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데이트

 

 

 

거울 앞에 선 서영은 몸을 오른쪽으로 비틀었다가, 다시 반대로 돌려봤다. 고개를 비스듬히 해 보기도 했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자세를 달리 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뭘 해도 어색하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서영은 결국 입고 있던 머스터드 색 티셔츠를 벗어 뒤로 던졌다. 티셔츠는 서영의 뒤쪽에 이미 쌓일 만큼 쌓인 옷더미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첫 데이트다. 그 이전에도 데이트라고 부를만한 일들이 적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지금 서영의 심정으로 진정한 데이트는 이게 첫 번째였다. 당연하지만, 잘 보이고 싶었다. 늘 입고 다니던 슈트에서 벗어나 자연스럽고 편한 옷을 입고 예뻐 보이고 싶었다. 직접 쇼핑할 시간까지는 없어서 헬퍼를 통해 서영에게 어울릴 만한 옷을 여러 벌 가져오게 했다. 그 중에는 살면서 한 번도 입어본 적 없는 청바지도 있었고, 총천연색의 팬츠나 상의도 여러 벌 있었다. 그러나 뭘 걸치든 마찬가지였다. 도무지 어떤 것도 어울리지 않았다.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거울 속에 속옷만 걸친 반라의 몸이 있다. 그 몸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픽, 어이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옷을 걸친 것보다 안 걸친 지금 상태가 오히려 자연스럽게 보였다. 하긴, 진하를 만날 때면 옷을 입고 있는 시간보다 벗고 있는 시간이 더 많다. 그게 어색하지 않을 만큼 우리는 만났고, 몸을 섞었다. 그러나 이런 캐주얼 차림은 못내 어색할 정도로 우리는 밖에서 평범하게 만난 일이 없었다.

 

진하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서영은 평범한 만남 같은 걸 생각할 겨를이 조금도 없었다. 그저 만나기만 하면 게걸스레 진하와 몸을 섞고 그녀를 느끼기에 바빴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 없이 둘만 마주하는 시간에 대한 갈급이 두 사람을 집 밖으로 나서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평범한 데이트가 하고 싶어졌을까. 거기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지만, 시원한 답을 찾지 못 했다.

 

거울을 다시 들여다봤다. 들뜸과 불안이 뒤섞인 얼굴이 가관이다. 단언컨대 이런 표정을 끌어낼 수 있는 건 진하 뿐이었다. 서영은 일부러 입꼬리를 양쪽으로 늘여 웃어봤다. 세상에서 자신을 작아지게 만드는 유일한 사람은 한없이 관대했지만, 그렇다고 작아져 비루한 모습을 대놓고 드러내기는 싫었다.

 

서영은 제 뺨을 가볍게 탁탁 치고 시계를 봤다. 약속한 시각이 30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뒤에 쌓인 옷 중에 그나마 괜찮다고 생각했던 크림색 브이넥 니트와 짙은 올리브그린색 치노 팬츠를 골랐고, 그 위에 러스트브라운색의 로브 코트를 걸쳤다. 괜찮다고 생각한 이유는 그게 줄곧 입었던 칙칙한 색이 아니라 밝은색이라서고, 그럼에도 ‘평범’에 가장 가까워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른 돌아섰다. 더 들여다본다고 해서 이상했던 게 예뻐질 리도 없고.

 

쌓아뒀던 옷을 옷장에 쑤셔 넣듯 넣어 정리하고 차 키를 집어 들었다.

 

 

*

 

 

서영은 유명 프랜차이즈 카페 앞에 서서 긴 숨을 내쉬었다. 가슴이 콩콩 가볍게 뜀박질했다. 빠른 심박을 따라 빈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심호흡도 몇 번이나 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긴장하는 걸까. 클럽에서 진하와 첫 플레이를 하게 되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후우- 숨을 길게 내쉬며 거리의 좌우를 살폈다.

