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날이면 어김없이 학생들은 학교로 향했다. 교문을 넘어서는 익숙한 발걸음은 조금 낯선 곳으로 향한다. 체육복을 입고 더운 여름날 손부채를 휘휘 저으며 향했던, 추운 겨울 으슬으슬 떨리는 몸을 감싸안은 팔을 슥슥 문지르며 향했던 강당으로 향한다. 이젠 피부처럼 익숙해져버린 교복은 어느새 작아진 이들도 있었고, 그 사이 새로 맞춰야 했던 이들도 있다. 하지만 오늘은 모두 하얀색 와이셔츠, 블라우스를 입고 연베이지색 조끼에 짙은 붉은색 넥타이를 반듯하게 맺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색에 학교의 문장이 금색실로 화려하게 수놓아진, 평상시라면 잘 입지도 않던 남색 블레이저를 걸쳤다.

강당으로 빽빽히 모인 학생들은 저마다 조잘조잘 떠들기 바빴다. 검은색 머리, 남색 블레이져 모두 같은 색을 자랑하는 안에서 툭, 노란색 머리가 튀어나와 있다. 덩어리진 학생들의 중심에 있는 아이는 오늘도 화려하게 웃었다.

-코노하 고등학교 제 67회 졸업식을 곧 시작하겠습니다. 학부모님들과 내빈들은 자리로...

조금 긴장한 듯 딱딱한 안내음이 흘렀고 자리를 내팽개치고 분주히 돌아다니던 아이들은 하나둘 자리를 찾아나섰다.

-교가재창이 있겠습니다.

3년간 부를 일이 얼마나 있었을까. 반은 음을 따라 적당히 흥얼거리며 얼버무리기 바쁜 교가였다. 하지만 어슴푸레 들리는 가사는 3년간 함께 했던 학교에 대한 자랑거리가 담겨있다. 

한참 들떴던 아이들은 조금 차분해졌다. 

-송사가 있겠습니다. 2학년 8반...

[존경하는 선배님과 선생님, 그리고 이 자리를 함께 해주신 부모님들과 내빈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드립니다. 벚꽃이 피는 계절이 돌아오고 우리는 떠나보내야 할 이들이 생겼습니다....]

아이들의 눈은 천천히 가라앉았다. 3년을 함께 했던 친구와 선생님, 사고를 치고다녔던 학교, 조금 점수가 박했던 시험지 등 사소한 것들을 떠올리며 멀어지는 목소리를 들었다.

-답사가 있겠습니다. 3학년 2반...

[끝나지 않을 것 같던 3년이 지나고 우리는 긴 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3년간 우리를 보듬어 주셨던 선생님과 학교, 그리고 언제나 뒤에서 묵묵히 저희를 뒷받침...]

저 뒤에서 어디선가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그 옆에 있던 친구는 킬킬 거리면서 벌써 우냐고 우스갯소리를 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자신도 목구멍이 먹먹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가는 뜨거웠고 코 끝은 시큰해졌다.

-축하공연으로 합창부의...

약 두달간 시간을 쪼개고 쪼개어 준비한 공연이 시작되었다. 벚꽃잎 사이로 노래가 나부꼈다.


-이상으로 졸업식을 마치겠습니다.


아이들은 저마다 다른 표정을 지었다. 활짝 있는 웃는 이들도 있었고 눈물로 얼굴이 엉망이 되어버린 이들도 있었다. 그 사이로 유난히 툭 튀었던 노란색 머리를 한 학생은 그 무리들을 사이로 떨어졌다. 벚꽃이 내렸다. 쏟아지는 히끄무레한 눈처럼 펑펑.

그 아래 아이는 서서 가만히 어딘가를 응시했다. 저 멀리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웃음소리, 울음소리, 조잘거리는 소리, 누군가를 찾는 소리. 늘 그 중심에 있었던 아이는 그들과 멀찍이 떨어졌다. 

꽃다발과 사진

졸업장과 편지

축하와 인사 

벚꽃과 졸업노래 

떨어진 곳에 아이는 홀로 졸업장을 말아쥐고 섰다.

노란색 머리칼 사이고 옅은 분홍색을 띈 벚꽃이 내려앉았다. 검은색 무리들 사이에서 유난히 청색을 띄 눈이 가라앉았다. 뚜렷한 검은색 동공은 자신의 눈을 똑 닮은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줄까."

벚꽃을 즈려밝은 이가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돌아본 아이의 얼굴에는 어떠한 표정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졸업식 가장 밝게 웃던 아이의 표정은 벚꽃과 함께 툭 떨어진 것 같았다.  

"쌤. ....아니 나라 시카마루씨."

"아직 교문 안 나갔다. 선생님이야."

"선생님은 학교에서 담배피면 안된다니깐."

"그럼 나라 시카마루씨라고 불러라."

남자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고 마저 담배를 물었다. 바람에 담배 끝에 피어나는 연기는 눈에 잡히기도 전에 사라졌다.

"나라 시카마루씨. 나 이제 성인이래요."

"그래, 축하한다. 아직 술은 안되지만."

"나, 학생이라고 400번 차였다니깐요."

"487번."

"하하... 진짜 많이 차였네. 이제 학생 아닌데 내가 고백하면 받아줄까요."

"해봐야지 알지."

