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부탁드립니다."


 벌써 4년이 넘었다. 새로운 일터, 함께 일하게 된 사람들과의 식사 자리였다. 서로 통성명을 하는데, 동료 중 한 사람의 이름이 어딘가 익숙했다. ‘돌림자’라고 했다. 동성동본끼리 항렬이 같은지, 높은지 낮은지 알 수 있도록 공유하는 이름자 말이다. 그래, 내 앞에 앉은 이 낯선 동료의 이름은 아마도 우리가 같은 성씨라는 걸 알려주는 것 같았다.


 "**씨, 실례지만 혹시 아버님 성함 가운데 글자가 * 아닌가요?" 라는 내 질문에 그는 용한 점쟁이에게 속내를 들킨 것 마냥 엄청나게 놀라 안 그래도 큰 두 눈을 더 크게 뜨고 ‘도대체 어떻게 알았냐’며 물었다. 반응을 보니 “아, 사실 제가 신통력이 있거든요”라고 말하면 정말 믿어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우리는 동성동본이다’ 말했다. 덕분에 그분과 친해지는 일은 매우 쉬웠다. 같은 성씨는 흔해도, 본까지 같은 경우는 생각보다 드문 탓일 거다.


 "**씨, @@시 출신이에요?"


 "네, 그렇습니다. 고등학교까지 거기서 나왔..."


 "와, 그래요? 아니, 그러면 고등학교는 어디?"


 "저 ##고 나왔습니다."


 "어? 나 거기 **회 졸업인데? 우리 동문이네?"


 우리나라는 혈연뿐 아니라 지연이나 학연을 통해 서로에게 접근하고, 유대감을 확인하는 일이 유독 흔하다. 개인이나 사회에서 독립심을 강조해 온 미국과 같은 나라와는 확연히 다르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특정한 형태로 상호주의적 가치관을 학습하고, 또 입으로 고백해왔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


- 국민교육헌장 중 -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 국기에 대한 맹세 -


 현재는 사실상 폐기된 국민교육헌장과 지금도 사용되는 국기에 대한 맹세다. 내용을 잘 읽어보면 나보다 ‘우리’를 강조하며, 나의 행복보다는 ‘국가의 영광’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관이 잘 녹아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만큼 개인과 공동체 중 유독 공동체에 대한 가치를 강조하고, 또 그만큼 일체화가 잘 되는 나라가 또 없다. 그때 그 시간 속에 함께하지 않은 사람들도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거리를 수놓았던 붉은 물결과 함성에 대한 전설 같은 이야기를 알고 있다. 


 '국민 00'이라는 키워드도 마찬가지다. 전 국민의 인기를 끄는 하나의 브랜드 혹은 트랜드가 쉽게 모두의 표준이 되고, 유행이 된다. 국위선양을 통해 민족정신을 고취했다는 이유로 우리 모두의 인기스타가 된 '국민 여동생' '국민 가수' '국민 배우' 등의 수식어는 한국인 특유의 일체성을 잘 보여준다. 


 한 번쯤 질문 해보고 싶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 민족은 이렇게 집단에 비중을 두는 것일까? 무엇이 한국인에게 공동체적 가치를 이토록 강렬하게 심어주었을까?' 필자는 이에 대해 우리가 주고받는 인사로부터 생각해봤다. 


 우리 민족이 공유하는 대표적 인사말이 있다면,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다. 몇 가지 의미가 더 있겠지만, 여기서 ‘안녕’이란 ‘편안함’을 뜻하는 안과 영으로, 상대방이 편안한지, 무탈한지를 묻는 인사다.


 왜 이런 인사가 널리 쓰이게 되었을까를 생각해보면, 역사적으로 외세의 압력과 침탈이 잦았던 일들이 한몫 했다는 사실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얼굴을 보지 못한 밤새 무슨 일은 없었는지, 혹시 누가 해를 당하지 않았는지 서로를 염려하고 챙기는 마음이 ‘안녕하세요’라는 인사 속에 녹아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런 배경은 한민족으로 하여금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공동체 위주의 가치관을 우선시하게 만들었다. 나보다 집단을 중요시하고, 나의 행복보다는 우리의 행복을 추구하는 태도는 개인의 주체적 의식보다 상호의존과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는 사회를 만들었다. 


