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해가 뜨기도 전인지 씻고 나오자 한기가 느껴졌다. 혹여나 들릴까 갈비뼈에 힘을 주고 기침을 참아내며 거울 앞에 섰다. 어제의 일 때문인지 눈이 일찍 떠진 탓에 얼굴이 부어있었다. 분명히 얼마 전에 다 썼던것 같았던 토너가 새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익숙하게 포장을 뜯어 솜에 묻혀 얼굴을 닦아냈다. 부은 눈을 가리려 화장을 하고 아직 자는 정재현을 혹여 깨울까 조심히 옷장 문을 열었다. 저번에 입었던 트위드 원피스가 드라이클리닝이 끝난 상태로 깨끗하게 걸려있었다. 망설임 없이 원피스를 꺼내 입는데 그 옆으로 트렌치코트 하나가 걸려 있었다. 저번에 같이 백화점에서 고른 검은색 트렌치코트가 내게 잘 어울린다고 하더니만 기어코 같은 걸 연베이지로 하나 더 사둔 것이었다. 별 다른 말 없이 늘 행동으로 사랑을 보여주는 정재현이었다. 가격 텍을 딱하고 떼고는 코트를 꺼내어 들고 방을 조심히 나갔다. 거실로 나와 소파 위에 코트와 가방을 놓아둔 뒤 냉장고 문을 열고 여러 재료들 중 간단히 해 먹을 수 있는 토스트 빵과 계란을 꺼냈다. 버터를 두른 빵을 굽고 계란을 저어 스크램블을 하고 있을 때였다. 내 뒤에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언제 깼어?"



약간은 갈라진 정재현의 목소리와 함께 그는 두 팔로 내 허리를 휘감았다. 막 자다 일어나서 온 몸이 뜨끈 뜨끈한 정재현이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한 삼십 분 전 쯤? 머리 덜 말랐네. 정재현이 젖은 내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만지며 중얼거렸다. 다 된 스크램블을 접시에 담아두자 정재현은 나에게 살짝 떨어져서 말을 이었다.



"토마토 있어."

"응. 씻고 나와요."



정재현이 내 입술에 쪽하고 입을 맞추고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가 나에게서 떨어지자 낮아진 체온에 다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말대로 냉장고 칸에서 토마토를 꺼내 씻어내고 토마토를 믹서기에 넣자 위잉 하는 소리와 함께 빨간 빛의 주스로 변해갔다. 주스를 유리잔에 두 개를 담고 테이블에 앉아 빵을 한 손에 들고 한 입을 베어 물며 화장실을 바라보았다.

아무 생각을 않으려 했는데 그럴수록 한 시간 뒤에 만나게 될 김정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두번째 이별을 한 너와 나는 어떻게 얼굴을 보며 말할 수 있을까. 고민에 끝이나지 않을 때, 화장실 문이 열리고 정재현이 젖은 머리칼을 수건으로 털어내며 말끔한 수트 차림으로 걸어 나와 내 옆에 앉았다. 주스와 빵을 건네자 정재현은 갈아 놓은 주스를 원샷했다. 



"숙취 심하지?"



내 말에 정재현은 약간 미간을 찌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뻑뻑한 식빵대신 부드러운 스크램블을 그의 쪽으로 살짝 밀었다. 멍하니 거실 쪽으로 나 있는 큰 창문을 보며 식빵을 오물거리자 정재현이 말을 걸었다.



"어제는..."



한참을 씹던 빵을 겨우 목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뒷 말을 묻지 않는 정재현을 바라보지 않고 정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 어제 헤어졌어."



앞뒤를 다 잘라먹고 심지어 목적어도 빼먹은 이상한 문장이었다. 그것도 남자친구한테 헤어졌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우스웠지만 그 말을 하는데 심장이 어찌나 쿡쿡 찔리던지. 급하게 주스 한 모금을 마셨다. 



"완전히."



덧붙이는 말에 정재현의 안도하는 한숨이 따라붙었다. 그리고는 내 머리를 그 큰 손이 쓰다듬었다.



"고마워."



