장인이 몇 명이나 있겠냐만, 오늘은 유난히 싫었다. 그러니까 어제 술자리에 가는 게 아니었는데.

차라리 평생 몰랐으면 좋았을 것을.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는 말을 적용하기에도 억울한 상황이었다. 하늘에 맹세코, 엔노시타는 입사한 직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궁금해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카아시 케이지의 직급이 자신보다 정확히 얼마나 높은지.

'아카아시 케이지, 팀장입니다. 잘 부탁해요.'

일견 차갑다 싶을 정도로 차분한 인상이었다. 개인적인 감정이라곤 조금도 없는, 사무적인 반응. 그런 아카아시의 태도는 회식 때도 변하지 않았다. 인사치레로 술을 따라줬지만 마시라는 강요는 없었다. 직접 나서서 떠드는 법은 없었지만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다는 티는 냈다. 여사원들은 화려한 미남상인 모 대리보다 그런 아카아시를 더 좋아하는 듯 했다.

자신과 동갑이라는 말을 듣고나선 열등감보다 부러움이 앞섰다. 좋겠다. 동년배인 사람들이 아직 사원, 기껏해야 주임 명찰을 달고 아등바등하고 있는 걸 보면, 아카아시의 '팀장' 타이틀은 분명 유능하다는 증거일 터였다.

자신을 환영하기 위해 열린 자리였지만 엔노시타는 우울해졌다. 첫 직장에서 별다른 경력도 쌓지 못하고 일방적인 해고 통보를 받은 뒤에, 부모님의 은근한 압박을 견디며 어렵게 붙은 자리라 더했다.

엔노시타는 거기서 생각을 한 박자 멈췄다. 슬슬 나가지 않으면 위험한 시각이다. 알면서도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 번만 더 점검하자. 머리, 괜찮고. 와이셔츠, 깔끔하고. 넥타이, 잘 매졌고. 가방, 빠뜨린 거 없고. 보일러, 가스, 콘센트 전원, 다 껐고. 더는 미적거릴 핑계가 없었다. 엔노시타는 가방끈을 꼭 쥐고 집을 나왔다.

출근길의 지하철은 변함없이 지옥이었다. 손잡이를 차지하고 서는 건 고사하고, 일단 몸을 구겨 넣은 것만으로 만족해야했다. 하필 양옆에 탄 사람이 둘 다 여자라 엔노시타는 이도저도 못했다. 이렇게 빽빽한 곳에서 함부로 손을 움직였다간 치한이라고 오해받기 십상이었다.

역마다 지하철이 멈추고 몸이 쏠릴 때마다 이곳저곳에서 죄송합니다, 라는 작은 속삭임이 이어졌다. 엔노시타도 손잡이를 잡고 선 여성에게 몇 번이나 사과해야 했다. 앉아서 조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부러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역세권 따지면서 방 잡지 말걸. 좀 일찍 일어나야 한대도 이 라인이 시작되는 역 부근으로 고를 걸 그랬다. 그쪽은 집세도 훨씬 싼데. 하필 엔노시타가 타는 역은 도시에서 가장 큰 환승역이었다.

...그러고보니 아카아시는 자가용도 있다. 그 잘 빠진 차, 딱 봐도 고급이라는 감이 오는 외관. 그것도 남자의 로망인 무광 블랙이었다.
운 좋게 아카아시의 차에 타게 되었을 때 엔노시타는 감탄사를 금치 못했다. 처음 상경했을 때도 이렇게 촌스럽게 굴진 않았는데. 일단 승차감부터 달랐다. 역시 비싼 차 비싼 차 하는 이유가 있구나. 엔노시타는 외관만큼이나 깔끔한 내부를 눈으로 훑으며 물었다.

'진짜 좋네요. 무광이면 관리하기 힘들지 않으세요?'
'그렇긴 한데, 아무래도 이쪽이 더 멋있어 보여서...무리 좀 했죠.'

그렇게 말하며 미소 짓는 아카아시의 얼굴은 살짝 붉어져 있었다. 처음보는 표정이었다. 무표정에서 더 안 좋아지는 경우는 자주 봤어도. 이렇게 쑥스러워하는 건 처음인 것 같은데.