 

어디로 시선을 두어도 사람이 많았다. 많은 사람이 서영의 앞을 끊임없이 지나쳐 갔다. 마치 강을 따라 흐르는 물처럼 사람들이 인도를 따라 흘러가고 있었다. 서로 부딪히는 일 없고, 서로 밀어내는 일 없이 각자의 걸음대로 걸으면서.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거리에 한가운데에 서 있으려니 어쩐지 자신만 이질적으로 붕 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걸 사람들도 눈치챈 것처럼 흘끗거리는 시선이 유난히 많았다. 아무래도 오늘 옷을 잘못 고른 게 틀림없었다.

 

오늘 대강의 코스를 짜놓긴 했지만 잘 해낼 수 있을까. 괜히 고생만 시키는 건 아닐까. 한적한 레스토랑의 프라이빗룸에서 식사하고, 커피를 마시고, 요즘 뜨고 있다는 신진 작가의 갤러리에 들렀다가 조용히 드라이브나 하는 게 훨씬 나은 게 아닐까. 어쩌자고 이런 인파 속에서 걷자고 했을까. 분명 계획할 때만 하더라도 꽤 괜찮아 보였는데, 지금 보니 너무 터무니없는 거 같기도 했다. 입술이 바짝 마르는 듯해서 입술을 말아 물고 혀로 훑는데, 그때 거리 저편의 인파 속에서 진하의 얼굴이 보였다.

 

곧 눈이 마주쳤고, 서영이 반사적으로 손을 번쩍 들어 보였다. 진하가 활짝 웃으며 똑같이 손을 들었다. 부서지는 햇살이 실어오는 것처럼, 진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반짝이며 서영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

 

 

진하는 주차하고 주차장을 빠져나오는 길에 서영의 차를 봤다. 벌써 와 있구나. 서영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자 자연스레 입꼬리가 올라갔다.

 

처음에는 서영이 하고 싶다는 평범한 데이트라는 게 대체 어떤 건지 감이 오지 않았다. 다행인 건 계획도 서영이 책임지겠다고 했다는 거다. 그러니 진하는 그냥 따라오면 된다고. 진하는 알았다고 했다. 이번 기회에 서영이 원하는 걸 들여다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서영은 만날 장소와 시간을 전해왔다. 평소처럼 어디 레스토랑이나, 호텔 따위가 아닌 번화가의 거리 위였다. 누구나 아는 장소 앞에서 보자, 라는 약속을 하고 보니 확실히 서영이 원하는 평범한 게 어떤 건지 알 것도 같았다. 로맨스 영화나 소설에서 나올 법한 소소하고 간질간질한 데이트가 떠올랐다.

 

그런데 썩 어울리는 그림은 아니지 않나. 미래 그룹 총수 후계자가 반려와 데이트한다고 번화가를 거닐고 있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서영의 얼굴을 아는 사람들도 오늘의 서영은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번잡한 번화가와 서영은 서로 어울리지 않았다.

 

거리로 들어서자마자 진하는 카페 앞에 우뚝 서 있는 서영을 알아봤다. 그리고 단숨에 방금 했던 생각을 철회했다. 사람들은 그럼에도 서영을 알아볼 게 틀림없었다. 존재감이 그랬다. 영락없는 우성 알파는 햇빛도 제 옆에 붙들어두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주변이 환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대부분이 서영을 흘끗거리며 지나갔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덤덤한 표정을 한 서영은 느긋하게 거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쳤고, 서영의 입가가 길게 늘어지며 눈이 반달처럼 둥글게 휘었다. 서영이 손을 번쩍 든다. 그렇게 높이 들지 않아도 너 거기 있는 거 알거든. 진하의 얼굴에도 어찌할 수 없는 웃음이 개화하듯 피어올랐다. 똑같이 손을 들어주자 서영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언니. 헤매진 않았어요?”

“아니. 너야말로 오래 기다렸어?”

 

두 사람의 거리는 순식간에 구두 코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서영이 고개를 저으며 진하의 뺨에 손을 뻗어왔다.

 

“춥진 않아요? 뺨이 좀 빨간데.”