그동안 그와의 완벽한 정리를 바라왔던 건 정재현이었다. 그렇지만 정재현은 한 번도 그것을 당연하게 여겨오지 않았다. 문득 그것이 궁금해져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고 있던 정재현에게 물었다.



"왜 나한테 김정우 정리 똑바로 하고 오라고 안 했어?"



내 말에 정재현은 고개를 돌려 웃었다. 그 웃음이 어쩐지 서글퍼 보이기도 쓰게 느껴지기도 했다. 내가 어떻게 그래.



"응? 어떻게 그러긴. 남자친구잖아."

"그러니까 남자친구가 뭔데. 여자친구 마음마저 맘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결정은 여주 몫이고 나는 그 결정을 최선으로 이끌도록 행동할 뿐이지."

"어..."

"결정을 강요할 수는 없어."



정재현의 말에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정재현이 손목에 찬 시계를 흘끗 보며 이제 갈까? 하며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 손을 잡았다.












내가

왜 

다시


(兩者擇一)

Phrase











김정우는 정말 헤어진 사람처럼 굴었다. 사적인 얘기는 일절 하지 않았고 업무 역시 최소한의 대화만 유지했다. 어쩐지 섭섭한 마음도 있었지만 이게 당연한 거겠지. 약간은 불편하고 미묘한 관계, 진작부터 이랬어야 한다고 생각을 하며 나 역시 어색하게 그를 대했다.



"맛있는 거 먹자. 뭐 먹을래요?"



점심시간이 되고 정재현과 함께 식사를 하러 나가는데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설마 설마 싶어 눈을 피하고 걷는데 그 실루엣이 점점 가까워져 오더니 내 팔을 덥석 잡았다.



"여주야! 어머 우리 여주 맞지?"



눈을 접으시며 웃으시는 게 김정우와 아주 닮은, 그의 어머니였다. 아, 안녕하세요. 당황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자 어머님은 신경도 안 쓰시며 한 손으로 내 얼굴을 쓰다듬으셨다. 그 다정한 손길에 나 역시 놀랐던 마음이 누그러졌다.



"어쩐 일이세요?"

"정우랑 점심 먹으러 회사 근처로 왔지."

"아, 정우..."

"그런데 우리 여주, 요새 많이 바빴지? 내가 먼저 연락하면 너 신경 쓰이게 할까 봐 연락도 못했어."

"안 그러셔도 되는데... 제가 먼저 드렸어야 하는데 죄송해요."



어머 얘는. 한가한 사람이 연락 먼저 하는 거지. 우리 사이에 죄송은. 유쾌하게 웃으시던 어머님은 곧 울리는 핸드폰을 흘끗 보더니 통화를 거절하셨다. 분명히 아들이라고 뜬 것 같았는데. 어머님은 나를 바라보시며 신나게 여러가지를 물어오셨다.



"요새 밥은 잘 먹고 다니지? 살이 많이 빠졌네. 아니면 정우 그 자식이 속 썩여? 날이 추운데 감기는 안 걸렸어? 이번에 유자청을 담갔는데 정우가 줬니?"



그 걱정섞인 물음표들에 내 뒤에 있던 정재현이 한 걸음 물러섰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아니라고 말하며 우리는 이미 헤어졌다고, 김정우는 반년 만에 본 거라고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엄마! 어디선가 급하게 달려온 김정우가 숨을 헉헉대며 우리 사이를 막아섰다.



"엄마는. 역 앞에서 만나자니까 회사까지 오셔."

"으응. 일찍 와서... 얘, 여주야 우리 점심 같이 먹자."



아, 점심. 해맑게 웃으시며 잡은 내 손을 흔드시는 어머님을 보고는 뒤를 돌아보자 두 발자국 떨어진 곳에 정재현이 서 있었다. 어쩐지 삐딱한 그의 태도에 미안함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려 김정우를 바라보았다. 도와줘.



"그게요..."



말끝을 흐리며 난처한 눈치로 말하자 김정우가 끼어들어 어머님의 팔을 잡아끌었다.



"엄마. 여주는 팀장님이랑 식사하기로 한 것 같은데 우리끼리 맛있게 먹자. 나 엄마한테 할 얘기도 있고."

"네 어머님. 다음에 봬요."

"그러니? 아쉽다."