귀엽다. 엔노시타는 무심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행여 아카아시가 자기 마음속을 들여다볼세라 재빨리 수정했다. 의외의 면도 있구나. 젊을 때 무리해서라도 동경하던 차를 지르는 사람이야 전 직장에도 있었지만, 아카아시가 그런 타입일 줄은 몰랐다. 이쯤에서 눈치챘어야 했다. 아카아시의 연봉이 그런 차를 굴릴 수 있을 정도로 높다는 걸.

역을 하나씩 통과할 때마다 그동안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영화관 앞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날. 이때만 해도 좋았다. 예매한 영화가 같다는 걸 알게 된 둘은 끝나고 함께 식사를 했고, 조금씩 감상을 나눴다. 사석에서 만나는 아카아시도 잘 웃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아무래도 회사에서 보는 것보단 편했다.

아냐, 그래도 내 잘못은 아니지. 엔노시타는 회사에 가까워질수록 거세게 뛰는 심장을 토닥였다. 취향이 비슷한 것 같으니 다음에도 만나는 게 어떻냐고 약속을 잡은 것도, 동갑이니 밖에선 말을 놓자고 제안한 것도 아카아시였다. 엔노시타는 그저 동의했을 뿐이다. 아카아시에게 책임을 떠넘긴다고, 제 생일 날 저질렀던 정신 나간 짓이 사라지진 않겠지만.

모두가 크리스마스와 적당히 퉁치는 엔노시타의 생일날, 12월 26일. 엔노시타도 다른 이들의 반응에 익숙해져서 적당히 넘어가려고 했지만 아카아시는 아니었나 보다. 그런고로 이번에도 둘은 극장 앞에서 만났다. 아카아시는 한창 상영 중인 로맨스 영화를 추천했다. 감독이 최근에 눈여겨보게 된 사람이라는 이유였다.

로맨스, 로맨스라. 액션, 공포, 스릴러, 판타지, SF, 첩보물에 판타지까지. 장르에 신경 쓰지 않고 보고 싶은 영화를 보던 둘이었지만 그 날은 기분이 좀 묘했다. 아직 크리스마스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번화가에서, 아카아시와 로맨스 영화를 보러 간다니. 그것도 생일 날 말이지.

영화는 그럭저럭 재미있었다. 배우의 연기도 결말도 나쁘지 않았다. 좋게 말하면 안전하고 달리 말하면 전형적인 로맨스 영화. 하지만 아카아시가 이런 걸 좋아하던가? 시나리오가 좀 뒤죽박죽이어도 실험적인 연출을 선호하지 않았던가.

영화가 끝나고 아카아시가 데려간 곳도 평소와 달리 비싼 레스토랑이었다. 아카아시가 애피타이저부터 디저트까지 예약해놓은지라 메뉴판을 보진 못했지만, 엔노시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대도시에서 건물 하나를 통째로 쓰고, 웨이터가 요리를 하나씩 날라올 때마다 일일이 들어간 재료와 원산지, 즐기는 법을 설명해주면서 저렴하기까지 한 식당이 흔할 리는 없으니.

'미안. 물어보지 않고 멋대로 정해서.'

아카아시가 사과했지만 엔노시타는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생일 선물이라 쳐도 과분한 식사였다. 싱싱한 야채에선 풋내가 전혀 나지 않았고, 고기는 넣자마자 입에서 사르르 녹아내렸다. 몇 가지 재료를 섞었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 소스는 물론이요 연달아 나오는 디저트,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치즈 조각까지. 이성을 유지하는 게 어려울 정도로 맛있었다.

둘은 마지막으로 나온 와인을 꽤 오래 음미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와인이 전체 코스를 다 합친 것보다 더 비쌌을 것 같다. 달콤한 와인은 혀에 착착 감겼고 매끄럽게 목을 타고 넘어갔다. 엔노시타는 첫 병을 혼자서 거의 다 비웠다.

'한 병 더 시킬까?'
'괜찮아. 너 안 마실 거잖아.'

운전해야 하니까. 생략된 뒷말을 알아들은 아카아시가 픽 웃었다.