 

고개를 젓는 동안 코끝을 스치는 바람이 서영의 향을 실어왔다. 진하는 서영의 손목을 잡고 거기에 코를 묻었다. 흐읍- 숨을 크게 들이켜니 연한 서영의 향이 폐 깊은 곳까지 닿았다.

 

“언니?”

 

진하는 숨을 몇 번이나 들이켠 후, 서영의 팔목을 놓아줬다. 위를 보자 서영이 난처한 표정으로 진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영아, 너 페로몬 흘렸어?”

 

진하의 말에 서영이 손바닥으로 제 눈을 가리고 고개를 돌린다. 그러다가 한숨을 얕게 내쉬며 애매하게 웃었다.

 

“언니, 꼬시지 말아요. 오늘은, 그렇게 쉽게 안 될 테니까.”

“지금 꼬시고 있는 건 신서영 같은데요.”

 

서영의 흔들리는 눈동자에 새빨간 정욕이 스몄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니, 아니에요. 저 페로몬 안 흘렸어요. 오늘은 정말 꼭 데이트할 거라고요. 우선, 좀 걸을까요?”

 

결의에 찬 서영의 목소리에 진하는 낮은음으로 흐흐 웃었다.

 

“그래, 그럼 한 발짝만 뒤로 물러서 봐.”

“뒤로요? 이렇게요?”

 

진하의 말대로 뒤로 물러난 서영의 앞에, 진하는 손바닥을 위로 놓고 손을 내밀었다.

 

“손.”

“손이요?”

“응. 손.”

 

서영이 순하게 제 손을 진하의 손바닥 위에 살포시 포갰다. 진하는 히죽 웃으며 그 손을 꽉 잡았다. 곧 손가락이 서로 얽혀 한 덩어리가 됐다.

 

“데이트니까.”

 

진하가 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자 서영의 귓불이 빨갛게 변했다.

 

 

*

 

 

손을 잡고 번화한 거리를 걸었다. 골목도 구석구석 들어갔다. 평소에는 보지도, 알지도 못했던 많은 상점이 지나갔다. 아기자기하고 특이한 상점이 많았다. 초반에 눈을 크게 뜨고 두리번거리던 건 서영이었지만, 걸어 다닐수록 신난 건 진하였다.

 

‘와, 작은 서점이네! 서점 진짜 오랜만이다. 들어가 보자.’

‘꽃 사줄까?’

‘여기 이 장갑, 너무 귀엽다. 목도리랑 세트인가 본데?’

‘우와, 여기 아기 옷 있어. 신발 봐. 어떻게 해. 너무 귀여워.’

‘이거 봐! 스너프킨이야. 나 스너프킨 너무 좋아해. 이거 사줘.’

 

그렇게 두 사람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 시간여를 돌아다녔다. 둘이 거리를 걷는 순간에는 어김없이 손을 잡았고, 손을 잡고 있지 않은 반대쪽 손은 갈수록 묵직해졌다. 서영의 손에는 바이올렛 소국 한 다발과 여행 잡지 두 권이, 진하의 손에는 귀여운 벙어리장갑 두 켤레와 깜찍한 아기 신발 하나, 그리고 제법 커다란 크기의 스너프킨 인형이 들려 있었다.


“언니, 무겁지 않아요? 제가 다 들게요.”

“됐거든. 꽃과 책을 든 신서영이 너무 근사해서 망치기 싫어.”

“그런 게 어딨어요.”

 

서영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지만, 그건 순도 백 퍼센트인 진하의 진심이었다. 화려하지 않은 소국이 오늘 서영의 차림에 너무 근사하게 어울렸다. 어디 박제해뒀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근데 서영아, 배고프지 않아?”

“배고파요. 안 그래도 근처에 제가 잘 아는 한식집 있는데, 한식 어때요? 거기 조용하고, 음식이 정말 정갈하게 나오거든요. 아마 언니 마음에 들 거예요. 지금 전화 넣을까요?”