김정우가 구세주처럼 느껴져 나 역시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건강 조심하고 식사 잘 하라며 내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시는, 어머님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내 나를 와락 끌어안고 내 등까지 토닥이며 두드려주시는 덕에 마음까지 따뜻해졌다. 오랜만에 어머님을 뵈니 좋긴 했다만 김정우랑 헤어진 사이인데. 그러고 보니 김정우는 헤어진 사실을 말하지 않은 분위기였다. 제가 더 난처해하는 걸 보니.



"가요."



정재현에게 다가가 말을 하자 정재현은 고개를 까딱하고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안 봐도 김정우의 어머님이라는 것을 알았을 텐데도 정재현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신경 안 쓰여?"

"조금."



그런데 지방에 계시는 김정우의 어머님이 여기까지 오신 건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하고 걱정이 꼬리를 물었다. 헤어지기 직전까지 딸같이 살뜰히 연락해놓고 헤어지자마자 연락을 딱 끊어낸 것도 그렇고. 집안 구석구석 어머님의 김치를 비롯한 각종 반찬들과 감기에 잘 걸리는 날 위해 챙겨주셨던 생강청, 매실청. 손재주가 좋으셔서 직접 떠주신 목도리들, 어머님의 마음들이 눈덩이가 되어 밀려왔다. 나 한테 진짜 잘해주셨는데, 만약에 김정우가 지금 나랑 헤어진 사실을 말한다면 그 모든 고마움을 표현할 게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있잖아, 혹시... 나, 가도 돼?"



누가 들어도 어이없어 할 게 당연할 내 말에 정재현의 걸음이 멈추었다. 그래 이런걸 묻는 것도 어이없겠지만. 내가 한숨을 내쉬자 정재현이 고개를 돌렸다. 왜 물어봐 나한테. 라는 눈으로 정재현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게, 우리 헤어진 거 맞고 걱정 안 해도 되는데. 오래 만나는 동안 어머님께 여태 받았던 것도 신경 쓰이고 해서, 가서 말씀드리고 정리하는 쪽이 좋을 것 같아."



자기가 싫으면 안 가구. 내 솔직한 마음에 정재현은 생각에 잠겼다가 곧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고 싶으면 가요. 그럼 자기는? 오늘만 혼자 먹지 뭐. 정재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리고는 한 발자국 앞서 걸었다. 와 새삼 쿨하네? 기대도 안 했는데 선뜻 나를 보내는 정재현이 대단했다. 정재현은 그러다가도 곧 뒤를 돌아 말했다.



"그래도 내 카드로는 안 샀으면 해."



입술을 삐쭉이는 정재현이 귀여워 웃음을 터뜨렸다. 나 그렇게 염치 없진 않은데. 주위를 둘러보곤 그의 입술에 쪽하고 입을 맞추고는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아직 식당에 가지 않은 건지 손을 잡고 걷던 두 사람과 마주쳤다. 뭐야, 기껏 보내줬더니 왜 다시 왔어? 김정우는 경악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고 어머님은 활짝 웃으셨다. 내가 왜 다시 왔냐면, 그건 김정우가 아니라 어머님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머머, 여주야!"

"어머님 오랜만에 뵈었는데 이렇게 가는 건 아닌 것 같아서요."

"정우야 봐라, 내가 여주가 다시 온다고 했지? 얘가 이렇게 착해."



어머님의 말씀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세상 재활용도 안 되는 쓰레기가 바로 여깄는 걸요. 어색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어머님의 말씀을 들으며 어느새 식당에 도착해, 자연스레 어머니 옆에 앉아 메뉴판을 어머님께 보여드리며 말했다.



"어머님, 여기는 점심 특선이 괜찮아요."

"정우 옆에 앉지 왜."



어머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씀하셨고 그 말에 김정우와 눈이 마주쳤다. 김정우는 곧 내 눈을 피했고 어머님 역시 크게 신경 쓰지 않으시고 음식을 주문하셨다.