'아쉽게 됐네. 네가 좋아하는 차, 오늘은 안 가지고 왔는데.'
'좋아하긴 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엔노시타는 아카아시의 차를 좋아했다. 아닌 게 아니라, 어떤 차라도 출퇴근길 지하철에 비하면 천국이었을 것이다. 앉아서 가는 것만도 황송한데 공기도 쾌적하지, 좌석도 편하지. 거기다 대신 운전해주는 사람까지 있었다. 회사를 나오는 순간부터 눈치 보지 않고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사람. 아카아시 케이지가.

두 번째 병은 사이좋게 반씩 비웠다. 아카아시가 세 번째를 주문하자 엔노시타는 내심 놀랐다.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니야? 이거 도수 꽤 있는 것 같은데.'

엔노시타가 빈 병 라벨에서 숫자를 찾으며 말하자, 아카아시는 언제 그런 것까지 보고 있었냐며 병을 빼앗아갔다.

'신경 쓰지 마.'

그리고 세 번째 병. 거절하기엔 너무 맛있었다. 평사원 월급에 언제 이런 식사를 해보겠냐 싶기도 했고. 엔노시타는 턱을 괴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거둬지지 않은 크리스마스 조명이 반짝이는 밤거리가 예뻤다.

'이러고 있으니까 조금 묘하다.'
'왜?'
'우리 둘이 데이트하는 것 같잖아.'

술기운에 말해놓고도 민망해서, 엔노시타는 끝을 웃음으로 흐렸다. 그러나 아카아시는 웃지 않았다. 가만히 있다가, 엔노시타가 돌아보자 그제야 얼굴에 미소를 띠며 이렇게 대꾸했을 뿐이다.

'데이트 맞는데.'

천하의 아카아시 팀장님이 이런 농담도 할 줄 아는구나. 회사 사람들이 알면 뒤로 넘어갈 거라 생각하며 엔노시타는 또 웃었다. 아카아시는 조금 토라진 표정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다 똑같은 무표정이라 하겠지만, 엔노시타는 이제 아카아시의 눈빛만 봐도 대강 기분을 읽을 줄 알았다.

'뭐가 그렇게 즐거워.'
'그냥. 내 생일을 너랑 보내는 게.'

여기까지만 회상해도 오그라드는 제 손가락을 참수하고 싶었으나, 엔노시타의 진정한 실수는 다음 대목에 있었다.

엔노시타가 저런 민망한 말을 던진 뒤에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갑자기 목이 타서 와인 병을 잡으려 했다가, 같은 생각이었던 듯한 아카아시의 손에 닿았다. 아카아시는 원래 그러려고 했던 것처럼 자연스레 엔노시타의 손을 감싸 쥐었다. 맨정신이었으면 놀라거나 피했겠지만, 만취한 엔노시타는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 입을 열었다.

'와인 보니까 떠올랐는데, 그거 해보자.'
'그거?'
'러브샷 말이야.'

현실에 타임머신이 있다면, 엔노시타는 그걸 타고 과거로 가서 자신의 뒷목을 쳐 기절시켰을 것이다. 러브샷을 왜 직장 상사랑 해!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뱉은 엔노시타는 기어이 아카아시와 러브샷을 하고, 그러다 연애 이야기까지 나왔다.

'그럼 아카아시는 지금 여자친구 없어?'
'응.'

차라리 여기서 끊었다면 수습의 여지라도 있었을 것을.

'남자친구는?'

...그걸 농담이라고 던져서.

'...아직 없지.'

아카아시가 웃으면서 받아줄 때 그만뒀어야 했는데.

'그럼 나는 어때?'

수습의 여지라도.......

'그래.'
'정말?'
'응.'

그냥 죽고 싶다.

아카아시는 무슨 정신으로 부하직원의 성희롱을 웃으며 듣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정신은 무슨. 엔노시타와 아카아시의 정신은 두 번째 병과 세 번째 병 어드메에서 사이좋게 손잡고 새해 일출을 보러 떠났을 터였다.

새해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거기까지 되짚어낸 엔노시타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 문제의 1월 3일. 엔노시타의 생일로부터 약 일주일이 지난 뒤였다.