 

서영이 갑자기 바빠진 듯 손을 놓고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나 서영이 화면을 채 열기도 전에 진하가 핸드폰을 빼앗듯이 낚아채 서영의 코트 주머니에 도로 넣었다.

 

“언니?”

“그런 거 말고. 오늘은 평범하게 남들처럼 데이트하자며.”

“음, 한식이 마음에 안 들어요? 이 주변에 다른 레스토랑은 괜찮은 게 없어서 차로 이동해야 하는데, 저는 그래도 좋아요. 제 차로 가고 언니 차는 나중에 가져오라고 하면 되잖아요.”

 

서영이 말을 잇는데, 쌀쌀한 초겨울 바람이 진하의 긴 머리카락을 흩뜨렸다. 서영이 말을 마친 후 은은한 미소를 매달고 진하의 얼굴에 엉겨 붙은 머리카락을 손끝에 걸어 귀 뒤로 살짝 넘겼다. 서영의 손길은 부드러우면서도 따뜻하고, 진하를 내려다보는 얼굴에는 오늘따라 감정이 더 진하게 느껴졌다.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사람의 얼굴이었다.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지금 서영의 눈에도 진하의 얼굴이 그렇게 보일까.

 

데이트를 원한다고 했던 서영이 기특해 죽겠다. 이 시간이 이렇게 좋을 줄 누가 알았겠어.

 

“오늘 재밌어?”

“네. 언니가 좋아하는 것들도 잔뜩 알아서 기분 좋아요. 소국을 좋아하는 것도, 스너프킨 좋아하는 것도 몰랐거든요.”

“힘들진 않고? 발 아프거나 그런 건 없어?”

 

진하가 서영의 발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빈티지한 가죽 로퍼가 그리 불편해 보이진 않았다. 서영도 고개를 저었다.

 

“저는 괜찮아요. 언니는요. 혹시 발 안 아파요?”

“나도 괜찮아. 그럼 점심도 내가 좋아하는 거 먹어도 돼?”

“그럼요.”

 

서영의 당연한 진심이 얼마나 믿음직스러운지.

진하는 히죽 웃었다.

 

“그럼 떡볶이 먹으러 가자.”

 

그럴 줄 알았다. 아무리 뭐든, 이라지만 이 메뉴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 같더라. 서영은 왕방울만큼 커진 눈을 하고 되물었다.

 

“떡볶이요?”

“응. 떡볶이 싫어?”

“어, 아뇨, 저기, 언니가 먹고 싶으면 가요. 저는 괜찮아요. 근데 어디로……”

“아까 저 골목 노점에 사람 많더라. 맛있나 봐. 거기 가자.”

 

괜찮다고 말은 하지만 그 말이 평소처럼 심이 단단하지 못해 맥이 없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 듯 허둥대는 모습을 보다가 진하는 결국 꾹 눌러 참던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먹어본 적 없는 모양이었다. 아니, 떡볶이는 먹어봤겠지만, 노점에서 먹은 적이 없겠지.

 

“근데 언니, 저, 그것보다 맛있는 거 먹어도 되는데……”

“그런 건 오늘 아니라도 언제든 먹을 수 있잖아.”

 

하긴, 신효주가 신서영을 그렇게 돌아다니게 놔뒀을 리가 없나. 진하 자신도 로열패밀리이긴 하지만 진하는 집안에 얽매이지 않고 제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살았다. 물론 진하 역시 노점에서 떡볶이를 먹었던 건 대학 다닐 때가 마지막이긴 했지만. 그래서 아까 노점을 봤을 때 저도 모르게 웃었다. 오랜만이라 반가웠고, 떠올리자 입에는 침이 고였다.

 

“……오늘 같은 데이트도, 언제든 할 수 있어요. 앞으로 자주 해요.”

“그건 생각 좀 해 보고.”

 

이 시간은 너무 좋지만 너를 힐끗거리는 시선이 너무 많아. 그건 좀 별로야.

이런 뒷말은 삼켰다. 너무 쪼잔해 보이니까.

 

“일단 가자.”