"그 말이 맞다니깐...."

아이는 텁텁한 표정을 하고 가볍게 피식 웃었다. 말아 쥔 졸업장에 힘이 들어갔다. 날씨는 선선했다. 블레이져 한 장으로는 한기가 쉽게 파고들었다. 하지만 졸업장은 땀에 찬 손에 들러붙었다.

"근데... 나 이제 고백 안할거라니깐요."

남자는 짧아진 담배를 꽁초가 수북히 쌓인 담배케이스에 눌러 껐다. 꽃향기가 시원하게 담배냄새를 덮었다. 

아이는 남자를 흘기던 눈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지금 고백해서 차이면 학생이라는 이유도 아닐테니까. .......고백 안할거라니깐."

"마음대로."

남자는 새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찰칵찰칵찰칵

바람에 불이 꺼지길 반복했다. 헛바퀴도는 라이터 소리가 귀를 깔짝거렸다.

아니, 거슬리는 것은 하나가 아니였다. 미치도록 쏟아져서 시야를 흐리는 벚꽃, 저편에서 시끄럽게 울려대는 아이들의 목소리, 정신없이 나부끼는 바람, 맞지 않는 손목시게, 졸업장, 졸업식 노래, 교복, 물기가 어린 파란색 눈동자.

아이의 무덤덤하던 표정은 어그러졌다. 눈물은 고였지만 떨구지 않으려 애쓰며 냉랭한 표정을 유지하려했다. 그럴수록 얼굴의 근육들은 맞지 않는 스텝을 걸어나가려는 듯 미묘하게 꼬였다. 입술은 올라간 듯 내려갔고, 눈가는 힘주느라 뾰족해졌고, 코 끝은 찡그렸다.

하하...

결국 아이는 포기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공들여 쌓아 놓은 탑을 포기하기로 했던 것 처럼 멋진 표정을 짓는 것도 포기하기로 했다. 해사하게 웃었다.

"나 졸업 축하나 해달라니깐요. 나라 시카마루씨."

찰칵찰칵찰칵

여전히 라이터는 헛바퀴를 돌았다. 짜증이 치밀었다. 적당히 라이터를 주머니에 쑤셔넣고 태우지 않은 담배를 대충 담배케이스에 꾸욱 짓눌렀다. 담배는 힘없이 부러졌다.

"그래,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남자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이 짜증스러웠다. 세워놓은 모든 계획이 봄 바람에 흐늘어져 흩어졌다. 안 주머니에 묵직하게 자리한 상자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이틀 전 꽃집에 미리 예약해 두고 오늘 흡족스러운 마음으로 찾아왔던 꽃다발이 무채색으로 시들해보였다.


"축하한다. 졸업한 거."

거친 발걸음으로 다가가 멋대로 품에 꽃다발을 안겨주었다. 퍽 소리가 날 정도로 투박한 손길에도 아이는 눈가를 곱게 휘었다. 고맙다니깐요. 라는 짧은 인사에 쯧- 하고 혀차는 소리가 절로 났다. 아이는 담백하게 발걸음을 돌렸다. 그제야 아이를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저기서 함께 사진을 찍자며 아이를 부르고 있었다. 

"우즈마키 나루토."

뒤를 돌아보니 하늘에서 상자가 툭 떨어졌다. 어정쩡한 자세로 어수선하게 받아들었다.

"선물이다."

손목 시계다.

"...기념 선물."

입을 몇 번 달싹이다 결국은 짧게 덧붙이고 말을 마쳤다. 머리를 긁던 손은 힘 없이 떨어졌다. 결국 담배를 하나 더 꺼내 물었다. 아이는 손목시계를 내려다봤다. 밝은 금색 테에 검은색 가죽 밴드 디자인. 심플한 디자인에 작게 들어간 푸른색 보석하나. 깔끔하게 떨어진 원 안에 바쁘게 돌아가는 시침과 분침 그리고 시침. 틈틈히 보이는 톱니들 사이에 세밀하게 세공된 이름 약자. 

Sikamaru

담배를 피는 남자의 왼손에도 검은색 밴드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는 우악스럽게 남자의 손목을 잡아챘다. 이제 막 불을 붙인 담배는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같은 디자인의 손목시계. 톱니 사이에 세공된 이름 약자.

Naruto


"시카마루씨 진짜 치사한거 아냐니깐요."

"...예정에 없었던 일이니까."

"좋아해요. 진심으로."

결국 일그러진 얼굴에서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손목을 잡은 손이 가늘게 떨렸다. 도망가지 않는 손목이 당장이라도 자신을 버릴까 긴장으로 땀이 스몄다. 손목시계를 바라보느라 떨어진 고개 끝에 부드럽게 이어진 다부진 어깨가 들썩였다.

"선생님이 아니라 나라 시카마루가 좋아요."

"488번 만에 성공 축하한다."

풍성하던 꽃다발이 두 사람 사이로 뭉개졌다. 꽉 안아든 체온이 쌀쌀한 날씨에 따끈따끈하게 달아올라 있다. 아직 방송실에서는 졸업노래가 흘러나왔다. 남색 블레이져도 그대로. 학교 운동장 한 귀퉁이 장소도 달라지지 않았다.


두 사람의 호칭만 달라졌다.

"시카마루씨!"

"나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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