왜 12월 26일과 1월 3일이었을까. 애매하게. 크리스마스 다음 날과 새해 다음 다음 날이라니, 안심하게 해놓고 뒤통수를 치는 하느님의 수법일까?

아무튼 그 날 엔노시타는 아카아시의 전화를 받고 술자리에 나갔다. 아카아시의 친한 선배였다던 보쿠토와 쿠로오, 후배인 츠키시마까지 해서 다섯 명이었다. 보쿠토는 첫 대면부터 떠들썩했다.

'그쪽이 엔노시타구나! 반가워!'
'선배, 나이가 어리대도 초면에 말 놓지 마세요. 그리고 사람을 삿대질하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입니다.'
'아카아시 딱딱해!'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말 그대로 동창회에서 고등학교 선배를 만나는 느낌이랄까. 쿠로오 쪽은 좀 더 유들유들하게 악수를 건넸다.

'드디어 만나네요. 안 그래도 최근에 아카아시가 엔노시타 씨 얘기만 해서 궁금하던 차였는데. 소개받기만 기다리고 있었어요.'
'하하......'

새해 정초부터 끌려 나온 게 피곤하다는 얼굴의 츠키시마는 데면데면하게 굴었다. 그래도 다른 사람 말에 일일이 장단을 맞춰주는 걸 보면 마냥 싫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장단이라고 해야하나, 삐딱한 태클에 가까웠지만. 활활 타오르는 보쿠토와 거기에 기름을 붓는 쿠로오의 조합에 시큰둥하게 찬물을 끼얹는 츠키시마를 보고 있자니 재밌기도 했다.

무엇보다, 아카아시가 단 '팀장' 타이틀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려준 사람이 츠키시마였다. 엔노시타는 화장실에서 손을 씻다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몰랐어요? 알고 친해진 줄 알았는데.'
'.......'

츠키시마는 그 뒤에 성격대로 비뚤어진 소리를 몇 마디 덧붙이려던 듯도 했지만, 너무도 놀란 엔노시타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다만 색소가 옅은 눈에 일말의 연민이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

'몰랐어....'

엔노시타는 츠키시마가 나가고 나서야 중얼거렸다.

몰랐어. 정말 몰랐어.... 아카아시가 자신보다 한두 계단 높겠거니 하고 짐작은 했는데, 한두계단 더 올라가면 임원급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애초에 엔노시타의 전 회사에서 팀장이라 함은, 짬밥은 좀 찼는데 아직 승진시켜 주기엔 애매한 사람에게 붙여주는 호칭이었다.

최소한 애 둘 딸린 과장님이 아카아시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쓸 적에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어쩐지 다들 신기해하더라. 어떻게 아카아시 팀장님과 그렇게 친해진 거냐고. 엔노시타는 회사에선 사적인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아카아시의 성격 때문에 그런 줄 알았는데, 돌이켜보니 그 아카아시 '팀장님'과 어떻게 친해졌는지 묻는 거였다.

넋이 나간 엔노시타는 츠키시마를 붙잡고 좀 더 자세히 캐물었다. 츠키시마는 '이 사람 왜 이러지, 정말 꿈에도 몰랐나' 같은 표정을 만면에 띄우면서도 성실히 답해주었다.

'이쪽 관련으로 전문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 엔노시타씨네 회사에서 스카웃해 간 거예요. 국내엔 몇 명 없으니까. 과정 마치자마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모셔갔죠. 면접도 안 봤을 걸요. 아카아시씨 쪽에서 높은 연봉 부르는 회사를 골랐으면 골랐지.'

분명 또박또박 알아 듣기 쉽고 발음도 좋은데, 이상하게 들을수록 머리가 하얘진다. 마치 표백제처럼.
그러니까 아카아시가 받은 '팀장'이라는 호칭은, 회사 입장에선 무척 중요한 핵심 자원인데 갓 들어온 이에게 부장이나 과장 명패를 붙여주긴 '애매해서' 내린 말이었던 것이다.