 

진하가 손을 내밀며 말하자, 서영이 순순히 손을 잡고 발을 뗐다.

 

 

*

 

 

서영은 당황하던 거에 비하면 떡볶이를 잘 먹었다. 앞에 놓인 떡볶이를 집을 때만 해도 손에 머뭇거림이 묻어있었지만 하나를 먹은 후부터는 달라졌다. 평소처럼 단정하게, 그리고 꼭꼭 씹어 야무지게 먹고 있었다. 순대와 튀김도 시켰는데, 순대보다는 튀김을 더 잘 먹었다. 진하가 떡볶이 국물에 튀김을 찍어 먹는 걸 보더니 서영도 따라 했다. 튀김을 푹 찍어 커다란 입으로 크게 한 입 베어 무는데, 서영이 먹으니까 포장마차에 있어도 CF 장면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보는데 얼마 먹지도 않은 배가 불러왔다.

 

한참 만에야 진하의 시선을 느낀 듯 서영이 돌아본다.

 

“맛있어?”

 

진하의 물음에 서영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다행이다. 이모, 여기 오징어 튀김 2천원 어치 더 주세요.”

 

진하의 주문에 이모가 오징어 튀김 네 개를 접시에 얹어 준다.

 

“어, 2천원 어치는 3개 아니에요?”

“손님이 너무 맛있게 먹어줘서 뒤로 줄이 자꾸 길어지잖어. 둘 다 참 곱게도 생겼어. 이쪽은 낯이 익은 것도 같고. 뭐 더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셔. 응?”

 

그 말에 진하가 뒤를 돌아봤더니 정말 그랬다. 아까는 보기 좋게 북적이던 노점이 이제는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서영도 그 줄을 흘끔 봤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다. 다만 진하의 앞으로 떡볶이 하나를 집어 내밀었을 뿐이다.

 

“먹으라고?”

 

차분히 고개를 끄덕이기에, 진하는 씩 웃으며 떡볶이를 받아먹었다. 가로로 길게 늘어져 있던 떡볶이 덕분에 입가에 소스가 묻었다. 일단은 다 먹고 닦을까, 생각하고 있는 사이 서영의 손이 불쑥 들어오더니 입가에 묻은 소스를 엄지로 쓱 닦아낸다. 그때까진 진하도 그저 웃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서영이 아무렇지 않게 소스가 묻은 엄지를 제 입으로 가져가 쪽쪽 빨아먹는 게 아닌가. 정말이지, 포장마차와 어울리지 않게 섹시한 표정으로.

 

그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신서영의 알몸도 수없이 봤는데 고작 손가락 좀 빤 거로.

 

진하만 그렇게 느낀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뒤에서 헉- 하고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는데, 착각 같지는 않았다. 하, 신서영 진짜 지나가는 사람들을 다 홀리려고 작정했나.

 

“언니?”

 

서영이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진하는 뒤늦게 소리를 빽 내질렀다.

 

“아니, 그걸 왜 빨아먹어!”

 

진하가 얼른 휴지를 가져와 서영의 손을 잡고 엄지를 열심히 닦아내는데, 서영은 비죽 웃을 뿐이다. 그리고는 한다는 말이 이거다.

 

“이 정도면 다들 알겠죠. 언니가 내 사람이라는 거.”

“허. 신서영.”

“얼른 먹어요. 그리고 일어나죠. 사람들이 다 언니만 봐요.”

 

유난히 열심히 먹는가 싶더니 진짜 이유는 그거였던 모양이다. 날 보는 게 아니라 널 보는 거야,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냥, 말았다. 말한다고 곱게 그렇습니까, 하진 않을 거 같아서.