"우리 정우 뒷바라지 하느라 고생했다. 정우가 거기 들어가느라 얼마나 애 썼는데... 같은 회사라고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갑자기 내 손을 잡으시고 진심 어리게 말씀하시는 탓에 나 역시 공손해졌다. 김정우는 말 없이 찬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사실은 나도 우리 정우 반년 만에 본다. 애가 독하게 맘 먹었는지 한번을 안 오더라고? 여주가 잘 챙겨주고 있다고 걱정하지 말라더라."



너 그랬어?  내가 김정우를 바라보자 김정우는 고개를 떨궜다. 그렇게 독하게 준비해놓고 어제는 뭐? 문제 생기면 네가 나간다고. 헛웃음이 다 나왔다. 바보 같은 김정우, 내가 입술을 살짝 물자마자 어머님의 말씀이 이어져 왔다.



"나도 정우보다 여주 널 더 믿으니까 믿고 기다렸지. 그래서 나는 여주 너만 보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어. 우리 아기 같은 정우 잘 챙겨주고..."

"엄마 그만."



김정우가 어머님의 말씀을 막으며 컵에 물을 따라 나와 어머님께 건넸다. 목이 막혀왔던 터라 나 역시 물을 들이켰다. 어머님은 컵을 받아 드시고는 우리를 돌아보며 물으셨다.



"그래서 너희 결혼은 언제쯤 생각하니?"



크흡. 내가 물을 코로 뱉자 김정우가 티슈를 급하게 뽑아 건넸다. 와 코 매워. 김정우는 어머님을 흘겨보며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엄마는 무슨. 밥 먹다 그런 얘길.



"너희 삼 년 넘게 봤는데 아직도 그런 얘기 안 했어?"

"아 쫌."

"아이고 이놈아. 여주 같은 애가 어디 있다고!"



갑자기 어머님은 팔을 뻗어 김정우의 어깻죽지를 팍팍 하고 때리셨다. 갑작스러운 폭행에 당황한 내가 어머님의 팔을 붙잡고 말렸다. 어휴, 어머님 아니에요. 저희 헤어졌어요. 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려던 찰나, 어머님은 나를 돌아보시며 물으셨다.



"아니면 여주 네가 망설이는 거니? 엄마는 사실 여주 네가 더 아깝긴 해."

"엄마."

"정우 하나 보고 결혼하기엔 우리 집안이 너무 미안..."

"엄마!"



얘가 왜 이래. 어머님의 말씀에 김정우가 테이블을 주먹으로 치고 일어섰다. 여기가 룸이길 천만다행이었다. 잔뜩 화가 난 김정우는 어머님을 바라보다 룸을 뛰쳐나갔다. 바보 같은 놈. 여주야 정우가 저래도 이해 해줘. 자존심이 워낙 세잖아. 상대방한테 거절 듣기 무서워서 자기가 먼저 피하는 거야. 어머님이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리셨다. 그래서 김정우는 늘 이별을 먼저 생각하는 걸까? 처음의 이별 역시 김정우는 내 잘못을 핑계삼지 않았다. 나에게 헤어짐을 듣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힘든 일이었을 테니까. 어머님의 말씀에 나 역시 어색하게 일어서며 말했다.



"어머님, 그런 거 아니에요. 정우 제가 데리고 올게요."



내 말에 어머님은 안심하신 듯 고개를 끄덕이셨다. 가게 바로 옆 골목에서 담배를 입에 물고 막 불을 붙이려던 김정우를 발견했다. 나는 그대로 다가가 손을 뻗어 김정우의 입에 물린 담배를 낚아챘다.



"어머님 담배 싫어하셔, 알잖아. 그만하고 들어가자."



내 말에 바닥만 바라보던 김정우와 눈이 마주쳤다. 마주 본 김정우의 눈가는 붉어져 있었다. 그대로 김정우는 쓰러지듯 내 어깨에 제 머리를 기대었다. 그 무게감에 휘청한 내 허리를 제 팔로 살짝 잡은 김정우가 웅얼거렸다.


"여주야 나 너무 힘들다." 



그러게 정우야, 우리 사이는 꽤 쉽게 끊어지질 않나 봐. 속으로 생각하며 김정우의 머리통을 쓰다듬자 김정우는 몸에 힘을 빼고 내게 기대었다.



"내 마음이 아직 남아서, 헤어지기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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