어째서 팀장이라는 위치는 회사마다 제각기 다른 거야. 하여간 예전 회사는. 입사해서 업무 배울 때도 그랬지만 내 인생에 도움이 되는 게 없어! 집에 돌아온 엔노시타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한탄했다. 그래 봤자 애꿎은 머리카락만 희생당할 뿐, 서랍에서 도라에몽이 튀어나와 우리 애는 많이 썼으니 이제 너도 쓰라며 타임머신을 쥐어주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퇴직하고 싶다...."

과거 회상이 끝난 엔노시타가 망연히 중얼거렸다. 그러자 같은 칸에 있던 모든 사람이 엔노시타를 안쓰러운 표정으로 쳐다봤다. 아뇨, 당신들이 공감하는 그런 종류가 아닙니다. 훨씬 더 심각한 일이에요. 엔노시타는 차마 그 말까지 입 밖으로 내진 못 하고 내렸다. 눈앞에 해외연수 광고가 보였다.

'해외연수라, 다녀오면 좋을까.... 팀장님은 해외연수 가본 적 있으세요?'
'아뇨. 저도 가본 적은 없습니다만.'

그래, 거짓말은 아니었다. 아카아시는 고등학교 수학여행을 제외하고는 해외에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다만 국내에서 손꼽히는 인재로 졸업했을 뿐이다.

문득 술자리에서 쿠로오가 이쪽 방면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며 보쿠토를 비행기 태웠다가, 아카아시가 세 손가락 안엔 못 든다고 추락시켰던 일도 떠올랐다. 쿠로오가 알려준 세 명 중에 아카아시 케이지는 없었다. 그럼 설마하니 다섯 번째가....

"하하...하...."

생각이 자꾸 나쁜 쪽으로만 튄다. 죽고 싶다. 아니, 돈 걱정 없이 사퇴하게 돼서 하와이로 이민 가고 싶다. 해변에서 아무 걱정 없이 누워 코코넛 주스나 마시고 싶다.... 엔노시타는 부질없는 상상을 하며 사무실 문을 열었다. 바로 그곳에.

"안녕하세요."

아카아시 케이지가 있었다. 사무실 한가운데, 에어컨과 히터가 너무 세지도 약하지도 않고, 프린터기를 쓰려고 모여든 사람들에 방해받지도 않는 자리에. 다른 장들을 제치고 저 황금 같은 자리를 하사받은 팀장님의 위치를 제가 왜 몰라뵈었을까요. 죄송합니다. 제 잘못입니다. 일이 꼬이면 사원들이 아카아시 앞에서 앵무새처럼 반복했던 문장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안...녕하세요. 아카아시 팀...장님."

시원찮은 대답에 아카아시가 물음표를 띄웠다. 엔노시타는 안절부절못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책상에 얼굴을 박고 철천지원수의 집에 내리꽂을 핵폭탄 발사 버튼을 누르듯이 키보드를 두드려댔다. 서류를 제출하러 온 엔노시타에게 아카아시가 물었다.

"오늘 평소보다 조금 더 늦은 것 같은데...무슨 일 있습니까?"

아카아시야 가볍게 던진 질문이었겠지만, 듣는 엔노시타의 가슴에는 묵직하게 내리꽂혔다. 아니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엔노시타는 필사적으로 아카아시의 말을 부정했다. 맹세컨대 면접관 앞에서도 이렇게 긴장한 적은 없었다.

"...그런가요"

아카아시는 덤덤하게 대답한 뒤 서류를 검토했다. 그러나 엔노시타는 보았다. 미묘하게 서운함을 표출하는 눈썹의 움직임을. 자연히 엔노시타는 더 안절부절못했고, 아카아시의 머리 위에 뜬 물음표는 점점 더 커져갔다.

"별일 없으면 타고 가시죠."

딱 걸렸다. 퇴근길에 도망치던 엔노시타는 가방끈을 움켜쥐고 뻣뻣하게 굳었다.

"저요...?"
"제 차에 태우는 사람이 당신 외에 또 있습니까."
"어머, 팀장님.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어요."