 

결국 진하 역시 먹는 속도를 올렸다. 사진 찍는 소리가 노골적으로 들리기 시작했고, 그소리를 듣자 내일 일간지의 헤드라인이 절로 머리에 떠올랐다. ‘미래그룹 후계자 신서영 이사의 노점 나들이, 서민 코스프레’ 이런 멋 없는 제목들이. 물론 그 전에 서영이 그 사진을 처리할 가능성이 크지만, 하여간 다른 사람들이 서영의 사진을 가지고 있는 건 영 마뜩잖은 일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순식간에 접시를 비우고 일어났다. 그리고 ‘진짠가봐.’ ‘사진보다 실물이 나은데?’ 같은 소리를 뒤로하고 도망치듯 그곳을 벗어났다.

 

조금 한적한 골목에 이르러서야 둘은 멈췄다. 뒷골목인 듯 인적은 없고, 쿰쿰한 먼지 냄새가 떠도는 곳이었다. 서영이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진하의 손을 잡고 골목을 벗어나려했다. 그러나 그런 서영을 진하가 저지했다.

 

서영이 의아함을 담은 눈으로 진하를 봤다. 그 순간, 진하가 들고 있던 쇼핑백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떨어진 쇼핑백이 넘어지는 소리를 채 다 인지하기도 전에 진하가 서영의 뺨을 그러당겼고, 빛보다 빠른 속도로 입을 맞췄다.

 

쪽- 쪽. 쪽쪽.

 

진하는 서영의 입술에 제 입술을 다급하게 붙였다 뗐기를 반복했다. 동그랗게 모은 입술을 서영의 입술에 비볐고, 곧 서영의 손에서도 쇼핑백이 투둑투둑 떨어져 나갔다. 서영의 단단한 팔이 진하의 허리를 감았다. 서로의 몸이 틈 없이 바짝 당겨졌고 배와 배가 맞닿았다. 시작한 건 진하였지만, 다급한 건 서영이었다. 서영은 진하의 입술을 열고 들어오기 위해 혀끝으로 입술을 몇 번이나 두드렸지만 진하는 계속 입술을 붙여오면서도 좀처럼 입술을 열지 않았다.

 

결국 서영이 잠시 물러섰다. 그러는 동안에도 진하는 서영의 뺨을 잡고 뺨에, 목에 입술을 내려 쪽- 쪽-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언니, 언니 잠시만요. 이거 좀 위험한데.”

“참아. 어쩔 수 없잖아. 지금 둘 다 떡볶이 먹은 입인데, 그 혀를 얽을 수는 없잖아.”

“그냥, 얽어도 되는데.”

“안 돼.”

 

진하는 단호했고, 말을 하는 도중에도 몇 번이나 서영의 뺨을, 목덜미를, 눈가를 입술로 지분거렸다. 입술을 열지 않고, 타액을 묻히지 않았지만 온기만은 여실히 옮겨왔다. 그 온기가 다급하게 서영의 성감을 깨우는데, 진하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제 할 일에 여념이 없다.

 

“흣, 어, 언니. 저 지금 이런 식으로 하면.”

 

서영이 진하를 밀어냈다. 반응하는 건 몸 전체였고, 당연하지만 거기에는 서영의 성기도 있었다. 그걸 진하가 모를 리 없었다. 아니, 진하는 되레 힘을 실어 서영의 몸을 밀었고,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서영의 등이 으슥한 골목의 한쪽 벽에 박혔다.

 

어느덧 서영의 양손을 잡아 벽으로 밀어붙인 진하는 서영의 가랑이 사이로 허벅지를 미끄러트렸다. 서영의 입에서 다급하면서도 나직하게 억누른 비명이 흘러나왔다.

 

“언니, 언니!”

“참아.”

 

진하는 호흡 하나 흐트리지 않고 엄하게 일갈했다.

 

“아, 이거 너무.”

“다른 사람들 홀린 벌.”

“네? 그게 무슨.”

“지나가는 사람마다 어찌나 쳐다보던지. 누가 이렇게 예쁘게 하고 나오래?”

 

진하가 뾰로통하게 말하자마자 서영의 힘이 강해졌고, 이번에 밀린 건 진하였다. 순식간에 진하를 힘으로 밀어낸 서영이 몸을 빙글 돌렸고, 돌연 벽에 박힌 건 진하였다. 서영이 평소와 달리 강한 눈빛으로 진하의 숨을 찍어눌렀다.