 물론, 상호주의가 ‘아예’ 전무한 곳은 없다. 다만 개인의 가치와 공동체의 가치 사이에서 둘을 동등한 가치로 여길 것인지, 아니면 개인이나 공동체 둘 중 하나의 가치에 더욱 비중을 실어 줄 것인지에 대한 차이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하나의 사실만큼은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 ‘나’가 강조될 때 ‘너’가 소외되듯, ‘우리’와 ‘공동체’가 강조되는 만큼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소속감을 상실한 채 겉도는 누군가는 차별, 심지어는 혐오의 대상까지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1933년 1월에 집권한 나치는 독일인을 ‘우월한 인종’으로 규정하고, 독일의 ‘인종 사회’를 위협하는 모든 외부인들을 ‘열등한 인종’으로 규정하고 그들을 적극적으로 탄압했다. 소위 '홀로코스트'로 기억되는 이 대량 학살을 통해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로마니’라고 불리는 집시, 장애자들, 그리고 폴란드와 러시아인들을 포함한 다른 슬라브인들까지 희생되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나치 독일은 정치적, 사상적, 및 행동적 근거를 통해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 여호와의 증인과 성 소수자들까지 탄압했다. ‘우리’와 같지 않다는 사실은 다름이 아니라 ‘틀림’이 되어버리고, 차별과 혐오의 흉터가 되어 지금까지 전 지구적으로 회자한다. 이런 크고 잘 알려진 사례가 아니더라도 다르다는 사실은 종종 사회 안에서 ‘갈등’ 문제로 불거지곤 했다. 


 어느 숲에 칡과 등나무가 있었다. 칡은 왼쪽으로만 기어오르고, 등나무는 오른쪽을 고집하며 감아 올라간다. 고목을 하나 두고 서로 비슷한 높이로 자라나면서 둘은 고목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왼쪽과 오른쪽으로 올라가며 서로를 옥죄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칡은 갑자기 온몸을 아주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등나무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둘은 결박되어 수분과 영양을 공급할 줄기가 말라갔다. 어느 날 부는 바람에 고목이 쿵 하고 쓰러졌을 때, 양쪽에서 감아 올라갔던 두 줄기도 끊어져 땅바닥에 흩어졌다. 이후 고목이 쓰러진 자리에는 온갖 풀들이 자라났지만, 죽은 칡과 등나무의 뿌리에서는 아무 것도 돋아나지 않았다. 


- 칡과 등나무 이야기 -


 불교 경전 중 출요경에 나오는 칡과 등나무에 대한 비유를 각색한 이야기다. 원문은 이렇다.  '중생(衆生)가운데 애욕(愛慾)의 그물에 얽매이는 자는 반드시 정도(正道)를 해치리니 궁극(窮極)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애욕의 그물이 엎어지는 것을 말하니 칡과 등나무가 나무를 얽어매어 끝에까지 이르러 두르면 나무가 마르는 것과 같다.'


 ‘갈등’이라는 말은 여기서 나오는 칡과 등나무를 나타내는 한자어다. 칡과 등나무의 다른 특성이 결국 서로를 말려 죽인다는 점은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충돌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닮았다. 그런데, 뜬금없이 또 필자의 발칙함이 또 고개를 든다. '정말 그런 걸까? 다름은 늘 문제를 일으키는, 나쁜 것일까?'


 너트와 볼트의 나사산과 나사골을 모르는 사람이더라도, 둘의 서로 다른 모양이 결합하여 무언가를 지탱해주거나, 조립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도구라는 사실을 잘 안다. 또 퍼즐은 어떤가? 물론, 퍼즐을 모두 맞추면 하나의 큰 그림이 나오지만, 그 큰 그림은 결국 서로 다른 모양의 조각들이 서로 들어맞아 하나를 이루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보다 ‘인간적’으로 생각해볼까? 스포츠로 가보자. 야구나 축구. 혹은 농구도, 하나의 팀은 서로 다른 포지션의 선수들이 있다. 내가 수비수라고 해서 공격수인 저 사람과 반목할 수 없다. 기능이 다르다고 해서 ‘저 사람은 나의 적이다’라고 간주해서는 퍽 곤란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혹시 ‘갈등’ 역시 다른 모습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칡이 왼쪽으로, 등나무가 오른쪽으로 감아 올라간다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다른 특성을 가진 둘이 똘똘 뭉쳐 하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혹시 이렇게만 생각한다면, 식물학을 공부하는 누군가는 필자에게 ‘무식한 소리 그만하라’고 소리를 지르실까?


 혹 누군가가 정말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제가 이쪽에는 문외한이라서...' 말하며 고개를 숙일 준비는 되어있다. 다만, 나를 혼내실 당신도 이 사실 하나만은 기억해주시길 부탁드린다. '다름은 결코 틀림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내가 왼쪽으로 감아 올라가는데, 굳이 오른쪽으로 올라가는 다른 이에게 경쟁심을 느낄 필요가 있을까? 왼쪽으로 감고, 오른쪽으로 감아 더 튼튼히 하나 된다면, 그것만큼 든든한 게 또 없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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