지나가던 대리가 한 마디 던졌다. 같이 퇴근하던 여사원들이 까르르 웃었다. 보통 차장보다 높은 팀장이 야 타, 라고 하면 뭔 일인가 싶어 웅성대겠지만, 그 대상이 팀장과 친하다고 소문난 엔노시타라면 달랐다. 그런고로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고 각자 제 갈 길을 갔다. 엔노시타는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주지 않는 각박한 현대인들의 인심에 절망했다.

"......."
"......."
"...저기."

아카아시가 먼저 운을 뗐다. 안전벨트를 생명줄처럼 꼭 쥐고 있던 엔노시타가 흠칫 놀랐다. 그날 정신줄도 이렇게 꽉 쥐고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네. 말씀하세요."

엔노시타가 존댓말로 답했다. 아카아시의 직급을 알게 되니 편하게 말을 놓을 수가 있어야지. 잘못 고른 선택지라는 걸 알려주듯 차 안의 분위기가 더 가라앉았다. 도망치면 안 돼. 도망치면 안 돼. 팀장님이 뭐라고 하시든 잠자코 듣고 나서, 그간 끼친 무례를 정중히 사과하자. 엔노시타는 단단히 마음을 다잡았다.

"혹시 어제,"

아 잠깐. 어제는 안 돼, 어제는. 어제 뭐가 있었든 다 잊어버리고 새로 시작합시다. 희망찬 미래로 나아가라. 그게 우리 회사 사훈 아닌가요. 엔노시타는 속으로 열심히 열변을 토했다. 물론 겉으로는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기분 상할만한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네?"
"보쿠토 선배는 원래 쉽게 들뜨는 사람이라. 쿠로오 씨도 짓궂은 데가 있어서 둘이 어울리면 감당하긴 힘들지만 나쁜 사람들은 아닙니다. 츠키시마 군도 표현이 부드럽지 않을 뿐이지,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고."
"...?"

엔노시타는 아카아시가 하루종일 띄우고 있던 물음표를 이어받았다. 따지고 보면 변명해야 할 사람은 이쪽인데, 되려 아카아시가 엔노시타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게 아닌가.

"둘 다 제 멘토 같은 사람들이어서 소개해주고 싶었던 건데, 만약 제가 너무 앞서나갔던 거라면 사과하겠습니다."

연애를 처음 해봐서 들떴던 걸지도. 아카아시가 마지막에 덧붙인 말은 희미해서 잘 들리지 않았다.

"네?"

아카아시의 정중하고 깔끔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엔노시타는 혼란에 빠졌다. 연애요? 설마 팀장님, 술주정뱅이의 말도 안 되는 추파를 진심으로 받아들이셨던 거예요? 진심으로? 우리 그 날부터 시작해서 지금 9일입니까?

"아니...그...그런 건 아니었는데...."

엔노시타가 어물거렸다. 진짜 사귀자고 한 말이 아니었는데요, 엔노시타가 전하려던 뜻은 이랬지만, 아카아시의 귀에는 좀 다르게 들린 모양이었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혹시 내가 실수했나 싶어서 걱정했어."

다행이긴 뭐가 다행이야! 그러나 침울했다가 순식간에 밝아지는 얼굴을 보니 차마 진실을 고할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아카아시의 무광 블랙 차는 엔노시타의 집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럼 내일 봐."

남들이 들으면 변함없이 냉막한 어조였지만, 엔노시타의 귀에는 다정하게 들리는 인사였다. 끝이 칼같이 잘리지 않는 데서 아쉬워하는 기색마저 읽은 엔노시타는 내심 경악했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분석할 수 있는 거지. 회의 때 보고할 통계 자료를 이 정도로 분석해낸다면 팀장까진 아니어도 대리 타이틀은 달았겠다. 그러는 사이 차 문이 잠겼다. 어라. 당황한 엔노시타를 두고 아카아시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솔직히...그날 네가 먼저 고백해준 게 아직도 꿈이 아닐까 생각해."

그렇죠. 전 아직까지 이 모든 게 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엔노시타가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그 반응이 아카아시에게 무엇을 불러왔는지, 갑자기 얼굴이 가까워졌다.

"아카아시. 잠ㄲ,"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엔노시타의 입술에. 아카아시의 입술이. 내 입술에, 팀장님의 입술이! 일시적인 공황장애에 빠진 엔노시타를 보고 아카아시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아직 이른가.