 

“신서영?”

“지금 누가 할 소리를 누가 하는 거예요.”

“뭐?”

“사람들 전부 언니 쳐다본다고 정신없던걸요. 언니야말로 오늘 너무 예쁘잖아요. 안 그래도 섹시한데 굳이 검은색으로 이렇게……”

 

서영이 말을 하다 말고 정말 억울한 일이라도 당한 것처럼 입술을 말아 문다.

하! 지금 누구 얘길 하는 거야. 고작 니트 위로 드러난 쇄골만으로도 눈 돌아가던 사람들이 몇이었는데! 진하가 대놓고 서영을 비웃으며 가랑이 사이에 무릎을 올리려고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서영이 빨랐다. 서영의 허벅지가 진하의 다리 사이로 먼저 파고들었다.

 

아흣-

진하의 입에서도 다급한 숨이 튀어나왔다. 서영을 밀어내보려고 했지만, 애초에 힘으로 당해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양손은 아까 제가 했던 것처럼 각각 서영의 손에 잡힌 채 벽에 단단히 박혀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진하가 분한 듯 입술을 깨물었지만, 서영의 웃음기 없는 입술은 주저없이 다가왔다.

 

입술이 진하의 귓바퀴를 따라 느리게 흘러내렸다. 진하가 입을 꾹 다물고 머리를 흔들었지만 서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귓불에 이를 세웠다. 오싹한 감각이 등줄기에 내달리다 가랑이 안쪽을 파고들었다. 오기로 다물고 있던 입이 벌어졌다.

 

아흐읏-

 

“타임! 타임, 타임! 스탑! 신서영!”

 

절박하면서도 나직하게 외쳤다. 여기서 백기를 드는 게 자존심이 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서영이 힘을 쓰기로 마음먹었다면 이기는 건 불가능했다. 게다가 지금 그대로 두면 서영은 끝까지 갈 것 같았다. 설령 서영이 끝까지 가지 않는다고 해도 이 이상 나가게 되면 되레 자신이 서영에게 매달릴 것만 같았다. 고작 이 정도 터치로 숨 거칠어진 거 보라지.

 

다행히 서영은 진하의 외침에 목에서 미끄러지고 있던 입술을 뗐다. 그리고 진하의 눈에 시선을 똑바로 맞춰온다. 저도 모르게 긴장해 눈을 내리깔자 반질반질한 입술이 보였다. 삼키고 싶도록 예뻤다. 입안에 침이 고여 목구멍으로 넘기길 두어 번. 서영이 코끝을 맞대며 속삭였다.


“언니, 얼굴이 빨개요.”

 

안다. 모를 수가 없다. 열이 이렇게 홧홧하게 오르는데.

진하는 서영을 지긋이 노려봤다.

 

“너어, 신서영 이 요망한.”

“언니가 먼저 시작한 건데요.”

 

……할 말이 없었다. 진하는 주춤주춤 ‘그랬나’ 하고 중얼거렸다. 서영의 입꼬리가 그제야 부드럽게 풀렸고, 서영은 벽에 누르고 있던 진하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뺨을 손바닥으로 감싸고 코끝에 가볍게 쪽- 입술을 대었다가 뗐다. 코끝에 닿은 가벼운 키스 한 번이 진하를 참을 수 없이 부끄럽게 만들었다.

 

진하가 서영의 목을 와락 끌어당겨 안았다. 서영도 진하를 허리를 당겨 번쩍 안아 들었다. 자연스레 진하의 발이 지면에서 떨어져 허공에 들렸고, 턱은 어깻죽지 위에 올려졌다. 진하를 받친 몸은 탄탄했다. 이 몸이 자지러지는 걸 보고 싶다는 욕정이 쓰나미처럼 달려들었다.

 

그러나 안 돼지. 안 돼. 이곳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골목이고, 우리는 데이트 중이었다. 그것도 심장이 간질간질해지는 보통 연인들의 데이트. 진하는 입술을 아프게 깨문 후 고개를 모로 돌리고 서영의 귓가에 속삭였다.

 

“우리 데이트 계속 안 해? 이다음에는 뭐 하려고 했어?”

 

서영은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한숨을 길게 흘리고 조용히 말했다.

 

“원래는 카페 가서 잡지도 보고, 음악도 같이 듣고 그러려고 했죠.”

“좋네. 그거 하자.”

 

진하는 서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단숨에 말했지만, 서영은 평소와 달리 곧장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싫어?”

“……하고 싶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언니 쳐다보는 건 싫어요.”

 

부루퉁한 말이 평소의 서영답지 않았다. 그러니까, 서영답지 않게 너무 귀여웠다. 미치겠네. 웃고 싶은데 서영이 사뭇 진지한 얼굴이라, 진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치미는 웃음도 함께 삼켰다. 게다가 마음은 진하도 비슷했다. 모르는 사람들이 서영을 보며 얼굴을 붉히는 꼴은 이제 그만 봐도 될 것 같았다. 진하는 잠시 생각하고는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때. 카페에서 커피를 테이크아웃하고 차를 탄다. 신서영이 차를 몰아 드라이브하면서 동시에 음악을 듣는다. 그러다가 정말 도저히,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 같을 때 신서영이 차를 으슥한 곳으로 몬다. 차에서 우리가 지금 참은 걸 마음껏 한다. 모자라면, 당연히 모자라겠지만 그러면 마지막으로 우리들의 집으로 돌아가서 또 한다. 이거 어때?”

 

시무룩하던 서영의 얼굴이 진하의 말이 길어지는 동안 서서히 밝아졌다.

 

“완벽하네요.”

“그럼 일단 카페부터 가볼까?”

 

진하는 골목을 나서며 서영의 팔에 팔짱을 꼈다. 서영은 제 팔에 단단히 감긴 진하의 손을 물끄러미 보더니 그 어느 때보다 활짝 웃었다. 해사한 웃음 위로 다시금 햇빛이 부서졌다. 서영은 반짝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절로 돌아갔다.

 

봐, 사람들이 너 보는 거 맞다니까.

 

진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픽 웃고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팔짱을 푼 서영이 자리에 서서 진하의 턱을 붙들었다.

 

“서영아?”

 

쪽-

입술에 가볍게 떨어진 키스. 그리고 달콤한 속삭임이 이어졌다.

 

“언니, 그렇게 예쁘게 웃으니까 다들 쳐다보죠. 근데 어떻게 하지? 언니는 내 건데.”

 

말문이 턱 막혔다. 아니, 기가 찼다. 각인하면 생각도 닮아가나?

하여튼 기어코, 대로변에서 일을 치는구나.

요오망한 신서영 같으니라고.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말이 되어 나오진 않았다. 열이 올라 뜨거운 얼굴 때문에 혀가 녹아내린 것 같았다. 입을 열었다가 닫고, 열었다가 닫았다. 어쩔 수 없이 입을 꾹 닫고 서영의 손을 덥석 잡아끌었다. 뚜벅뚜벅 걷는데 아래쪽에서 물이 엉키는 야한 소리가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아, 오늘 드라이브 갈 수 있을까. 당장이라도 쓰러트리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 눌러야 하나, 고민하는 와중에 서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언니, 드라이브는 짧게 할까요.”

“좋아. 커피도 필요 없어.”

 

진하가 단숨에 대답했고, 서영이 진하의 손을 잡더니 뛰기 시작했다.

우리는 주차장 방향으로 있는 힘껏 달렸다.

 

다음 날, 우려했던 대로 일간지 한 곳에 서영과 진하의 사진이 두 장 올라와 있었다.

제목은 <재벌의 일탈, 소박한 데이트를 즐기는 신서영 이사와 그녀의 반려>

 

사진 속의 진하와 서영은 입을 맞추고, 또 마주 보고 있었다.

서로를 향해 질투할 여지도 없어 보이는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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