"그...그럼....그럼...내일...."
"응. 잘 자."
"아카아시...도...좋은...밤...."

엔노시타가 내리고 나서도 아카아시는 출발하지 않았다. 너 들어가는 거 보고 갈게. 엔노시타는 이 승차감 죽이는 차가 자신을 병원으로 당장 실어날라 주길 바랐다. 물론 자동차에 숨겨져 있던 인공지능이 엔노시타의 텔레파시를 수신하고 각성하는 일은 없었다. 엔노시타는 등 뒤에 꽂히는 아카아시의 시선을 받으며 집에 들어왔다.

"다녀왔습니다...."

가방끈을 필사적으로 움켜잡고 있던 손가락이 저절로 풀렸다. 엔노시타 치카라, 첫 회사에서 잘리고, 두 번째 회사에 들어온 지 1년도 안 돼서 사내 연애를 시작하다니. 그것도 아카아시 '팀장님'하고!

"왜...대체 왜...?"

팀장님, 팀장님은 왜 팀장이에요? 죄 없는 아카아시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 하다못해 그냥 대리 정도만 돼도 편하잖아요! 저 그렇게까지 유능한 애인 필요 없는데!

정말이지 자살하고 싶다. 하와이의 해변에서 코코넛 주스를 마시며 몇십 년에 걸쳐 느긋하게 죽고 싶다! 엔노시타는 현관에 주저앉아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하 예전 블로그에 올리면서 덧붙였던 글.

안녕하세요, 환청통조림입니다. 통조림에서 환청이 들리는 건 기분 탓입니다.
본래 써야 할 원고 전에 가벼운 스트레칭 삼아서 저장해뒀던 썰에 손대봤습니다만, 정신 차리니 글 분량은 만 자가 넘었고 이 문장을 쓰는 지금은 오후 세시 이십 분이네요. 분명 아침 먹고 나서 디저트로 코코아를 마시며 메모장을 켰는데 이게 무슨 일이죠. 약 이백 자 분량 되는 썰을 간단하게 풀어쓰려던 것뿐인데. 넥타이 그려진 표지만 있으면 당장 얇은 책으로 내도 될 분량이...? 아카엔노 대체 나에게 무슨 짓을????

참고로 회사 직급 순서는 보통 사장-부사장-전무-상무-이사(여기까지 임원진)/부장-차장-과장-대리-주임-사원이라고 합니다. 부장이랑 과장 사이 어드메에 실장이 있기도 하고요. 임원진 라인에 본부장이나 이사장이 추가되기도 하고.  여기에 회사마다 제각각인 다른 팀장.... 오호라, 그렇다면 저 높은 곳에 끼워 넣어보면 어떨까? 하는 음흉한 생각에 엔노시타 고통받으라고 아카아시 직급을 높여봤습니다. 엔노시타가 생각한 팀장의 위치가 대리와 사원 사이라면, 실질적인 아카아시 팀장님의 위치는 이하생략.  


반대로 엔노시타가 아카아시보다 직급이 더 높으면 어떨까도 상상해봤는데, 엔노시타는 차근차근 올라갈 것 같아요. 아카아시가 입사할 시점에선 온화한 성품의 연상 상사. 아카아시에게 연심을 품고 있지만 상사라는 위치상 안 좋은 쪽으로 압박이 될까 봐 티 내지 않으려는 엔노시타와, 엔노시타와 동등한, 최소한 비슷한 위치에 서기 위해 계획적으로 승진을 노려서 결국 원하는 직위를 따내고 프러포즈하는 아카아시는 어떨까 합니다.

전 어딘가 섬뜩한 구석이 있는 판타지를 좋아하지만, 이런 알콩달콩한 현대 로코풍도 좋습니다. 엔노시타 입장에선 이게 로맨스인지 로맨스릴러인지 모르겠다는 점까지 포함해서 좋아합니다.

긴 글에 긴 후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읽어주신 분들 좋은 하루 되시길!

하이큐와 앙스타에 콩팥 한 쪽씩 저당잡힌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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